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52화
메인 던전 - Lv. 17500 [환염의 삭풍, 라파엘רפאל](2)
사막의 열풍.
라파엘이라는 천사를 상징하는 공격이자 환경요소다.
태양이 하나가 아닌 하늘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둘이라면 특별히 권능이 아니더라도 한 지역을 사막으로 만들기는 충분하다.
셋이라면? 넷이라면?
그렇게 숫자가 늘다 보면 결국 녹아내려 용암으로 가득한 지옥이 된다.
천사가 만들어내는 것이 지옥이라는 점은 우습지만, 본디 천사란 그런 존재.
신이 특별히 인간을 위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그래왔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라파엘은 우리를 보자마자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하는 불기둥으로 맞이했다.
로스엘은 곧바로 모습을 바꾸었다.
세피로트의 힘이 낡은 기천사에게 깃든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황불을 신록의 가호가 막아섰다.
[바닥에 발 디디면 안 됩니다.]
[알고 있네.]
우리는 라파엘에 대한 공부도 미리했다.
로스엘의 손을 들어주기로 한 순간부터 이 세계의 모든 천사와 악마는 우리가 잡아야 할 보스다.
* * *
* * *
신화적인 공격을 보며 희우가 한숨을 내쉰다.
[가브리엘과 비슷하게 하면 되겠죠?]
[미아 위주긴 하되 미아가 견딜 수 있는 정로 회피는 해주어야 해.]
동시에 로스엘에게 오더한다.
[방어해 준다고 생각하세요. 로스엘이 경험치 먹어서 뭐 합니까.]
[어차피 공격하라고 해도 못 해. 저 녀석 내 공격에는 거의 대미지를 입지 않는걸.]
인간형일 때라면 어떻게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3페이즈인 라파엘이라면 불완전 하니엘인 로스엘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결국 일해야 하는 것은 우리 파티원들이다.
누군가를 잘 꼬셔서 그 힘만으로 어찌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새로운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기둥의 기능 해방은 파티원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된 것이 분명하다.
막막함 대신 당장 눈앞의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니까.
[교란할게요!]
희우는 짐짓 쾌활하게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 쾌활함은 어딘가 빛이 바래 있다.
적어도 내 눈에는 보였다.
흠. 서브 리더로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인가.
그게 아니더라도 희우는 점점 연기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은 그걸 연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조만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 안에 없는 것을 연기할 수 없다.
희우는 사실 원래부터 밝은 아이이며 주변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사람이다.
뭐, 동작에서마저 쾌활함이 느껴지는 연기를 대체 누가 그냥 할 수 있겠나.
그리고 그 작은 반짝임은 어쨌건 라파엘의 태양을 상대하는 파티원들에게 힘이 되어준 것 같았다.
[흠, 그래. 뭐 한 번 했으니 두 번도 할 수 있겠지.]
[이번에는 물뿌리개가 있으니까요!]
물뿌리개는 미아가 가브리엘의 완드에 붙여준 이름이다.
나는 완드의 원래 이름을 말해주려다가 말았다.
나쁘지 않은 이름인 것 같다. 실로 미아다운 네이밍이 아닌가.
메마른 사막을 로스엘의 에덴이 감싸기 시작했다.
드넓게 펼쳐진 사막을 푸른 벌판이 포위하고 이내 어느 수준에서 멈추기 시작한다.
나는 그곳에 발을 디뎌보았다.
[안전 확인. 에덴은 안전지대야.]
에덴이 완전히 라파엘의 영역을 지워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주변을 둘러싸 끝없이 뻗어 나가는 사막을 멈춰 세우는 데는 성공했다.
리온과 라리사, 그리고 쥐새끼가 그 안전지대에 자리 잡는다.
저곳은 의무대다.
우리에게 포션이 없다는 것을 라파엘도 알까?
안다면 먼저 노려질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
고위의 존재들이란 것은 삶에 필사적이지가 않다.
수만 년간 살아오면서 어떻게 모든 것에게 필사적이겠어.
하지만 분노는 확실히 있어 보인다.
쩌렁쩌렁 울리는 영적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마력이 흔들린다. 체내의 생명력이라 볼 수 있는 것에 직접적인 타격이 들어올 정도다.
[으아아아악! 죽어! 죽으라고!]
그런데도 내용은 아주 간결하면서도 격정적이다.
나는 뭔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제는 늘 그렇듯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잠깐만! 다들 공략 그대로 하지 말고 아주 수비적으로 상황을 좀 더 지켜봐!]
그리고 생각해 본다.
라파엘이 가브리엘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원래도 그렇다. 그건 달라지지 않은 사실.
하지만 실제로 가브리엘을 먼저 제거할 경우 어떻게 되었더라?
라파엘이 파워업하는 일 따위는 없다.
아니, 그걸 넘어서, 지금 3페이즈지?
