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497화
메인 던전 - Lv.17500 왕관을 쓴 거미 [바알בַּעַל](8)
아서는 그 찰나에 이 공격이 성공한다고 확신했다.
인간형인 바알의 1페이즈는 너무 빠른 것이 문제다.
그 속력을 평범하게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상대의 공격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자리가 있으니 거기에 검을 가져다 대는 것뿐이다.
바알은 그 동물적인 감각과 천재적인 발상으로 자신의 피지컬을 활용하고 있으나 달리 말하면 그것일 뿐이었다.
바깥에서도 백전, 미궁 내에서도 백전연마인 아서의 눈에는 어디를 어떻게 노릴지가 뻔히 보인다.
그럼에도 대검을 방어적으로 움직이기에 급급할 뿐인 속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를 더 느낀다.
생각보다 내구력 자체는 낮을지도 모른다.
빠르고 강하다.
그럼 그만큼 튼튼하다는 뜻도 되어야 하지만 미궁의 섭리는 꼭 그렇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기천사는 치천사보다 내구력이 낮다.
비슷한 맥락으로 바알은 제 모든 힘을 공격에 쏟고 있다.
죽어도 좋다.
혹은 죽어도 그만이다.
실제로도 그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닌 진정한 바벨의 자식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일 뿐일 것이니까.
* * *
* * *
그 심리에서 약한 내구력이 나온다.
방어할 생각이 없다.
마력이 그러하듯 권능 역시 생각에 따라 움직인다.
바알은 상대를 잡아 죽일 생각뿐이다.
자신이 얻어맞는다는 상정 자체를 하지 않는다.
다만 어설퍼서는 재생할 뿐이다.
총 내구력은 낮더라도 본체의 무한한 힘을 끌어다 수복한다.
중장 대신 재생력을 두르고 상대를 향해 달려드는 트롤이 생각났다.
이건 유배자에게도 존재하는 갈래다.
단단함이 아닌 회복력으로 탱킹 하는 탱커.
공격으로 상쇄당하더라도 재생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도의 딜누적일 뿐.
그렇다면 마주 상쇄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치명적인 일격이라면 어떠할까?
재생형 탱커는 그런 공격에 취약하다.
일격에 사망한다면, 최대 내구도 자체가 낮은 그들은 그대로 끝이다.
아서는 그간 많은 훈련을 거쳐왔다.
그가 본디 몸에 익히고 있던 기술 이외에도 리더로부터 전래된 잡기술의 연마에 힘썼다.
사실 이것을 잡기술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리더가 그리 부르는 이유는 안다.
기본기가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잡기술 연마는 도리어 해악이니까.
하지만 이미 충분히 단련된 전사에게 알려진다면 그것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화룡점정과도 같은 것이다.
마법은 어렵다.
그래도 몸을 쓰는 이런 것이라면 곧잘 해내는 편이다.
아서의 일격에는 많은 것이 깃들어있다.
그간의 세월, 바깥의 삶, 원탁의 기사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곧 스러질 성검의 추억마저도.
바알은 그것을 마주하고…….
눈을 부릅떴다. 입가에는 미소.
아서는 그 시점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미 빛나는 참격은 바알의 이마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너무 지근거리기에 제대로 그 규모를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바로 그렇기에 [선택받은 왕]의 검날은 최대한 압축되어 있다.
이 일격에 무사할 수 있는가?
그럴 자신이 있는가?
이해를 초월한 존재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아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안심하지 않았고, 바로 그렇기에 살아남았다.
자연의 신과 함께 서둘러 돌아온다.
강력한 스펙의 마법사는 여러 이상현상에도 불구하고 마법을 쉬이 구현할 수 있다.
나도 도와서 정말 최선의 속력으로 공간을 찢어발기며 돌아왔다.
그리고 아서와 바알의 충돌이 보였다.
쾅 하고 번쩍이는 빛.
