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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71화 (44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71화

메인 던전 - Lv.12500 나헤마(3)

바알은 돌아가는 길에 썩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균형의 추는 기울었다.

미카엘이 예상 이상으로 강한 것은 사실이며 저 지긋지긋한 요새 역시 막강하다.

하지만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저 곳을 벗어나는 순간 천사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과 멸망뿐이다.

저곳에 갇혀 서서히 말라죽을 뿐일 것이다.

가뜩이나 아슬아슬한 균형이었다.

악마군단장들이 훨씬 수가 많았다.

텅텅 빈 세피로트와 달리 클리포트의 자리는 빈 곳이 몇 없다.

악마 특유의 욕망에 충실한 성향 덕에 단합되지 못했을 뿐, 사실 처음부터 전력 자체는 눈에 띄게 우세했다.

고로 이제 승리는 확정이다.

차라리 그 이후를 걱정할 때다.

물론, 바알은 그런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것이 가장 강력한 악마의 품격.

악마는 제멋대로 사는 것이 미덕인 존재다.

바알은 누구보다 악마다운 자신에게 자부심이 있다.

* * *

* * *

제멋대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고민 따위는 없다. 악마는 그 순간에 충실한 생물이 아닌가.

[바알, 그럼 나는 내 영지로 돌아가겠다.]

[마음대로.]

아스모데우스가 떠난다. 바알은 아드라멜렉도 돌려보내었다.

저 둘은 그나마 바알의 말을 잘 따라주는 편인 악마군단장이다.

일종의 파벌인 셈인데 다른 대악마들 역시 각자의 꿍꿍이를 가지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지옥의 성채에 도달했다.

그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섰다.

인간형의 바알은 산발의 남성이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카락, 듬성듬성한 수염, 사납고 야성적인 미소.

그대로 지옥의 성채로 들어가서 아무 곳에나 드러누웠다.

악마들은 특별히 바쁘게 움직이지 않는다.

유황불과 어둠이 가득한 이곳에서 제멋대로 싸우고 죽이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죽는 녀석이라고 해봐야 드물지.

지옥의 성채에 특별히 자리는 없다.

대악마도 권속에 불과한 악마도 일개 악마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바알이 지나간다면 모두 길을 비키기야 하겠지만 그건 바알이 지닌 힘에 존중을 표하는 것이다.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악마다.

그러니 그런 모습을 보고 비켜주는 것도 악마다.

그렇다보니 악마가 딱히 절대악인 것은 아니다.

물론 바알은 절대악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흐흐흐.”

그냥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웃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어떻게 천상의 도시를 때려 부술지 궁리해보면 될 것이다.

“요즘 싸움이 너무 적었지.”

바알의 내킴은 곧 힘이다.

더 강한 힘.

하지만 무의미하게 가지기만 하는 힘이 아니라 사용할 수 있는 힘이다.

누구든 좋다.

싸워 때려 부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위해 힘을 축적하고 힘을 드러내보인다.

미카엘은 본능과 어둠의 악마인 바알의 대척점에 서는 존재.

그 마지막을 보내주고 나면 섭섭해지겠으나 그럼에도 그 싸움만큼은 기대된다.

요새의 방어막이 무너지고 다른 모든 자잘한 것들을 다른 악마들이 맡으면 바알은 미카엘과의 오랜 결착을 지으리라.

“그 다음에는 사탄이라도 깨워볼까.”

잠들어있는 또 다른 숙적.

바알은 어쨌건 원하는 대로 할 수만 있으면 족하다. 내키는 대로 치고받을 누군가가 이 세계에 존재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부족해진다면 다른 세상으로 눈을 돌리겠지.

파괴! 싸움! 멸망! 그렇게 이 미궁을 멸망시킬 수 있다면 즐겁지 않을까?

메인 던전이라는 이 영원한 굴레에 끝을 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미궁으로부터의 독립이다. 그 끝에 스러진다면 그 또한 벗어남이 아닌가.

“크크크크크.”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그렇게 바알은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인간의 형태를 취하면 의식을 재부팅할 수 있다. 클리포트로 본 모습을 가리고 껍데기를 뒤집어 쓴 것의 장점이다.

그리고 미처 잠들기 전에 갑자기 허공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바알은 눈을 떴다.

허공에 구멍이 뚫렸다.

지쳐 보이고 피를 흘리고 있는 소년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둘은 눈이 마주쳤다.

“리온 무슨 일이야?”

“빨리 닫아!”

그리고 다시 고개를 쏙 빼서 사라진다.

구멍이 닫히기 시작한다.

바알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계신의 힘이 느껴진다.

성배인가?

구멍이 완전히 닫혔다.

“뭐야, 이거 재밌잖아.”

몸을 튕기며 탄력으로 단숨에 일으켰다.

그리고 정권 지르기의 자세를 취한다.

이 박력 있는 자세는 이 모습으로 싸움을 즐기기 위해 익힌 것이다.

