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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54화 (52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54화

메인 던전 - Lv. 17500 [환염의 삭풍, 라파엘רפאל](4)

블랑쉐는 위성을 통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끊임없이 대지에 존재하는 산맥이나, 라파엘의 이동 속도를 조절할 수 있을 만한 커다란 장애물 같은 것을 알린다.

단순히 속도만이라면 고위천사는 엄청나게 빨랐다.

기천사인 제니가 마법사의 보조를 받으며 최선을 다하더라도 위기가 많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대한 크기의 차이 때문에 선회력에서는 유배자의 우세다.

불타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모습을 한 천사는 추진체에 가까운 방식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어쨌건 저쪽에는 오르골이 있다. 블랑쉐는 이제 그의 리더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그 신뢰는 이미 ‘대충 알아서 하겠지.’에 가깝다.

많은 이들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성패가 확실하지 않으며 실력보다 기도에 더 많은 것을 의존해야 하는 상황은.

블랑쉐가 가장 많이 겪어보았다.

평생의 삶이 그런 것이었다 보니 별수 없다.

오르골이 그녀에게 이런 다양하고도 정밀해야 하는 역할을 맡긴 이유다.

블랑쉐의 작업은 언제나 격정과는 거리가 멀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 * *

* * *

무미건조한 눈으로 지도를 읽는다.

끊임없이 브리핑하면서도 다른 쪽의 상황을 동시에 본다.

위성은 점차 입체적인 지형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형태를 가시적으로 보정하여 제시하기 시작했다.

전장 쪽의 해상도가 점점 좋아진다.

자신도 큰 힘을 다루게 되며 저런 종류의 힘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권능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의 모습은 끔찍했다.

클리포트의 악마들이 나타나 각자의 영역을 펼치며 아비규환을 만든다.

영역의 종류는 알고 있다.

[바알, 아스모데우스, 아드라멜렉이 와 있다.]

[셋 뿐이야?]

[현재로서는 그렇다.]

[여기서도 악마들은 말을 잘 안 듣는 모양이군. 저쪽도 급하게 나왔다고 보면 되겠어.]

제니는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다.

사실 블랑쉐는 맨 처음에 그다지 제니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짐이 되냐 안 되냐를 따지면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짐덩이를 넘어 암덩이일 수 있었던 존재.

그렇기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인가부터 그게 제 아비의 방식임을 깨달았다.

인간의 우열을 빠르게 결정하고 그대로 단정지어 버린다.

그녀가 제니를 어찌 생각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니가 어떻게 하고 싶었고 어떻게 되어오냐가 중요했다.

지금도 제니가 미아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사실 어딘가 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한다.

그래도 제니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공통의 목표로 나아가는데 저렇게 헌신적인 고양이가 또 있겠는가.

애요오오오옹.

디스트로이어가 갑자기 울었다.

“괜찮아. 디스. 너도 잘하고 있어.”

애오옹.

블랑쉐가 믿은 대로 제니는 큰 문제 없이 악마들이 날뛰고 천사들이 밀려나는 전장까지 라파엘을 몰고 갈 수 있었다.

바깥이라면 중상이겠지만…….

미궁에서 중상의 기준은 적어도 신체결손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그나마도 포션이 없어서다.

블랑쉐는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충분한 해상도를 확보하여 가시적인 데이터가 현실과 다름없어진 위성의 정보에서 거대한 충돌이 일어났다.

다른 악마들은 아직 인간형조차 버리지 않았다.

라파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불태우며 나타났다.

그래서 거의 한순간은 그 힘이 길항했다.

악마군단장들은 이 상황을 당연히 아마겟돈으로 여겼다.

갑작스럽게 본 모습으로 나타나 아끼고 있던 힘을 뿌려대는 고위 천사.

천사와 악마의 최종전이 너무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옆에 하니엘도 보이는 참이다.

저쪽 입장에서는 세피로트의 천사 둘이서 전장에 지원을 나온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릴리움이 정보를 얼마나 자세하게 풀었건 나헤마는 필요한 수준만큼만 전달했으리라.

그건 리더가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을 처음 마주치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모니터 너머에서는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족이라.

오르골에게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나만 말하는 것도 억울하군.”