그리고 퍼져 나가는 어둠.
짙은 어둠은 금방이라도 결정화될 것처럼 번져 나간다.
얼마나 큰 힘이 응축되었는지 모르겠다. 휘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이것이 일종의 영역처럼 기능하게 될 거란 사실을 예감한다.
[물러나!]
이런 짙은 연막 속에서 바알을 마주할 수는 없다.
아서는 어디로 갔지?
마법적 통신에서 메시지 같은 형식으로 아서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살아있군.
루시가 창을 든다.
그리고 어느 방향을 보았다.
[막을까?]
[그래 주시죠. 파라켈수스!]
[한다. 부디 시간을……!]
다음 순간 무언가가 나를 향해 정면으로 돌격해 왔다. 번진 어둠이 아직 완전히 퍼지기도 전이지만 그 일부 구간에서만큼은 휙 하고 날아가 버렸다.
루시는 창을 들어 그것을 막고 그대로 몸을 틀어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바알의 성격상 자신과 합을 겨룰 수 있는 루시에게 한동안은 집중할 것이다.
곧 달이 쏟아져 내렸다.
강제적으로 빛의 원소를 흩뿌려 어둠을 중화시킨다.
달뿌리개를 흔드는 미아가 제니에게 안긴 채로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야?]
[아서가 충돌했는데 밀렸어요.]
[그게 다야?]
[죽었을지도 모르긴 해요.]
미아의 마법이 아서에게 가 있었던 참이다. 그래서 미아는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행동이 엄청나게 빨라졌어요. 단순한 가속은 아니에요. 시간을 건드린 것 같았어요.]
[나헤마가 하던 짓이군.]
실제로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러나 바벨의 자식들이 타고난 권능은 어떤 의미로는 마법의 본질에 더 가까운 힘.
무의식중에 그런 형태로 발현했다고 하면 말은 된다.
[말이 안 되지만 일어난 이상 된 거라고 봐야겠지.]
그럼 1페이즈부터 고난이 예상된다. 미아가 시간의 흐름을 다뤄서 무력화시켜 두고, 그대로 아서가 전력을 후려갈겼다.
그럼에도 대응해 냈다.
[죄송해요. 시간을 굳히는 형태가 아니면 묶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적응한 저 녀석이 이상한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엄마가 우리엘이 되는 식으로 활로를 찾아볼까요?]
[아니, 그건 미카엘에게. 바알보다 빡셀 거니까.]
나는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미카엘이 지금 이쪽으로 덤벼들지 않는 것도 그랬다간 바알이 자신에게 덤빌 게 뻔해서다.
공멸하면 우리만 좋은 일이지.
[페이즈가 넘어가면 미아는 기믹을 파악하기 위한 수색을 해줘. 루시가 버티고 있고 파라켈수스가 합류했어. 1페이즈는 어떻게든 될 거고. 2페이즈도 그 정도 시간을 낼 수 있겠지.]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그리고 에길이다.
[이번엔 부활 스택 써야 합니다. 바알의 특징과 체력 수치는 알죠?]
[물리에 강하지. 훨씬 더 강하게 쳐야 하니 타당하군.]
수학 바이킹은 이미 계산을 끝마친 듯하다.
거의 전력을 다해야 닿을까 말까니까 사실 계산할 것도 없긴 하다.
악마인 바알이 비교적 마법에 약하다고 마법만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법은 근본적으로 광역기이며 그렇기에 단일 대상 타겟팅에는 약세를 보이는 면이 있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보스의 대가리를 쪼개는 건 물리력인 셈이다.
[1페이즈를 내가 넘기나?]
[그건 마법으로 될 겁니다.]
[2페이즈 기준으로 준비하고 있도록 하겠네.]
아서가 무사한지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부활 스택을 소모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너무 빠르게 움직이던데.]
[시간 관련으로 뭔가 깨달은 게 아닐까 합니다.]
