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18화
왕국 - [심연] 탐사 준비(3)
메인 던전의 테마는 말 그대로 테마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신화적이며 장대한 서사를 테마로 삼는 곳이라면, [심연]은 로그라이크 그 자체를 테마로 삼는 곳이다.
[심연]은 개발진들이 오랜 로그라이크의 팬이었으면 그에 따라 헌정하는 듯한 던전이다.
전형적인 지하로 내려가는 던전물.
그 깊숙한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매층이 랜덤하게 구성되며 경우에 따라 달려서 계단을 통해 스킵하는 수도 있다.
정말로 로그라이크다운 올랜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각자 컨셉이 잡혀있을지언정 선형적인 구성인 다른 테마들과는 구별되는 특이점이다.
거기에 반드시 고정되는 메인 던전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가만히 앉아서 룬을 만지작거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걸 손에 넣는 건 처음이 아닌데 말이야.”
우리 왕국에도 존재하는 [왕국의 문]에 지정된 메인 던전 3개와 심연의 룬을 박아넣는다면 그것으로 해결된다.
미궁은 끝날 것이다.
가장 가까웠던 것은 2개를 클리어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게 한계였다.
* * *
도무지 다음 던전 공략을 시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후에 나 역시 죽어 다음 회차로 떠났다.
재미없는 추억이다.
“그게 그렇게 귀한 그 물건이에요?”
“그 고생을 해서 얻은 게 겨우 그 반짝이는 돌멩이라니 기분이 이상해요.”
희우와 제니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의 룬을 본다.
생각해보니 이걸 얻은 후 딱히 보여주지는 않았구나.
룬은 파티 리더의 인벤토리에 자동으로 들어간다.
본래라면 중대한 일이겠으나 코인토스를 하는 대신격들을 봤더니 오싹해져서 잊고 있었다.
룬 자체가 중요한건 아니니까.
메인 던전을 클리어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도둑맞을 수 없는 물건인가요?”
“아니, 빼가려고 하면 빼갈 수 있지. 암살자 스킬에는 도둑질 관련도 있잖아.”
“아……. 혹시 저번 회차 때는?”
“그렇지. 이게 사라졌었어. 일종의 상징이니까.”
“이번에는 그럴 일은 없겠네요.”
“모를 일이지.”
정말 모를 일이다.
모두가 꼭 바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미궁에서야말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이들도 있으니까.
“사실 오빠가 안 그런게 신기해요.”
“왜?”
“저는……. 사실 미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러고 보면 그런 성향의 아이였지.
희우는 방에 틀어박혀 공상하며 혼자 노는 것도 잘하는 아이다.
그리고 현실을 외면하며 게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던 아이기도 했다.
물론 진짜로 거기에만 매몰된 것은 아니었겠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게임상에선 친구가 많았다는 모양이니까.
거기에 끌려갈지언정 가서 함께 퇴마일도 했다는 모양이고.
아싸 중의 인싸라고 해야 할까? 가끔 보면 그런 타입의 사람들도 있다.
희우는 배시시 웃으면서 나를 가리킨다.
“전 대충 오빠만 있으면 되는데.”
“미아는?”
“물론, 미아도요.”
둘의 관계는 뭐라고 할까, 엄마와 딸이라기보다는 사실 그냥 자매 같다. 실제로도 그 정도 나이차이기도 하고.
아니지 미아가 더 많던가?
그렇다곤 해도 우애가 깊다는 것 까지는 사실이겠지.
“슬슬 끝나가나?”
“제가 시간 재고 있었어요. 이제 열릴 거에요.”
제니가 쌍검을 든다. 바알의 무기.
스킬적 스펙으로 승부하는 제니에게 가장 적절한 장비다. 앞으로 계속 쓰게 될 것이다.
기다리고 있던 보스가 출현했다.
지금 서버에서 진행하고 있는 연계 퀘스트의 마지막 부분이다.
경험치를 벌러 와있다.
부활 스택을 많이 소모한 순서대로 더 열심히 경험치를 벌어야 한다.
