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75화
메인 던전 - Lv.17500 하나님의 오른쪽 자리 [미카엘](5)
정말로 기분이 이상한 것은 사실 미카엘이었다.
이 유배자가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가?
마음이 딴 데 가 있음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다.
그럼 다르게 말해서 지금 지껄이는 말은 전부 사실이란 뜻이다.
수작을 부릴 정신은 없어 보이니까.
그런데 저게 다 사실이라고?
나헤마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고 있는 것까지는 좋다. 유배자니까 알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게 된다고?
미카엘은 유배자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응용할 방식뿐이다.
그러니까 어렴풋이 유배자들의 목적과 삶의 방식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다.
뭔가 해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해낸 정도가 아니다.
판을 뒤집어엎어서 때려 부순 것 같은 짓을 했다.
억겁의 세월 동안 지속되어 [영원한 분쟁]이라고 불리는 지역마저 생겨났을 정도의 일임에도 말이다.
미카엘은 차분하게 자신의 지성을 발휘했다.
* * *
거짓일 가능성을 다시 고려하지만 정말로 거의 없다. 옆의 괴팍한 마법사도 낄낄대며 거들고 있지 않나.
그가 아는 솔로몬은 그다지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누군가가 좋을 대로 이용당할 인물이 아니다.
이렇게 친분을 과시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
거기에 눈치를 보는 것 보면 저 남자가 원해서 여기까지 솔로몬을 몰고 온 것도 아니다.
솔로몬이 원해서 왔겠지.
하지만 그조차도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제일 먼저 묻고 싶을 정도다.
미카엘은 다시 한번 눈앞의 남자를 본다.
그리고 그 파티원의 면면을 생각해 본다.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당장 잠깐 데리고 있었던 어린 마법사만 해도 이상할 정도의 마법사다.
마법을 익힌 지 1년도 안 되었다고 말하면서 뻐기는 기색도 조심스러운 기색도 없다.
그냥 말했을 뿐이다.
마법적 이론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기이하기 짝이 없다.
뭔가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태연하게 지껄이면서, 미카엘이 어느 정도 조예가 있기에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미친 소리를 그냥 당연하게 지껄인다.
대체로 가능성의 여부보다는 그런 발상 자체를 누가 할까 의심스러운 형태의 술식이 난무하며 이론 자체에도 뭔가 싶은 새로운 것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가 곧바로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유다.
제일 무서운 점은 마법사가 자신의 대단함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 대단함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라는 점.
그건 저런 능력을 가지고도 특별히 파티의 중심이 아니라는 뜻.
그렇다면 그런 마법사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단 말이다.
단지 가브리엘을 쓰러뜨렸다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일이다.
‘확실히 가능하겠군.’
거기에 마법 스승은 이 눈앞의 남자라고 했다.
마술사왕의 제자이며, 그 마술사왕을 칩거에서 끌어내어 여기까지 데려와 다짜고짜 자신을 겁박시킬 정도로 친밀한 관계.
‘정상이 아니군.’
이쯤 되면 괴이할 지경이다.
미카엘은 조금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유배자인가?
미궁이 그에게 보낸 어떤 계략일 수는 없나?
그도 그럴 것이 수만 년간 이어온 고민이다.
메타트론을 실각시키고, 가브리엘과 라파엘을 돌보며, 악마들을 견제하고.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보는 세월이었다.
그 수많은 세월 간 쌓아올린 것도 많다.
미카엘은 필멸자를 충분히 존중하지만 이건 존중의 범위를 넘어섰다.
약간의 경외마저 느껴진다.
‘가브리엘은 몇 번을 싸워도 이들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겠군.’
양쪽의 방식 모두를 알기에 누구보다도 그 힘의 격차를 잘 안다.
바벨의 자식들이 기술을 익히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가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지 않은가.
미카엘은 정말 오랜만에 장고해야 했다.
눈앞의 남자가 떠드는 장황한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다.
결국 요점은 지금 나헤마가 바알의 측근들을 썰고 있는 데다가 바알도 썰어버릴지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그거면 충분하다.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두뇌를 풀가동한 미카엘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건 일단 잡아봐야 할 줄이군.’
동아줄이라기보다는 아다만타이드를 꼬아 만든 케이블 같아 보였다.
사탄의 봉인지는 과거 마법사의 나라였던 곳답게 해괴했다.
“공간이 뒤틀려 있는 건 대체 뭐죠?”
블랑쉐가 고심 끝에 대답한다.
“공간 활용을 위해 그리한 것 같다. 중첩된 여러 공간을 동시에 활용하는 형태의 건축이군.”
