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15화
메인 던전 - [빛과 어둠의 경계](6)
쥐새끼는 열심히 제 친구들을 통제하기 위해 힘썼다.
어둠의 정령왕이고 나발이고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끼어드는 것은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유배자 파티를 돕는 것도 좋으나, 어쨌든 오랜 시간을 동고동락한 쥐떼 친구들이 아닌가.
어쨌건 그렇게 쥐새끼는 제 친구들이 어줍잖게 탈출하는 것을 막았다.
쥐새끼호는 추가적으로 더 많은 어그로를 끌지 못했다. 진작 저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아 나헤마의 보스룸에 불시착해있었다.
위쪽에서 우당탕쿵쾅 하는 동안 쥐들과 탑승한 다른 어린 천사들, 그리고 노인들은 숨죽이고 그 자리를 지켰다.
사태가 진정되었음을 느낀 후에야 라지엘이 조심스럽게 바깥을 보았다.
쥐새끼호는 여러모로 손상이 심해 바깥을 제대로 관측할 수 없다.
라지엘은 온천에 머물고 있는 유배자들을 보았고, 상황을 물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그 소식은 쥐새끼호에도 전달되었다.
쥐새끼는 자신의 몸, 그러니까 성배였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 * *
* * *
* * *
불가능했다.
이 함선과 쥐새끼는 본디 하나의 신이었던 것, 그러니 다시 하나가 되었다.
쥐새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강철의 동체가 그다. 그리고 그가 이 함선이다.
아주 피로해 보이는 표정의 블랑쉐가 나타났다.
그녀는 함선 안으로 들어와 쥐새끼가 보고 있는 카메라에 대고 엄지를 들어보였다.
“너는 최고였다. 쥐새끼.”
[갑자기요?!]
“앞으로도 최고겠지. 블랑은 정말로 멋진 함선이야. 이걸 가지고 돌아갈 수 있어야 할텐데.”
쥐새끼의 짱구가 빠르게 굴러갔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오우! 큰누님의 세계로 가는 건가요? 저도 함께?]
“가능하다면 말이지.”
블랑쉐는 좌누아르 우블랑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정신이 없으니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장비는 사수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비는 다시 어디서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전리품이다.
블랑쉐는 파티의 전력 향상을 위해서라도 이걸 들고갈 방법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쥐새끼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저를 그만큼이나 생각해주시다니……! 이 쥐새끼! 고철덩어리가 되는 그날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사소한 오해와 착각이 벌어지는 가운데 라지엘은 씁쓸하게 리더와 대화중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그렇습니다.”
“세상을 부술거야.”
“그게 가장 안전하니까요?”
“맞아. 우리 왕국 입장에서는 이런 던전이 남아있는 것 자체가 위험부담이지. 이미 다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그대로 두기만 하면 문제없겠지.”
라지엘은 리더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잠깐 사이 몇 번이나 종족이 바뀌었는가. 지금은 데빌이다. 초췌한 것만 뺀다면 실로 악마적인 얼굴이었다.
보통 악마는 괴물이거나 미남으로 묘사되는 법이지.
라지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뜻대로 하시지요. 다만, 준비할 시간을 주겠습니까?”
“준비라니?”
“긴 삶을 마감하기 위한 약간의 유예 말입니다.”
리더가 눈을 가늘게 뜬다.
“죽으려고?”
“그래야지요. 사실 라지엘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불완전하게나마 살아남은 메타트론과 다르게 저는 그저 껍데기일 뿐.”
그러니까 나헤마와 내통하는 수도 있었다. 라지엘은 이미 바벨의 자식이 아닌 필멸자였으니까.
“미카엘의 선배셨군.”
“이제는 다른 누군가의 선배가 될 수도 있겠지요.”
“라파엘과 가브리엘?”
“그렇습니다.”
둘은 구석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여전히 불안해보였으나 그 사이 조금 더 안정된 것 같았다.
“저들은 살려주시겠습니까.”
“바벨의 자식에 나이 같은 게 있나?”
“갓 태어난 것들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 또 맞긴 하군.”