나는 여유분으로 빼두었던 포인트마저 모조리 부활로 소모해버렸으니 열심히 노가다를 뛰어야 한다.
거대한 용이 나타났다.
고대룡 크로니삭스.
마냥 수월한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경험치다.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사를 걸고 싸우는 일도 아니었다.
힘겨운 노동에 더 가깝다.
녹초가 되어 돌아와서 뻗는다.
셋이서 갈라먹는 경험치는 아주 달콤하다.
“부활 스택으로 레벨이 소모되니까 점점 요구량이 말 같지도 않아지고 있네요.”
“레벨업을 많이 했어도 좀 더 벌어야 소모한 부활 스택을 메꿀 수 있으니까 말이야.”
부활 스킬은 쉽게 뽑을 수 있는게 아니다. 무한한 포인트가 있다면야 쉽겠지만 어느 정도 제약도 걸려있다.
일정 포인트 이상 소모하지 않으면 출현하지 않는다 따위의 제한이다.
그러니 그저 레벨이 높은 것이 깡패다.
“내가 5천렙을 바라보게 될줄이야…….”
특히나 지친듯한 제니가 중얼거린다.
눈도 팔다리도 풀린 그 모습은 여전히 전투가 적성에 맞지 않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진실로 그 사실에 불평하진 않는다.
이젠 습관처럼 투덜거릴 뿐이다. 주변에서도 그걸 안다. 제니는 든든한 파티 멤버다.
희우가 입맛을 다신다.
이쪽은 이제 슬슬 힘들다보다는 지겹다로 바뀌어가고 있다.
최단시간 최고효율의 노가다라는 건 원래 그런 법이지.
“이런 레벨링보단 그냥 좀 기다렸다가 다음 던전으로 가면 안 되나요?”
“안 되는 건 아닌데, 무슨 변수가 더 생길지 몰라서 적당한 시기에 출발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해.”
“끙.”
부활 스킬들은 쿨다운이 아주 길다.
바로 다음 메인 던전 공략에서 그게 돌아오길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도 [심연]다음으로 진입할 메인 던전 쯤에서는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짧으면 석달. 길면 다시 반년간 찬찬히 정비한다.
파티원들의 새로이 노출된 약점들도 메꾸고, 다른 여러 가지 준비도 해야 하니까.
희우가 무기를 손질하면서 대답한다.
“그래도 미아가 그렇게까지 저질체력이란 건 상정 외였어요.”
“언데드는 체력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내가 생각해봤어야 했는데. 씁.”
“대신 다른 모든 것은 미리 생각하고 메꿨죠. 오빠 잘못 아니야.”
사실 아서가 마법에 재주가 없는 것도 의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간 만났던 아서들은…….
대검을 그야말로 마법처럼 다루고 있었기에 마법을 구사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게임 시절에도 아서에게 특별히 마법 구사 디버프 태그는 없었단 말이지.
에길도 마찬가지다.
그는 애초에 항상 인간이었다.
인외의 존재가 된다면 발할라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완고한 바이킹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어지간한 수준의 재능이나 무능이 아닌 이상 태그로 달리지도 않는다.
“애초에 아서에게 요구하는 마법 수준도 절대 낮지 않다고요.”
“그건 그래.”
“에길도 남들보다 좀 적응을 많이 못하는 정도지 정말로 종족 변환이 불가능하다는 정도는 아니고요.”
“그것도 맞지. 현실과 게임 사이 어떤 곳의 간극이군.”
입맛만 다실 수밖에.
“슬슬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지고 있어.”
“불안해요?”
“그렇지. 하지만 나름대로 뭐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된 거죠.”
제니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끼여든다.
“음. 으으음, 저도 뭐. 불평은 많이 하지만 그래도 꽤나…….”
보스 러시가 끝나고 MVP를 투표했다.
블랑쉐를 제외하고는 전부 제니를 가리켰다.
미아를 가리키려던 블랑쉐는 드물게 당황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방향을 옮겼던 것을 기억한다.