[본모습을 드러내고도 인간형의 감정을 유지한다고?]
내가 기억하는 대로면 1페이즈와 3페이즈는 다른 존재나 다름없다.
드래곤의 [폴리모프]와도 흡사하다.
로스엘이 견제사격으로 태양을 쏘아내며 대답했다.
[그게 이상한 일이야?]
로스엘도 이렇게 반응하면 안 된다.
이상한 일이니까.
로스엘은 좀 더 고위 천사 출신의 세피로트 천사들을 이해하지 못해 불만을 토로하는 식의 스크립트를 읊어야 한다.
이 모든 변화한 점이 내게 요구하는 결론은 하나다.
[얘도 좀 다를 것 같다!]
앞으로 모든 보스가 다르겠군. 딱 그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대신, 지원하는 시스템도 새로 출현하는 셈이니 나쁘지 않군.
진짜로 내가 떠나고 나서 DLC라도 출시했나?
웃지는 못하겠지만 울상 짓지도 않는다.
어딘가 달라 보이는 라파엘은…….
격정이라 함은 사실 라파엘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다.
그래서 라파엘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다.
인간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다.
자신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을 뿐이다.
바벨의 자식은 분노에 몸을 맡겼고, 그것은 제법 기묘한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라파엘은 그다지 효율적으로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세상을 불태우고 싶을 뿐이었다.
사방으로 힘을 분출한다.
힘이란 곧 존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목숨을 아낄 생각 없이 뿜어내는 화염과 사막의 바람이 사방을 뒤덮는다.
격렬하고도 파괴적인 권능이 세상의 위상을 바꾸어놓았다.
에덴에 밀려 더 뻗어 나가지 못하는 대신 그 안에 갇혀 농밀해진 힘은 사용법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폭풍과 다름없다.
그야말로 열풍이.
사막의 열풍이자 태양풍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것이 에덴의 가장자리까지 미친다.
풀밭이 시들려 하고 태양이 대지를 녹인다.
하지만 단숨에 녹아내리지는 않는다.
사막의 달아오른 모래알은 단지 발 딛는 자에게만 치명적인 대미지를 부여하지 않았다.
대신 적극적으로 솟구쳐 올라 열풍의 기세에 합류했다.
라파엘은 문득 깨달았다.
이건 의외로 좋은 방법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어떻게 하였는지는 몰라도 가브리엘을 쓰러뜨린 유배자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고위 천사 라파엘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유배자다.
하잘 것 없는 존재다.
그들이 설령 강하다고 한들 그것은 신기한 재주를 부려서일 뿐이다.
그럼 그걸 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
동급의 존재들과 싸우기 위해, 그리고 승리하기 위해 절제되고 효율적인 방식을 고수할 이유는 없다.
그저 격정적으로 폭발하듯이 쏟아낸다면 저것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
[내 가브리엘을 돌려줘!]
[택틱 전부 취소한다. 패턴이 그냥 아예 달라. 이건 다른 보스야.]
[어떡하지? 후퇴해?]
그건 악수다.
나는 오싹함을 느끼는 중이다.
보스들의 패턴이 그렇게 구현되는 이유는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동급의 존재를 상대로 일격에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안정적인 선택이 아니다.
그 정도 스케일의 힘을 다루는 곳에서 가장 필요한 기본기는 소모전을 견뎌내는 안정성이다.
스펙의 차원이 달라서 생기는 일이다.
그래서 한낱 유배자가 정교한 기술, 고위 천사가 보기에는 잡기술인 것으로 이겨낼 여지가 생긴다.
그리고 지금 라파엘은 그것을 버렸다.
이건 폭주 라파엘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불러야 한다.
더 무서운 것은 다른 것이다.
[저게 전해지면 안 될 것 같아. 지금 그런 생각이 들었어.]
가브리엘을 통해 이미 내려둔 결론 한 가지.
이유는 모르지만 이번 테마의 보스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선형적 구조를 이탈하고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라파엘은 저런 방식을, 고정관념의 변화를 다른 보스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아, 잠시만. 나도 지금 소름 돋았어.]
[그건 좀 곤란하겠군.]
[곤란이 아니라 파멸 아니에요?!]
제니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대화할 짬이 제대로 나지 않기 시작했다.
휘날리는 모래알은 충분한 대미지를 가하고 있다.
그 범위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에덴의 존재가 파티의 목숨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다.
밀어내는 듯하지만 로스엘이 맞서 힘을 가하자 더 이상 침범해 오지 못한다.
로스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판단을 바꾸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건 기믹 보스일 것이다.
무언가 다른 수단으로 제압해야 한다.
그냥 힘과 기술만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혹시 라파엘을 먼저 잡았으면 가브리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확실히는 모르겠다.
[이거 라파엘도 계속 유지는 못 하는 거 맞죠? 지금은 들어가는 순간 죽는데.]
