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53화
메인 던전 – Lv. 17500 [환염의 삭풍, 라파엘רפאל](3)
안타깝게도 제 아무리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도 한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장비의 수량에는 한계가 있다.
차원 수납 주머니도 무한정 무언가를 담을 수는 없다.
부피를 제거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요, 무게를 극단적으로 줄인다는 것이 두 번째 장점이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여러 개의 차원 수납 주머니가 서로 가까운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면 좋지 않은 일, 상호 간섭에 의해 내부 공간이 터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대로 쏟아진다.
재앙이 따로 없다.
미궁의 인벤토리 제한은 그런 식으로 구현되어있다.
어떤 형태로건 차원 수납 주머니의 개수를 제한하고 각 주머니가 담을 수 있는 질량을 제한한다.
그런데 사수는 일단 기본적으로 많은 물품을 소지하고 다니게 된다.
인벤토리가 곧 힘이나 다름없는 클래스다.
따라서 병기창을 포함하여 무수한 주머니를 소지하고 다니는 블랑쉐는 파티원 중 가장 인벤토리가 적다.
그녀의 인벤토리 구성을 살펴보자면 누아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머지 부분은 휴대 위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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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캣틀링건의 가장 큰 장점은 탄환 소모가 없다는 점이다. 그녀의 인벤토리는 탄환을 넣을 필요가 없는 만큼 훌륭한 화력과 유틸리티를 추가로 탑재했다.
누아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휴대 위성이다.
고블레타리아의 기술력이 유감없이 깃든 이 위성은 그녀에게 더 넓은 시야를 제공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수십 대가 이미 대기 중이며 왕국에 복귀할 때마다 리필 한다.
그러나 그녀가 당장 소지할 수 있는 것은 2대가 한계다.
더 늘릴 방도는 없다.
일종의 맵핵과도 같은 이것은 귀중하게 사용된다.
블랑쉐는 리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파티에서 이탈했다.
적절한 발사 위치를 잡고 그대로 쏘아 올린다.
두발을 모두 쏘아 올려야 커버할 수 있는 넓은 영역의 정찰이다.
위성이 자리잡기 전에는 오른 팔의 장갑이 분해되며 드론이 되어 사방으로 뻗는다.
블랑쉐 본인의 위험을 대비하는 동시에 위성의 위치를 제어하기 위함이다.
일련의 숙련된 작업은 3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무려 이동시간도 포함한 것이다.
눈앞에 인터페이스가 떠오른다.
고블레타리아는 그녀의 시그니처 수트에 다양한 형태의 기능을 추가하려고 노력했다.
결실을 거둔 것은 적으나 위성과의 연동만큼은 유익했다.
지형의 스캔이 시작된다.
위성은 방출되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적의 위험도와 위치를 특정 한다.
곧 라파엘과 그에 쫓기고 있는 파티의 마법사 듀오가 보인다.
제니는 잘해내고 있었다.
블랑쉐는 미소 지으며 위성의 시야에 들어온 [영원한 분쟁] 필드를 살폈다.
“과연 변수 덩어리인가.”
혼잣말은 마음을 다잡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의식.
눈앞에 떠오르는 증강현실의 지도가 점점 구체화되고 있다.
전장에서 벌어지는 힘, 에너지의 향연들이 생생하게 그려지기 시작한다.
그 규모는 상상했던 것, 그러니까 리더에게 듣고 짐작하던 수준보다 훨씬 거대했고 혼란스러웠다.
이 주변 지역의 원소가 이토록 혼란스럽게 뒤섞인 것이 무려 저 전장의 여파일 뿐인 모양이었다.
블랑쉐는 천천히 브리핑을 준비했다. 이번 보스전에서 그녀의 역할은 딜링이 아니다.
[들리나 리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블랑쉐는 자의적으로 수신 상태가 불량하다고 판단했다.
라파엘이 온 사방을 날아다니며 깽판치는 중이다. 그 불의 바퀴가 지난 곳은 권능의 흔적이 남아 마력을 교란한다.
미아가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여도 저런 힘에서마저 효과적인 통신을 유지할 수는 없다.
위성을 통해 마법이 아닌 다른 형태로 보조하기 시작한다.
마도공학의 정수가 통신을 다시 재연결하기 시작했다.
[리더 들리는지?]
[수신양호.]
[확인.]
