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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65화 (43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65화

메인 던전 - Lv.5912 라파엘(2)

“스승님. 좀 쉬어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지 않겠다.]

“제기랄, 좀 쉽시다. 정신적으로 아주 수치스럽다고요.”

[수치스러운 건 분위기를 그렇게 잘 잡아놓고 상대 반응이 미묘했던 게 아니라?]

“좀 닥쳐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리벤지해서 성공했으니까요.”

솔로몬은 이빨을 엄청나게 딱딱거리면 웃더니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말지어다. 제자여. 그건 네 탓이 아니라 상대도 처음이라 그랬을 것이니.]

“어쨌든 너무 수치스러우니 좀 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야기를 해보아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냉정하게 현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주 부끄러운 이야기를 한 끝에 솔로몬의 환심을 사는데는 성공한 것 같다.

차마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지금 사라진 이전 시간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으니까.

이 양반은 거짓부렁에 민감한 부분이 있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까버리면 그렇게 여길 수는 없겠지.

솔로몬 역시 마음을 연 것 같은 척하면서 은근슬쩍 나를 떠보고 있다.

* * *

서로가 어느 정도는 가식인 것을 안다.

다만, 나는 제법 필사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중이고 솔로몬은 그냥 재밌어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지? 세피로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로스엘 알아보셨지 않습니까.”

[그 천사가 아직 살아있을 줄은 몰랐지. 어디 바깥 이야기를 해보겠느냐.]

입질이 왔다.

이 은거자 바깥을 궁금해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랬다면 여기 처박히지도 않았겠지. 미카엘이건 바알이건 하다못해 메타트론이 그를 중용했으리라.

또는 독자적 세력을 구축할 수도 있었겠지.

그딴게 다 상관 없는 광인임에도 흥미를 보였다.

“로스엘이 세피로트와 어떤 상호작용을 겪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시면 즐거우시겠습니까.”

[말해 보아라.]

세피로트와 클리포트는 솔로몬의 무수한 업적들 중에서도 유달리 빛나는 것이었다.

이미 사라진 과거의 유산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을 보여주었으니까.

솔로몬이 죽어 이미 존재하지 않는 케이스는, 그래서 ‘제거’ 당했기 때문이다.

이번의 솔로몬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제 이름을 걸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고위 마법사들의 집단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그 끝을 매듭지은 것은 이 마법사다.

마술사왕이라는 호칭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경우일 것이다.

목을 가다듬고 바깥의 상황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메타트론의 실각에서는 늘 그렇듯이 낄낄대며 즐거워했다.

[그 늙은이는 유배자를 무슨 땔감처럼 생각하곤 했지. 본인은 드러나지 않았을거라고 여겼겠지만 곁에 있어보면 누가 모르겠나?]

“지금은 세상 친절합니다만, 속은 똑같겠죠.”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그래 어디. 나를 만나는 것은 몇 번째냐?]

이것까지 솔직하게 말해야하나?

아주 짧은 고민 끝에 있는 그대로 고했다.

“열하고 다섯 번째입니다.”

솔로몬은 이번엔 웃지 않았다. 이를 딱딱거리는 대신 살짝 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데미 리치의 텅 빈 눈구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조금 더 강해진다.

살아있는 때였다면 이채를 발했다 따위로 묘사할 수 있는 눈이다.

[보통 유배자가 아니로군.]

“보통이면 당신이 제자로 삼았겠습니까.”

[바른대로 고해라. 몇 번 제자가 된 거지?]

“세 번이군요.”

[날 보스로서 대한 적은 몇 번이지?]

“다섯 번이군요.”

[몇 번 이겼느냐?]

“두 번 이겼습니다.”

이번에는 이를 딱딱거렸다. 소리가 크고 강했다. 생전이라면 엄청나게 호탕하게 웃는 것이겠지.

나는 조금 긴장했다.

이래놓고 갑작스럽게 건방지다며 보스전이 시작될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해 도망쳐야한다. 내 목숨은 나만의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기우였다.

[정신 나간 놈이로군. 그래놓고 다시 여길 기어 들어와서 나를 이렇게 독대해?]

이번엔 마음에 들어버린 모양이다.

[좋다. 좋아. 아주 재밌군. 네놈의 정신상태가 상당히 많이 궁금해졌다.]

“통 속의 뇌는 좀 사양하고 싶은데 어찌 안 되겠습니까?”

[널 통 속에 집어넣는 건 귀중한 자료를 훼손하는 짓 같구나. 그래 어디 바깥 이야기를 좀 더 해보 거라.]

