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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494화 (46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494화

왕국 - 막간

“두 번째 보스까지 부활 스택 한 번으로 퉁 쳤으면 엄청 잘된 거야. 다들 변수에 강해졌군.”

실로 그러했다.

내가 방패를 들고 가장 큰 변수를 감당하긴 했으나 아서는 모르되 에길이라면 한 번쯤 사망할 수도 있었다.

내가 모든 공격을 패링으로 감당한 것은 아니다.

3초에 한 번씩 뭔가를 쳐낸다는 것은 이미 엄청난 수준의 탱킹이지만 달리 말하면 겨우 3초에 한 번.

에길은 잔뜩 그슬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천사가 아니었다면 죽었겠지. 치천사의 날개는 정말로 튼튼하군.”

“에리나의 날개도 소름 끼칠 정도로 단단했죠.”

희우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쪽도 온통 그을려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새 갑옷 꺼내야겠네요.”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다. 방어구는 무기보다도 소모품인 경우가 많다.

애초에 우리 파티는 그다지 귀한 자원으로 방어구를 제작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지금부터는 조금씩 지속 활용 가능한 방어구를 모아갈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딜이지만, 딜이 충분해지고 나면 안정성을 끌어올려야 한다.

* * *

* * *

부활 스택 몇 개로 땜빵 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맞아도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생기는 단계지.

제니가 영혼 없는 눈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가끔 생각하는데, 그냥 평상복이어도 별 차이 없는 것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봤던 적이 있었지. 별 것도 아닌 걸로 팔다리가 날아가면 생각이 좀 달라질 거야.”

어차피 스쳐도 죽음의 위기니까 무의미하다?

죽음의 위기가 아니라 진짜 죽음이 될 거다.

제대로 장갑까지 다시 착용하고 제니가 한숨을 쉰다.

“이제 몇 더 남았죠?”

“보이는 걸로만 보면 둘이 더 있는데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군. 짜잔 하고 더 나타날 수도 있다고 봐.”

“사탄과 싸워야 할까요?”

“패턴을 모르니까 싸워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되는 거죠?!”

“패턴을 모르니까 한번 붙여보고 싶겠지?”

“억울하게 까임 당하네요…….”

억까라고 줄이지 않고 묘하게 반듯하게 사용하는 것이 또 제니답군.

“자 이제 루팅을 해볼까.”

나헤마는 껍데기를 남기지 않았다. 바벨의 자식이 아닌 그는 남길 거죽이 없다.

그의 몸은 온전히 본체 그대로였으며 클리포트에 앉아 누적된 세월이 어떤 형태로 남아버릴 여지는 없다.

나헤마라는 악마는 여기서 사라졌다.

남은 건 시체일 뿐이다.

“오랜만에 보고 오랜만에 잡았군.”

“큰일 날 뻔한 것 같아요. 벨페고르를 잡아두지 않았다면 아주 까다로웠겠죠.”

“튼튼한 마법사는 그 자체로 재앙이란 말이지.”

그리고 나헤마는 어쨌건 그가 지닌 권능을 제하더라도 상당히 튼튼했다.

에길이 아니더라도 공격력 위주로 먼저 세팅을 마친 우리 파티원들이 아니라면 여유를 허용했을지도 모른다.

시체가 입고 있던 가죽갑주를 척척 벗겨낸다. 이런 루팅은 셀 수도 없이 많이 해보았다.

“의외로 깨끗하네요.”

“나헤마 일생의 역작이거든. 이것보다 좋은 민첩 마법직의 갑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아.”

“어……. 설마 제 건가요?”

그야, 가장 두들겨 맞는 일이 자주 있는 민첩직은 희우다.

“으에엑.”

싫다는 소리는 안 하지만 싫은 소리 자체는 나온다. 나헤마는 어쨌건 시커먼 남정네고 썩 미남이라 할 인물도 아니다.