리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지엘은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확답을 들었다.
어차피 파밍 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털어간다고 했다.
노천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동료들에게 갔다.
모두 함께 늙어온 이들이다. 메타트론의 권속들.
그리고 라지엘이라고 해서 딱히 더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녀는 진작 미카엘에게 죽어 껍데기만 남은 필멸자다.
그러니 이들의 동료였다.
메타트론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겠지.
그는 기계신을 숭배하게 되었고 미궁을 우러러보게 되었을 뿐, 사탄과 큰 차이 없는 원리주의자였다.
모두가 각자의 생각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까지 관철할 힘이 있었던 것은 저 유배자들이다.
그뿐인 이야기다.
아즈라엘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는 좀 데려가라고 해주시지 그러오.”
“유리만? 다른 아이들은?”
에후디엘도 거든다. 라지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걸 말해야하는 것은 내가 아니지요. 어차피 우린 여기까지일 테니.”
“그런가…….”
에후디엘과 아즈라엘이 다시 한숨을 내쉰다.
그들은 한때 불멸을 꿈꿨던 유배자의 후예다.
불멸을 위해 바벨의 자식들을 불러들이고 그 권속이 되었으며 이제는 나이조차 잊을 만큼 오래 지내왔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영원한 삶에 고통을 느끼지 않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세월은 결국 모든 것을 갉아낸다. 열정도 욕망도 아무것도 없다. 이젠 지쳐있을 뿐이다.
사실 정리할 것도 없다.
너무 오래 살았다면 그 삶 자체가 이미 정리의 과정이 된다.
그저 인사나 하면 될 뿐이다.
각자 맡아 데리고 있던 어린 천사들에게 찾아간다. 유리는 나이든 천사들의 의향을 듣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리더를 찾아갔다.
“먼저 찾아오는 건 처음이네?”
“그러게요.”
유리는 차분하게 왕국에 해를 끼칠 생각이 없으며 가능한 조용히 지내겠다고 말했다.
애초에 어린 기천사로서 만들어진 그들은 다른 천사들만큼 강한 힘도 없다.
바짝 주눅들어있는 그 모습에 리더가 웃는다.
“뭐, 상관은 없지.”
“감사합니다.”
유리는 친구들에게 돌아가 그 사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곳으로 가야한다. 이곳에 있으면 죽는다.
아이들은 이미 어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우는 아이는 없었다.
어쨌건 모두 미카엘과 흡사한 형태의 기천사를 만들기 위해 시도되었고 실패했던 아이들이니까.
정말로 차분하게 작별인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유리가 아즈라엘에게 물었다.
“그냥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아즈라엘은 유리의 항상 차분하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유리야. 그것은 네 두려움이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도 같이 간다면…….”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어쨌건 메타트론님의 권속이니.”
“없는 분이잖아요.”
“하지만 내 평생 가장 오래 함께하신 분이지.”
그건 제게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에요.
유리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노인들이 지쳐가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건 그들의 삶은 그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정해진 수명만이 수명은 아니다. 유리는 그 사실을 저도 모르게 이해했다.
그저 한번 품에 안겨보았다.
이제 죽어가던 세계에서 멈춰있던 어린 천사들의 시간이 다시 흐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힘이 없어서 제대로 상대하기가 힘겨웠다.
그럼에도 나는 이 파티의 리더이며, 많은 것을 결정해야할 위치다.
더해서 이 메인 던전의, 이 세상의 향방을 내가 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니 그에 맞는 책임을 지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사실 그런 건 크게 관심이 없다.
제니는 여기저기 들쑤시며 미처 못 찾았던 것들을 찾아왔다.
아서와 에길도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서는 수색을 수행했다.
나는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는다.
희우가 근심에 찬 표정으로 날 지켜보고 있어 너무 부담스럽다.
“난 멀쩡하다고.”
“그건 알아요. 이건 다른 걱정이에요.”
“흠?”
뭔가 다른 생각인 모양이다.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일단 움직인다. 라파엘과 가브리엘도 처리해야한다.
