망겜에 갇힌 고인물 451화
메인 던전 – Lv. 17500 [환염의 삭풍, 라파엘רפאל](1)
미카엘이 보고를 받은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는 성지를 확보한 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곳을 급습해 올 유배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다른 수색에 나섰다.
단독 수색인 이유는 있다.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그의 말을 잘 따라주기는 하나 그다지 자신의 의지는 없다.
사실 바벨의 자식들인 고위 천사들은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이곳으로 내려온 것은 단지 부르는 이들이 있었고 취할 이득이 있어서다.
그 이득에는 새로운 자극이라는 흥미도 있다.
미카엘의 흥미가 그랬다.
유배자의 후손들에게 야망이라는 것을 배웠다.
세상을 정복하는 것에 대한 쾌감을 배웠다.
미카엘은 언제부터인가 정복자가 되고 싶었다.
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 * *
* * *
“대체 왜?”
권속을 거느리지 않고 홀몸으로 메타트론의 행선지를 찾고 있었다.
애초에 쉽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가 구멍을 하나만 파두었을 리는 없으니까.
동시에 만족스럽기도 했다.
메타트론은 힘을 되찾지 못했다.
그러니 그를 피해 달아났겠지. 성지를 버리고 추하게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냐.”
단지 빠르기에 선택된 기천사는 몸 둘 바를 모른 채 미카엘과 독대해야했다.
“뭘 어떻게 하면 한나절도 안 되어서 천상의 도시가 털리고 하니엘이 나타나며, 가브리엘이 쓰러져?”
일단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거짓을 고할 상황은 아니다. 한낱 권속이 어떻게 그에게 없는 말을 지어낼까.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자신의 욕망이 없는 만큼 신뢰는 할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메타트론의 방식이 아닌 그의 방식을 따르는 것도 그 탓이다.
미카엘은 규율로 그 둘을 속박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 소식은 온전한 진실이다.
“그리고 라파엘은 갑자기 미쳐서 세피로트를 벗어던지고 날아서 사라졌다고?”
미카엘은 침착해 지려고 노력했다.
“지금 내가 들은 게 전부 진실이란 말이냐?”
그래도 묻지 않을 수는 없다.
겁에 질린 기천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미카엘은 기가 막혔고, 그 어이없음은 점점 분노로 승화하기 시작했다.
“당장 돌아가겠다.”
기천사는 느리다. 미카엘은 몸소 이 하인을 붙잡고 그의 거점, 천상의 도시를 향해 날기 시작했다.
본디 왕국이라 불렸던 이 평탄한 땅은 장애물만 없다면 아주 먼 곳도 눈에 들어온다.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천상의 도시를 비추던 찬란한 빛이 사라졌음을 눈치 챘다.
“하. 이건 내가 안이했군.”
분노도 잠시다. 감정이란 것은 본디 위대한 자에게 존재하지 않던 것.
그러니 순간의 격정에 불과하다. 곧바로 식어간다.
서늘한 합리와 이성이 대신 자리 잡기 시작했다.
“좋다. 고난과 역경 또한 지배를 위한 과정이겠지. 즐겁군.”
웃음기 하나도 없이, 하지만 진심으로 그리 여겼다.
라파엘의 흔적을 쫓는 과정은 그 자체로 험난했다.
지나간 자리에 고스란히 사막과 태양이 남아 있다.
몇 개인지 모를 태양이 떠서 모래로 뒤덮인 세상을 구워 버리는 중이다.
단순한 열이 아니라 신성을 가진 권능의 영역이기에 이 자취를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대미지가 있다.
라파엘은 자신의 힘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긴 세월 모아온 자신의 권능을 아무렇게나 흩뿌리고 있다.
“라파엘이 가브리엘보다 쉬울까요?”
“쉽다. 반드시 더 쉬워. 가브리엘의 완드와 스태프가 있으니까.”
상성의 문제다.
라파엘의 약점 속성 자체는 물이 아니다. 바람을 상대로 대응하는 것은 굳건한 대지. 이번에는 물의 정령이 아니라 땅의 정령이 있다면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권능을 펼쳐 생겨나는 물로 대항할 수 있다.
물은 불을 상대로 강하지는 않더라도 대등할 수는 있는 것이다.
“대량의 수증기가 발생하겠군요. 실피드가 있다면 더 편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없지.”