[개나 소나 성장형 보스로군. 이거 참 치사해서 살겠나.]
[아서도 왕국 기준으론 보스 아닙니까.]
[그런 발상은 없었는데.]
왕국에서 깽판 치려다가 아서에게 박살 나는 랭커들은 꽤 흔한 편인데 말이지.
희우가 조금 창백한 안색으로 날아와서 아서를 챙긴다.
저 둘은 적어도 1페이즈는 쉬도록 해줘야 한다.
[루시도 단독으로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하겠는데. 미아, 제니 서두르자.]
자연의 신, 파라켈수스는 바알의 모습을 보며 골치가 아파옴을 느꼈다.
신들의 신인 루시는 전사로서는, 아니, 유배자로서도 그가 아는 한 최강의 존재다.
약간 이레귤러적인 파티 오르골을 제외하면 틀림없다.
그런데도 확연히 밀리고 있다.
중간중간 동작이 기이하게 빨라지는 부분이 있다. 빨리 감기와 재생을 반복하는 것 같은 이상한 포인트다.
신좌에 도달한 마법사로서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낀다.
‘권능을 시간계열 마법처럼 다루는군. 하지만 발동도 빠르고 술식이랄 것도 없어. 그야말로 본능이군.’
타고난 것을 넘어선 무언가다. 위대함의 편린된 존재들에 대해서는 연구해 본 적이 있다.
그들은 탄생할 때의 속성에 얽매인다. 그리고 완성되었기에 성장할 여지가 없다.
지닌 속성이 그 본질이며 그 무엇보다 강한 대신 그것에만 예속되어 있는 운명의 노예들이다.
‘벗어났다.’
언제나 아웃라이어는 있는 법.
‘이 메인 던전의 최종보스겠군.’
파라켈수스는 그렇게 판단했다.
루시는 힘겨워하지는 않았으나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린다.
상처가 점점 늘어간다. 포션도 없으니 그대로라면 곧 목숨마저 위험해질 것이다.
창의 긴 리치도 그냥 맞으며 파고드는 격투가에게는 의미가 없다.
스펙으로서의 공격력이 아주 높기에 쳐서 밀어내고 상쇄할 뿐.
실제로 파라켈수스가 이 전장에 도달하고 루시가 대신 바알을 떠맡은 지는 1분조차 지나지 않았다.
유니크 스킬을 발동하기 위한 잠깐의 시간 만에 이미 그렇게 몰렸다.
‘이러니 내가 공략할 생각은 못 했지.’
그리고 동시에 신좌에서 이 파티의 리더를 처음 봤을 때, 그리고 혼돈의 여신이 함께함에 희망을 보았다.
‘인도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오래전의 일인 것처럼 떠오르는 46서버의 전쟁, 그 한가운데에서 그가 혼돈의 여신을 위해 요정을 동원했던 일들.
‘멀리도 왔군. 정말 멀리도 왔어.’
어쨌든 파라켈수스 역시 닳고 닳은 유배자.
이제 와서 강력한 보스를 마주한다고 진정 두려움만을 느끼지는 않는 것이다.
유니크 스킬 [원환의 소용돌이]
유니크 액티브 [정언 명령 : 물리금지]
그리고 그가 저 보스의 카운터라는 사실은 옳다.
[원환의 소용돌이]가 말하는 것은 운명.
끊임없이 돌고 도는 세상의 이치다.
그리고 이 스킬의 보유자는 그것의 일부에 간섭할 수 있다.
운명이란 소용돌이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조금 뽑아내어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리적 공격을 금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루시가 창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그 스킬 참 오랜만이군.]
방어를 멈추자 당연히 바알의 주먹이 루시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바알 역시 손맛이 전혀 없음을 느낀다.
말 그대로 닿기만 했다.
“뭘 한 거냐?”
다시 두들긴다. 아무리 두들겨도 마땅히 동반되어야 할 물리적 파괴는 동반되지 않는다.
