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62화
메인 던전 - Lv.17500 마술사왕 [솔로몬](5)
중간보스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넘어갔다.
그야 당연한 것이, 중간보스 레벨을 1대1로도 승리할 수 있게 훈련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부침 따위는 없다.
이 통로의 끝에는 자아를 가지게 된 무기가 있을 것이며 그게 보스다.
약점이랄 것도 없는 무기질형 보스기 때문에 정말로 정정당당하게 힘으로 두들겨 패야 하기에 시간이 좀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위험하진 않나요?”
“위험하긴 한데, 사실 여기 루트는 컨셉 자체가 정신공격이란 말이야.”
“아, 그럼 괜찮겠네요.”
파티원들은 때때로 악몽에 빨려 들어가지만 그때마다 다른 이들이 있음에 안심하며 전진하고 있다.
전혀 갉아먹히지 않고 있다.
성기사인 라리사까지 있었다면 그야말로 날로 먹을 수 있을 만한 상태다.
분위기도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라파엘의 검을 횃불 삼아 전진하자 악몽에 빠져드는 일도 감소한다.
어둠 속에 가끔 드러나는 무언가를 몇 기는 제거하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
* * *
* * *
* * *
물론 내 온신경은 근처에서 바라보고 있는 리치에게 집중되어 있다.
문득 블랑쉐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를 본다.
눈만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블랑쉐는 고개를 끄덕이고 모른 척을 하기 시작했다.
솔로몬은 계속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불안하고 끈적한 시선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원래 성정대로라면 나타나서 귀찮게 굴어야 한다. 그 결말이 전투일지언정.
지금 말을 걸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가만히 지켜본다는 것은 뭔가 두고 보고 싶다는 것인데 우리 파티에 그런 요소가 있나?
아주 한순간, 혹시 과거의 기억이 솔로몬에게 남아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다.
이번 회차는 여러모로 이전과는 다르니까.
그러나 곧바로 고개를 젓는다. 그것만큼은 미궁이 시도하지 않을 방식이다.
회차의 분리는 엄격하다.
몇몇 깊은 인연들은 다시 만날 때마다 씁쓸해지곤 한다.
다 알고 있더라도 마음이란 게 어디 자유자재로 되던 것이던가.
지금은 그저 나를 알지 못하고 인간이란 것에 흥미를 느껴 선공하지 않는 보스일 뿐이다.
무의미하게 과거를 곱씹는 대신 그곳에서 현재를 찾아낸다.
결론적으로 일단 이대로 공략을 지속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 섰다.
싸워 이기기 위해 간을 보는 것도 아닐 테고, 정말로 뭐하나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는 것이겠지.
거기까지 도달하자 솔로몬의 호기심에 대해 떠오른다.
흠, 혹시 우리 파티가 너무 수월하게 전진하니까 그에 흥미를 보이나?
확실히 이렇게 어둠의 원소가 짙게 고인 곳에서 멀쩡할 수 있는 파티는 드물다.
누군가는 사고를 치기 마련이다.
생각해 보면 솔로몬도 유배자 출신이다.
이런 환경의 어려움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아닌가? 너무 오래되어서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공략은 순조로웠다.
로스엘은 트라우마가 많을 것 같은 삶을 살아왔으나 하니엘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있다.
솔로몬은 로스엘에게 주목했다.
낯익은 얼굴이다.
유배자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한 기천사였다.
단순 NPC도 아니고 몬스터 출신의 기천사.
그럼에도 왕국에서 제가 유배자라도 된 것마냥 저러고 지낸다.
거기에 휘두르고 있는 힘의 일부가 어딘가 낯익었다.
기계신의 권능.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바깥의 향기다.
세피로트의 천사?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온 작품이 생각난다.
그가 혼자 했던 것은 아니다.
무수한 마법사들이 그 일에 달라붙어 무언가 이루고자 했다.
결말을 지은 것이 그일 뿐.
그래도 흥미로운 일이다.
저 천사가 세피로트에 앉았다?
솔로몬 역시 로스엘에게 도움받은 적은 있다. 도우미를 자처하며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던 이상한 녀석으로 유명했기도 하지만 그 영향력만은 진짜였지.
하지만 많이 고장 났군.
로스엘이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아왔는가. 살아온 세월로만 따지자면 고위 천사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타당하군.
그러나 버티지 못한다. 세피로트에서 보낸 세월은 로스엘의 노후화를 더 가속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 파티는 충분히 특이했다. 너무 능숙하지 않은가.
도우미 로스엘의 힘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의 무덤을 파헤쳐 헤집어놓을 만한 능력이 있다.
이런 수준의 유배자 파티는 그가 과거 몸담은 곳에도 없었다.
뛰어난 이가 있다면 부족한 이도 있다.
뛰어난 이만 모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파티는 그래 보였다.
얼마나 잘 헤쳐나갈지 더 보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저들이 그가 만든 무기가 있는 곳까지 당도했을 때 솔로몬은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다.
손짓 한 번에 제 마음대로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던 무기가 힘을 잃고 쓰러진다.
