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00화
메인 던전 - Lv.17500 왕관을 쓴 거미 [바알בַּעַל](11)
힘은 검술이요, 곧 기예라. 바알은 기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힘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충분히 강력한 힘이 있다면 그에 걸맞은 검술이 생기는 법.
바알의 검술이란 사실 기술이라기보다는 숙련된 야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맹수가 이빨과 발톱을 사용하는 것에 기술이 있는가?
그것은 그저 본능이다.
눈앞을 가로막은 두 작은 유배자들은 비록 검보다도 작았으나 그 끝에 맺힌 스킬의 은혜들과 눈부신 기예로 그의 검을 받아낸다.
바알은 아주 좋은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뒤틀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는 침잠한다.
이 검의 숲은 그의 영역, 모든 곳을 하나하나 관조하기 시작했다.
* * *
제일 먼저 이상함을 느낀 것은 단독으로 움직이던 희우였다.
역할이 회피탱이자 기동대다.
그러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단독행동하게 된다.
* * *
* * *
* * *
그래서 휩쓸렸다.
“뭔가 이상한데?”
급격하게 이상해졌다.
검의 숲이 움직이는 형태가 이상하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형태의 팔은 가동 범위가 제약되기 마련이다.
희우는 그래서 그 사이를 파고들어 어떻게든 스피드로 따돌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 움직임이 딴판으로 변했다.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듯이, 마치 바알과 지금 당장 마주하고 있는 듯 움직인다.
희우가 움직일 퇴로를 차단하고 그 위로 다른 검이 떨어진다.
쉴 틈 없고 위험하지만 어떻게 버텨낼 만하던 수준의 위협이 한순간에 수십 개의 기요틴 아래에 목을 드리운 것처럼 소름 끼치게 변했다.
기천사의 속력으로도 애초에 움직임을 제약당하니 방법이 없다.
버프를 켜고, 검날을 들어 정면에서 받아친다.
단검은 이 경우에는 아주 성능이 나쁜 무기다.
그러니까 배운 것들을, 살면서 배워온 모든 것들을 활용한다.
공감각의 감각 속에서 음속보다야 느리지만 그래도 보고 피하는 건 한없이 힘든 속력으로 내려치는 검을 인지한다.
천사가 되어 비행을 익히며 가장 많이 는 것은 공간 인지력이다.
세상은 3차원이다. 평면 위의 2차원이 아니다.
다양한 각도로 달려드는 거대한 검날들을 하나하나 단검을 가져다 대며 궤도를 바꾸고 빗겨 흘린다.
세 번의 작업 끝에 탈출로가 생겼다.
그 틈으로 잽싸게 빠져나오자 요란한 소음이 한발 늦게 바닥의 어둠을 헤집어놓는다.
흐물거리는 팔들은 금방 다시 일어나며 희우를 찾는다.
“갑자기 팔에 눈이라도 달렸나?”
진짜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생각조차 곧바로 변한다.
종횡으로 베는 각도가 너무 절묘하다.
날개 끄트머리에 거대한 검격이 스친다. 손상은 없었지만 생겼다면 진짜로 위험해졌을 것이다.
“뇌도 달렸잖아……. 고도를 더 높여야 하나?”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처리 능력이 분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좀 너무한데.”
그런 중얼거림이 나온다. 다시 몇 번이 검격이 스쳐 지나간다.
희우니까 피하는 것이지 다른 멤버들은 어떨지 모른다.
쳐내고, 튕겨내고, 검에 타서 이동하고, 종횡무진 정신없이 빠져나가야 한다. 그러면서 바알의 본체를 쫒고는 있지만 현격히 느려진다.
거기에 회피 난이도가 갈수록 상승하고 있다.
바알과 일대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바알 본체를 마주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더 곤란에 처했다.
다행스럽게도 완전히 산개하기 전이라 근방에 있었기에 망정.
루시와 아서는 마법사인 파라켈수스를 중심으로 바삐 움직인다.
여러 마법적 보조가 몸에 깃들고 도움을 준다.
루시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 유니크 액티브를 동시에 발동해야 했다.
아서 역시 이미 버프를 전부 작동시켰다.
[좋지 않은데. 이러면 딜타임이 나와도 쏟아부을 화력이 없잖아.]
[동감입니다. 혼돈의 여신.]
[신좌는 내려놓은 지 좀 되었으니까 그렇게 그만 불러줘…….]
심연 공략 때 다시 잠깐 신좌에 앉힐 것이란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가.
아서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돌아가기 싫어하겠지.
그리고 점점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사라져 간다.
바알의 검은 거대하고 또 거대하면서도 묘하게 절도가 있다.
그러나 형식은 없다.
단지 적합한 루트로 점점 최적화되어 가는 힘과 속도의 검이다.
하나라면 어떻게 맞대어 쳐낼 수 있다.
