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72화
메인 던전 - Lv.15000 나헤마(4)
나헤마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악마 중에서도 장사꾼인 이블로서, 그것도 금전 접미를 달고 있는 신으로서 신좌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거짓말에 민감해진다.
실제로 거짓말을 감지하는 마법도 존재한다. 이블은 유틸리티에 특화된 마법사 종족이기에 그런 것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조절할 수 있다.
이제는 권능으로 그것을 행한다.
마력으로 하던 것을 클리포트의 좌에서 제공하는 권능으로 치환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세월은 대체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법이다.
그래서 그는 알 수 있었다.
아서라는 이름의 유배자는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을 읽힐 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고 타락시킬 수 없었던 것이 아쉽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메인 던전화 되어버린 왕국에 남아있는 유배자로서 가장 곤란한 것은 이곳이 어떻게 굴러갈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본래는 안다.
유배자는 미래를 알 수밖에 없다.
무수한 과거의 삶들이 그 정보를 제공한다.
* * *
* * *
하지만 자신이 속한 왕국이 메인 던전화 된다?
그러면 알 수 없게 된다.
막막한 일이다.
정보를 쥐고 있던 시절은 그저 꽤 좋았던 시기로 기억 속에 자리 잡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확실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메인 던전의 중요한 한 축이며, 엔딩 분기였다.
아서라는 노기사가 털어놓은 ‘나헤마 루트’에서는 한 치의 거짓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는 해야 할 일과 그로 인해 일어날 일에 대한 정보를 다시 쥘 수 있게 되었다.
재는 것이 많은 자는 달리 말하면 겁이 많다는 뜻도 된다.
나헤마는 겸허하게 자신의 그런 성향을 인정한다.
확신이 생기기 전엔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을 할 때다.
이 뱀 같은 악마는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아드라멜렉이다.
그의 영지에 도달하자 몹시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악마군단장이 몸소 나타났다.
[필멸자가 여기엔 무슨 용무지?]
아직도 저 필멸자 운운은 우습지도 않다.
나헤마는 파벌이랄 것이 없는 악마군단장이다.
클리포트의 자리를 하나 차지했기에 최소한의 존중을 받고 있을 뿐, 그 이외에는 멸시뿐이다.
물론 그렇기야 하겠지.
서로 인간형인 이 상태라면 모를까 한 꺼풀 벗고 싸운다면 나헤마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언제나 자신의 작은 요새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기회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뱀의 혀가 움직인다.
[아드라멜렉님, 제가 메타트론의 행방에 대해서 안다면 어쩌겠습니까?]
모든 악마군단장은 메타트론이라는 악마에게 데여본 적이 있다.
단언컨대 최강의 천사라고 할 수 있었던 존재.
상대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나헤마는 즐거워했다.
[조용한 곳에서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볼까.]
나헤마는 품속의 검은 단검을 분석했던 것을 떠올렸다.
스승의 유품을 쓸데없이 훌륭하다. 그리고 어찌보면 그의 스승이기에 만들 수 있었던 물건이기도 하다.
클리포트의 제작자가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 불멸자들은 무엇을 믿고 그들이 그렇게 관심두지 않는 필멸자가 만든 것에 몸을 맡기고 있는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기나긴 모멸과 멸시의 시간을 생각하며 나헤마는 아드라멜렉을 따라갔다.
우선은 바알의 한쪽 팔을 꺾는다.
“우리 보스전이 얼마나 남은 거죠?”
“나헤마가 꽤 많은 악마를 처리해줄 거라고 생각하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나헤마가 처리하지 못하는 악마들과 미카엘.”
“그러면 많지 않군요.”
“이미 후반부에 접어들었으니까.”
안 잡아도 되는 녀석들까지 다 잡을 필요는 있겠으나 나헤마가 굉장히 많은 악마군단장들을 처리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는 원한이 많다.
그렇기에 나헤마 루트는 보스 수가 적다.
문제는 그 후다.
끝없는 야망이 있기에 이곳까지 도달한 것이다.
로스엘처럼 야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유배자 출신 위대함의 편린.
