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16화
왕국 - [심연] 탐사 준비(1)
추가적인 보스전은 없었다.
로스엘은 순순히 시간을 더 주었고 호들갑을 열심히 떨어대었다.
놀라운 것은 그런 대화에 어떠한 그늘도 없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택한 죽음을 앞둔 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
솔로몬과 다른 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들의 고향과 함께하기를 택했다.
아서가 세월의 무게를 말한다.
“나는 저럴 자신이 없군. 못 다한 일은 너무나도 많으며 아직 하고 싶은 일도 정말 많다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완전히 닳아 사라지려면 저들만큼 살아봐야 할지도 모르겠군.”
“아서는 돌아가서 그걸 다 이루어도 저렇게 안 될 자신이 있습니까?”
“성배 탐색은 내 의무긴 하지만 그게 아주 재미있는 일이냐면 그렇지는 않지. 그래도 우선은 멀린부터 찾아야겠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만의 발할라를 찾아 떠돌다가 어디선가 전사로서 쓰러지겠죠.”
“브리튼은 좀 가만히 놔둬줬으면 좋겠군. 그래.”
“선처해보지요.”
* * *
희우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다. 어디 아픈가 싶어서 신경을 썼더니 그렇지는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미아와 솔로몬은 쥐새끼호를 어떻게 왕국으로 가져갈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중 한 가지가 먹혔다.
“호오. 결국 신좌란 어느 왕국에나 존재하는 것이니 리프트를 통과해도 출력 자체는 유지되는군.”
“이렇게 되면 의문스러운데, 다중 왕국 시스템을 미궁이 설계한 이유가 뭘까요?”
“무한한 가능성을 위해서 아니겠느냐. 나 또한 그 덕에 너희를 만났으니.”
“가능성이라, 그것도 마법의 일부라고 간주할 수 있겠죠?”
뭐 재밌어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제니가 미카엘의 보검을 가져왔다.
그가 사용하던 그 검이다.
“이건 사실 아티팩트도 뭣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실제로 그렇다. 저건 바알의 검처럼 제 송곳니나 다름없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다.
미카엘이 검술을 익히기 위해 만들어 오랫동안 사용해온 그냥 그 자신의 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름이 떠올랐다.
[어느 천사의 검]
“아티팩트화 되었군.”
이런 아이템은 처음 본다. 게임 시절에는 더미 데이터로도 존재하지 않던 무언가다.
그리고 미카엘을 쓰러트린 후에 아무런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도 그렇다.
다 끝나고 나서야 하는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가 진행한 것이 완전히 새로운 루트라는 것이 정말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임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는 먹히긴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디선가 좌초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관점에서 보면 엔딩까지 도달하는 일련의 상황은 정상적인가?
게임이라면 이렇게 밸런스가 망가진 게임이 또 없다.
얼핏 보면 여러 가지 상호작용이 잘 설계되어있는 것 같으나 지나치게 꽁꽁 숨겨져 있거나 너무 대단한 능력을 요한다.
도리어 게임이라 생각하면 어색해진다. 그런건 제대로 만든 게임이 아니다.
‘현실이 되었으니까 다르겠지~’ 같은 식으로 편하게 생각하기엔 위화감이 든다.
미카엘이 마지막에 했던 말도 떠오른다.
위대함의 편린에 그런 설정은 없다.
그들도 모를 것이라고?
미카엘은 무언가 더 알았던가.
그래서 심문을 해보았다.
바알은 이미 완전히 제니의 제자나 다름없는 포지션이었고 스스로도 그걸 납득하고 있다.
라파엘과 가브리엘은 죽을 수는 없다며 우리 왕국으로 이주하기를 택했다.
가브리엘은 아직 무리였고 바알과 라파엘은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모른다!”
이 호쾌한 바보는 바알이고.
“미카엘이나 메타트론은 그런 것을 신경을 많이 쓰곤 했지.”
“아, 사탄도 그랬다.”
이 신중한 바보는 라파엘이다.
혹시 몰라 라파엘을 쪼아 가브리엘에게 물어달라고 했는데 거긴 겁에 질린 바보였다.
바알이 껄껄대며 웃었다.
“너희들도 음험한 천사 놈들보다는 악마가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군.”
라파엘과 바알이 제법 친해 보인다는 것이 몹시 우습다.
바벨의 자식으로서의 과거는 이미 죽은 거라고 너무 당연하게 인식하니까 그 시절의 앙금 같은 것도 없나보다.
“제기랄……. 물어볼 녀석을 다 죽였어.”
그러나, 후천적 위대함의 편린인 우리 솔로몬 선생님이 아직 살아계셨다.
