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464화 (43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64화

메인 던전 - Lv.5912 라파엘(1)

미아는 당연하게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고위 천사가 뒤집어 쓴 세피로트의 매커니즘에 대해서 말이다.

기계신이라는 미궁의 시스템에 근원을 둔 파워 소스가 이미 존재한다.

그 힘은 신좌라는 형태로 발현되고 있었으며 그 집합으로서 일종의 병렬 신좌인 것이 기계신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계장치의 신은 아마 1+1이 2가 아니라 3이나 4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터.

기존의 신좌와 비교하면 일반 컴퓨터와 양자컴퓨터만큼의 성능 차이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번성했고 몰락했다.

전일근무 가능 만능 무보수 하인은 세상을 병들게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질 테니까.

유배자라는 수혈을 막고, 변화와 독립 거기에 불멸을 위해 바벨의 자식들을 불러들였다.

몰랐던 점은 미궁의 시스템이 이 세계를 벌릴 것이라는 점.

유배자가 없으니 누구도 미궁의 시스템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던 탓이다.

살아남은 소수의 유배자들이 말하는 의견이 먹혔을 리는 없고.

그런 와중에 여러 가지 이해관계 끝에 만들어진 것이 세피로트.

이미 그 안으로 들어가서 분석도 해보았다.

그때의 가상공간은 오래 방치되어 만들어진 부산물에 불과하다.

원래 의도는 온전히 그 강력한 미궁의 시스템이 가진 힘을 뽑아오기만 하는 것이었겠지.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런 창조에 가까운 일이 자연스레 누수 되는 힘만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라는 뜻이다.

마법이 먼저인가 미궁이 먼저인가. 모든 마법사들의 화두일만도 했다.

그 구조를 완전히 파악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걸 만들었다는 마술사왕의 생각만큼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가브리엘이나 라파엘이 쓰러진 후에 그 껍데기가 남는지도 말이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라파엘이 황망하게 말한다.

전투를 각오조차 하고 있지 않았던 전 고위의 존재는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고위 천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듯 하다.

“사람이 개미가 되면 이전의 자신과의 연속성을 부정하게 되려나요.”

“모르겠는데.”

리온과 라리사의 대화를 들으며 미아는 속으로만 부정했다.

인간과 비교하면 짚신벌레 정도 아닐까? 개미는 제법 고등한 생물이다.

지닌 힘과 존재의 메커니즘만 따지자면 실제로 그런 차이가 있으리라.

미아가 사랑하는 파티원들은 그런 의미에서는 강력한 질병이 된 바이러스 같은 존재다.

가브리엘도 라파엘도 연속성을 부정하려고들만 하지.

전생했더니 바이러스? 쉽지 않다.

미아는 끈기를 가지고 설명했다.

좌절한 천사는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죽이려고 드는 원수였으나 한순간에 입장이 극적으로 뒤바뀐다.

라파엘에게 이제 복수심은 없다. 그는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있으니까.

“껍데기라고는 해도 어차피 이게 당신들의 삶 대부분이지 않았나요?”

“바벨의 주변에서 떠돈 시간이 얼마나 긴지를 모르는군.”

“그 시간에 가치는 있었나요? 지금의 가치관으로 생각해보시죠.”

생글생글 웃으며 단 한 마디도지지 않는다.

라파엘은 그런 은발의 악마를 보며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가면 휘말리는데. 어디선가 겪어본…….

“그거 아세요? 가브리엘은 살아있어요.”

“그건 의외군. 하지만 그건 가브리엘이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 이후에 이어진 말은 어딘가 인식의 괴리만이 가득한 대화다.

그럼에도 미아는 능숙하게 그 대화를 이끌고 간다.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깨닫게만 하면 될 뿐이다.

라파엘은 계속 시큰둥했지만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이미 그에게는 목표도 의지도 없다.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리온과 라리사가 지쳐서 조금 잠들었다가 깨어나곤 했다. 그래도 미아와 라파엘은 꾸준히 서로를 상대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알면서도 어느 순간 넘어가고 있는 자신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언제 또 일어났는지도 알았다.

“미카엘!”

“네?”

“미카엘이군. 메타트론을 공격할 때 꼭 그렇게 날 구슬렸어…….”

“그런 사람같아 보이긴 했어요.”

“사람? 미카엘은 바벨의 자식이야. 사람이라고 불러도 될 존재가 아니지. 감히 네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자다.”

“뭐, 그건 넘어가고요. 어때요? 가브리엘을 한번쯤은 만나볼 필요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라파엘은 한숨을 내쉬며 그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동료로 여겼던 건 그런 게 아냐. 그쪽 역시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너는 포기를 하지 않을 것 같군. 미카엘도 그랬지.”

“좋아요. 그럼 여기서 나가야겠군요.”

“어떻게? 그건 불가능해. 필멸자들아.”