휘몰아치는 사막의 토네이도는 불길과도 같았다. 거대한 불타는 수레바퀴 형태의 천사를 중심으로 온 사방을 뒤덮는다.
그야말로 죽음의 삭풍이다.
[유지는 못하겠지만 그대로 보고만 있지도 않겠지.]
이윽고 바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방에 흩뿌려지는 끓어오르는 바람이 에덴을 침범한다.
리온이 비명을 지르면 도망쳤고 미아가 열심히 물뿌리개를 휘둘렀다.
[어느 정도는 방호가 가능해요!]
[제니! 전력으로 빠져!]
당연하지만 그 순간 미아가 포커싱당한다. 라파엘의 분노의 원인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미아에게 모든 화력이 급격하게 집중된다.
바람은 무형이다. 그렇기에 방어가 곤란할 수 있다.
제니는 그래도 아주 민첩하게 그 타격의 위치를 감지하고 움직였다.
미아의 가속관문이 순간적으로 피어난다.
바람은 아주 빨랐고 거의 광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뒤섞인 모래알이 공간을 갈아버릴 듯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제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많이 잘못되었는데요?!]
아니지.
잠시만.
저게 해답일지도 모르겠군.
아서와 희우도 같은 것을 깨달았다.
[이거군.]
[이거네요.]
[네? 뭐가 이거예요우악!]
다시 긴급한 회피기동.
그리고 미아를 노리고 쏘아지는 공격 덕에 전방위를 커버하던 무시무시한 폭풍에 공백이 발생한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꾸준한 대미지를 입을 것이며, 언제건 죽을 위기에 노출되겠지만 그럼에도 기회인 공백이 말이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또 하나의 사실.
[권능은 곧 생명력이야. 라파엘이 화나서 날뛸수록 HP 자체가 감소하는 거야. 그러니까 체감 HP는 그리 높지 않을 거란 말이지.]
[하나도 안 기쁜 소식인데요?]
제니에게는 부활 스택이 존재한다.
만약 죽더라도 그건 제니의 잘못이 아니다.
비상시에는 제니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미아만은 지켜낼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으니까 믿을 수 있다.
[로스엘! 곁에서 날며 견제 부탁해요!]
[방어적인 의미지?]
[최대한 제니와 미아가 버텨낼 수 있도록요.]
라파엘은 눈이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미아의 손에 들린 가브리엘의 유품(?)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다.
거대한 힘을 사용하고 있으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사용한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을 더 떠올린다.
이번 테마 최종 보스 정도까지 가면…….
우린 대체 무엇을 상대해야 하는가?
그 생각을 당장은 찍어 누른다.
그리고 공백이 생긴 폭풍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공기가 없는 것처럼 텅 비어 있는 진공의 공간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이곳은 라파엘의 영역이며 그의 태양이 빛나는 사막이다.
후끈하고도 따끔한 열기가 몸을 감싼다. 생채기가 몸 곳곳에 생겨난다. 새 갑옷도 이걸로 끝이군. 여벌이 남아날지 모르겠다.
라파엘은 뇌수가 펄펄 끓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불타오르는 수레바퀴의 중심에 눈과도 흡사한 것이 이쪽을 봄이 느껴진다.
하지만 대응하는 것은 제니를 향해 날아드는 흉악한 수준의 공격과는 전혀 다르다.
라파엘은 우리를 무시하고 그대로 제니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말이다.
[심지어 추격전이군. 어쩐지 보스가 넓은 구역을 배회하는 놈이더라.]
저건 저래 봬도 전사형 보스다. 그러므로 원거리 요격 능력은 가브리엘에 비해 미흡하다.
그래서 이 보스전의 구조가 성립한다.
파티원 하나가 어그로를 점하고 추격당하는 동안 그 뒤를 따르며 공격하여 제압해야 하는 기믹 보스.
희우가 좋은 생각을 하나 더 떠올렸다.
[그럼 라파엘의 진행 루트를 제니가 통제할 수 있잖아요. 릴리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짧게 스쳐 지나가는 불안하다는 생각.
하지만 오히려 제니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시키는 것이 더 불안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결론은 직관적으로 나온다.
[해보자.]
악마들이 몰려들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근방에 있는 전선에 말이다.
[블랑쉐! 전선 상황 정찰 부탁해! 위성 다 쏴버려!]
암살자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제니는 아직도 비명을 지르고 있다.
로스엘은 최선을 다해 제니 곁을 비행하며 라파엘의 공격을 방어해 주고 있다.
[저희는요?!]
리온과 라리사가 이 추격전을 따라올 수 있을 리는 없다.
[거기에 대기! 필요한 경우 들러서 치유받을 거야!]
어딘가 안도한 듯한 리온의 대답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이제야 뒤늦게 메시지가 떠오른다.
난 이게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깨달았다.
[마지막 편린]
[환염의 삭풍, 라파엘רפאל]
보스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