뱀에 비견되는 만큼 비열한 마법사의 상이다.

“비열하다는 건 사실 유배자에겐 칭찬이지만요.”

마법이 걸린 갑옷 대부분이 그렇듯이 희우가 주섬주섬 걸치자 사이즈가 맞춰진다.

다만 나헤마의 취향인지 몸에 착 달라붙어서…….

“블랑쉐 언니 수트 같은 느낌인데. 그거보단 덜 타이트하지만.”

희우가 부끄러워하지는 않으니 다행이군.

……라고 생각했는데 음, 귀가 좀 빨개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녀석의 기준을 잘 모르겠단 말이야.

블랑쉐는 만족스럽게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는군.”

“그게 좋은 이유가 움직임을 전혀 방해하지 않아서야. 거기에 방호력과 내구력도 엄청나지.”

“다른 기능은 없어요?”

“모든 아티팩트가 발동형 기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냐. 단지 스탯만으로 아티팩트인 경우도 있으니까. 희귀한 진주용의 가죽으로 만든 거니까 마법에 대한 저항력은 더 올라갈걸?”

“어디까지 맞아도 될지 테스트를 해봐야겠군요.”

“남은 녀석 중에 마법사형 보스는 없으니 나중에 미아에게 도와달라고 해.”

나헤마는 아마 갑옷이 망토나 로브에 가려 겉으로는 보이지 않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법 시전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기를 원했겠지.

그래서 그런 기능에만 집중되어 만들어졌다.

그냥 높은 방어력, 그냥 높은 마법저항력, 그리고 그러면서도 일상복 같은 편안함.

뭐 오래 살면 그런 걸 추구하게 되는 법이다. 언제나 갑옷을 걸치고 살 수는 없지 않나.

“그런데 달리 비장의 물건 같은 건 없네요.”

“유배자 출신이니 있었겠지만, 다 소모했겠지. 요새를 털었으면 뭐가 많았을 건데 말이야.”

그게 전부 무너져 내려서 말이지. 진득하게 하고자 한다면 털 물건은 많았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다 손에 넣었으니 문제는 없다.

운이 따라준다면 심연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좋은 물건일수록 심연의 깊은 곳까지 가라앉는 법이니까.

그리고 일찌감치 수색을 하고 있던 미아가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리프트가 있어요!”

“드디어 좀 쉴 수 있나?”

“3일 정도는 휴식할 수 있을 겁니다.”

리프트를 통해 왕국으로 돌아가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전혀 달라진 시간의 흐름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메인 던전이 일시정지 되지 않는단 뜻이다.

딱 좀 쉬기만 하라는 뜻이지.

“주변 지형지물들 보니까 여긴 무너져 내린 [영원한 분쟁] 지역이군.”

굳이 필요하지 않은 곳에 나중에 써먹으면 더 좋은 게 있다?

그럼 일단 내버려 둬 보는 것도 방법이다.

만약 그때 그걸 활용했다면 여기서는 비활성화된 리프트를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겠지.

위에 있는 건 바알이다.

메인 중의 메인 보스 중 하나.

그런 것까지 잡아야 겨우 휴식 한 번이 주어진다면 마음이 아파지겠지.

“정신적으로건 몸이건 좀 쉬긴 해야겠군요.”

휴식은 중요하다. 인간이 기반인 유배자들이 제아무리 단련하더라도 피로는 몰려온다.

그 사소한 것들이 어떻게 전투에 영향을 끼칠지는 알 수 없다.

더욱이 전투에서 얻은 경험들도 쉬면서 돌이켜볼 수 있어야 발전의 거름이 되는 법이다.

달리기만 해서는 결국 쓰러진다.

“바알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니 일단 넘어가서 생각하도록 합시다.”

“쥐새끼호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없을 거 같으니까 그냥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

“리온이랑 라리사는요?”

“빨리 데려와!”

의사 결정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파티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그대로 내달렸다.