“그딴 게……. 건축?”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이곳은 물리적으로만 미로가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갑자기 바깥이 또 있다거나, 계단을 올라갔더니 아래로 내려온다거나.
심지어 그저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갑자기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몬스터도 안 약하네요.”
어딜 가나 있는 어둠의 정령들 말고도 뭔가 실험의 부산물이거나 오래 방치된 마법적 도구 같은 것들이 보인다.
솔로몬의 무덤에 있던 것들과 흡사하지만 방치된 기간의 스케일이 다르다.
“게다가 이건 아마 사탄의 영역이겠죠?”
봉인이라 한들 그게 얼마나 완벽할까.
사탄이라는 바벨의 자식은 봉인된 채로도 그 힘이 질질 새어 흐르고 있었다.
빛과 어둠이 뒤섞인 소우주와도 같은 공간은 중구난방의 미러룸과도 같다.
어떤 의미에선 이 혼란스러운 공간의 뒤틀림에 어울리는 함정이다.
“거기 조심해요!”
그런 식으로 피로도가 엄청나게 올라가는 탐험 끝에 희우는 목적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찾았다! 찾았어!”
절로 만세가 나올 만큼 힘들었다.
몸보다는 정신이 힘들다. 보스전과는 또다른 피로함이었다.
“보스전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군.”
“필드가 끔찍한 게 보스가 끔찍한 것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는 거군요.”
찾아낸 것은 물론 사탄을 가두고 있는 장치가 아니다.
“똑같이 생겼네요.”
제니가 [가라앉은 영광]에서 보았던 것과 꼭 같은 형태의 문이 남아 있었다.
대신 [아후라 마즈다]가 최소한의 유지보수를 하고 있던 그곳의 것과는 다르게 낡고 비틀어진 티가 난다.
“이끼인가? 이거 안전한 거 맞겠죠?”
지형지물 하나 무엇일지 모른다. 실제로 아까 에길은 어떤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그것에게 물렸다.
블랑쉐가 신중하게 달뿌리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이 정도에 부서지지는 않을 것이니.
이끼가 가브리엘의 달빛에 사르르 녹아내리듯이 사라진다.
그런데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쏟아져나온다.
“으으, 징그러.”
이끼가 아니다. 무수히 많고 엄청나게 작은 거미의 군집이었다.
녹아내린 거미는 증발하기 전의 그 짧은 순간에 연기를 피워 올릴 정도의 부식성 혈액을 흘린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화학적 연기를 아서와 에길이 바람을 일으켜 걷어내었다.
“이건 마셔도 상태 이상에 걸리겠군.”
“마법사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우리 마법사만 빼고.”
그래도 덕분에 낡은 창고의 문이 온전히 드러났다.
“세 곳 중 어디에 무엇이 있을지는 랜덤이라고 했죠. 에길의 무기는 저번에 구했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 게 있기를 빌어야겠어요.”
희우가 [왕관의 검]을 낡은 문짝의 가운데에 꽂으려 했다.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달빛을 더 조사하여 녹여냈다.
철컥하고 돌아가기 시작한다. 오래된 유산이 삐걱거리며 아가리를 벌렸다.
어두컴컴한 어둠이 모습을 드러낸다.
블랑쉐가 불빛을 만들어 띄웠다.
아서도 서툴게나마 불빛을 만든다.
먼저 들어간 불빛은 고대의 창고 내부를 밝혀내었다.
희우가 입맛을 다셨다.
“금은보화는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군.”
흔히 마법사들이 터를 잡았던 곳에는 마법사가 사용할 물건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아티팩트 제작은 마법사들의 주요한 과업 중 하나이며 명예다.
세상의 신비를 물질에 붙잡아두는 행위. 희우는 언젠가 미아가 그것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했다.
졸다가 혼도 났다.
“흠. 아티팩트로 투검을 날려도 되겠는데요?”
단검은 가장 기본적인 인챈트 소재중 하나다. 크기가 적당히 작으니 만들기 쉽고, 무기가 아닌 도구로서도 용도가 많다.
따라서 많이 만들어지고, 자연히 걸작도 많이 나타난다.
단검 사용자들이 신나서 이것저것 확인하기 시작한동안 블랑쉐는 새로운 총이 없을까 하고 주변을 훑었다.
안타깝게도 총기는 없는 모양이다.
디스트로이어가 애옹 하고 질투를 드러내기에 얼른 츄르를 하나 깠다.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지만 그만큼 화력도 올라가니 꼭 나쁜 일은 아니지.
에길은 이 테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좋은 무기를 이미 획득했다.
그렇기에 문 앞에서 혹시 모를 변고를 대비했다.
아서가 반색했다.