버프가 덕지덕지 발려서다.
둘이 넘어간다면 혼자서는 견뎌낼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공격을 회피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깝다.
본체 역시 어둠에 휘감긴 더 강력한 공격을 난무하기 시작한다.
그 무질서 속에 존재하는 묘한 질서, 야성이라 불러야할 매서운 무언가가 점점 더 전황을 나쁘게 만들고 있었다.
[이거 검술이 아닌데?]
[하지만 검술이군.]
그나마 루시는 사정이 좀 나았다.
단순히 스펙으로만 따진다면 악룡을 제외하고는 따를 자가 없다.
아서가 밀리는 것을 보며 조금씩 분담을 늘린다. 쳐내는 것도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 날이 서 있으나 검사로서의 기예가 뛰어나진 않다.
창날을 대고 밀어내어 흘리는 것이라면, 그래서 다른 이가 견뎌낼 정도로 만드는 것이라면 어찌 가능하다.
당연하지만 상처도 늘고 있다.
막아서야 하니까 피하질 못해서다.
그런데, 이 지경이 된 지 3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뭐 방법 없나?]
[모르겠군요.]
전방의 전사들만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전후방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기에 마법사는 마법사대로 괴롭다.
[후, 이 나이 먹고 이렇게 현장에 뛰는 거 아닌데.]
루시가 즉시 파라켈수스에게 꼽을 줬다.
[내 나이 먹고는 맞나? 어?]
[아, 거 좀 불평 좀 할 수도 있지요.]
마력 방벽으로 버텨낼 강도가 아니다. 장벽을 두르는 한편으론 공간을 왜곡하고, 물리법칙에 간섭하며, 권능을 중화하기 위해 빛을 끌어다 넣어야 했다.
그리하고서야 겨우 물리적 충격이 마력 방벽으로 견뎌낼 수준까지 내려온다.
루시가 신경 써서 막아주고는 있으나 공격 자체가 쉴 새가 없다.
당연히 보유 마력은 수직 하락 중이다. 이대로면 조만간 바닥난다.
에길은 그 모든 광경을 보면서도 보지 못한 척해야 했다.
어차피 그가 뭔가 큰 거 한 방을 먹이지 못하면 희망은 없다.
그러니 자신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택을 채워갈 뿐이다.
그리고 그럴 정신도 없다.
바짝 얼어붙은 긴장감 속에서 끝없는 순환을 유지한다. 그의 도끼에 깃든 이 흑룡의 순환이 멈춘다면 그때야말로 바알을 저지할 최후의 수단이 사라지는 셈이니까.
불편하지만 방법이 없다.
이럴 때만큼은 차라리 방패를 드는 탱커가 되는 편이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곧, 블랑쉐가 합류했다.
이미 너덜너덜하다. 물리에 강한 악마임에도 포션은 텅 비어 있고 몸이 성하지 못했다.
[내 자리도 있나?]
그렇게 물어라도 본 것이 그나마 아직 제정신이긴 하다로 보였다.
[블랑쉐, 단독 행동이 불가능했나?]
[무리였다. 팔이 죄다 눈이라도 달린 것 같더군. 난 저 공격을 받아낼 수가 없다.]
마법사는 이미 있다. 서브가 필요하진 않으니 디스트로이어를 든다.
사격으로 물리적 충격을 상쇄한다. 그 와중에도 피한다.
루시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점점 깊어졌다.
다시 1분 정도 지났을 때, 마침내 파탄이 일어났다.
직격으로 당했다.
바알은 공중 콤보를 구사하듯 연속적으로 자세가 무너진 루시를 두들겼다.
그러나 창대는 놓지 않는다.
아서가 끼어들어 비틀며 구출한다. 검은 창과 성검이 서로 교차하며 바알의 송곳니를 밀어내었다.
마법이 쏟아진다. 그러나 마법은 거대한 물리력 자체를 상쇄하기는 너무 힘든 수단이다.
통째로 진영이 밀려났다.
뒤편에 새로운 팔들이 솟아난다.
이마에 흐르는 피가 눈을 가리기에 닦아내며 루시가 다시 바쁘게 창을 놀렸다.
[오르골놈 뭔가 좀 하라고!]
귀가 가려워졌으나 긁을 시간이 없다.
너무 멀리 날아갔고 버프도 모두 끝났다.
이게 끝난 이상 파고들 수단도 없다.
속수무책이라면 속수무책인데, 좁은 통로의 미로라는 기믹이 있어야 할 보스가 기믹 없이 개활지에 등장하니 답이 없다.
그러니까 바로 그래서 무언가 기믹이 있다.
파티원들은 멀리서 보면 제법 괜찮게 버티고 있다.
나는 너무 멀리 튕겨 나왔다.
안전을 위해서긴 했지만 바알이 내게 계속 어그로가 끌리길 바라기도 했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팔들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마치 바알 본체와 일대일의 대치를 하고 있는 기분.