그리고 바알은 그런 우리를 보고 있었다.

“뭐야? 저놈들 어디가?”

바알이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몸을 열심히 풀고 있었다.

나헤마가 당한 마지막 암습을 자신이 겪으면 어떻게 대처할지부터 여러모로 궁리 중이었다.

필멸자들의 전투 방식에는 아주 흥미로운 점이 많아서 스포츠로서 즐길 만하다.

그런데 상대가 탈주를 하면 김이 샌다.

저게 뭔지 안다. 가끔가다가 이 세계에 찾아오는 유배자 일부들은 저 문을 통해 사라진 다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무너진 폐허로 보이지만 유배자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을 걸 수 있는 탈출구였다.

다급해진 바알은 그대로 뛰어올랐다.

[안 되지! 이 녀석들아! 어딜 도망가!]

단 한 걸음에 그곳에 주어진 공간의 한계에 도달한다.

그리고 허공을 박차고, 물리적인 힘만으로 순식간에 음속의 벽을 찢어발긴다.

연속적인 소닉붐을 일으키는 동시에 권능을 휘감아 더욱 가속했다.

검은 어둠의 혜성이 어두컴컴한 심연의 하늘을 밝힌다.

그야말로 내리꽂히는 유성처럼 날아들며 바알은 저 유배자들을 놓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재미만 보고 빠지면 안 되는 거지! 이 세계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미카엘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며 지금 바알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면 되는가 깊이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곧 포기하고 그냥 구경하기 시작했다.

저 리프트라는 것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저 파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돌아올 것이다.

그럼 바알을 무찌르고 올라온 저 녀석들이나 혹은 상처 입은 바알을 상대하면 될 것이다.

본디 이 테마의 가장 주요한 최종 보스 둘이서 유배자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유배자들은 결국 리프트를 통과했다.

“조진 거 같은데요?”

“다시 돌아가면 즉시 바알전이 개막하겠군.”

“광역기 아니에요? 그런 속도로 내리꽂히면……. 혹시 바알도 [슈퍼 히어로 랜딩] 써요?”

“스킬로 가진 건 아니지만 그런 패턴을 구사하지. 저 녀석은 격투가형 인간형 보스 중에 최강 중 하나거든.”

“으윽.”

에리나 생각이 나는지 희우는 몸서리쳤다.

지금 다시 싸운다면 가볍게 승리할 수 있겠지만 기억이란 것은 그런 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패배를 의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안 졌거든요!”

“부활 스택 먼저 빠졌으면 진 거지.”

“……메타트론한텐 이긴 건데.”

입이 삐죽 튀어나온 상태로 왕국으로 돌아온다. 제니의 얼굴에 안도가 깃들고 리온과 라리사의 얼굴에 마침내 혈색이 돌아온다.

“전 이곳의 햇볕이 이토록 그리워질지 몰랐습니다.”

“저도요…….”

“너무 고생해줬어. 쥐새끼 파워를 이용한 그때 그 딜 상쇄도 최고였고.”

“이제 우리 결혼할 수 있는 거죠……?”

“그럼!”

느릿한 정화의 신의 치유보다는 역시 포션이다.

포션이 다 떨어질 상황은 생각보다 없다.

아예 부활 스택을 포션 대신 삼아 쓰면 썼지 말이다.

“전투에만 집중하는 것이 정세를 살피는 일 따위보다 훨씬 편하군.”

“나도 그건 이제 피곤하다네. 정복군주를 하는 게 더 좋았지 않나 싶어.”

실제로도 아서왕이 내정에 강했는지는……. 잘 모르겠군. 우리 쪽 지구에서는 그냥 전설 속의 인물일 뿐이었단 말이야.

그리고 어떤 요정이 말을 걸어왔다.

“쉽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오, 파라켈수스.”

