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60화
메인 던전 - Lv.17500 마술사왕 [솔로몬](3)
던전이라는 것은 지하 감옥을 의미하는 단어다.
더 어원을 파고들자면 성채의 중앙탑 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언어의 사회성은 의미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에 있지.
그게 온갖 보물과 위험이 도사린 폐쇄된 공간을 의미하게 된 것은 D&D를 위시한 초기 RPG의 영향이 지대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발을 들인 이곳은 미궁의 수많은 공간 중에서도 가장 RPG에서 말하는 던전의 근본에 가까운 곳이다.
“정말 모범적인 던전이긴 하네요.”
“그래서 존재하는 함정이나 몬스터들도 꽤나 클리셰적이야.”
“레벨 3천이 넘어서야 이렇게 모범적인 던전에 들어와 보다니…….”
제니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건 서브 리더가 너무 엘리트 코스를 밟아서 그래요. 사실 이런 곳은 흔해요. 그리고 보통은 발을 안 들이죠.”
“맞아.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마법사의 던전이라는 점이 특별한 거지 사실 이런 던전 자체는 흔해 빠졌어.”
무수한 서버의 역사적인 시간을 넘나들며 얼마나 많은 마법사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하다못해 괴짜 드래곤의 레어도 이런 형태인 경우가 제법 있다.
* * *
희우는 굉장히 ‘그런가아.’ 하는 얼굴이 된 다음에 고개를 저으며 집중했다.
어쨌든 온갖 변형이 가해진 형태의 고레벨 지역에서 이런 정석적인 던전은 오히려 귀하다.
블랑쉐가 척후를 맡아 전진한다. 암살자라고 불리는 클래스는 다르게 말하면 전통적인 RPG의 도적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저레벨 암살자들은 그런 역할을 더 많이 한다.
유배자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니까.
“어색하긴 하군. 이런 식의 대열을 구성해 본 적이 없어.”
“저도 그렇습니다. 대개 달려가서 부수면 부서지니까요.”
아서와 에길도 조금은 어색해한다.
고정 NPC로서 압도적인 스펙을 지닌 채로 왕국에 도달하는 저 둘에게 이런 식의 탐사는 낯설긴 하겠지.
보스전 포메이션은 지독하게 훈련했지만 평범한 던전 탐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훈련이랄 것도 없다.
기본적으로 아는 바이기도 하지만 쓸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블랑쉐가 앞장서고 내가 바로 그 뒤를 따르며 전사들이 언제건 나서서 싸울 준비를 하는 상태다.
제니는 후방을 경계 중.
“어쩐지 그립네.”
“그러게요.”
내가 그리운 것은 내 과거일 것이며 희우가 그리운 것은 모니터 속의 RPG일 것이다.
“그래도 다르게 말하면 정석적으로 험난합니다.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괴기스러운 곳은 아니에요.”
“솔로몬이라는 리치가 지켜보고 있지는 않나? 갑작스레 나타나는 경우는?”
“재수가 없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솔로몬은 무언가 목적이 있어 이런 던전을 구성한 것이 아니다.
그는 마법에 미쳐 있고 마법 때문에 살아간다.
미아를 수만 년간 숙성시키면 만들어질 것 같은 그런 마법 괴물이다.
“오빠도 못 이겨요?”
“음, 이런 말하긴 뭐한데. 난 거의 솔로몬의 제자야. 심화 과정은 많이 배웠지.”
“오……. 저 여기 보스전 하기 싫어요.”
“나도 싫어. 가브리엘이 더 나아.”
지금은 어떨까?
순수하게 마법적 능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상대는 메인 던전의 순환 속에 갇혀 있다 한들 설정부터 수만 년을 살아온 대마법사다.
내가 이긴다면 꼼수지 정정당당한 마법 배틀은 아닐 것이다.
“변수 그 자체군.”
“로스엘만큼이나 질이 나쁜 보스예요.”
