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08화
메인 던전 - Lv.20000 [미카엘מיכאל](8)
면밀히 계획된 심리전이었다.
미카엘은 신중한 편이며 세월을 길게 쓰는 타입이다.
세상의 시간 흐름을 남다르게 본다면 필요한 순간 충분히 빠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범인의 시선으로서 나라면 그렇게 당할 것이라는 확신이기도 했다.
미카엘은 당했다.
그는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검을 더 잘 믿고 더 자부심을 가지고 덤볐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의심했다.
내가 무슨 수작을 부릴 것이라고 의심했다.
동시에 자신이 검이 가진 힘을 의심했다.
제 입으로 자신이 둔재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겸손한 이다.
하지만 그것을 남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이는 달리 말하면 자기신뢰가 부족한 이이기도 하다.
미아는 이것마저 어시스트했다.
천상의 군주는 공허한 존재다.
그러니 우리엘을 만들어 무언가 하려고 했겠지.
그럼에도 고요하던 그 호수에 돌을 던진 것이 미아다.
잔잔한 파문은 이윽고 파도가 될지도 모른다.
* * *
* * *
불안은 공평하다.
바알처럼 정신머리 없는 녀석이라면 오히려 먹히지 않았을 짓이다.
본래의 미카엘처럼 오만한 녀석이었다면 먹히지 않았을 짓이다.
미카엘은 유배자에게 배웠고 유배자의 약점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성공하고도 나는 당황했다.
[마지막 편린]
[미카엘מיכאל]
이건 이상하다.
[모두 일단 물러서요. 미카엘의 칭호는 저게 아닌데.]
단지 이름만이 표기된다.
저게 아니다. 원래 미카엘이 본체를 드러낸다면 그 앞에 붙을 호칭은 ‘하나님과 같은 자’이다.
그리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원래의 미카엘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칭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문득 납득할 수 있었다.
지금의 미카엘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런 칭호가 필요한 자가 아니다.
그리고 별다른 폭발이나 개막 패턴은 없었다.
사방에서 일어난 빛은 모여들었고 미카엘의 실루엣은 결코 커지지도 부풀어 오르지도 않았다.
내가 알던 미카엘이라는 천사 본연의 모습인 부정형의 에너지체로 돌아가지 않았다.
수십 쌍의 날개를 거느린 눈부신 빛의 은하가 모여 만들어진 거인이 아니다.
전사이자 포격형 보스인 끔찍한 조합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미카엘이 흩뿌리는 빛은 서서히 그 안으로 갈무리되고,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의 천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검을 들었고…….
간신히 때맞춰 반응했다.
빛이었다.
조금 전처럼 어정쩡한 아광속이 아닌 다른 무언가.
어쩌면 정말로 빛과도 같은 속도를 내는 무언가 말이다.
정신을 놓치지 않았기에 정신을 차릴 필요는 없었다.
막대한 충격은 세피로트의 힘으로 무마된다.
하지만 밀려남은 어쩔 수 없다.
미카엘은 아직도 내 눈앞에 있다.
[유배자여. 천상의 군주가 얼마나 고민했다고 생각하나? 그대들의 힘을 배우며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나?]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은 순수하게 페이크다.
이건…….
제 본체마저…….
[내 인정하지. 나는 어쩌면 유배자가 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벨의 자식을 버리고 미궁의 선택을 받아 세상을 주유하는 그런 필멸자가 말이지.]
나직하지만 빠르게, 말이라기보다는 의지에 가까운 무언가가 흘러 든다.
찰나에 내 귓가에 속삭이듯 미카엘은 중얼거린다.
[나는 이미 바벨의 자식으로서의 나를 잃었다. 남은 것은 그저 내 이름뿐.]
멀리 멀리 밀려난다. 어디까지 밀려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검을 맞댄 채, 점점 증폭되는 그 힘에 저항하기 힘들다고 느끼고 있다.
파티원들의 계획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 와중에 생각해야한다.
더 더 생각한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스쳐 지나가는 생각대로라면 미카엘은 아마도…….
[그렇기에 나는 그저 미카엘מיכאל. 그 앞에 어떤 수식도 없음이라.]
이 모습이 본체다.
빛이 꼬리를 끌며 사라지는 가운데 아서는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 당황이 공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황스러운 장면?
그건 언제나 있어 왔다. 애초에 이미 이룬 것들만 따져도 얼마나 황당한가.
그런 파티다.
아서는 즉시 추격하여 비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알은 분명 빠른 존재다.
그가 앉았던 클리포트 역시 동질의 힘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스펙, 그리고 압도적인 물리적 힘.
아서는 솔직히 말해서 리더만큼 그것을 잘 통제하고 있지는 못했다.
예행연습 한 번 없이 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공백이 생겼다.
다른 파티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옆에 있었던 아서마저도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리더와 보스의 일대일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리더에 대한 신뢰와는 별개로 모두 표정을 굳힌다.