대화는 이어진다. 가슴을 쓸어내릴 것 같은 상황은 많았으나 세피로트와 클리포트의 현재 상태에 대해 모두 털어놓을 수 있었다.

특히 로스엘이 하니엘로서 아주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을 신기해했다.

[그게 그런 식으로 작동했군.]

“만들어두고 결과도 안 보셨습니까?”

[내가 거기 남았다면 메타트론이 보내줬을 거라 생각하느냐.]

“절대 아니겠군요. 하다못해 미카엘이 당신을 붙잡았겠지.”

[내가 남의 뇌를 통 속에 집어넣는 것은 좋다만, 당하고 싶지는 않군.]

말하는 게 아주 그냥 내로남불의 화신이시다.

솔로몬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세피로트라. 흠. 난 아직 여기서 그것은 컨트롤 할 수 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소유자는 당신으로 인식되고 있겠죠.”

지금도 세피로트와 클리포트라는 인공 신좌에 앉아있는 것은 사실 솔로몬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보면 그 권능을 나눠받는 솔로몬의 신도인 셈이다.

형식이 그렇다는 것이지 강제력은 없는 허울뿐인 것이지만.

[좋아. 자리가 텅텅 비었군.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좀 볼까.]

솔로몬이 눈을 감았다. 리치의 눈구멍의 불길이 형태가 변하기에 그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맹랑한 녀석이 하나 있군. 외부 연결을 통한 세피로트의 조작?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이건 혹시 네놈의 동료냐.]

그 말을 드는 순간 미아가 떠올랐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갇혀있는데 그게 된다고?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럴 능력이 있는 것은 미아 뿐이다.

“위치가 가깝습니까?”

[가깝지 않다면 이걸 시도할 수도 없겠지.]

악마들이 미카엘을 물리치고 천상의 도시를 점령했다면 세피로트부터 박살냈겠지.

그것은 확실히 아니다.

그럼 미아밖에 없군.

“제 동료가 맞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이 마력의 울림으로 클클대며 웃었다. 그와 동시에 두개골을 360도 회전한다.

언제 봐도 변태 같은 동작이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나름대로 기분이 좋을 때만 저렇게 웃는단 것이다.

[좋다. 내가 어찌 해주길 바라지?]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신 이 마법사를 내게 데려와라.]

역시 그렇게 되나.

하지만 미아가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면 뭔가 활로가 있다는 뜻이다.

할 수 있게 해주자.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미아는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라리사의 볼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기 시작한다.

“아흐, 저는 이제 별로…….”

실제로 액면가는 이제 라리사가 가장 높아 보인다. 리온은 나이를 먹지 않는 뱀파이어기에 지금도 그리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으음! 충분히 훌륭해. 제니보다 나아.”

“제니님한테 그런 짓을 하세요?”

“제니도 좋아하는걸.”

그게 정말일까 리온은 의심했다. 라리사는 부끄러워하며 리온의 옆에 숨었다.

“우으, 누워있을래.”

미아가 지친 듯이 몸을 늘어뜨렸다.

리온은 이 작은 마법사가 체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데드를 그만두고 심각한 저질체력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라리사도 마찬가지로 떠올린 듯 하다.

“여기 누워서 쉬세요.”

“응.”

라리사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미아는 곧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좀 수척해진 것 같지?”

“뺨을 만지는데 그. 음. 좋긴 한데 약간은 탄력이 부족하달까.”

뒤에서 지켜만 보는 것 같은 입장이지만 누가봐도 그렇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쥐새끼가 거들었다.

[확실히 처음 뵈었을 때보다 여러모로 지쳐 보이긴 합니다요.]

“이리 와서 따뜻하게 해줄래?”

[기꺼이 그럽죠.]

어쨌든 쥐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쥐새끼는 따끈따끈하다. 천상의 도시는 몰락해가는 곳인만큼 따스함과는 거리가 멀다.

겨울도 아닌데 차가운 냉기가 방에 감돌고 있는 참이다.

쥐새끼가 미아의 옆에 달라붙어서 몸을 웅크린다.

“저쪽은 무슨 일도 없는 건가.”

리온이 여전히 팔짱낀 브릿지 자세를 하고 있는 라파엘을 보며 말했다.

라파엘이 대답했다.

“아무런 느낌도 없군.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렇게 대답하는 라파엘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가브리엘의 어디가 좋았던 거지?

동료로서?

흠. 확실히 동료로서 믿음직하긴 하지.

서로의 힘이 어느 정도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처음 친해진 계기도 그것이다.

별 생각 없던 가브리엘이 미카엘에 동조했던 것도 라파엘이 먼저 넘어가서였다.