한번 캐물어보자. 뭐 어떻게 살았으면 저런 사람이 되는가 궁금하다.

그리고 오르골 역시 돌아갈 곳이 있기는 할 것 아닌가.

그것이 진짜건 가짜건.

세력전이라는 형태는 다들 알고 있다.

2층에서도 겪었던 그것, 그리고 [빛과 어둠의 경계]라는 이름을 가진 이번 테마의 종류다.

근본적으로는 같다.

이미 서로 적대적인 존재들이 으르렁거리고 있고, 유배자는 단지 그 사이에 끼어들 뿐인 것이 이곳의 테마다.

그 스케일이 다를 뿐이다.

일단 스펙으로 찍어 누르는 것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게 설계되어 있다.

그러니 유배자는 선택해야 한다.

한쪽에 붙어 어느 정도 이용당할 생각으로 공생하거나, 모두를 적으로 돌리거나, 혹은 아예 편린들에게 이용당하는 편리한 노예가 되거나.

마지막은 굉장히 별로 같지만 생각 외로 괜찮은 판단이다.

철저하게 노예로서 굴려지며 장기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끝내는 반역하여 주인을 찌르는 그런 것.

초보에게는 오히려 권장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먼저 굽히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럼 대등한 관계를 위해 노력해 볼 수 있겠다.

실적은 이미 있다.

산달폰과 가브리엘이 쓰러졌다.

기계신에 대해서는 말해봐야 긁어 부스럼일 테고.

내쪽이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이제 미카엘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이제 도달한다.]

우선은 라파엘이다. 제니는 여전히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은 한편으로는 라파엘의 어그로를 더 효과적으로 끄는 수단이 되었다.

미아는 물뿌리개 대신 달뿌리개를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물뿌리개에서 쏟아져 나온 물들이 주변을 단단히 방어한다.

[이것도 쉬운 게 아니군. 속도 내는 법도 더 연습해야겠어.]

[전 아예 마법으로만 날고 있으니 굉장히 힘겹군요.]

아서 비행하며 따라오던 아서가 물러났다. 나 역시 물러난다.

이 추격전은 너무 빨랐다. 사실 뒤에서 따라가는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억지로 어떻게 공격을 넣는 이상은 할 수 없었다.

라파엘이 주춤하는 동안 제니는 위기를 빠져나갔다.

기천사가 이런 경우에는 편리하다.

희우가 마지막까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나는 얼른 리온과 에길을 부르러 갔다.

원소가 너무 뒤틀려 있어 공간이동에는 제약이 있다.

그래도 강행한다.

짧은 거리로 연속적인 공간이동을 감행하여 순식간에 도달했다.

라리사가 기겁을 했다.

“이게 몇도 화상이에요? 머리카락은 다 어디 갔어요!”

“치유의 빛 뿌리면서 따라와. 막타 노리러 가야 해.”

거기서부터는 리온이 공간이동을 연속 시행한다.

그을리고 모래알에 두들겨 맞은 몸이 치유되는 기분이 든다.

“아무리 팔 한 짝 날아가는 거 아래로는 생채기도 안 난 거라곤 하지만 지금은 포션이 없어요. 선생님.”

공간이동의 멀미 속에서 기도를 올리며 날 갈구기까지 하다니. 라리사는 잘 자랐군.

리온 역시 연속 공간이동을 시행하면서 쓰게 웃었다.

“라리사. 진정해. 선생님은 죽지만 않으면 만전의 상태라고 주장하는 분이야.”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포션이 있다면 사실이긴 하다.

“때로는 목숨도 탄환이 될 수 있지.”

부활 스택은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다. 내 생각에는 이번 테마 후반부에 상당히 소모할 것 같다.

라리사가 기도하며 질린 표정이 되었다.

저거도 참 집중이 필요한 일인데 그걸 저렇게 하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성직자 플레이는 거의 해보지 않았기에 저럴 자신은 없다.

신은 뭐 내가 신인데 뭐하러 신을 섬기겠나.

언젠가부터는 그런 마인드였다. 신들은 편리한 비즈니스 상대이자 전력 정도였지.