이것은 사고다.
파티의 힘으로 강력한 단일 개체에 대적하는 것이 유배자의 방식.
그러니 단독으로 대치하는 것은 순간이라면 모를까 위험한 일이다.
페이즈가 넘어간 후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 모습을 조금 더 멀리서 보고 있던 희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메시지와 페이즈 변화가 나타났을 때는 성공했구나, 늘 그렇듯이.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리고 또 변수가 생겼다. 이것도 늘 그렇듯이.
서브 리더로서 대응해야 할 상황이다.
희우는 움직였다.
몸보다는 생각이 더 빠르다.
생각은 마법적 통신으로 이어져 사방으로 전달된다.
[일단 다들 하던 일에 집중합니다. 블랑쉐, 찾았어요?]
[아니, 아직 가브리엘의 행방은 잘 모르겠다.]
미아도 뒤늦게 합류하려다가 붕 뜨게 되었다.
희우는 생각했다.
제니는 특수한 케이스다. 정말로 순간적인 스펙 상승에만 모든 것을 투자한 케이스.
다른 파티원들은 제니에게 빌려준 스펙을 되찾아도 단순 대응이 어렵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한다.
[미아, 나와 아서를, 그리고 에길은 혹시 모르니 늦게라도 합류해 주세요.]
희우와 아서는 대인전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보일 수 있는 세팅의 파티원이다.
그리고 에길은 큰 거 한 방으로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렇게 셋이 미아의 도움을 받아 공간을 접어가며 움직인다.
제니는 완전히 이탈한 상태.
그리고 희우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바알의 콜로세움에는 리프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왕국의 문도 이미 발견되어 있었다.
다만, 이번엔 처음부터 제니가 시간을 번 다음 세피로트와 클리포트에 자리를 잡은 이들이 전투하는 형태로 흘러갈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왕국의 문은 예비의 의미로만 남겨두었을 뿐이다.
지금은 불러야 한다.
문짝을 걷어차다시피 열어젖혔다.
반대편에서 으르렁거리는 트롤의 소리가 들려온다.
악마인 루시는 이번에는 만약을 대비해 빠진다.
그녀는 분명 강하지만 극상성을 극복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대신 단순한 물리력적인 스펙으로는 왕국에서 최고를 다투고 있는 트롤이 있다.
드라간이 아주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뛰어든다.
“하하하하! 나 없이 될 줄 알았나!”
그리고 그 뒤편에서 트롤의 그림자에 가려진 천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규율과 금전의 신은 혼돈의 신좌에 종속되어 있다.
그가 꾸미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것을 포기한 대가로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한들 그 수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마법사다. 이플릭셔스나 파라켈수스와는 또 다른 의미로 말이다.
지상으로 내려온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는 신좌라면 자유라도 찾는 편이 맞긴 했겠지.
그리고 당연히 별다른 할 일이 없는 한량은 징집당한다.
벌레 씹은 표정인 것은 그 탓이다.
“내가 왜 이런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그건 당신이 유능해서니까 그렇죠. 빨리 일하세요.”
“후.”
파라켈수스와 비슷하지만 더 노골적으로 싫음이 드러나는 투정이다.
희우는 상황을 설명하고 시간이 없음을 주지시킨다.
규율의 신은 합리적인 인간이다.
종족이 천사였던 것도 악마보다 더 좋은 이미지였기에 그랬다.
마법사이면서 천사. 대천사.
루시와 비슷한 케이스다.
“방어적으로는 당신이 최고니까 안 써먹을 수가 있을까요?”
희우가 드라간에게 고개를 돌린다.
“이 사람 집어던지세요.”
“어디로?”
“저기로.”
빛은 이미 어딘가에 도달했다.
세상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곳.
무너져 내리고 있는 세상의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인 어딘가다.
미카엘과 오빠는 거기서 단독으로 마주하고 있다.
“젠장, 저긴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규율의 신은 얼른 뚝딱거리면서 마력 방벽을 쌓아올린다. 희우는 그것이 온전히 술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느꼈다.
규율의 신은 조금 이질적인 형태의 마법사다.
미아는 유니크 스킬을 가졌지만 결국 마법 사용을 보조하는 패시브일 뿐이다.
파라켈수스도 강력한 유니크 스킬을 가졌지만 결국 마법사의 약점을 메우는 유틸리티다.
규율의 신은 조금 다르다.
이자는 금전의 화신, 효율의 망자다.
직접 마법을 익히는 것은 최소한으로.
대다수의 마법을 액티브로만 구현한다.
그리고 달리 말하면 그렇게 끼워 맞추기만 하고도 신좌에 도달한 마법사다.
제니와도 비슷한 케이스다.
그저 가용할 수 있는 스킬의 위력이라면 무수히 많은 지능계열 신좌에서도 가장 강한 존재다.
드라간은 몸을 웅크리고 여섯 장의 날개로 감싸 깃털 달린 공처럼 변한 규율의 신을 집어 들었다.