“이젠 당신도 필멸자니까 조금 다른 말을 쓰는 게 어떨까요?”

“그도 그렇군.”

미아는 대화를 통해 확신했다.

세피로트가 남기는 고위 존재의 찌꺼기는 미궁의 시스템에 기반 한 창조적 힘이 발현된 결과다.

이것은 라파엘 그 자체다.

그것이 본디 지녔던 힘은 딱히 기계신과 연관된 무언가가 부여한 힘이 아니다.

그래서 사라졌을 뿐.

지금 사라진 것은 단지 고위 존재로서 자연발생한 라파엘이다.

그 힘만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그대로.

그러나 힘이 곧 존재였던 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울 수 있는 것이다.

꼭 거기에서 미아는 고찰을 멈추었다.

필요에 따라 연구하는 것이다. 여긴 미아의 연구실이 아니다. 더 이상은 하지 않아도 좋다.

“그렇다면 좀 도와주시겠어요?”

라파엘은 반쯤 포기한 상태로 대꾸했다.

“그러던가.”

“좋아요.”

미아는 활짝 웃었다.

“당신의 몸을 좀 쓸게요.”

“뭐?”

“예?”

“네?”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세피로트가 남긴 껍데기만큼 훌륭한 단말기가 또 어디 있다고.”

라파엘이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바로 포기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그 이후의 작업을 라리사는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리온 역시 그랬다. 미아가 행사하는 마법 술식은 일부를 이해하는 것만에도 많은 고민을 요했다.

충분한 시간을 들인다면 이 예비 신혼부부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눈 앞의 작은 마법사는 그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손짓하는 것마냥 아무렇게나 그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리온은 이미 그것에 관심을 보여버렸다.

미아는 남에게 마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이게 반드시 될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로스엘의 경우가 있잖아. 로스엘은 미궁의 시스템에서 유래된 존재지.”

선주문명과 미궁의 시스템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아니 사실 시스템 역시 그들이 만들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같은 것에서 유래한 로스엘과 세피로트는 모두의 상상을 초월한 출력을 보여주었다.

미궁의 시스템이란 근본을 굉장히 따지는 모양이다. 어떤 것이 어디서 유래했는가.

마법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지만 일어난 현상들로 증명되어있다.

그리고 지금의 라파엘은 순수하게 기계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천사다.

“그러니까 다시 세피로트로 접속할 수 있을지도 몰라.”

“확실한 것은 아니군요.”

“반반 정도 아닐까 생각하는데.”

리온은 공손하게 한때 자신을 흡혈귀로 만들었던 악마를 대한다. 선생님의 딸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미아가 그의 마법 스승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월등하게 그보다 뛰어났던 이 작은 마법사는 이제 어디까지 가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있다.

괜히 말을 붙였다가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는 이론 강의를 잔뜩 들을 정도로 말이다.

교수님 진도가 범위를 아득히 벗어났습니다.

어쨌든 미아는 이 행위 자체가 몹시 신나는 모양이었다.

술식에 열중하던 미아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리온과 라리사를 본다.

“좋다.”

“네?”

“이렇게 셋이 있는 거 엄청 오래간만 아니야? 히히.”

리온과 라리사에게는 특히나 더 그렇겠지만 생각해보면 미아에게도 그럴 것이다.

각자 각자의 일로 너무 바빴다. 은퇴하고 결혼식을 할 생각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가.

라리사는 표정이 살짝 변했다.

타고난 고양이 상에 의해 조금 올라가있는 눈꼬리가 내려간다.

“되었다. 이제 조금 시간을 두고 봐야할 것 같은데. 저쪽에서 응답해서 연결을 해줄지를 봐야해. 그래서 반드시 된다고 못한 거야.”

일종의 블루투스 같은 것이다. 본체는 세피로트고, 그곳에서 라파엘을 매개로 보내는 신호를 받느냐였다.

미카엘은 그들을 여기에 가두면서 대부분의 수작은 차단했으나 마력이 아닌 것을 차단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신성이 남아있군…….”

“천사니까요.”

“그래. 이것도 천사지. 하잘 것 없는 먼지같은 천사일지언정.”

제 몸을 내려다보며 라파엘이 중얼거린다.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어차피 힘들지도 않잖아요.”

“뭔가 수치스럽군.”

브릿지 자세가 된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다. 다양하게 실험한 결과 가장 발신율이 좋았다.

덤으로 의복이 없는 편도 더 좋았다. 라파엘은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수치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이젠 그렇게 살아가야하니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라파엘은 그리고 입을 열지 않았다. 치천사의 강인한 근력은 브릿지 자세로 몇 시간이고 있을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럼 이제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거군요.”

“맞아. 한가해졌네.”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감돈다.

임시로 선생님을 따라 게스트 파티원이 된 후로도 리온과 라리사는 약간 겉돌고 있었다.