이번 회차의 루시 여신님은 좀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공간을 마구 찢어발기며 연속적으로 마력을 낭비한 끝에 조금 멀리서 라파엘이 당도한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제니는 요즘 자신이 조금 심한 꼴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제니즈들 덕에 멘탈이 너덜너덜해진 게 바로 직전의 일인데 세상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다 때려치우고 싶거나 좌절을 했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제니즈의 유산은 제니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지금껏 미묘하던 쩌리 포지션에서 탈피하여 진짜로 제대로 된 든든한 전력이 될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은 지금도 잘 작동하고 있다.

제니즈가 알려준 요령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죽도록 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날개가 빨갛게 달아올라 미아가 물을 뿌려 식혀주었을 정도다.

속도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하고 있다.

러너스 하이라도 올 것 같다.

품속의 미아는 그런 제니를 열심히 응원하는 중이다.

[제니 대단해.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야!]

[정말요오오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미아가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다.

처음에는 파티에서 그나마 역할이라고 부여받은 것이 이거여서겠지만 이제는 그 이상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 심한 꼴을 많이 당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뜻이니까.

눈앞에 목적지가 보인다.

저곳에 도달한 후에는 파티원들이 이탈을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차오른 자부심이 순간 집중력을 흐렸다.

리더의 지시대로 방향만 바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던 전력비행은 마지막의 순간에 파국을 맞이할 뻔했다.

날개가 펑 하고 터졌다.

끝자락을 스치고 지나간 라파엘의 태양 덕분이다.

[어?!]

작은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추진력을 잃는다. 항력도 잃는다.

균형을 잃고 빠르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관성에 의해 아직 괜찮지만 빠르게 따라잡히고 있다.

서브리더가 날카롭게 외쳤다.

[제니! 자세 제어해!]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익혀둔 스킬이 몇 가지 있다.

자력이 아닌 스킬의 보정에 의해 비행을 간신히 유지하며 자세를 잡으려고 애썼다.

등 뒤로 다시 화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로스엘! 막아줘요!]

[몸 한번 대준다고 안 죽겠지?]

굉음, 그리고 어지럼증.

다시 자세를 잡았을 때는 이미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신화적인 광경을 인지하기도 전에 품속의 미아부터 확인한다.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쌍뿌리개는 놓지 않고 있어 다행이다.

잠깐만, 내가 뭘 해야 하더라?

얼른 미아를 깨운다. 손에 여유가 없으니까 생각하다가 급하게 핥기 시작했다.

거의 본능에서 나온 행위였기에 시작한 직후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별수 없다.

‘아아아아, 나는 고양이. 미아 양의 고양이.’

그러다가 결국 머리를 힘껏 부딪쳤다.

미아가 반짝 눈을 뜬다.

[미아 양 달! 달!]

거의 반사적으로 쌍뿌리개를 흔들었다.

사방에 달이 비치고, 거대한 해일이 저 멀리서 사막을 빗겨 솟구쳤다.

로스엘이 소리친다.

[전력전개!]

약속된, 그렇다곤 해도 일단 추격전이 시작된 후에 정신없이 의견을 교환하며 수립된 작전이 펼쳐진다.

사방에 에덴이 피어난다.

악마들이 보기에는 틀림없이 세피로트의 천사 셋이 지원 나온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한낱 유배자에 주목할 이유는 없을 거니까.

[로스엘! 제니와 미아는 제가 챙겨갈게요! 최대한 깽판 치고 빠져나와요!]

[이따가 봐~]

콰르릉 쿵 하는 굉음과 번쩍이는 섬광.

그리고 순간적으로 시간을 멈추고 다가왔을 게 분명한 서브 리더.

번뜩이는 시간의 틈에서 제니는 일단 미아부터 내밀었다가 혼났다.

[미아는 멀쩡해요! 부상자는 제니잖아요!]

서브 리더가 그대로 둘을 안은 채로 속력을 내었다.

뒤편에 거대한 폭발과도 같은 힘의 폭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제니는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잃을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서브 리더가 내는 속력이 보인다.

공감각인지 뭐시긴지를 이용해 신체 부위인 날개까지 극한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했던가.

사실 서브 리더에게 더 어울리는 역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제니가 방금 전까지 내고 있던 최고속력이 우스울 정도로 빨랐다.

그것도 두 명이나 끌어안은 채 날고 있는데.

‘나도 배워보겠다고 해야겠다.’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안 되어도 되게 하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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