유니크 스킬 [정언 명령 : 이동금지]
[움직이지 말지어다.]
그 순간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자리에 고정된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힘이 부족해서도 강제로 묶여서도 아니다.
바알은 자신이 처음부터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닌 바위 같은 것이었다는 착각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지. 뭘 건드린 거냐?”
[내 주변에서의 짧은 평화다. 폭력은 나쁜 것이지. 안 그런가? 악마여?]
마찬가지로 범위 내에서 물리적 공격도 이동도 할 수 없게 된 파라켈수스가 말한다.
그것은 그사이 바알과 거리를 상당히 벌린 루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알이 껄껄하고 웃었다.
[언제 봐도 마법사에게 주기엔 참 비겁한 스킬이야. 안 그래?]
[당신만 하겠습니까.]
공격 수단이 정말로 물리뿐인 보스에게는 이 짧은 시간이 얼마나 유효한지 모른다.
바알은 빔을 쏘지도 못하고 입에서 불을 뿜지도 못하니까.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회피할 수도 없다.
때맞춰 파티 리더가 마법사를 끼고 도착한다.
[오랜만이구나. 미아.]
[인사할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진짜로 없으니까 빨리 저거부터 치워!]
악마는 비교적 마법에 약하다. 그건 분명한 사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극인 빛에도 약하다.
그리고 기계신은 돌고 돌아 심연에 대비되는 빛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쥐새끼호는 진작부터 바알 맵의 상공까지 대피해 있었다.
애초에 공격할 생각도 없는 포지션이다.
바알을 쏘아 떨어뜨릴 수가 없을 테니까.
바알 역시 자신이 맞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방치했다.
붉은 선이 그인다.
바알을 노리는 게 아니다. 바로 그 위편을 가리킨다.
미아가 자신이 짜고 있던 술식을 넘긴다.
세 명이 함께 그걸 만지기 시작했다.
붉은 실선이 빛으로 가득 차기 전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오른다.
우연이겠으나 흡사 볼록렌즈 같은 형상의 3차원 입체 마법진이었다.
“저 포격 자체는 물리 비중이 더 높으니까 에너지만 뽑아다 쓴다!”
파라켈수스는 어렵지 않게 그 대작업을 구현하는 것에 따라왔다.
거대한 렌즈에 빛이 쏘아진다. 강력한 메타트론의 권능이 그 안에 집결되고 노심화되듯이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응축되고 응축된 끝에, 바로 아래에 있는 바알을 향해 수직으로 꽂힌다.
아서는 멀리서 눈부신 빛의 기둥이 우뚝 섬을 보았다. 충분히 바알의 1페이즈를 날려 버리겠거니 여겨진다.
엑스칼리버는 일단은 물리 판정이니 저것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더는 혹시 모를 위험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미아를 바닥에 내려둔 제니가 쌍검을 뽑고 그대로 교차한다.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타들어가는 대악마를 향해 그것을 겨누고, 미아가 소리쳤다.
[제니! 지금! 고양이 광선!]
[창세의 빛줄기거든요!]
어쨌든 모든 상성을 무시하는 대미지가 빛에 지져지는 바알의 인간형을 추가로 지져 버렸다.
약 10초간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렸다.
정언 명령의 효력은 진작에 다했다. 애초에 그리 길지는 않다. 길어서는 안 되는 효과이기도 하다.
파티원들도 [왕국의 문]을 통해 지원 나온 신들도 숨죽이고 지켜보지는 않았다.
그다음을 대비할 뿐이다.
그리고 빛이 꺼져 사그라지고 있던 폭심지에서, 돌연 어둠이 피어올랐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제대로 영역을 펼치는 파괴적이고도 강력한 기류가 온 사방을 뒤덮는다.
메시지가 떠오른다.
[마지막 편린]
[왕관을 쓴 거미, 바알בַּעַ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