나헤마 루트는 가장 왕국을 향한 침공이 거세어지는 루트다.
“나헤마는 확실히 죽여야 하고.”
“그럼 아마도 미카엘, 바알, 나헤마는 확정에 우린 로스엘의 편이니까 YHVH까지 남은 셈이군요.”
“추가로 몇몇을 더 상대하게 될지도 모르지. 라파엘도 쉽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일단 나헤마를 이용해 최대한 제거하는 건 최선이야.”
리더가 있다면 혼자 정리해버린다.
부재중인 현 상황에서 파티원들은 서로 많은 의견을 나누어야 했다.
리더 없이도 진행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희우는 의외로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심연은 강제로 흩어져서 단독으로 진행하게 되는 구간도 있다.
머리로는 아는 리더의 부재도 실제가 되면 다르다.
점점 파티의 비중이 골고루 나눠지기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파티의 완성도가 올라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빠가 원하는 대로 되어가고 있다.
제니도 이제 곧잘 의견을 낸다. 블랑쉐도 조용히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고민을 하는 것 같다.
어느 순간 희우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의견을 취합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단지 게임이라는 형태에 익숙하기에 그런 역할을 맡을 뿐이다.
삶의 경험이라면 에길과 아서가, 특이한 상황을 고려하는 것은 블랑쉐가, 아주 당연하지만 그래서 놓칠 수 있는 부분은 제니가 꼬집어준다.
리더가 없는 상황에 대한 틀이 빠르게 만들어지고 있다.
다툼은 없다.
리더라는 기둥이 아주 오랫동안 지탱하며 신뢰를 쌓을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혹시 잠깐 빠진 것까지 의도인가?’
희우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나헤마가 위험한 일을 우리한테 떠넘긴 건 확실해요. 이거 풀자마자 바로 뛰어야 하잖아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겠군. 전력에 손실이 커.”
“마법사의 부재도 아쉽네요.”
“크흠.”
아서는 굉장히 찔려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그가 마검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보완할 점은 아직도 존재한다.
블랑쉐는 시시각각 치솟는 자신의 입지를 즐기는 듯이 아서를 보며 웃었다.
사탄의 봉인지는 위치가 어느정도 고정되어있다.
다만 거리가 멀기에 이동하는데 시간은 필요했다.
봉인지라고는 해도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아주 먼 옛날에 존재했던 마법사의 나라 유적일 뿐이다. 이 왕국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곳.
바알은 거기에 제 권능을 잔뜩 불어넣어 그 속에 사탄을 감금했다.
복잡한 원리는 알 필요 없다. 그냥 봉인을 유지하는 장치를 파괴하면 된다.
나헤마가 이 봉인을 도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알은 그때부터 나헤마를 제대로 된 악마군단장의 일원으로 인정해주었다던가.
그리고 이곳은 마법사의 나라였던 곳인 만큼 기계신과 관련된 것들도 많은 곳이다.
[가라앉은 영광] 필드처럼 온전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파밍 요소라면 비슷하게 있다.
[왕관의 검]을 통해서만 열 수 있는 창고들도 그러한 것들 중 하나다.
이건 천사 측에서 스타트했을 때, 메타트론을 통해 얻어야만 하는 열쇠다.
보상은 당연히 조금씩 달라지는 법.
“그래도 이번엔 그리 위험하진 않을 거야.”
블랑쉐가 물뿌리개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미아만큼은 아니어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가브리엘의 힘은 그 조각난 파편에 불과하더라도 아주 강력하다.
“끝내기 전에 여길 다시 돌아올 짬이 날까요?”
“파밍을 다 못하면 너무 찝찝하긴 하죠.”
제니도 태연하게 파밍 운운하는 거보면 고일만큼 다 고였단 말이지.
그리고 블랑쉐가 눈을 비볐다.
“민트색 고양이 깃발이 보인 것 같은데.”
“엥? 진짜네요?”
다가가자 메시지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검이 하나 놓여있다.
“[왕관의 검]이잖아.”
메시지의 내용은 자신은 무사하다는 것과 솔로몬을 꼬셔서 미아를 구하러 간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하죠?”