“내가 왜!”
그리고 달리 말하면 그래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을 것이다.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괜히 히든 보스가 아니에요. 시비를 안 털면 그냥 이 테마의 흐름에 관여 자체를 안 하거든요.”
“제 던전을 들쑤시는 건 시비 아니에요?”
“관심 없을걸? 이미 수천 년 전에 끝난 연구를 방치하고 있을 뿐인 거니까.”
“아……. 이해했어요. 집 청소를 잘 안 하는 사람이구나.”
물론 곧 나타나기 시작한 고난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요약될 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뭐야! 이 슬라임은!”
슬라임은 사실 아주 강한 몬스터다.
온갖 신체부위들이 죄다 약점인 평범한 생물과는 다르게 약점부위도 핵이라고 부를 하나뿐이지 않은가.
고레벨 슬라임은 끔찍한 존재다.
에길과 아서는 살이 녹고 타는 경험을 제법 많이 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은 합성수 구역이었다.
“천사와 악마의 키메라?”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이…….”
“드워프 왕국이 하려던 건 아주 귀여운 일이었네요.”
빛과 어둠을 동시에 다루는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다.
어떤 식으로건 약점을 공략할 방도가 없기에 정정당당하게 힘들여 싸워야 했다.
“스켈레톤? 이건 좀 흔한데. 한데 이상하게 빛이 나는군.”
“저거 형광색 저거 방사능입니다. 가능한 합을 겨루지 말고. 알겠죠?”
체렌코프 광이 날 때까지 마력을 머금어 강화된 치명적인 독성 스켈레톤도 상대하고.
“기괴하게 생긴 고양이네요?”
“다들 엄폐해!”
“애오오옹!”
유사 캣틀링건형 괴물 고양이 부대도 만나고.
“이건 레이저 트랩이네요.”
“닿으면 녹을 거야. 저거 방어력 무시해.”
“포션 먹고 달리면 안 될까요?”
“회복이 못 따라갈걸.”
사방이 거울로 이루어진 빛의 향연도 지나치고.
“이제 입구를 다 통과했다.”
“이게 말이 돼요? 서른 번은 전투한 것 같은데.”
“시간은 두 시간밖에 안 흘렀어.”
“믿을 수 없어.”
제니가 한심하게 불평했다.
“전 열두 번은 죽을 뻔한 것 같은데요…….”
파티원들이 모두 녹초가 되었다.
“여긴 끔찍하게 넓어.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나 다름없지. 솔로몬은 이 던전을 계속 확장해 나가고 있을 거야. 명확한 거처도 없어. 끝까지 도달한다면 새로운 연구를 하고 있는 데미 리치를 만나게 되겠지.”
“괜히 히든이 아니네요.”
녹초가 되었다는 것은 가감 없는 사실이다.
순간의 격렬한 보스전도 충분히 후유증을 남기겠지만 비교적 할만한 전투도 끝없이 이어지면 굉장한 스트레스가 된다.
그 끝에 도달한 것은 진짜로 현관이 끝난 듯한 느낌을 주는 광장이었다.
비로소 솔로몬의 무덤이라 불리는 던전의 시작점에 도달한 것이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다.
“여길 베이스로 삼자. 오래 쓰게 될지도 모르니까 준비해 다들.”
“지금부터가 진짜란 거군.”
희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우리 베이스 캠프 만들고 사실 거의 안 쓰지 않아요?”
“쓸 생각인데 항상 뭔가 휴식할 틈도 없이 개판이 나니까.”
“메인 던전 들어오고 나서 한 번도 베이스 캠프를 쓴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젠 써야 할 거 같은데. 적어도 이 던전은 뭔가 달라진 점이랄 것도 없어 보여. 무슨 일이 생기려면 이미 생겼겠지.”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는데.”
한눈에 보아도 이 광장은 거점으로 삼으라고 만들어진 구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여러 갈래가 뻗어 있다.