한껏 당겨진 몸의 근육에 물리력을 담아 그대로 앞으로 내지른다. 마지막 순간, 대악마로서의 어두운 권능이 그 끝에 담겼다.

으지직하면서 공간이 으깨지기 시작한다.

조금 전에 뚫렸던 구멍은 일그러지고 뭉개지며 그 흔적을 노출한다.

바알은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무언가 붙잡혔다. 그 속으로 더 팔을 집어넣는다. 어둠이 뭉클 피어나고 막대한 권능의 힘을 느낀 악마들이 주변에서 도망친다.

지옥의 성채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흐으음?”

공간 속으로 팔을 집어넣는 건 자주 하는 일은 아니다. 새로운 감각, 반대편의 어떤 공간으로 팔이 들어갔음을 느낀다.

더듬더듬 만져본다. 허공이다.

다른 팔도 그 안으로 구겨 넣는다. 잡아 뜯으면 열릴지도 모르겠다.

지지직하는 소음과 함께 공간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더 힘차게 근육에 힘을 불어넣는다. 권능도 더 짙게 피어오른다. 사방의 빛이 집어삼켜진다.

빛이 부재하는 무에 가까운 공간이 주변을 집어삼켰다.

마침내 공간이 잡아 뜯기기 시작했다.

열어젖히고 머리를 집어넣는다.

그 순간 노르스름한 쥐를 안고 있는 소녀가 보인다.

무엇이지 하는 순간 기계신의 힘을 듬뿍 담은 광선이 이마에 직격했다.

설마 곧바로 반격할 줄은 몰랐기에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엉덩방아를 찍었다.

공간은 빠르게 복구된다.

놓쳤다.

바알은 멋쩍게 중얼거렸다.

“뭐지? 옆에 있던 뱀파이어는 마왕인가? 성배를 안고 있던 건 용사? 그럼 유배자?”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건 없다. 그럼 생각하는건 낭비다.

바알은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뭐 어쩔 수 없지. 크크크.”

“바알은 악마 주제에 무투파라면서요?”

“마법의 종족이지만 마법스러운 권능을 내다버리고 주먹질과 칼질을 선택한 녀석이라 했지.”

“흥미롭군.”

에길이 흥미로워했다. 그럴만한 상대다. 전사인 악마라니.

왕국 아래의 지옥에도 비슷한 존재가 있었다. 검사로서의 마왕.

그때도 흥미는 있었으나 급한 탓에 루시가 순식간에 썰어버렸었기에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위대함의 편린, 그 본질이 태어나면서부터 특정 요소에 귀속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악마로 전사라 할 수 있는 성향을 가졌다.

종족의 보편적인 성향에 반해서 말이다.

“패턴도 실제로 전사로운 것들 투성이라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악마의 정점에 군림한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겠지.”

아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헤마를 단독으로 마주하고 온 입장이다.

“정면 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점쳐보지도 않는 느낌이었다. 그냥 못 이긴다에 가깝겠지.”

나헤마는 신 출신의 교활한 유배자였다. 그런 이가 보스로서 바알을 대하면서도 정면 승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사실이다.

“그래도 이번 일은 이미 아는 대로 흘러가서 다행이에요.”

희우가 정리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틀리지 않았다.

나헤마 루트는 나헤마에게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여 그들의 협력을 얻고 나서부터다.

대등한 거래상대로 인정받을 정도의 거래를 하고나면 진행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일정 수준의 신뢰를 얻고 나면 그가 유배자에게 의뢰를 준다.

이 테마가 악마측에서 스타트했다면 진행되었을 흐름대로다.

의뢰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냥 바알의 목을 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우리만으로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바알에게 원한이 많으며 그래서 이를 갈고 있는 녀석이 하나 있지.]

사탄.

빛과 어둠의 악마라는 모순된 존재.

본디 천사였으면 영락이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악마가 된 존재.

“바알에게 패해서 유폐 당했다고 했죠? 바알은 얼마나 센 걸까요.”

사탄은 상징적인 이름이다. 지구 문명권 출신인 희우는 그런 이름은 보통 최종보스로 쓰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이길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제니가 끼어든다. 희우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오빠는 일단 여길 클리어해본 적도 있다고 하니까. 우리가 실수하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겠죠.”

그렇다고 상대를 서로 싸우게 만들어 약화시킬 수단이 있는데 정면 승부를 할 이유는 없다.

아서가 특히 그렇게 주장했다.

“파밍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지. 직접 필요한 장비들을 조달하기 위해 맵을 탐사해야해. 언제 그런 여유가 다시 올지 모르니까.”

“사탄의 봉인지는 주울게 아주 많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왕관의 검]이 없네요.”

처음 이 테마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일단 무언가 만들어야 했다.

중간에 새로운 변화가 발견되며 곤란에 처하기도 했지만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사라지고 악마들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들 어떤 꿍꿍이가 있겠지만 상황은 파티의 손을 어느 정도 떠났다.

무언가 하지 않아도 사건은 앞으로 나아갈 테니 한 바퀴 돌아서 여유가 생겼다면 생긴 상황이다.