“너희들은 여기에 있을 거야?”
“그럴 수는 없지. 나는 마침내 사랑을 손에 넣은 참이다.”
“…….”
당당한 라파엘과 별개로 가브리엘은 그 뒤로 숨어서 나를 흘깃거리고 있다.
하나도 안 귀엽다. 몇 번이고 죽을 뻔한 것 잊지 않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그저 평범한 치천사와 대천사다.
왕국에 두어도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둘이 알아서하게 내버려둔다. 바알은 드라간과 티격태격 중인 것 같다.
어쨌든 사상자 자체는 아무도 없어서 너무 다행이군.
미아는 단지 체력이 부족한 것 뿐이었기에 꽤 빠르게 회복했다. 그래서 솔로몬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스승님은…….”
적이 안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여기서 솔로몬이 다시 한 번 보스로 등장한다면 정말 모든 것이 끝장일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솔로몬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 너덜너덜한 몸을 보며 솔직히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리를 돕는다고 소모된 셈이다.
그는 명백하게 죽어가고 있다.
“오오, 제자야. 이 아이는 참으로 영특하구나. 잘 키웠어.”
“그럼요. 누구 딸인데.”
“하지만 기계신에서 파생된 세피로트나 클리포트를 너희 세계로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방금 나왔다.”
“그거 참 아쉽군요.”
미아도 실망한 표정이다. 만약 가능했다면 앞으로의 메인 던전을 거의 날먹할 수 있었을 텐데.
아깝기 그지없군.
“아직 더 많은 가능성을 탐구 중이에요!”
미아는 전리품으로 이 세계에 있는 것들을 좀 뜯어가고 싶어 했다. 얼마나 가능할지는 몰라도 솔로몬이 돕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마법적 연구인 셈이라 솔로몬은 만족해했다.
“그래서 스승님은 혹시 그, 같이 가실 생각 없습니까?”
어떻게든 살릴 방법은 있을 것이다. 솔로몬 같은 NPC를 왕국으로 이주시키는 방법은 게임 시절엔 없었다.
지금이라면 있을 법도 하다.
내가 모르는 루트의 결말이니까.
하지만 솔로몬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 세계와 함께 죽을 것이다. 심연의 깊은 곳에 가라앉아 보고 싶군.”
“미쳤군요.”
“미궁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마법 아니겠느냐.”
“정말 미쳤군.”
하지만 결국 마법사들이 극에 도달하면 미궁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미궁은 가장 위대한 마법, 혹은 미궁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것이 마법일지도.
뭐 어쨌든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그런 식의 인식이 통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결국 심연에 가서 닿게 된다.
무수한 세계의 잔해, 그리고 끝.
그것을 풀어 헤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미궁의 진실에 닿는 것이니.
“어쨌든 알겠습니다.”
솔로몬은 마법사답게 심연으로 귀의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너무 오래 산 마법사들은 심연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도 하니까.
창백한 얼굴로 뻗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규율의 신을 발견했지만 그냥 지나갔다.
얘도 살아는 있었군. 솔직히 이 녀석은 뭐……. 사상자여도 별 생각 안 했을 것 같은데.
고생한거 생각하면 아주 그냥.
그리고 굉장히 좋은 소식을 하나 더 들었다.
“리더! 리더! 창고 찾았어요!”
“이야. 못 깠으니까 일부러 남겨둔 건가?”
왕관의 검을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창고다.
골수까지 벗겨먹을 수 있게 되었군. 아주 좋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로스엘이었다.
로스엘은 빛나는 태양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확실하게 보인다.
무너져 내린 세상을 비추고 있는 태양 속에서 그 소원을 빈 존재가 눈을 감고 있다.
성배 둘을 치켜든다.
태양과 성배 사이에 이어진 빛이 조금씩 커지더니 하나가 된다.
비로소 기계신은 그 힘을 되찾았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조금 더 작아진 세상을 복구할 정도는 될 것이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로스엘이 눈을 떴다.
“오오오오, 다 끝났구나!”
“혹시 의식 있었어요?”