실피드가 있는 정령계로 다시 찾아가 바람 결정을 통해 데려올 필요가 있는데, 그럴 수가 없다.
다음 리프트까지 우리는 실피드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제가 실피드를 유지해야 했는데…….”
저혈당 쇼크로 사경을 헤매다가 돌아온 주제에 하는 소리가 저거다.
우리 딸내미를 너무 겁 없이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보고 배운 게 죄다 죽음에 무딘 유배자구나.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상성상 라파엘에게 강한 편이야!”
싱글벙글 웃고 있는 로스엘도 거든다.
로스엘의 필드는 사막과 태양.
그 대척점에 서는 것은 로스엘의 에덴이다.
원거리 공격 위주의 하니엘은 전사형 보스인 라파엘과 거리를 두며 영역 지배의 싸움으로 몰고 갈 수 있다.
풀밭과 사막은 서로를 끊임없이 잡아먹으며 길항할 것이다.
“그래도 상성상 우위를 점할 수는 없는 거네요.”
“모든 속성을 구비하는 거 해보긴 했는데, 썩 좋은 생각은 아니야.”
파티원이 너무 늘어나면 적도 늘어나거든.
“라파엘을 잡으면 불에 약한 다른 편린을 쉽게 잡을 수 있지. 악마 쪽에 하나 있어.”
그리고 그렇게 돌고 돌다 보면 미카엘과 바알에게도 도달한다.
파티원을 늘리는 게 아니라 장비를 적절한 순서대로 늘리는 것이 해답이다.
사람 한 명 늘어나는 것은 단순히 전력이 늘어나서 좋다 이상의 문제를 야기한다.
그럴 바에야 바로 이전 회차처럼 군대에 가까운 인원을 동원하는 편이 낫다.
“가브리엘의 장비로 라파엘을 떨구는 거군요.”
“장비 스왑은 점점 중요해질 거야.”
그게 선형적 구성 던전의 참맛이 아니겠는가.
“앞에 물 더 필요하다. 미아야.
“네네. 이거 굉장히 좋아요.”
미아가 완드를 흔들며 즐거워했다. 권능의 작동 방식에 대하여 새로운 자극을 받는 것이 기쁜 모양이다.
라파엘이 남긴 사막은 가브리엘의 물로 채워지며 식어간다.
미아의 통제에 따라 달빛이 고인 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식히고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맨 앞에서 척후를 하는 것은 블랑쉐.
에길과 아서는 좌우를 경계하고 있다.
내가 신경을 쓸 일은 당분간 없다.
그럼 이 와중에도 다른 고민에 빠질 틈이 생긴다.
미카엘은 이제 자신의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이다.
악마도 안다.
과연 미카엘은 우리를 추적하려고 들까 아니면 일단 천상의 도시를 방어하려고 들까?
어차피 성배도 없다면 세피로트도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을 내버리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라파엘을 뒤따라올지도 모른다.
그럼 악마들은 어찌 움직일까?
천상의 도시를 점령한들 미카엘과 메타트론이 살아있다면, 그리고 막상 성배도 없다면 맛이 없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바알은 미친놈이니까 틀림없이 미카엘도 찢어버리고 싶겠지.
“……너무 개판이 예상되는데.”
그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개판 중의 개판이 예측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차근차근, 공략의 탑을 쌓아 올리는 수밖에.”
장비를 모으면 길이 보인다.
메인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유니크 스킬도 있다.
“생각해 보면 맵을 이렇게 멀리 벗어나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눈을 열심히 굴리던 희우가 말했다.
확실히 그렇다.
천상의 도시 주변과 가라앉은 심연의 근방에서만 열심히 돌아다녔지 지상에서 이렇게 멀리 나오는 것은 처음이다.
“경치는 괜찮지?”
“몰락 중인 세상이라는 건 쓸쓸하면서도 장엄하네요.”
빛과 어둠의 원소만이 남아 소용돌이치는 대지와 하늘.
자연의 흔적도 없기에 도리어 어딘가 황폐하며 인공적인 이 대지는 그렇기에 장엄하다.
미지의 것은 공포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외를 주기도 한다.
현실이 된 미궁이 게임 시절보다 확실히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것 중에는 경치도 있다.
도트로 꾸민 던전들이 다 실사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이 자식 방향이 점점 이상한데?”