어떤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태의 해골 마법사가 불현듯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빠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공격하지 마.”
블랑쉐가 깜짝 놀란 제니를 진정시켰다.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은 둘 뿐이었다.
아서와 에길은 공격 동작에서 즉시 무기를 거둔다.
희우는 타이밍을 놓쳤다. 버프 몇 가지가 발동하여 검극에 맴돈다.
[판단이 훌륭하군. 너희들은 나를 이기지 못한다.]
실제로는 어떨까?
희우는 승산을 점쳐보려고 했다.
하지만 곧 위대함의 편린 못지않은 오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강대한 마력은 느껴진다.
아니, 사실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 감지할 수 없는 오한과도 같은 기척만이 사방에 맴돈다.
미아를 비롯해 정말로 강력한 마법사들은 몸에 막대한 마력을 축적하고 있다.
그것은 방사능과 같은 형태로 드러난다. 은은하면서도 섬뜩한 체렌코프광.
그러나 눈앞의 해골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모자란 것이 아니다.
과하다.
너무 과해서 오히려 어떤 힘조차 감지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느껴지는 것은 그저 본능 혹은 직감이 경고하는 위기일 뿐.
아마 지금 그녀가 저 해골을 후려치려고 시도한다면 곧바로 [위대함의 편린]이라는 메시지와 보스 명칭이 등장하겠지.
같은 데미 리치겠지만 샤크마는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못할 것이다.
표기 레벨 차이만 해도 10배는 나겠지.
[인간은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군.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모두 스러졌지.]
오빠에게 관심을 보인다.
인간.
인간에 묘하게 집착하는 리치라는 점은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빠가 속삭였다.
“권능 켜.”
곧바로 납득할 수 있는 문제였다.
보스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가브리엘 때는 충분히 각오가 된 상태에서 제법 철저한 준비 끝에 이루어진 것에 가깝다.
그때도 패턴이 어그러지기 시작한 후부터는 시간의 천사로서의 권능을 켜두고 있었다. 약간의 소모로 들어두는 보험 같은 것이다.
지금이 아낄 타이밍은 아닐 것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솔로몬의 무덤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위협들은 이 던전의 난이도를 담당하지 않는다.
이 던전의 난이도는 오롯하게 보스인 솔로몬 개인에게 몰려있다.
[내 무덤에는 무슨 일로 왔지? 나헤마가 보내더냐.]
곧바로 곤란한 질문부터 하네.
오빠가 태연하게 대답한다.
“그의 의뢰는 아니지만 그 언질은 받았죠. 당신이 살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이 무덤의 주인이겠죠. 솔로몬.”
[대충 알 것은 다 알고 왔군.]
그 후로도 대화는 자연스럽다. 오빠는 이런 경우를 대체로 스스로 해결해낸다. 갑자기 권능을 작동시키라는 이유를 모를 정도로 순조로워 보인다.
솔로몬은 이미 많은 호감을 지닌 상태로 등장했음이 분명하다.
희우는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느꼈다. 아군이 되어주거나, 필요한대로 이용당해 주진 않더라도 여기서 보스전이 시작되지만 않으면 승리다.
그리고 대화하던 와중에 갑자기 솔로몬이 말했다.
아무런 전조조차 없이 뜬금없는 말이었다.
[전부 거짓이로이군. 유배자여. 이 메인 던전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
오빠가 검을 뽑았다.
파티원들도 그것을 신호로 태세를 갖춘다.
희우도 긴장을 끌어올렸다.
[크크크. 너무 잘 알아. 지나치게 많이 아는군. 유배자여. 나를 몇 번째 보는 것이지?]
“싸우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안 됩니까?”
[나에게 많이 죽어본 것 같은 발언이로군.]
“이 던전에서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습니까.”
[아는 게 너무 많군. 붙잡아서 분석해 봐야겠다.]
오빠가 곧바로 말했다.
“솔로몬은 여기 입장할 때부터 알고 있었어. 돌아간다면 2번째 통로에 입장하는 순간이야. 나에게 전달해.”
말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무미건조하고 고저 없는 음성이었다.
희우는 입맛을 다셨다.
[위대함의 편린]
[마술사왕 솔로몬]
공간이 일그러지며 비틀렸다.
세상이 잠깐 잿빛으로 물들고 넓디 넓은 공간의 마법사가 큭큭대며 웃고 있었다.
데미 리치의 해골에 살이 차오른다. 생전과도 다름 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한눈에도 괴팍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사방에 날리는 봉두난발은 관리에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수염은 기르려고 기른 것이 아니라 불편할 때만 대충 잘라낸 것처럼 괴상하게 뻗어 있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에 희우는 데미 리치라는 언데드의 특성을 떠올렸다.
반 리치.
그럼 언데드가 아닌 나머지 절반이 무엇인가.
그것은 신이다.
미궁의 모든 마법사들이 갈구하는 것.
미궁의 근원, 마법의 진리에 도달하자고 하는 것.