그야 중요한 일은 맡겨지지 않았으며 대단한 교류가 없었다보니 딱히 할 말도 없었던 탓이다.

선생님을 빼고도 인연이 있었다고 하려면 미아나 희우인데 그것도 참 애매한 관계였다.

특히 라리사에게 그랬다.

선생님 파티의 서브 리더는…….

예쁘지. 거기에 리온이 어릴 때부터 데리고 다녔던 연상의 소꿉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라리사에게는 강력한 경쟁 상대였다.

미아 역시 그렇다. 리온이 미아에게 관심이 있었냐고 한다면 확실하지는 않다. 그래도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게 분명하다.

눈을 돌린다.

이쪽도 쓸데없이 예쁘다. 외모가 어릴 뿐이지 보지 않아도 미래가 보인다.

리온과 라리사의 삶은 대체로 그들 둘 뿐인 것이었다.

간혹 왕국이라는 외부에서 찾아오는 선생님과 그 동료들이 있었을 뿐.

그렇게 좁은 세계에서 라리사는 제법, 불편함을 느꼈다.

못난 여자가 하나도 없다. 자신이 제일 못난 것 같다.

지금은 자신이 객관적으로도 상당한 미인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경쟁자들이 너무 강했던 탓이다.

긴 시간이 아니었다면 리온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야 어땠건, 라리사는 평생 그런 불안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서브 리더가 나타날 때마다 도끼눈이 되고, 미아가 나타날 때마다 꺼려했던 이유다.

“옛날이야기나 해볼까?”

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리온 처음 만났을 때는 좀 더 작았는데.”

“그때도 제가 훨씬 컸습니다.”

“라리사는 확실히 나보다 작았어. 그렇지?”

“그것도 착각인 것 같은데요.”

미아는 열 살인 채로 그대로다. 리온과 라리사는 십대 중반은 되었을 때 서로를 처음 만났다.

“씨. 그냥 그렇다고 해줘.”

“말은 바로 해야죠.”

미아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리온이 곤란한 듯 웃었다.

그래도 분위기가 자연스러워진다. 알몸의 천사가 브릿지 자세를 하고 있는 방에서 그간 없었던 교류가 이루어졌다.

잡담의 가운데에서 미아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 리온을 좋아했을지도 몰라.”

“음.”

“사실 잘 모르겠어. 남동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음.”

망상이라고 해야 할까. 엄마 아빠를 보면 그런 것을 따라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이의 마음이다.

지금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만 그때의 미아는 더 어렸고, 또래의 남자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미아는 상상력이 꽤 풍부한 편이었다.

거기까지 떠올리고 미아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른다.

침묵의 가운데 이상한 분위기가 나오자 라리사가 얼른 자리를 바꾼다.

“제 제거거든요.”

“후후. 엄마처럼 말하네.”

“윽.”

“그래도 지나간 일이야. 리온도 그렇지?”

“예?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럼 그런 걸로 해두자.”

라리사가 리온을 괜히 쥐어박은 후에 셋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언젠가 그럴 날이 올까?”

“결혼이요?”

“응.”

“선생님이 원하는 모든 일이 끝나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며 리온은 남몰래 생각한다.

다들 많이 변하고 있다.

그도 미아도 라리사도.

그리고 선생님도.

세월이 흐르고 있다.

바르바로이는 잘 지낼까?

라리사가 미아를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뱀파이어 아니죠? 좀 수척해진 것 같은데.”

“살이 빠진다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된 기분이야. 난 너무 오랫동안 언데드였어.”

“키 좀 크지 않았어요? 그 옷도 좀 작아진 것 같은데.”

“그건 기분 탓이 아닐까.”

“볼 만져봐도 되요?”

“……안 대우으이아.”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빠르다. 그러니 마법사보다는 성기사를 시켰지.

미아의 볼을 주물럭거리면서 라리사가 행복해한다.

“딸을 낳으면 이랬으면 좋겠다.”

그 발언에 미아가 몹시 분노했다.

“내그 연상이그든!”

아니지 않나?

시간이 하도 뒤틀린 미궁에서 그런 게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유교 탈레반 국가에서 온 부모를 둔 미아는 자주 그걸 신경 쓰곤 한다.

리온도 사실, 선생님이 아버지나 다름없었기에 비슷하다.

온통 엉망으로 꼬여있다.

미궁은 그런 곳이다.

그리고 그런 대화가 오가는 곳에서 홀로 브릿지를 하고 있는 천사는 조용히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흠……. 짚신벌레들은 저렇게 살아가는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 모습이 떠오른다.

‘가브리엘…….’

바벨의 자식이던 시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의 모습은 그래서 오히려 흐릿하다.

세피로트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던 은발의 소녀.

그 모습만이 떠오른다.

‘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