“여기로 가면 어디가 나와요?”
희우는 겜순이답게 슬슬 지역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눈치챘다.
사실 방금전에 말한 빛과 어둠의 소용돌이가 이미 그 징조다.
천상의 도시가 자리한 천사의 영역은 아무래도 빛의 비중이 더 크다.
쓸쓸할지언정 밝고 화려하다.
그런데 세상이 점점 침침해지고 있다.
“천사와 악마들의 전선 부근이야. 이렇게 되면 또…….”
공략이 성립은 하나?
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빨리 따라잡지 못하면 변수가 폭증하는 형태의 기믹형 패턴인가?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잘 배분하는가가 핵심인 종류의 게임들이 있다.
그런 장르가 뒤섞인 기분이 든다.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난이도가 높아져만 가는 그런 종류의 게임들.
그런 게임을 높은 난이도로 플레이하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효율적이지 못하게 낭비하는 순간 모든 것이 망해 버리곤 하지.
지금 그런 살얼음판 위에 있는 게 아닌가 두렵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라. 주변에 왕국의 문과 리프트가 하나 더 있을 거거든.”
휴식은 중요하다. 소모품의 보충도 중요하다.
왕국에서 다시 정비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애초에 한정된 시간을 쪼개고 다시 쪼개다 보니 우리 상태는 전혀 만전이 아니다.
미아는 마력의 절반 남짓을 회복했을 뿐인 채로 움직이고 있다.
라파엘의 진로로 보아, 완전 회복을 기다렸다가는 늦었겠지.
“앞에 뭔가 있다. 태양 같은 수레바퀴군.”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더 멀 거야.”
왕국은 둥글지 않다. 가시거리에 들어와 제대로 보이게 되었다고 한들 가까운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유배자 스케일이다.
“전쟁터 지역으로 진입하겠군. 속전속결을 못하면 또 엄청나게 곤란해질 거야.”
천사와 악마들이 억겁의 시간 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전장도 곧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에 한발 앞서서 지역 변경 메시지가 떠오른다.
[영원한 분쟁]
변수 덩어리를 넘어서 변수 그 자체인 지역이다.
슬쩍 파티원들의 상태를 한 번 더 체크한다.
점차 긴장이 차오르고 있으나 겁에 질린 이는 없다.
가브리엘을 겪은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다시 그런 것을 상대하러 가는데도 말이다.
나헤마는 물질주의를 상징하는 악마다.
세피로트에 대응하는 클리포트의 좌에 오르기 전, 기계신이 탄생하기도 전.
그는 이 왕국의 마법과 금전의 신이었다.
원래 신좌에서 무슨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지금의 자리는 그렇게 알맞을 수가 없다.
마법사이자 장사꾼으로서, 제 마법을 팔던 신은 세상이 이렇게 변한 후에도 잘 적응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로 악마다운 이일지도 모른다.
고전적인 설화 속에 등장하는 악마는 기만과 협잡을 즐기며 사악한 술수로 모두를 꿰어 타락시킨다.
마법사이자 비즈니스맨인 그는 실제로 그런 방식을 아주 즐겨 사용했다.
천사 쪽에 친구를 만들어둔 것도 그 일환이다.
한때 지식의 천사 라지엘이라고 불렸던 존재.
현재는 릴리움이라는 수상쩍은 가명을 사용하는 친구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메타트론이라는 거대한 변수를 제어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릴리움이 마음에 들어서기도 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가.
세상엔 대화가 되지 않는 버러지들이 너무 많다.
“후후후. 그런 일이 일어났단 말이지.”
릴리움은 아마 정확히 필요한 수준의 정보만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서로 바라는 것이 충족될 만큼은 말이다.
“내가 먼저 움직일 필요는 없지. 기다리면 상대가 수를 쓰니까.”
바알에게 먼저 고하면 일단 그가 움직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대악마의 숙원이 이루어질 기회니까.
나헤마의 취향은 그렇게 앞장서는 누군가의 뒤에서 실리만을 취하는 것이다.
한낱 유배자이던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그가 1인자일 필요는 없다.
배후에서 암약하면 충분하다.
1인자는 언제나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나헤마가 바알에게 천상의 도시에 일어난 변고를 알렸다.
곧바로 바알은 대악마들을 소집했다.
영원한 빛과 어둠의 전쟁에 끝을 고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