따라서 데미 리치가 극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반신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신좌의 신이 아니다.
고위존재.
그리고 완전히 언데드의 모습을 지우고 인간과도 같은 모습을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데미 리치라고 할 수 있는가?
메시지가 알려주고 있다.
[위대함의 편린]
저것은 신이 된 리치다.
그리고 이번 전투는 철저한 준비 끝에 승리를 목표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저 괴물.
희우는 여러 불길함을 안고서 몸을 날렸다.
“다음 전투는 한 대 맞아도 살 수 있을 겁니다.”
“믿을 수 없군.”
“노히트 아니어도 되는 거예요?”
파티원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다.
희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그 모습을 슬쩍 보았다.
희우가 말했다.
“오빠, 전멸했어요.”
“이런 젠장. 시간신의 권능으로 돌아온 거야?”
“네.”
“페이즈 어디까지 봤어?”
“마지막 페이즈요.”
다른 파티원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집중된다.
제니가 입을 반쯤 벌린다.
“어, 우리 첫 전멸이죠?”
“솔로몬이 그렇게 강한가?”
“전문 마법사가 없는 게 컸던 모양이군.”
오빠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여기서 이따위로 이걸 소모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솔로몬과 어떤 대화를 했는지 빨리 말해봐.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겠군.”
“어? 전투 브리핑 안 들어도 되나요?”
“안 싸우는 게 최선이야. 3페이즈까진 갔어도 승산은 없었지?”
희우는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활 스택 이미 많이 날아간 후였어요.”
시간이 되돌려졌기에 상황을 전혀 모르는 다른 파티원들이 의아해한다.
“대체 어떤 존재기에……?”
“네?! 제 부활 스택은 3개인데.”
희우는 입맛을 다셨다.
“제니는 2페이즈에서 죽었어요.”
“히익.”
“나는? 나는?!”
로스엘이 신기해하며 묻는다.
“세피로트를 만든 마법사라 그런지 로스엘의 연결을 끊어버리던데요.”
“앗아아. 그럼 난 약해…….”
사실 사상자가 나온 시점에서 이미 되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솔로몬은 심지어 중간에 시간의 신의 권능이 개입할 것이란 사실도 깨달았다.
마지막에 미쳐 웃으며 말했으니.
[다시 덤벼라. 천사여. 신앙은 얼마나 남았지?]
희우는 찬찬히, 있었던 대화를 최대한 그대로 알려주기 시작했다.
솔로몬이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적으로 돌변했는지까지 말이다.
“난 미친놈이 싫어. 예측을 할 수 없거든. 차라리 제자였던 연으로 빌붙는 게 좋겠군.”
“오빠도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어요. 이번 솔로몬은 그쪽을 신경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다고.”
시시각각 정신 상태가 변한다는 모양이다. 수만 년쯤 홀로 이런 연구만 진행하다 보면 같은 인물이어도 항상 다른 상태일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오빠의 말에 따르면 원래부터 제멋대로인 기분파라는 모양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오빠가 결론을 내렸다.
“좋아, 상황은 알겠어. 다시 진행하자. 이번엔 솔로몬을 적으로 돌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신앙은 얼마나 남았어?”
희우는 곧바로 대답했다.
“같은 시간이라면 한 번은 더 돌릴 수 있어요.”
통로 공략에 시간이 많이 들지 않은 탓이다.
그렇기에 가진 신앙 수치의 절반이 조금 안 되는 선에서 억제할 수 있었다.
시간의 신의 신앙은 오로지 시간으로만 차오른다.
달리 보충할 방도는 없다.
가장 소중한 자원이자 희우가 가진 최강의 카드다.
만약 희우가 이걸 모두 소모한다면 똑같이 신앙을 아끼고 또 아껴둔 레미가 파티에 합류하게 된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했던 그대로 다시 진행할게요.”
다시 반복하려면 시간도 그대로 맞춰야 한다.
제니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리를 잡았다.
다른 파티원들은 일어날 것이 일어났다는 정도의 태연함이다.
그렇게 파티원들은 두 번째로 두 번째 통로에 들어섰다.
희우도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섰다.
이제는 희우만이 기억하고 있지만, 일단은 파티 오르골의 첫 패배였다.
“미아만 있었어도…….”
꽤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오빠가 머리에 손을 턱 하고 올린다.
“내가 왜 보험을 항상 몇 중으로 들어두는지 알겠지? 파티가 완전하지 않았다는 건 결국 변명이야.”
“X같은 게임이네요.”
“이건 게임 아니고 현실이라도 똑같아.”
기분이 엄청나게 우중충했다.
“이렇게 끔찍한 기분일 줄 몰랐어요. 제가 더 잘해야겠어요.”
“너무 마음 쓰지 마.”
“네…….”
희우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몇 번이고 솔로몬과의 보스전을 복기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태어나서 처음 겪는 패배다.
오빠와 블랑쉐에게 졌을 때는 조금 다른 마음이었으니까.
새삼스레 무게감이 느껴진다.
아직 메인 던전이 셋이나 더 남았다.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