자연의 신이다. 현재 당번이었던 모양이다. 리프트는 애초에 왕국의 문 옆에 있다. 왕국의 문 앞에서 신들이 돌아가며 당번을 서는 것은 언제 우리가 도움을 요청할지 몰라서이다.

“이번엔 마법사가 하나라도 더 필요하니까 당신은 고정이야.”

“상대가 누굽니까.”

“바알.”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압니까.”

“악마 격투가야.”

자연의 신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왜 그딴 걸 했답니까?”

“유배자가 아니라 보스거든.”

“……더럽게 세겠네.”

격투가도 따지고 보면 소드 마스터의 친척 정도 된다.

도대체가 유배자가 그걸 왜 하겠는가.

리치가 짧으면 언제나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 유배자다.

격투가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에리나같은 하이랭커급에나 별종이 존재할 뿐.

그리고 그건 언제나 스펙으로 유배자를 압도할 수 있는 보스 기준에서는 굉장히 강력하고 훌륭한 클래스라는 뜻도 된다.

“그러니까 마법사지.”

남은 문은 두 개다.

그럼 바알에 하나, 미카엘에 하나.

딱 좋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직접 메인 던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겪고 생환한 리온과 라리사는 우리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며 결혼식을 서둘렀다.

그러며 기가 막힌 소식도 하나 들었다.

“파라켈수스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언제부터 이름으로 부르는 사이가 된 거야?”

평소부터 메인 던전과 왕국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여기 들렀다가 간 지 며칠 안 된 걸로 아는데.

“교제를 신청받은 지 일주일도 안 되긴 했죠.”

자세한 내막을 들으니 꽤나 우스웠다.

파라켈수스 씨는 바깥에서도 연금술사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꽤 과거의 인물이다.

15세기 이탈리아 사람인가 그랬지.

거기에 요정의 신이기까지 하다. 여러모로 음. 아무튼 꽤나 틀딱한 사람이라고 해두자.

그 덕에 레미에겐 상당히 고풍스럽게 돌려 말해 왔었던 모양이다.

레미는 너무 당연하게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고 깨달은 것이 얼마 전이라고.

“왜 꿀술을 돌려주지 않냐고 하더라고요.”

“아하, 그게 그렇게 된 거군.”

둘 다 이제 꽃잎 요정이니까. 거기에 파라켈수스 씨는 아무래도 요정으로 지낸 기간이 훨씬 길지.

그래서 그 관습을 따르려고 한 거군.

“맞아요. 저도 그런 관습을 들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오해라고 생각할 줄 알았어요. 제법 진심이더라고요.”

“그래서 만들고 있어?”

“사실 재미로 만들어는 놨어서……. 맛있다고 해주던걸요?”

“용케 신이랑 사귈 생각을 하네.”

“제가 왕국의 지배자인 건 어떻고요? 그거에 비하면 다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대범해졌구나. 레미.

“어떤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

레미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꽃잎 요정이라서 X나게 잘생긴 거.”

하긴 보통 꽃잎 요정은 자기들끼리 결혼하게 되는 법이지.

거울만 봐도 눈이 높아지니까.

서둘러 준비된 리온, 라리사 부부의 결혼식도 참석한 후 여러 보급을 마치고 다시 리프트로 향했다.

“몇 분 안 지나서 부를 것 같으니까 잘 부탁합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나도 같이 들어가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그래. 그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옆에 선 루시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리온과 라리사를 데려가는 것도 제법 모험이었단 말이죠. 난이도가 그냥 높은 거보다 나쁜 게 변동하는 겁니다. 막판에 그런 건 사양하고 싶네요.”

왕국의 문으로 부르면 카운트해 주지 않는다.

한 번에 2명씩만 부를 수 있는 게 문제지.

인원을 갑자기 늘려서 생기는 재앙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완전히 군대를 양성해서 보내는 정도가 아니면 감당하기가 힘들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바알펀치죠?”

“막는 게 아니라 피해야 해. 전력으로.”

심호흡을 마치고 발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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