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77화
메인 던전 – Lv.17500 투신 [바알](2)
메타트론과 미카엘로 이어져온 천사 측의 왕과는 달리 악마들에겐 그들의 왕이 누군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악마들은 제멋대로다.
지옥의 성채의 주인이란 것은 그저 제일 힘이 센 녀석이 클리포트를 지켜라 정도에 불과한 자리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그 자리를 노리는 악마들이 많았다.
최강의 악마.
가슴에 울리는 그 단어.
악마들은 그런 것을 참 좋아한다.
바알 역시 그런 악마 중 일부였다. 심지어 그의 욕망은 투쟁 그 자체다.
지옥의 성채의 주인이 된 것도 사탄이 자기 위에 있고 위로 평가받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 뿐이었다.
지금 치고받고 싸우면서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권능적인 영역끼리의 다툼을 벌이면서도 물리적인 충돌은 계속 되고 있다.
바알은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인간형으로 싸우는 것 역시 제법 좋아하는 와중이다.
주먹을 어떻게 쓰는지, 두들겨 패는 게 어떤 맛인지, 나아가 상대의 뇌수를 으깨고 척추를 뽑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 * *
* * *
소위 말하는 손맛이란 것이다.
따라서 바알은 권능을 동원한 싸움에도 적극적인 물리적 충돌을 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인간형의 거인, 수없는 날개가 온 몸에 제멋대로 뻗어 나온 부정형의 몸체를 주먹으로 두들기는 것도 그 탓이다.
사탄은 어이없어했다.
[그런게 통할 것 같으으윽!]
통한다.
왜 통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딘가 요령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때리고 때리다보니까 더 잘 때릴 수 있게 되었을 뿐일지도.
어쨌든 바알은 그런 상황이 제법 즐거웠기에 특별히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처럼이니 더 오래 즐기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사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때 천사였으며 타락하여 악마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강했기 때문이다.
사탄은 강하다.
지옥의 성채의 주인이 된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어째서?
아직 클리포트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바알은 이상한 점이 있다.
힘의 집중과 타격, 그 끝에 실린 물리적 파괴력이 무언가를 이루어 내고 있다.
사탄은 자신이 저번 싸움에서 패한 이유가 단순히 바알이 무언가 수작을 부려서라고 생각했다.
악마에게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당연한 미덕이다.
그렇기에 그 패배는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도 비슷하다. 어딘가 다르다.
사탄은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고.
모든 힘을 쏟아내었다.
바알은 그것에 휩쓸리며 거대한 본모습을 드러낸다.
빛과 어둠, 그리고 어둠이 하늘에서 춤춘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제멋대로 뒤섞이고 치대지는 권능의 흐름 가운데에서 거체들이 부딪힌다.
힘의 격류는 얌전하게 서로를 갉아먹는 대신 쉬지 않고 파고들어 서로를 노렸다.
그리고 바알의 무수히 많은 팔들이 검을 휘두른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사탄!]
물리적 충격이 사탄의 몸을 뒤흔든다. 부정형인 빛의 거인이 이지러진다.
[팔이 많다는 건 생각보다 큰 장점일지도 모르겠더라고!]
사탄 역시 생각해본 적 없었다.
몸의 형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본질이 힘이며 힘이 곧 본질이니 그 모든 것을 부딪히는 것이 바벨의 자식들이 충돌하는 싸움이다.
이건 무언가 이상했다.
사탄은 자신이 또다시 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구보다 확실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바알은 단순히 수작을 부리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내었다.
그럼 사탄도 해내어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천사였던 대악마는 온 힘을 다하여 힘을 쏟아내었다. 사방으로 몰아치는 빛의 충격이 바알을 잠깐이나마 몰아내고, 그 틈에 다시 껍데기를 뒤집어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도망쳤다.
욕망의 실현만이 미덕이다. 사탄의 욕망은 승리다. 마지막에 승리하기 위하여 지금 도망치는 것은 그에 반하지 않았다.
번쩍하고 하늘에 펼쳐진 권능의 격류가 사라졌다.
바알은 추격에 능하지 못하다.