“제길, 그러니까 이게 사실 안에서 해야 하는 건데.”
지옥의 성채 내부는 전부 바알의 보스룸이다. 원래는 그래야 한다.
곤란하기 짝이 없다. 나헤마가 약화라도 시켰어야하는데 꼴을 보니 손도 못댄 것 같다.
쓸모가 없네. 쓸모가 없어.
방패로 패링하면서 전진하고 있으나 파티원들과는 충분히 멀리 떨어진 상태.
“이러면 미아뿐인데.”
애초에 여긴 나헤마 보스룸이지 바알의 보스룸도 아니다.
더 잘하려고 했으면 위로 빠르게 올라가야 했다.
바알이 미쳐서 여기로 뛰어 내려오기 전에 말이다.
판단 미스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니, 이건 너무 억울하다. 바알이 미치광이인 게 왜 내 잘못이야?
“종족을 미리 바꿔놔야 했나.”
이 상태라면 더 어울리는 종족은 천사다. [섬광 재생] 같은 유니크 액티브를 가져다 쓰는 용사는 분명 좋은 클래스지만 이런 부분에서 한계가 있다.
결국 평타와 기본기 싸움인 와중에 필살기만 주렁주렁 탑재하는 건 그리 좋지 않다.
인간형 드래곤이라고 할 정도의 스펙을 보유하는 것도 단순 스펙일 뿐이다.
미궁은 원래 단순 스펙보다는 기초 스탯이나 스킬빨이 더 중요한 곳이다.
종족 특성 역시 그렇다.
“[왕관의 검]은 가급적이면 미카엘에게 쓰고 싶었는데.”
지금 쓰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아예 아까 써야 했다.
어둠의 악마가 우리 파티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이 검의 숲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서 이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변명은 소용없다. 해결을 해야 한다.
자, 미아야. 빨리 뭐 좀 해줘.
나라고 항상 뭘 해낼 수는 없다.
“제니, 그거 알아? 고양이는 원래 사막 태상의 동물이래.”
“그런 거 알 리가 없잖아요!”
바로 그 말을 들은 것처럼 제니는 바알의 영역 곁에 당도했다.
이쯤 되고나면 오히려 바알의 보스룸이 아니라 나헤마의 보스룸에서 전투가 시작된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단말기이자 중계기인 라파엘은 수신감도가 높은 자세로 저 멀리 안전한 곳에 존재하고 있다.
바알은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상상도 못 할 것이며, 해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 해! 불이여!”
“부 불이여!”
언령은 중요하다. 마법에서 그러하다. 상상과 생각만으로 의지를 행사하는 것은 상급자들.
그리고 그 상급자들도 입으로 굳이 영창을 하며 소매틱으로 손짓을 하여 그 의지를 더욱 구체화하고 정밀하게 가다듬는 법이다.
라파엘의 속성은 바람과 불.
그가 앉아 있던 세피로트의 힘이 민트 빛 고양이 천사의 몸에 깃들어있다.
그리고 작은 악마는 그 품에 코알라처럼 꼭 달라붙어 매달린 채로 소리 높인다.
“어둠을 갈라 광명을 보여라!”
“어 어둠을 갈라 광명을!”
“보여라!”
“보여라!”
제니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저도 모르게 미아의 유도에 따라 이미지를 구체화했다.
상상이 현실이 된다.
마법도 권능도 결국 근본은 그런 법이다.
순수한 힘의 권화가 바알의 영역을 통째로 두들겨 부쉈다.
구멍이 뚫린 공간 속에서 어둠이 왈칵 솟아오르고.
“바람이여!”
“바람이여어어!”
불길을 품은 사막의 광풍이 그 속을 헤집으며 어둠을 몰아내었다.
수십 개의 팔이 달린 거대한 거미의 형체, 그리고 그와 대치하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빛의 세례를 받아라!”
“비 비이잋!”
정확히는 불이다. 하지만 미아는 은근슬쩍 단어를 빛으로 바꾼다.
제니는 시키는 대로 영창처럼 권능을 다루었고 그 심리에 반응하여 눈 부신 태양이, 그리고 밝고 따뜻한 작열의 사막이 어둠의 검림 속에서 피어올랐다.
“죽어라 바알!”
“죽어라아아아!”
미아는 그렇게 외친 다음에 제니의 품속에 납작 달라붙었다.
엄청난 가속이 느껴진다. 제니의 상대적으로 납작한 가슴팍에 볼이 짜부러질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우오오아오아앙!”
어쩐지 신난다.
제니가 이렇게 활약하는 장면은 언제나 미아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미아는 항상 제니가 자긍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지나간 궤적 그대로 사막의 자취와 눈부신 태양을 남기며 제니는 돌격했다.
그리고 바알과 부딪혀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