블랑쉐는 전선의 정보를 확인되는 대로 공유했다.
[거대한 에너지체가 나타났다. 악마군단장들인 것 같다. 이미 전장에 나타난 지는 좀 된 모양이군. 천사들이 전선을 빠르게 물리고 있다. 지원을 기다리는 것 같다.]
그리고 추격당하는 제니의 앞에 펼쳐지는 지형에 대해서도 빠르게 구술하기 시작한다.
파티 플레이의 훈련이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
각 파티원들은 적어도 서너 가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하며 상대의 그 역할에 각각의 파티원들도 다 숙달되어야 한다.
반년은 사실 짧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충분한 숙련도를 이룩해낸 것도 대단한 일이다.
내가 고른 파티원들이니 그러리라 믿고는 있었더라도, 이 훌륭한 결과물에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곤 말할 수 없으리라.
블랑쉐는 약속된 약어를 통해 환경을 구술했고 익숙한 내게는 지도를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것과도 비슷한 효과였다.
지금 쏘아 올린 휴대위성, [주시자의 눈]은 고블레타리아에서도 양산할 수 없는 초고성능 모델이다.
6층에서 혁명을 일으켰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시작부터 그렇게 굴려가지 않는다면, 이런 결과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결과는 아직 나지도 않았다.
[리더어어어어! 살려줘요오오오!]
제니는 주기적으로 비명을 반복해서 내고 있었다.
그 품속의 미아는 최선을 다해 물뿌리개를 흔들어대고 있다.
가브리엘의 권능이 내뱉어진다.
사방을 푸르스름한 달빛 서린 액체가 나타나 가로막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은 그와 충돌하여 대량의 수증기를 만들며 사라졌다.
때로는 물줄기를 쏘아내기도 했다.
권능을 머금은 원소들이 빛과 어둠만이 가득한 곳을 마구 색칠하는 중이다.
대부분은 장비에서 나오는 힘이기에 미아는 걱정이 없다.
[로스엘! 저거 막아줘요오오!]
다만 제니는 거의 패닉이 온 것 같았다.
이런 훈련은……. 시켜본 적이 없는 것 같기는 했다.
로스엘이 사격을 통해 제니에게 날아가는 투사체를 막아낸다.
그리고 말했다.
[제니! 힘내! 라파엘에게 붙잡히면 좋은 꼴은 못 당할걸? 저 녀석 저래 뵈도 전사계거든.]
[무슨 전사가 원거리 공격이 이렇게 세요?!]
로스엘이 직접 몸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라파엘은 제니, 더 정확히는 그 품속의 미아가 아닌 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분노로 돌아버린 것일까?
희우가 공감각 속에서 전력으로 비행하여 찌르기를 먹였다.
[슈퍼 히어로 랜딩]
약간의 충격을 받은 라파엘은 속도가 조금 늦어졌지만 희우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거 맞고도 끄떡없네요. 엄청 튼튼한데요?]
[전사계니까.]
가브리엘을 먼저 노린 것은 이유가 있다.
들고 있는 무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가브리엘은 상대적으로 몸이 약한 보스다.
[그래서 추격전이 성립하는 거야. 가브리엘처럼 피하지도 못할 패턴이 난무하지는 않으니까. 저건 어디까지나 견제기라고.]
그건 제니도 많이 탑재하고 있다.
제니가 어이없어하다가 다시 비명을 지르며 방향을 튼다.
[나는 따라갈 수가 없군.]
[좋아요. 에길은 그럼 차라리 리온을 지켜주세요.]
[알겠네.]
상대적으로 비행이 서툰 에길이 이탈한다.
나 역시 전적으로 마법에 의지해 속력을 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라파엘은 제니보다는 느렸다.
하지만 근소하게 느릴 뿐이다. 순간적으로는 더 빠른 속력을 낼 수도 있다.
제니는 그때마다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미아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막아내고 있다.
그 가속력을 받아 쏘아진 태양이 사방을 불사르고 있으며 라파엘의 흔적을 따라 사막이 칠해지고 있다.
블랑쉐가 알려주는 방향을 생각하며 작전을 구성한다.
[제니! 직진 말고 우회전 될 거 같아?]
[차라리 죽여요!]
[미아야! 시켜!]
[네!]
제니는 수상쩍은 괴성을 내지르며 미아에 의해 강제 가속되었다.