“그립감이 아주 좋군.”
“끔찍한 소리 그만하고 빨리 던져요.”
애초에 위기 대응 기동대로서 한 조가 된 둘이다.
드라간은 그야말로 공간을 찢어발기는 요령을 담아 무시무시한 물리력으로 천사를 냅다 집어던진다.
희우는 이어서 말했다.
“저도 좀 던져줘요. 그리고 얼른 합류해 주세요.”
드라간은 그야말로 빛살처럼 날아가는 규율의 신의 구체를 보며 만족스러워 하며 손을 펼쳤다.
거구에서 나오는 투포환이 한 번 더 발사 된다.
나는 부활 스택을 보통 하나만 유지하는 편이다.
그것은 죽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최적화에 가깝다.
단 한 발의 탄환.
어차피 그게 먹히지 않는다면, 내가 내 목숨을 탄환으로 써서 상대했는데 상황을 끝낼 수 없다면 이미 뒤가 없기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을 대비한 것이라도 하나면 충분하다. 필요하면 그때그때 더 땡길 수 있으니까.
다만, 지금은 포인트가 그다지 없다.
하지만 난 혼돈의 신도다.
혼돈의 신이 버려지는 것은 제대로 사용하기가 너무 까다로워서일지도 모른다.
대전사로서 권능을 사용한다. 주사위가 구르고 내 패링 포인트 일부가 초기화되어 환원된다.
미카엘은 여전히 나와 검을 맞대고 있다.
마인드맵이 빠르게 변화해 간다.
혼돈의 주사위가 구르고 여러 가지 보정을 찰나의 찰나에 다 구겨 넣어 부활을 최대한 뽑아낸다.
포인트 환원은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짓이다.
그걸로 목숨을 만들어 내겠다고 하면 더욱 큰 손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부활은 아주 큰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당장 전투력에는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는다.
부활 스택이 많다는 것은 단적으로 보면 그만큼 약해진다는 뜻이다.
내 모든 포인트를 퍼붓고 2개의 부활 스택을 더 얻어냈다.
운이 조금 나빴다. 이것 보단 많이 나오는 게 평균적이다.
하지만 큰일일 정도로 적지는 않다.
그렇다면 된 것이다.
평균에 수렴하는 확률을 언제나 의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 하나는 미리 뽑아두는 법이다.
아서는 내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처음 나와 싸웠을 때 말이네.”
“지옥에서요?”
“그래. 그때 사용하던 그거 너무 위험하지 않나?”
마력으로 근육을 강제 조작하며 강화하는 방식, 그리고 체내에서 마력을 폭파시키며 이루어내는 오버 클로킹.
맞다. 그건 생물의 방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엔진의 원리에 더 가깝다.
정상적인 생물은 그렇게 움직였다가는 죽는다.
포션의 존재가 상정된 형태다.
그렇다면 그것을 목숨을 내버리면서 하면 어떨까?
내 복제가 [아후라마즈다]를 상대로 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3개의 스택이 있다.
이것으로 이 미카엘을 찢어발길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갈만큼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나는 파티 오르골의 리더다.
각자의 역할이 꽉 맞춰져 돌아가는 이 파티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포지션이다.
나는 변수가 생겼을 때, 그것을 대응하기 위한 조커다.
파티 플레이의 구멍을 막기 위해 뭐든지 다 하는 그런 포지션.
검을 든다.
쌍수가 더 좋다.
라파엘과 메타트론의 의지가 내게 깃든다.
철컥하고 뇌 속의 무언가가 맞물리는 느낌.
마인드맵의 변혁과 의식의 개변은 주관적인 시간으로는 길었으나 실제로는 미카엘에게 밀려나며 세상의 끝에 도달하는 그 시점에서 이미 완료되었다.
그리고 나는 본래 마력으로 하던 것을 기계신의 권능을 동원하여 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붉은 증기를 내뿜으며, 피를 연료 삼고, 생명력을 에너지 삼아, 그 모든 것을 가장 효율적인 힘으로 짜낸다.
인신공양이 강한 힘을 가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
목숨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원은 드문 법이다.
미카엘이 내 검을 받아내는 순간 이미 다른 검이 목에 가서 닿는다.
미카엘은 무표정하게 목으로 검을 받아내고 내 심장을 노린다.
하지만 난 이미 그곳에 없다.
라파엘의 바람과 태양이 체내에서 그대로 발현되며 타오른다.
시시한 권능 배틀이 아니다.
미카엘도 나도, 그 권능으로 물리적 싸움을 하고 있다.
시야가 점차 하얗게 백열한다.
순간 의식이 끊어지고.
아직도 미카엘은 눈앞에 있다.
“한 번 죽었군.”
처음 하는 일도 아니다. 시동이 꺼지기 전에 자연스럽게 엔진을 이어서 가동한다.
새로이 목숨 하나가 불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