이제는 몸의 절반 정도가 바스라지신 해골바가지 선생님은 호쾌하게 대답했다.
“내가 보스가 된 걸 언제 알게 되었냐고? 대신격이 속삭이더군.”
“……뭐라고요?”
“우리의 편린을 가지고 새로운 도전자를 맞이하라였나? 뭐 그러더군. 그래서 한 500년은 그 목소리의 발신원과 대신격의 위상좌표를 특정해보려고 연구했었지. 성과는 없었지만 재밌었어.”
그러니까 결국 솔로몬도 똑똑한 바보였다.
알 수 없는 게 정상이긴 하지.
이제부터는 심연의 신의 영지나 다름 없는 곳을 공략하러 가게 될 것이니 결국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지 간섭이 없었다는 것도 좀 이상했다.
“듣고 보니 대신격들이 뭐라 한 적이 없네요.”
“저보고 뭐라 그랬어요! 의사심연을 구현하는 건 금지한다고 했어요!”
“그건……. 실시간 버그 수정 같은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솔로몬이 낄낄대며 웃었다.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들었다. 일부러 그렇게 금욕적으로 살라 해도 못 살겠더군. 보통 환경이 나쁘면 마법사가 되지도 못하는데. 그런 우연이 겹치는 것들 또한 마법이겠지. 더 잘 키워봐라. 못난 제자 녀석아.”
“잘난 제자 녀석으로 하시죠.”
“그래, 잘난 녀석.”
그리고 마지막 금고다.
열었더니 재보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잔뜩 있다.
쥐새끼호에 어떻게든 옮겨 담았다.
이 왕국에 과거 융성했던 문명의 유산들이다.
역설계등으로 왕국의 장인들의 기술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각자 챙길 것도 챙겼다.
이번에는 무기보다는 방어구 비중이 높은 곳이었다.
아서는 아직도 마법사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효과적인 풀 플레이트 메일을 조금 더 챙긴다.
전신 아티팩트 도배가 그리 멀지 않아지고 있다.
그리고 떠날 때가 되었을 때, 솔로몬이 말했다.
“내게도 보스로서의 보상이 지정되어 있겠지.”
“지금 자결이라도 해주시렵니까?”
“아니, 심연의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을 거란 말이다.”
“……확신하십니까?”
“틀림없다. 네놈이 말해준 방식대로라면 말이지.”
그것에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위대함의 편린에 닿았던 직감을 근거로 솔로몬이 그리 말했다.
마법적 능력이 아주 뛰어난 존재의 직감이란 것은 예언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거다.
“부디 좀 얕은 곳에 계시기를…….”
“그럼 이제 저쪽 천사들과 이야기를 좀 해볼까.”
여러 세계에 걸쳐 내게 마법을 가르쳤던 스승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광기어린 쾌활함을 선보여 라지엘과 천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로스엘은 높은 곳에서 그저 즐겁다는 듯 그 모습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어딘가 씁쓸함에 미소 짓고는 모두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리프트로 발을 들였다. 쥐새끼호는 일회성에 가까운 압축을 통해 블랑쉐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긴장해야할 순간이라고 여겼다.
대신격들이 뭐라고 말을 건다면 그건 롸잇 나우다.
통과하는 순간의 부유감이 나를 감싼다.
몇 번인가 클리어 했을 때의 화려한 연출이 나를 감싼다.
빛과 어둠으로 나뉘어져 있던 세상이 보이고 그 경계가 흐려지며 무너졌다.
그리고 한데 뭉쳐서 뒤틀리고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처음 입장했을 때처럼 불길이 치솟으며 그 모든 것을 불태워 지웠다.
그리고 회차가 넘어갔을 때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그래야했다.
“역시.”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어떤 거대한 좌 셋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에 앉아있는 어떤 실루엣.
어떤 징후도 없으나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이런 식으로 메인 던전의 마지막에 등장할 셋이라면 대신격 밖에 없지 않은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것 하나가 생겨난다.
코인이다. 천사 측인가 악마 측인가를 정할 때의 그 코인과 흡사한 디자인이었다.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튕겼다.
금빛이 반짝인다. 시간인가.
그리고 배경이 변했다.
코인의 회전에 따라 계속 변한다.
코인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쓰레기장처럼 온갖 것들이 쌓여있는 어두운 땅은 [심연]이다.
곳곳이 무너진 예스러운 유적들이 가득하며 하늘에는 선명한 달이 떠있는 곳은 [달 그림자의 도시]다.
그리고…….
아주 번영한 것 같아 보이는 어떤 왕국의 모습.
그러나 명백하게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그곳은 아닌 왕국의 풍경이 보인다.
기억과 흡사한 곳도 있으나 아닌 곳도 많다.