라파엘은 선회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더 화를 냈다.
[내 가브리엘을 내놔라! 네가 가지고 있는 그것! 나의 친구다!]
대사에서 지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군. 가브리엘을 보고도 문득 느꼈던 것인데.
이 세계의 고위존재들은 생각보다 더 인간적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감정이 뭔지를 몰랐기에 더 동화되어 타락해버린 그런 존재.
머리 끝까지 화가난 나머지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는 느낌이 나고 있다.
고위 천사들은 원래 그런 존재들이 아니다. 무미건조하게 자신들의 방식만을 고수하기에 공략당하는 그런 존재다.
과거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지금이 실전이라는 이야기겠지.
그 이상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장점이자 단점이구나 생각한다.
지금처럼 인간적인 바람에 생기는 틈도 있으니까.
[블랑쉐, 악마들이 돌파하는데 얼마나 걸릴까?]
[천사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미 전투중이다. 그쪽으로 몰고 가면 재밌는 일이 일어나겠군.]
[이해했다.]
블랑쉐는 관측이 굉장히 흥미진진하다고 느꼈다.
클리포트의 악마군단장들은 강력하다. 사대천사와 동급을 이루는 존재들답다.
릴리움은 과연 나헤마에게 정보를 흘렸다.
그녀는 메타트론을 따르기는 하지만 그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다.
그보다는 유배자 출신으로서 오랜 세월 암약해온 나헤마를 더 높이 샀다.
“개판이군. 더 개판으로 만들어줘야지.”
반면 전선에서 거리가 있는 리더와 라파엘 쪽도 위성으로 관측되는 지도가 아주 장엄하다.
거대하고도 넓은 빛과 어둠의 벌판은 사막으로 점점이 칠해지고 있다.
때로는 산맥을 넘고 때로는 갈라진 틈을 지나지만 모든 곳에 모래알이 뒤덮인다.
리더는 우선 전선과는 먼 방향으로 라파엘을 유인하고 있었다.
“저런 힘이 있다면 확실히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겠지.”
블랑쉐는 가끔 생각한다. 지금 유배자로서의 이런 힘을 가진 채 그녀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그렇다면 그녀 혼자서 모든 것을 끝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첩보원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지.
일개 개인의 무력으로 말이다.
그런데 저 고위 천사의 힘은 그만큼 강력한 그녀가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다.
“배울 필요도 없고 배울 수도 없었겠지.”
블랑쉐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 역시……. 어떤 의미로는 저들과 비슷한 존재다.
미아도 제 재능에 그대로 먹힐만한 환경이었다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보면 천진난만하게 오싹한 소리를 해대니까. 블랑쉐도 오싹할 정도의 소리라는 것이 남에게는 어찌 들릴지 이제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알파와 베타는 처음부터 블랑쉐보다는 더 인간적인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실패작이었고 블랑쉐는 성공작이었다.
그녀의 친부가 그렇게 여겼다.
고위 천사나 악마들은 그와 비슷한 것들로 여겨진다.
위대함의 편린이라.
편린은 조각을 말한다. 한때 하나였던 무언가가 조각나있다는 뜻이다.
그럼 그 원래 하나였던 위대함이란 무엇인가.
힘을 말하는 것은 아닐 터.
미궁을 마지막에 클리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다.
최후의 최후에는 결국 인간으로 돌아가서 시련을 마주해야한다.
대신격들이, 그리고 미궁이 그렇게 원하고 있다.
“미궁은 기묘할 정도로 인간적이야.”
블랑쉐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겠군.”
확신하고 있다.
지도상의 움직임이 격렬해지고 있다.
블랑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거대한 수레바퀴 형태의 천사가 물러서고 있던 전장에 도달했다.
미카엘은 돌아가는 도중에 전선의 변고를 들었다.
바알이 악마군단장들을 모조리 이끌고 전선에 나타났다.
언젠가를 위해 힘을 비축하던 긴 시간이 끝났다는 것처럼.
미카엘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도시를 보았다.
“여길 더 지킬 필요도 없겠군.”
천상의 군주가 명했다. 모든 천사들은 전선으로 날아가라. 지금이 이 영원한 전쟁을 끝내야할 순간이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브리엘이 사라졌다고 갑자기 모든 것이 끝장나지는 않는다.
미카엘은 이미 그 다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가 아직 건재함을 보여줘야만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