“나는 어떻게 보면 기계신과 하나였던 존재니까? 유배자 출신도 아니잖아. 내 근원은 여기였다고!”
솔직히 말해서 YHWH가 등장하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란 느낌이다.
혹시 모르잖아. 언제나 불안은 품고 있어야지.
로스엘이 대답한다.
“그럴 수도 있었던 거 같아.”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까?”
“지금은 내가 YHWH야.”
“……그게 그렇게 되나요? 혹시 보스 하실겁니까?”
“아니!”
로스엘이 개구지게 웃었다.
그리고 태양 속에서 빠져나와 나를 꼭 끌어안더니 볼에 입을 맞춘다.
“소원을 들어줬는데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속으로는 다른 생각 중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럼 YHWH버전의 로스엘과 싸울 수도 있었단 거군.
그건 너무 끔찍한데. 하니엘은 귀여운 수준일 것이다.
“솔직히 못 이길 것 같았는데. 미카엘은 너무 세더라.”
“저도 어떻게 이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짜다. 마지막에는 의식이 제대로 남아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기억조차 희미하다. 무언가 떠오르고 그 덕에 힘을 냈던 것 같긴 한데.
“뭐, 어쨌든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버티고 있을 테니까 할 일을 다 마치고 떠나도록 해.”
“로스엘은 여기 남을 겁니까?”
“난 이 세상과 함께 죽는 게 소원이었어!”
그렇겠지.
로스엘을 믿고 할 일을 모두 끝마쳤다.
실제로 얼마 남지도 않은 세상의 가장자리가 무너져 내리려다가 멈추는 것이 보였다.
이래서 주요 인물들의 호감도는 최대한 올려두는 게 좋다.
그냥 싸움만 잘해서는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이 너무 많다.
모든 일을 끝마친 후, 남을 이들은 남고.
떠날 이들은 떠났다.
로스엘은 무너져 내리다 만 공간을 보았다.
기계신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사실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식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로스엘이 기계신의 전원을 내리는 행위다.
온몸을 비틀어 유지되던 이미 멸망한 세상의 셔터를 내리는 행위다.
진작 저 심연 속에 가라앉아 하나가 되었어야할 세상이 드디어 순리대로 될 뿐이다.
남아있는 이들이 보인다.
늙은 천사들과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데미 리치다.
다른 이들은 모두 떠났다.
어떻게 쥐새끼호도 가지고 떠난 모양이다. 로스엘은 자세히 모른다.
굳이 남아있는 이들과 인사하지는 않았다. 각자 알아서 끝을 택한 이들이다.
천천히 기계신의 빛을 꺼트린다.
너무 긴 세월 동안 이 세상에서 고생해준 신좌들이다.
태양이 흐려진다. 세상도 흐려진다.
조금씩 더 큰 어둠에 잠겨간다.
모든 것이 가라앉는다. 격렬하지는 않았다.
불빛이 미약해지듯이 천천히 세상이 어두워질 뿐이었다.
그리고 하강하는 듯한 느낌.
로스엘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태양이 빛을 잃어가는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관찰한다.
모니터의 명암이 내려가듯 점차 시야가 암전되어 간다.
로스엘은 이 세상에서 보냈던 세월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너무 길고 많았다.
그리고 고장 난 탓에 모든 것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 땅도 한때는 온갖 도전자와 유배자들이 살아가던 터전이었다.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길러내던 땅이었다.
그것이 아니게 되고 왕국의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이 세상은 이렇게 되어야만 했다.
드디어 이루어진다.
시야가 완전한 암흑으로 물든다.
아직 세상은 남아있다. 하지만 잠깐일 뿐이다.
전원이 내려간 모니터처럼 어두운 속에서 로스엘은 조용히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즐거웠어.”
그리고 아주 먼 과거에서 태어났던 기천사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로스엘이었던 작은 활 하나가 어둠 속에서 눈물처럼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유배자들이 서든데스라고 부르는 현상과 함께 저 심연의 깊은 곳으로 말이다.
그렇게 어떤 왕국이 그 이야기를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