더욱이 지금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정석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단계다.

“미래를 안다는 건 정말 안정감이 넘치는 일이네요.”

“권능을 사용한 게 아깝지만 사실 부활 스택도 아직 소모하지 않았고, 나쁘지 않은 것 같군.”

보스전은 아직 더 남았다.

그래도 확실하게 진행 상황을 점검할 수 있는 상황이다.

사탄을 다시 깨우는 것은 후반부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파트인 탓이다.

사전에 알고 있던 대로라면 오히려 몇 가지 보스전이 스킵 되었다.

메인 던전에 발을 들이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를 생각하면 당초 계획 이상으로 빠르다.

“오빠와 미아, 그리고 리온 부부만 무사하면 되겠군요.”

듣고 있던 로스엘이 흥얼거리듯 말한다.

“사랑의 예감! 그 두 명의 결혼식에 내가 참석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사랑의 천사 하니엘로 돌아가고 나서 혼잣말 같은 헛소리 빈도가 늘고 있다.

희우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오랜만의 안정감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충 알 수 있다는 안정감.

여기서 또 틀어진다면 아주 슬프겠지만,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나 싶다.

“또 꼬이진 않겠죠?”

“……알 수 없지.”

아서는 제발, 나헤마가 악마 측의 모든 변수를 틀어쥐고 제대로 인지중이었기를 바랐다.

리더가 없는 상황에서 뭔가 뒤틀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것 같다.

“리더가 제발 무사했으면 좋겠군.”

“죽을 곳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리타이어 할 수는 있지 않나.”

“말이 씨가 되니까 나쁜 말 금지! 우리 좋은 말만 해요!”

제니가 누구보다 나쁜 표정으로 입단속을 시켰다.

[저게 뭔지 설명해보아라 제자야.]

솔로몬이 날아가다 멈춰 섰다.

나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사탄의 봉인지군요.”

[사탄? 그렇군. 클리포트도 자리가 비는가. 봉인이라니 대체 어떤 놈이 한 거냐? 내가 알기론 사탄의 좌에 앉은 녀석은 루시퍼일 텐데. 그놈을 누가 어떻게 이겨?]

“바알이 이겼습니다.”

[놀랍군. 그렇게 벼르더니 결국…….]

“스승님이 사역할 때는 어땠기에 그렇습니까?”

이건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다.

솔로몬과 72위의 악마라는 건 지구에서도 존재하던 전설이다.

미궁에서는 그런 전설의 선후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지구에 존재하던 전설이 있기에 미궁에 반영된 것일까.

그게 아니면……. 미궁에 있으니까 지구에도 있는 걸까?

마법이 먼저일까 미궁이 먼저일까에 대한 의문과도 같다.

이 여정의 끝에 답이 있겠지.

[뭐, 사역이라고 해보아야 잠깐이었지.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의외로 순순하게 실패를 인정하고 있지만 저건 사실 자랑이다.

바벨의 자식들을 제가 만든 시스템을 통해 잠시나마 사역마로 다룬 것이니까.

유래 없는 위업인 것을 아니까 태연스럽게 말한다.

[네놈이 내가 짠 함정에 대해 들어보았는지 모르겠군. 만들면서 그걸 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당연히 이전에 들어보았다. 세피로트와 클리포트 내에 만들어둔 의도적인 허점.

그때의 솔로몬은 바벨의 자식들을 정말로 사역하여 미궁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힘의 덩어리들을 예속 시키는 것은 기계신의 힘을 빌려도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고 은둔자가 되었다.

솔로몬의 무덤은 그때부터 이름이 무덤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솔로몬이 이미 죽고 없는 것도 그런 짓을 한 탓이다.

분노한 어떤 악마가 그가 충분히 잊히기 전에 죽여 버리는 것이지.

“그거 아직도 심어져있긴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구하러 가는 네 딸이 그걸 좀 이용한 것 같던데.]

“예?”

대체 어디다 쓴 거지?

그건 가르쳐준 적 없는 것 같은데. 사실 나도 활용하려고 시도해본 적은 있지만 애초에 정상적인 진행이면 그렇게 세피로트나 클리포트에 가까이 다가갈 일이 없다.

원래 여긴 선형적인 구성의 던전이란 말이다.

“가능성이 참 많이 열려있군요.”

지옥 같은 난이도로 뒤틀린 만큼 창의적인 플레이의 가능성도 열려있는 것이로군.

창발적인가? 사실 이제 어디까지가 의도인지 모르겠다. 나도 처음 플레이하는 던전이란 말이지.

하지만 파티원들 쪽이 제대로 진행하고 있다면 결국 여길 찾고 이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메시지를 남길 수 있겠군.

“잠깐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솔로몬은 이미 사탄의 봉인을 살펴볼 생각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내부에서 권능 자체에 대한 연구는 할 수 없다.

까마득한 세월을 홀로 보내다가 밖으로 나왔다.

모든 것이 신선한 자극일 것이다.

솔로몬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내게는 이곳을 찾아올 파티원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전달할 시간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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