“히든 지역인만큼 털 건 많아.”
“[왕관의 검]을 이용해 터는 재보 같은 셈이군요.”
“아마 우리가 이 뒷부분에 있는 걸 싹 털어가도 솔로몬은 신경도 안 쓸 거니까.”
아서가 질문한다.
“마법사에게 유용한 물건 위주로 존재하는 거 아닌가?”
블랑쉐가 바로 부정했다.
“디스와 비슷한 존재도 만들어낼 수 있는 마법사였다. 정말로 뭐든지 만들겠지.”
“하긴 세피로트를 만들었다고 하니까.”
나는 제안했다.
“그래도 본인이 전사가 아닌 솔로몬이 만든 무기들을 우리가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확률은 낮아요.”
“그럼 무엇을 얻나?”
“소모품과 방어구.”
“과연.”
마법사들은 이상하게 그런 걸 만드는 취미가 있다.
괴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괴물에 대응할 수 있는 장비도 만들어낸다.
사실 그건 하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뭔가를 새로 만들어내면 당연히 그 대응 수단도 같이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제 작품의 장단점을 정리하려고 하면 정말 오만 가지 파생품들이 태어난다.
“어차피 우리가 노려야 할 것은 우리가 쓸 장비 일부와 나헤마에게 주고 그의 호의를 살 아이템들뿐이니까 여길 다 뒤져볼 필요는 없을 거예요.”
추가로 더 좋은 소식이 있다. 이 방사형 광장에서 이어진 곳에 이미 솔로몬의 흔적은 없어 보인다.
그는 더 먼 곳까지 새로운 마법의 지평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일도 없는 것이다.
“풀어놓을 생각도 좀 해봤는데. 안 되면 마는 거지.”
시간을 엄청나게 들일 만큼 확실한 계획도 아니다. 제 스승의 물건을 나헤마에게 가져가기만 하면 되겠지.
좋아. 일이 더 단순해졌군. 변수를 더 창출하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어디까지 감당 가능할지는 모른다.
안 되면 안 되는 셈치고 그냥 가도 좋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솔로몬과 싸우게 된다면 일어날 수 있는 패턴들을 파티원들에게 숙지시켰다.
패턴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그간 여러모로 익힌 것이 많았기에 어렵지 않게 해야 할 행동을 정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파밍이다.
“여기 2번째 통로와, 저기 11번째 통로만 털면 됩니다. 다른 곳은 무시하고 되돌아가도록 하죠.”
2번째는 악마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고 있는 곳이다.
이미 천사 세력이 미카엘을 제외하고는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헤마는 바알의 통수를 후려갈길 수단을 원할 것이다.
솔로몬의 비교적 초기 연구는 천사와 악마, 특히나 고위 존재들에 대한 것이 많았다.
바알의 약점을 찌르는 장비들은 그의 구미에 맞을 것이다.
훌륭한 가격을 쳐주겠지.
“11번째 통로는 그냥 보기만 해도 알록달록하죠?”
“쇠 정도는 가볍게 녹을 것 같은 열기가 느껴지는데…….”
“저기 물건은 [벨페고르] 잡는 데 쓸 겁니다.”
“냉기라고 했던가?”
라파엘 장비가 있으니 상성에 맞는 녀석부터 처리하는 게 옳다. 솔로몬 특제 냉기 저항 장비라면 내가 몇 년씩 공들여 만드는 것보다도 고성능이다.
그 위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다음 전투는 한 대 맞아도 살 수 있을 겁니다.”
“믿을 수 없군.”
“노 히트 아니어도 되는 거예요?”
파티원들의 너무 좋아해서 무안해졌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리치는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멀고 먼 마법의 지평을 향하여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을 잠깐이나마 멈추고 휴식을 취하려는 생각을 할 만큼이나 말이다.
그는 자신이 늙었음을 자각했다.
육체는 불멸이어도 정신은 언젠가는 늙는다.