두들기는 것만 잘한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후,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만 더 놀아주지. 뭔가 더 알 것도 같았는데.”
그러곤 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상황은 너무나도 빠르게 변했다.
사도들이 찾아오고 기껏 해봐야 며칠이 지났을 뿐이다.
유배자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장본인 중 하나인 메타트론은 이번에 도달한 사도들에게 제법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왕관의 검] 같은 귀한 물건을 흔쾌히 내준 것 역시 그래서다.
충분히 휘저어만 준다면, 그렇다면 그가 직접 나설만한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미카엘이 없군.”
성지에서 쫓겨난 지 시간이 제법 지났다. 그가 보내온 유구한 모멸의 세월을 감안한다면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어느 정도 유배자의 시간에 익숙해지기로 했으며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다.
무언가 성과를 내었다면 두드러지기 시작할 시점이라고 여기고 있다.
성배를 구하러 떠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말이다.
가브리엘을 쓰러트린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별일은 없을 것이다.
꼭 그런 생각으로 슬쩍 돌아 가본 길이다.
성지는 기천사 몇몇이 지키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상 텅 빈 것이나 다름없다.
메타트론은 가뿐하게 그들을 제거하고 성지를 되찾았다.
그 허무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날아오른다.
미카엘이라면 이곳을 허투로 방비할 리가 없다.
아무리 메타트론이 껍데기만 남았다고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얕보인 것인가?”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히 좋다.
라지엘과 함께 천상의 도시에서 쫓겨난 후 권토중래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미카엘이 마침내 그에 대한 경계를 거두었다면 그것도 좋지 않은가.
메타트론은 날아올라서 밖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새로 도달한 사도들은 이제야 겨우 이 세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는 것도 많고 전투력도 훌륭하지만 이곳이 그리 호락호락한 곳은 아닌 탓이다.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만 흘러갔다면…….
메타트론은 그 시점에서 사고가 멈췄다.
“이상하군.”
아주 먼 곳의 하늘에 전투의 흔적이 보인다. 이제 사라지고 있으나 사탄과 바알의 것이다.
“정말 이상해.”
더 높이 날아오르자 평탄한 세상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영원한 분쟁]이란 이름이 붙은 전쟁터는 텅 비어있다.
악마 병력도 천사 병력도 없다.
라파엘의 흔적도 보인다. 뜨거운 사막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뭔가 잘못 된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사도들은 이미 죽었나? 갑자기 일부만이 허겁지겁 돌아온 끝에 다시 떠난 길이다.
변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건…….”
지금까지 가끔 찾아오던 사도들이 어떠했던가.
이 드넓은 땅을 헤매다가 결국 돌아오지 않는 경우는 흔했다.
바다에 돌을 던진다고 해서 그 파문이 멀리 퍼지지는 않는다. 파도에 삼켜져 곧 잊힐 것이다.
그런데.
“이미 충분히 많은 일을 해주었군.”
메타트론은 긴장했다.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갔음에 긴장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도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길 바랐다.
이런 파티를 다시 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안정적으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전진하기를 바랐다.
중간에 전복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메타트론은 뒤편에서 성심성의껏 사도들을 도왔으리라.
실제로 그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기에 걸어줄 축복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권능의 일부를 떼어 빌려줄 계획까지 세우는 중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유리를 우리엘로 만들 수도 있다. 강력한 세피로트의 천사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줄테니까.
“다 이루었구나.”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메타트론이 천천히 준비를 하는 동안 사도들은 이미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어처구니가 없군.”
긴장은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갔지?”
유배자의 가능성을 알기에 불러들이고 있다. 그 가능성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도 안다.
미궁은 유배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어 하는 존재니까.
그러니 이곳에서도 그렇게 될 수는 있다.
“너무 유능하다. 과도하다. 이럴 수는 없다.”
메타트론은 자신이 알던 인간의 시간감각이 틀렸나 재고해보아야 했다.
아니다.
몇 달에서 몇 년은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게 메인 던전 공략이다.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도 적어도 한 달은 지난 후여야 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보였다.