다들 모른척했다.
그 뭐, 숙명의 라이벌?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미아에게 표를 주려고 했던게 아닐까?
제니는 그 사실이 엄청나게 감명 깊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 얼굴을 붉히면서 더듬더듬 말한다.
“메인 던전 공략 나쁘지 않을지도……. 아니……. 꽤 재밌을지도……?”
늘 힘들어하고 불평만 했던 게 부끄러운지 아주 머뭇거리면서 말한다.
“아이 참, 제니 귀엽기는.”
희우가 제니를 꽉 끌어안았다.
제니의 꼬리가 빳빳해졌다.
“뭐,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벌써 해가 저물었네요. 시간이 빠르다 빨라.”
“잠은 잘 자두고. 미세한 컨디션 관리도 중요하니까. 다들 해산!”
그렇다고 각자 노는 것은 아니다. 제니는 최근 공감각이라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기대받지 못한 일도 스스로 하려고 한다.
다들 발전 욕구로 가득 차있다.
첫 메인 던전은 고난에 고난을 토핑한 위험한 경험이었으나,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많은 것들을 남긴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더 완벽해지고자 각자의 연습에 몰두하고 있으니까.
희우도 최근 가족들과 가까이 지내는 모습이다.
그것에서 뭔가 얻을 수 있을지는 문외한인 나는 모른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점점 늘고 있다.
괴물을 죽이는 무술이란 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희우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다.
오늘도 그랬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조만간 한번 붙어봐야겠는데.
일단 일과를 뒤로하고 블랑쉐를 보러 가기로 했다.
블랑쉐는 또 제 나름대로 열심히 몰두하고 있는 일이 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
블랑쉐의 격납고로 향한다.
아직도 공사중이지만 그래도 벌써 구색은 다 갖추었다.
애초부터 초인적이고 마법적인 힘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작정하고 건축 전문가가 된다면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가능해진다.
격납고에는 당연히 쥐새끼호가 있다.
“왔군, 오르골.”
“내 도움이 필요할 일이 있나?”
블랑쉐의 모습은, 제법 의외인데 용접을 하다가 면을 올리면서 맞아준다. 여기저기 검댕이 묻어있는 것을 보면 오래한 모양이다.
항상 입고 있던 수트가 아니라 작업복으로 보이는 것도 뜻밖이다.
너무 색다른 모습인데?
어딜 보아도 평소 기를 쓰고 유지하는 깔끔한 첩보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기계신의 파편인 쥐새끼는 여전히 함선에 동력을 공급하고 있다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개조를 좀 해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거라면 유수의 석학들을 레미가 구해주지 않았어?”
“그들도 미궁 전문가는 아니니까. 내게는 최고의 블랑이 필요하다.”
“흠, 그래. 내가 뭘 도와줄까?”
“그럼 동력원부터 설계도를 보며 설명하지. 새로운 무장도 좀 탑재해볼 생각이다. 쥐새끼?”
블랑쉐가 열띤 목소리로 말한다.
곧바로 오랜만에 듣는 요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예쓰! 누님! 쥐새끼입니다요. 그럼 브리핑 들어갑니다!]
홀로그램 같은 것들이 사방에 떠오른다.
블랑쉐가 손짓으로 페이지를 휙휙 넘긴다.
그리고 주절주절 설명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 녀석들은 나를 대체 뭐로 생각하는 거지? 난 공돌이가 아니야. 그냥 필요에 따라서 일부 총기와 병기의 구조를 알고 있을 뿐이라고.
딱 응급 처치할 정도인데.
하지만 그만큼 나에 대한 신뢰가 쓸데없이 두텁다는 거군.
직전 회차의 블랑쉐가 생각난다. 그녀도 그랬을까?
추가적인 설명이나 시연을 위해 다른 기술자들도 불려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요키! 여기서 뭐해?”
“이번 일로 소집되었죠. 총기 장인인 제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맥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무기고의 길드 마스터는 여전히 쾌활한 바위 난쟁이였다.
고블린 관련 인사들도 보인다.