“이거라면 내가 마법을 급하게나마 조금 사용할 수 있지 않겠나?
마법사인 블랑쉐가 확인해 주어야 했다.
길고 단순한 스태프지만 범상치 않은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재질은 미스릴, 그것만으로도 신뢰도가 올라간다.
조심스럽게 만지고 사용해 본 결과, 과거에 미아가 사용하던 것과 정반대의 성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위력 보정은 굉장히 마이너스인 대신, 시전 보정이 자릿수가 다르다.
블랑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앞에 일어난 현상을 보았다.
메모라이즈 구슬 다섯 개가 동시에 만들어졌다.
블랑쉐는 멀티캐스팅을 할 의도가 아니었으며 애초에 서툴러서 제대로 하지도 못한다.
순차적으로 시전하려던 서로 다른 마법이 한 번에 완성되었다.
술식을 떠올리면 지팡이가 나머지를 채웠다.
아주 정교한 자동완성 기능이다.
아서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탄성을 내었다.
“흠, 아서. 이거라면 아케인의 코흘리개도 랭커 파티의 즉시 전력감이 될 수 있겠는데.”
물론 위력 말고 시전 자체에 대해서다. 하지만 마법의 본질은 유틸리티.
블랑쉐는 이름을 확인했다.
[광대의 지팡이]
아서가 받아들고 마법을 구사해 본다.
제법 공간을 열어볼 수도 있었다.
희우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형 아서군요. 아서 지팡이도 잘 어울려요.”
호호백발의 깐깐해 보이는 노인에게 자못 마법사스러운 지팡이가 어울리지 않을 리가 있나.
제니가 잿빛 망토를 하나 가져와서 아서의 갑옷을 덮었다.
갑옷이 가려지자 정말로 그럴싸해졌다.
에길이 싱글벙글하며 고깔모자도 하나 가져와 아서의 머리 위에 올린다.
제니가 담담하게 소감을 말했다.
“사루만 같네요.”
“지팡이 이름이 뭐예요?”
“광대의 지팡이라네.”
“광대?”
희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파티원들은 필요에 따라 정보를 나눠서 기억했다.
모든 정보를 가진 것은 리더, 그리고 획득할 가능성이 있는 장비에 대한 정보 대다수는 미아가 기억하고 있다.
단순히 암기할 것이 가장 많은 부분이기에 그렇다.
등장만 한다면 어느 회차에서나 같은 성능을 가진 고정 아티팩트는 수없이 많다. 그걸 다 외우는 것은 미아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뭔가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에길이 옆에서 허허하면서 웃었다.
“왕이(Crown)이 광대(Clown)가 되었군.”
그런 농담을 들으면서도 아서의 표정은 굉장히 편안했다.
“좋아, 이제 악마 종족 값을 할 수 있겠군. 마법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다니. 멀린을 다시 만난다면 사과해야겠어.”
“마법쟁이라고 무시한 적이 있나요?”
“크흠. 없다고는 못하지. 요술은 좀 그, 그렇지 않나.”
희우는 아서가 나름대로 포지션 수행의 미흡함에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다 보니 아서는 파티원들이 꾸며준 마법사 같은 차림을 마음에 들어 했다.
우연히 그것들도 각각 상당한 수준의 시전 보정이 걸려 있는 장비였다.
방어구로써의 가치는 전무하지만 모두 장비하면 반푼이 마법사도 하이 랭커에 준하는 시전능력을 지니게 만들 정도의 물건들이다.
“아, [가라앉은 영광]의 창고에도 이런 게 많았을 텐데.”
“열자마자 폭발해 버려서……. 에길의 도끼도 리더가 바로 알아봐서 겨우 건져온 거예요.”
블랑쉐는 총기를 찾지는 못했지만 만족스러워했다. 대량의 단검, 그것도 하나하나가 괴상망측한 아티팩트인 것들을 챙긴 탓이다.
“고급 총탄이군. 레일건에 넣고 쏴야겠어.”
희우가 그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보구를 탄환으로 쏴대는 녀석이 약한 경우는 없죠. 마침 여길 연 것도 열쇠검이네요.”
아마 이 단검들을 회수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전투에서 흔히 무시되곤 하는 견제수단인 투검의 위력이……. 충분한 피해를 강요할 정도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아서나 에길이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꼭 맞는 것이 아닐 뿐, 그래도 아티팩트급의 보조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다만타이드로 만들어져 튼튼할 뿐인 장비가 아니다. 이제 본격적인 아티팩트 도배의 시작이다.
그리고 조금 더 헤매고 다니긴 했지만 사탄의 봉인을 순조롭게 해체할 수 있었다.
한때 천사였던 악마가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