“특별히 지시는 없으니까 계속 하면 될 것 같군.”
“대체 저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솔로몬은 아군이 된 건가?”
“보는 앞에서 그걸 적지 못한 것을 보면 별로 아군은 아닌 것 같은데.”
“아군이 아니면 그냥 협잡과 기만으로 변덕의 방향을 틀어서 미아를 구하러가게 만든거군요.”
제니가 눈을 치켜뜨더니 소리쳤다.
“미아양의 재능을 팔아먹은 거 아니에요?!”
“진정해요. 제니.”
“하지만! 솔로몬 같은 사람이 미아양의 재능에 눈독들이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제니, 미아가 소중한 것은 알겠지만. 진정 좀 해요.”
“제가 좀 가 봐도 될까요?”
“아니, 진정하라니까!”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블랑쉐가 물뿌리개를 흔들었다.
실로 권능적인 차가운 물이 제니에게 쏟아진다.
“이렇게 쓸 수도 있군.”
강제로 진정된 제니는 고개를 떨며 몸을 털었다.
“미안해요. ……리더가 생각이 있는 거겠죠. 제가 너무 흥분했나 봐요.”
“아니야. 제니. 나도 조금 의아하긴 한데. 알아서 잘 하겠지.”
“맞아요. 분리불안 증세 같아요.”
“그걸 제 입으로 말하는 건 좀 어떨까 싶은데.”
제니가 코를 훌쩍였다.
“미아양이 보고 싶어요.”
아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거의 자아를 의탁했군.”
에길이 아서에게 작게 속삭였다.
“자신의 필요를 고민할 때도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마법사 담당이니까요. 모두가 이런 일이 적성에 맞는 것은 아니죠.”
“하긴, 평화로운 곳에서 왔다지.”
이해하지 못하냐면 그렇지는 않다.
사실 그 둘이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이다.
제 아무리 무수한 계기가 있고 받쳐주는 동료들이 있다고는 해도 사람은 이런 환경에선 점점 망가진다.
리더가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인원들로만 파티를 구성하려고 한 이유일 것이다.
“끝에는 평화가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군. 그래.”
“우리는 전장으로 돌아가겠지만요.”
“돌아가면 브리튼 침공을 멈춰주면 안되겠나?”
“우리가 같은 세계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아서는 제 때는 이미 죽고 없는 사람 아닙니까.”
“이교도 대군세까지 살아있지 못해 슬프군.”
“당신의 묘비를 찾아보도록 하죠.”
대신 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만나 대화할 수도 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물건이 아닌가.]
나헤마는 [악마 죽이기]를 분석하며 이걸 건네준 유배자들이 모르는 기능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클리포트를 만든 주인으로서 그의 스승이 처음에 가진 의도는 알겠다.
악마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원리는 클리포트에 앉아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결국 기계신의 힘을 빌어 만들어진 무기다.
마법만으로는 바벨의 자식을 상대할 수 없음이다.
그러니 여기에 존재하는 연결 해제 기능은 클리포트의 권한을 장악한 입장에서 궁리한 결과물일 것이다.
클리포트 자체에 데미지를 입힐 수는 없다.
그러니 순간적으로 연결을 해제하여 본체에 피해를 입힌다.
1페이즈를 유지한 채로 본체를 공격할 수 있는 셈이다.
그 연결 해제의 순간에서 만들어낸 솔로몬도 예상하지 못했을 부작용이 일어났다.
나헤마는 결과적으로 일어난 일을 그렇게 해석했다.
스승의 방식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빠르게 추론 가능했다.
“대체……?”
아드라멜렉이 망연하게 나헤마를 바라보고 있다.
껍데기다.
힘이 없는 빈껍데기.
하지만 아드라멜렉이 죽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남은 찌꺼기가 아니다.
단지 분리되었을 뿐이다.
힘은 그대로 존재하는 채로 의식만이 클리포트에 의해 뒤집어쓴 껍데기로 분리되어 나갔다.
[지금 죽으면 당신이 가진 힘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나헤마는 실험해보기로 했다.
아드라멜렉의 껍데기가 죽었다.
그리고 주인 없는 힘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