라파엘이 하니까 나도 한다. 겨우 그 정도의 이유.

기특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그렇다. 미카엘이 귀찮게 굴면 서로에게 투덜거리며 지내왔다.

그 시기의 모습 대부분은…….

지금의 그처럼 껍데기의 모습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감정이 원래 내게 있는 것이던가?

불현 듯 낯설어진다.

과거의 자신과 달라졌음을, 위대하고 위대한 רפאל이 아닌 한낱 치천사임을 새삼스럽게 되새긴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그는 껍데기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잔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은 가브리엘도 그렇지 않은가?

이들의 말에 따르면 살아있다.

만나고 싶다.

그러고 싶다.

위대한 자신과의 연속성은 사라졌고 이제 서로는 동등하다.

다시 만난다면 오히려 미카엘이나 다른 무엇과도 다르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라파엘이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모두가 놀랐다.

라파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사랑인가!”

라리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미쳤나봐요.”

“음, 박테리아가 되면 미칠 수도 있겠지.”

라파엘이 발끈했다.

“그게 아니다. 필멸자들이여. 나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뭔데요?”

“사랑이다!”

“어…….”

“당장 가브리엘을 만나고 싶군.”

아까까지는 껍데기에 불과해서 의미 없다면서?

“내 치하하지. 필멸자들이여. 너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을 수 있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던가. 그런 말을 하는 필멸자가 있었지.”

“어, 네.”

로마가 뭐지?

리온도 라리사도 모른다.

“그런 것이었다. 나는 이제 필멸자! 그러니 필멸자답게 지내면 되는 것이다. רפאל은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존재가 아닌가!”

“지금까지 말한대로라면 그러시죠.”

“그래. 나는 그럼 가브리엘에게 고……. 고…….”

라파엘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심각해졌다.

“필멸자들이여. 너희는 이미 성혼했다고 들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예정이죠.”

“거절 당할까 두려웠던 적은 없는가?”

리온은 조금 아연해졌으나 동시에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기에 첫사랑을 보내주었다.

뭐 지금 생각하면 씨알도 안 먹히긴 했겠지. 정말 훌륭한 판단이었다.

라리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라파엘에게 격하게 공감했다.

“맞죠! 그거 너무 두려워요!”

“어떻게 이 두려움을 이겨냈지?”

“음, 거기에 방법이 있을까요? 도전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도전…….”

라리사가 날카롭게 찔렀다.

“애초에 지금까지 같이 지내면서는 뭘 할거에요!”

“흠, 그건 그저 동료로서. 그리고 우리 바벨의 자식들에게는 생식같은 것은 의미가 없는지라.”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생태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라리사는 대신 라파엘에게 다가가서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할 수 있어요!”

“그런가.”

“가브리엘은 아마 멍한 얼굴로 고개 끄덕일걸요.”

“항상 표정이 맹하긴 하지.”

라파엘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리온은 슬슬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대체 무엇인가 아연하기 시작했다.

라파엘이 무언가 결심을 하려는 무렵 갑자기 어떤 일이 일어났다.

“흐어어어억!”

“왜 그래요?”

“마법사를 깨워라. 무언가 왔드허어어어업!”

리온이 서둘러 미아를 흔들어 깨웠다. 연결인지 뭔지가 받아진 모양이었다.

미아는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났고 라파엘을 보았다.

선생님의 가르침이었지. 기상은 언제나 저렇게 하는 거라고…….

“이어졌다!”

미아가 만세하며 제자리에서 팔짝 뛰었다가 쥐새끼를 밟고 미끄러졌다.

머리를 박아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서둘러 경련하는 라파엘에게 다가갔다.

“이제 우리가 세피로트에 앉을 수 있을 거야.”

중간부터 이론 설명을 듣지 않고 있었던 리온은 그 말에 입을 벌렸다.

잘못 들었나?

“라파엘이 아니라요?”

“천사와 악마를 위해 만들어진 자리잖아.”

“여기 천사는 라파엘 뿐인데요?”

“라파엘을 더미로 써서 힘만 내가 행사할거야!”

미아의 눈 불이 켜졌다.

마법에 대한 학구열. 리온은 그것을 그렇게 해석하곤 한다.

플래시라도 뿜는 듯 번쩍번쩍 빛나는 모습을 보고 불안해졌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여기서 가장 천사에 가까운 성기사가 할 수 있겠지!”

쥐새끼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저는 뭔가 도울 수 없나요!]

“거기서 했던 걸 또 할 거니까 꼭 필요해!”

그걸 또 하라고?

쥐새끼는 잠깐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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