고블레타리아 연방에게 왕국은 위대한 대전사이자 여신님의 나라다.
위상만 따지자면 극락 내지 천국 뭐 그런 곳인데, 거의 사이비 광신도 수준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보니 앞을 다투어 왕국행 열차를 타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즉 여기 연방의 고블린이 와있다면 그들은 모두 은하 레벨의 석학들이다.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는데.
그런데 블랑쉐는 태연하게 알아들으며 잘 모르겠는 대화를 전문가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보다 블랑쉐, 언제 그런 공부를 했어?”
“잠을 자지 않아도 되니까.”
[저도 많이 도와드렸습니다요!]
몇몇 고블린이 졸도하는 가운데 블랑쉐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사용하는 무기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이 미궁을 이겨낼 수 있겠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지.”
희우가 가르친 말인가보군. 둘이 죽이 잘 맞아 다행이다.
디스트로이어는 한가롭게 그런 공사장 구석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앞으로는 직접 만들어도 볼 생각이다.”
“당장은 무리일텐데……?”
“물론 지금은 도움을 받겠지. 그렇지만 나중은 말이다.”
블랑쉐가 [길을 찾는 날개]의 장갑을 드론으로 분리하여 띄워 올렸다.
그리고 일부가 합체하여 좀 더 큰 화력을 내는 형태를 취한다.
마력의 흐름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건 기동력을 조금 희생한 대신 더 높은 화력을 내기 위한 형태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는데?
“저런 기능 없는데 저 무기?”
“내가 개조했지.”
“아티팩트를?”
“하니까 되더군. 마법을 익힌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잠깐 뇌가 정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생각해보면 블랑쉐는 의외로 마법을 익힘에 있어 종족 보정에만 의지하지는 않았다.
물꼬를 트는데 악마로서의 보정이 중했을 뿐 마법사로서의 능력은 온전히 스스로 쌓아올렸다.
제법 단기간에 말이다.
똑같이 보정을 받고 있는 아서가 겪는 고난을 생각하면 차원이 다른 적성이다.
거기에 아서가 생각보다 그렇게 마법에 재능이 없는 건 아니란 말이지.
희우 말대로 메인 던전 수준에서 사용 가능한 마법의 수준이 너무 과한 거다. 아서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
블랑쉐는 그런 의미에서 이미 훌륭한 마법사다. 주력 분야라면 하이랭커 파티에서도 블랑쉐가 더 나을지도 모를 정도로.
“천재냐?”
블랑쉐가 아주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내려다보는 나머지 나를 올려다 볼 듯이 고개를 뒤로 젖힌다.
“후후후후후. 그렇다고 하더군.”
왜 그런 말을 입을 가리면서 하는 거야.
진짜인지 구석의 나이 지긋한 고블린 공학자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그는 영광스러운 대전사의 질문에 감격하며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게 고했다.
“기본 지식이 이미 제법 있으셨습니다.”
그건 확실히 근미래 출신이니 그럴 법 해. 그 후에 고블레타리아들이랑 많이 부대끼기도 했고.
“재능이 있으셔 굉장히 성취도 빠르셨지요.”
그야 그렇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정말로 열심히 하셨습니다. 저는 블랑쉐님이 쉬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대전사님과 대화하는게 제가 처음 본 쉬는 모습이십니다.”
“……그래?”
잠도 한숨도 안 잤던 모양이다. 그게 가능한 미궁의 보정이 있더라도 보통은 자는 법인데.
블랑쉐의 상태가 괜찮은가를 다시 본다.
그리고 기우였음을 깨닫는다.
아주 즐거워하고 있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설계도를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보고 있다.
저런 거라면 나도 알지.
그래서 플레이 타임이 3만 시간이 넘었던 거니.
“그럼 되었어.”
다들 너무 열심이군. 나도 열심히 해야겠는데?
제니에게 가보자.
공감각 자체는 거의 나만의 기술이니 도움이 더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에게도.
파티원들은 이제 나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파티를 돕고자 진심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