고위의 존재들이 그다지도 단순한 것은 그것이 그 수명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반면 솔로몬은 너무 복잡하게 살아왔다. 마법사이니만큼 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솔로몬은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더 이상의 연구를 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앉아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몇 시간이던 명상은 점점 길어졌고 이윽고 몇 개월, 몇 년 단위로 늘어났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었다.
그는 차분히 내면을 관조했다.
어찌 보면 그것이 그가 새로이 하는 연구였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어둠의 원소가 미치는 그런 사소한 영역을 넘어 인간의 정신을 이루는 고고한 무언가에 대한 실마리를 잡고 싶었다.
솔로몬은 비록 리치지만 인간이고자 하는 마법사였다.
그것은 무수한 종족을 거치고 돌고 돌아 고위 존재의 행태마저 지켜본 결과였다.
미궁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탓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배자가 아니었으며 유배자였던 기억도 흐릿한 세월 속으로 스러졌지만, 그래도 인간이었던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
이 세계에 다시 인간이 나타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 내면에 가라앉았다.
정신의 여러 층을 탐구하고 다면화된 여러 모습들을 정의했다.
마법이란 결국 정신의 힘.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짐을 느꼈다.
물리적인 강함은 아니었다.
데미 리치의 정신은 점점 날카롭게 다져졌으며 동시에 완성되어 갔다.
나쁘지 않은 연구였다.
그리고 솔로몬은 실로 오래간만에 명상에서 깨어났다.
이젠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불멸의 육신에 수북이 쌓인 먼지는 이미 지층이나 다름없다.
솔로몬은 굳이 마법 대신 물리적인 뼈의 움직임을 통해 먼지의 지층을 뚫고 올라왔다.
새로운 공기는 없었다.
새로운 일도 없었다.
뭐, 상관은 없었다.
그게 그가 바라던 일이다.
미궁을 이겨낼 수 없다면 이렇게 어딘가에서 제 할 일만 하는 것도 즐겁지 않은가.
우둑우둑하고 리치의 뼈마디가 소리를 낸다.
[늘 그렇듯이 조용하군.]
제 스스로 낸 목소리만이 이곳의 유일한 의지를 가진 목소리다.
[아직도 이 세상은 망하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는 눈을 뜰 수 없었겠지.
언젠가 침몰할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있을 뿐인 이런 삶.
좋지 아니한가.
[흐으으으.]
다시 명상에 잠기기 전에 자신의 명상을 방해할 만한 일이 없는가를 알아둘 필요는 있다.
소소한 소일거리기도 하다. 기분의 전환은 언제나 중요하다.
마법사가 아니라 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대화가 그립군.]
침입자가 있다면 붙잡아 통 속에 뇌만 담궈두고 때때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
이 역시 좋지 아니한가.
그래서 리치는 자신의 정신을 확장시켰다.
마력이지만 평범한 마력 탐지와는 전혀 다른 어떤 형태의 감지능력이 그가 만든 던전 내부로 퍼져 나갔다.
기실 이 던전은 그의 몸이요, 그 속은 체내나 다름없다.
육신은 그 와중에 뼈를 통해 허밍을 하며 다시 명상에 잠길 방을 청소한다.
그리고 무언가 느껴졌다.
[으음? 침입자?]
종족구성부터 확인했다.
천사나 악마라면 몹시 불청객이다. 뇌를 뽑아볼까.
[인간?]
인간이 하나 있었다.
이 세계에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혹여 있더라도 그 같은 언데드일 것이다. 그건 사실 인간이 아니다.
[인가아아안?]
유배자로군.
그것도 인간인 유배자.
인간인 채로 메인 던전에 들어와? 간이 정말 크다.
솔로몬은 일단 그것만으로도 상대에게 호감을 품었다.
[뇌를 뽑진 말아야겠군.]
인간의 정신에 대해 탐구하던 참이다. 살려두고 이야기를 들어보자.
최소한 죽일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