빛의 천사인 미카엘은 의도건 의도치않건 눈에 잘 띄는 존재다.
움직이고 있다. 그 곁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군대를 거느리지 않았다면 뻔하다. 사도들이다. 무엇을 하였는가? 저쪽에 붙었는가?
“위험하군.”
손에 더 확실하게 넣거나.
“가장 먼저 신께 바쳐야한다.”
노인은 자신이 불러들인 것들에게 위기를 느꼈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빠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서둘러 라지엘을 찾았다.
“라지엘!”
“조엘, 그 이름은 사도들이 왕림했을 때는 말하지 않기로…….”
“전쟁이 멈췄소! 그리고 사탄이 깨어났고! 라파엘도 죽은 게 분명해! 바깥은 이미 흐르고 있어! 이 영원할 것 같았던 대립이 뒤틀리고 있다고! 여기 있어서는 안 된다! 나가야 해!”
유배자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그들이 이루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시기는 이미 지났다.
뭔가 이루어지길 바라며 꾸미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바로 당장 나서야 한다.
“다들 성지로 돌아가시오! 어서!”
메타트론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라지엘, 당장 천상의 도시에 남은 성배 하나를 회수하러 가지. 그리고 지옥의 성채 근방으로도 가야하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바쳐야 해! 이대로 흘러가게 둘 수는 없어!”
유배자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지?
성배를 순순히 가져다 주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아졌다.
그렇다면 그가 직접 회수하면 될 일이다.
미카엘은 도시에 있는가?
없었다.
“그 쥐새끼를 당장 찾아야 한다!”
그들은 아직 기계무덤에서 헤매고 있다.
희우와 파티원들과 합류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서로가 우선 깜짝 놀랐고, 그 다음에는 빠르게 정보를 교환했다. 솔로몬은 미아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약속해야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미아를 빌려주기를.
미아는 아서와 트동트를 상대로 갈고닦은 애교로 솔로몬을 그럭저럭 녹여내었다.
사실 미아가 무슨 짓을 했건 그 빛나는 재능을 본 솔로몬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미카엘은 파티원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한다.
나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한 만큼 파티원 개개인에게도 흥미를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곧바로 보스전을 할 일은 없을 거야. 우린 일단 지옥의 성채 쪽이 어지러워진 동안 성배를 찾아야 해.”
악마 측에도 존재하는 것들이다.
결국 이 세계에서 이것저것 바라는 보스들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은 성배가 있어야 이루어진다.
조각난 기계신을 다시 부활시키려면 모든 성배가 모일 필요가 있다.
천상의 도시처럼 지옥의 성채도 성배를 보유하고 있다.
그 내부로 잠입하기에는 이런 개판이 최선이다.
그리고 저쪽 개노답 삼남매 중 하나도 찾아서 조져야 한다.
성배를 최대한 많이 모아두고, 우리가 승자를 정한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로스엘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는 끝나는 순간까지 잠시도 쉬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미카엘에게는 들리지 않게 희우에게만 말했다.
“메타트론도 움직일 확률이 높아.”
“왜요?”
“그 편이 더 개판일 테니까.”
“미궁의 심리 읽기군요.”
지금 성배 자체에 가장 집중하고 있는 것은 메타트론이다.
다른 보스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우리는 메타트론과 성배 먼저 모으기 경쟁을 해야할 확률이 높다.
나헤마가 바알을 치고, 그 나헤마를 다시 미카엘이 치고, 그리고 메타트론이 모습을 드러내면 결국 서로 치고받겠지.
우리는 최대한 존재감 없이 성배를 털고 다닌 후, 로스엘에게 줘야한다.
“누구? 저요?”
“당신이 해야 해요.”
“파괴를……?”
“기계신을 되살리고 이 세상과 함께 죽으라고 명령하세요.”
“네가 하면 안 되나?”
“우린 이 왕국 소속이 아니거든요.”
로스엘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구나. 진짜 이루어지는 거였어?”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실감이 안 나서.”
생각에 잠기려고 해서 일단 궁둥이를 걷어차서 출발시켰다.
엄청나게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