여러모로 엄청나게 세월이 흐른 것 같다.
그곳은 [클리어에 가장 가까웠던 자들]일 터.
회전하고 또 회전하던 배경의 풍경들이 [심연]에서 멈춰 섰다.
금빛이 그 풍경에 테두리처럼 둘러졌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시간이 [심연]을 골랐나?
그리고 다른 자가 코인을 다시 튕긴다.
배경이 둘만 회전한다.
[달 그림자의 도시]에서 멈추었다. 짙은 보랏빛이 그 주변을 덮는다.
마지막은…….
자연스럽게 분홍빛이 [클리어에 가장 가까웠던 자들]에 얽혀들었다.
지금 무언가 결정되었다.
내가 전혀 모르는 무언가가 말이다.
그리고 갑자기 누군가가 말했다.
나이든 목소리.
울림도 위엄도 없는 그냥 목소리.
“정해졌군. 행운을 빌지.”
“예? 잠깐만. 당신은 누굽니까?”
명백하게 대신격은 아닌 누군가가 있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르륵 사라진다.
부유감이 몸을 감싸고, 다시 왕국이었다.
파티원들에게 물었다.
“나만 봤나?”
“저도 봤어요.”
“나도 보았네.”
“뭐죠 그건? 리더가 말한 적 없는데.”
“그야 나도 모르니까. 이게 대체 뭐지? 개꿀잼 DLC인가?”
하나도 재미 없어…….
하나도 재미 없다고…….
바알과 라파엘, 그리고 가브리엘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모양이다.
“이 게임은 왜 스토리텔링을 이 따위로 하는 거야! 그냥 설명하라고! 갸아아아악!”
그런 일이 있었지만 결국 해야할 일은 정해져있다.
희우는 확실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부활스택의 쿨다운을 기다리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일찍 사용된 하나는 돌아오겠지. 에리나에게 뜯긴 스택은 오래지 않아 돌아온다.
그래도 그걸 다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다시 레벨링을 통해 부활스택을 복구할 필요가 있다.
위대함의 편린의 힘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그러던 메시지들은 경험치를 이야기한다.
그것들은 클리어 하는 순간 막대한 포인트가 되어 마인드 맵에 새겨졌다.
그래도 부족하다. 부활 스택이라는 탄환을 더 많이 준비할 필요가 있다.
파티원들 모두가 그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과도 별개로 개개인에게 과제가 주어졌다.
아서는 마법을 더 잘 다루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이라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마음가짐 자체가 전혀 달라 보인다.
에길은 열심히 여러 종족들에 적응하고자 했다.
내일은 인어 카드를 구해볼 생각이라는 모양이다.
지느러미에 미리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던가.
미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운동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
연구실에서는 프로틴을 합성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헬창 마법사라니 괴이쩍은걸.
희우는 다른 것에 눈길을 돌렸다.
친오빠와 친언니가 이곳에 있다.
“굳이?”
“굳이가 아니야. 사실 난 야매로 배웠으니까…….”
“하지만 희우야. 기술적으로 네게 부족함은 없어.”
“미궁의 기술이라면 그렇겠지만……. 결국 내가 배운 건 우리 집 무기술이니까.”
그걸 바꿀 수는 없다.
희우의 걸음걸이조차도 그것이 깃들어있다.
하지만 열심히 했던가?
전혀 아니지. 농땡이치고 방구석에서 숨만 쉬었다.
오빠와 함께 갈고닦은 것은 프로 퇴마사로서의 기술이 아니다.
미궁에서 통하는 미궁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면 근간으로 다시 돌아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가능하면 언니의 그것도 좀…….”
마법 체계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안다.
미궁의 일반적인 마법은 희우와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바깥에서도 통용되던 체계라면 다를 수도 있다.
친형제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얼마건 도와줄게.”
“희우가 이걸 배운다고……?”
그 와중에 언니가 진짜로 충격 받은 것 같아 보이는 점은 좀 슬프다.
미카엘의 검술을 보며 느꼈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경지였다. 남이 다가설 수 없는 미카엘만의 무언가.
수 만년의 세월이 담보된 그만의 어떤 방식이다.
오빠도 마찬가지다.
게임스러운 부분과 뒤섞여 혼자 만들어낸 어떤 자기류의 영역이다.
아서도 에길도, 그리고 루시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은 무언가의 자기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희우는 이도저도 아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배워 알고 있을 뿐이다. 대체로 스킬과 스펙, 그리고 본능적인 감각에만 의지하고 있다.
더 갈고 닦을 수 있다.
미카엘과 검을 맞대며 그런 확신이 생겼다.
그러니 조금 더 달인이 될 필요가 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