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24화
지하 2675층 - [심연]의 초입(3)
희우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녀는 실패작이었고 가문의 온정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였다.
실제로 어쨌건 스스로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니까 더 깊숙하게 파고 든다.
토벌이라는 것은 얼마 없는 사회활동이다.
그게 사회활동이란 것은 우습지만 부모님은 그 행위를 일종의 재활로 받아들였다.
항상 친형제들과 함께 나가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한다.
자긍심이 조금이나마 고취되고 자존감이 약간이나마 회복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더 한 발짝을 떼지는 못했다.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것이 꼭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실패하는 것도 꼭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왠지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희우는 자신이 그랬다고 생각했다.
태어나고 싶어서 이 영웅의 가계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걸.
때맞춰 이 미궁이란 세계에 들어온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 * *
* * *
그것은 해방이며 모험이며 새로운 삶이다.
희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설이나 게임의 주인공처럼.
그리고 실제로 희우는 제법 주인공 같았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본 것이다.
그건 스스로 뭔가 이루어낸 것인가?
내가 이 일들에 자긍심이나 자존감을 가져도 되나?
돌이켜 보면 반푼이라도 강제로 익혀진 기술이 있었다.
태생부터 다른 압도적인 피지컬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이 혈통의 유전자는 굉장한 미인이다.
그 모든 것을 가지고 희우가 한 것은 무엇인가?
그저 누군가 주는 것을 받아먹었다. 스스로 극복한 것이 무엇인가.
가족의 온정에 기대듯 오빠의 필요와 이해심에 기댄 것 아닌가.
안다.
그 정도는 아니다.
희우는 노력했고 이루어냈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가져도 좋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갈 필요가 있다.
오빠는 희우에게 삶과 희망을 주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바보라도 한 발 더 나갈 생각을 하게 된다.
착 하고 걸어 나가본다.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 기억을 마주해 볼 차례다.
“우웨에엑.”
“오, 그래도 좀 쳐다볼 수 있게 된 거 아니야?”
“싸울 수도 있어야 하는데요.”
토사물을 보며 우울하게 말한다.
진심이다. 개인플레이 구간이 존재하는 이상적을 가리며 싸우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질기디 질긴 것이라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훈련만으로 마주볼 수 없게 한다.
속은 쓰리고 마음은 더 쓰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진다.
할 수 없으면 할 수 없는 대로 살았던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무엇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 도움이 되고 싶은데 불가능하다.
기억조차 안 나는 것이 더 악질이다.
그 어린 시절 그녀는 대체 무슨 감정과 충격을 느꼈던 것일까?
중학교 이전의 기억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어둡고 무서웠던 저택.
딱 그 정도의 흐릿한 인상.
“사실 극복하지 못해도 좋아. 나는 여유가 있으니까 네 쪽으로 합류할 수도 있을 거야.”
“그게 가능해요?”
“그런 포인트도 드물지만 없진 않아. 확률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많으니까.”
오빠는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태그라는 형태로 NPC에게 붙어 있곤 하는 것이기에 극복시키려고 노력은 해보았다고 한다.
“되는 사람만 되는 거야. 모두가 할 수 있다면 병이 아니지. 되더라도 너무 중대한 계기가 필요하고.”
하지만 그 말조차도 가슴 아프다. 내가 왜 안 될 사람이야!
한 김에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마주하고 이겨내고자 하는 시련은 길고도 복잡한 것이다.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어요.”
“뭘? 어? 야! 잠깐!”
희우는 잠깐 뇌를 빼냈다. 퓨즈 아웃되듯이 본능처럼 질주한다. 그 와중에도 몸은 브레이크를 걸고 있고 눈물이 고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대로 혐오체들의 사이로 돌격했다.
니글거리는 촉수들과 끔찍한 형태의 질감, 질척한 점액과 뒤틀려 있는 팔다리, 내장, 눈알, 사람이었던 것일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마구 뒤틀린 그 모든 것.
고레벨의 예민한 감각에 남김없이 걸려들고, 의식이 끊어졌다.
당연하지만 엄청 혼났다.
“너무 열심히군.”
“그러게요. [심연]의 계획에선 비중을 아주 줄여둬서 저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좋은데 말입니다.”
“그래서겠지.”
“그래서군.”
“예?”
흠, 확실히 희우의 장점이자 단점이 묘하게 현실감각이 없다거나, 사회 경험이 적은 게 티 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미궁에선 현실감각이 좀 없는 것도 스탯이다.
개소리 같긴 한데, 진짜 개소리는 미궁이었구요.
그래서 1층에서 마주치자마자 손뼉을 쳤다. 좀 맛이 간 애들이 미궁에서 더 잘한다.
그리고 그 문제점도 더 이전에나 훨씬 강하게 두드러졌다.
그날을 기점으로 파티원들에게 마음을 열고 더 원활하게 해나가고 있는 편이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롤모델 삼는 것은 웃기지만 원래 그런 것이 성장이다.
각각의 사람들 마음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그 사람만 아는 거지.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잘한다 잘한다 박수만 치는게 아니라 점점 더 잘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에 걸림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더 잘해야 하는데.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래도 원래 태그는 떼려고 노력 한번 해보고 안 되면 그냥 붙은 채로 감수하고 진행하는 게 정석이거든요.”
“그 이야기가 아닌데.”
“뭐, 큰 틀에서는 다른 말은 아니군. 어쨌든 노력하는데 말릴 수는 없지.”
“이번엔 심했어요. 혐오체들의 물리적 스펙은 드래곤급이니 생명의 위협도 될 수 있다니까요.”
실제로 꽤 위험했다. 이렇게 어이없이 부활 스택을 날릴 수는 없다.
노력했다곤 해도 더 이상 이전처럼 폭렙이 가능한 레벨이 아니기에 부활 스택을 다 복구하진 못했다.
다들 처음의 절반 이하다.
내 경우에도 하나가 간신히 돌아왔을 뿐이고, 그냥 날아간 거나 다름없는 포인트들이 많아서 곤란한 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도 상정한 범위 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무리까지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때가 되면 싫어도 무리하게 될 테니.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상정한 것 이상으로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게지.”
“나도 뭔지 안다네. 일방적인 것은 사랑이 아니지.”
“흠, 희우는 언제나 제 도움이 되고 있는데요.”
정신건강을 포함해서 모든 면에서 사실이다.
“에휴.”
“어휴.”
“아니, 그. 잘 모르겠으니까. 다음으로 넘어가죠. 또 기절 못 하게 잘 막는 건 그렇다 치고 이제 다와 갑니다.”
그렇다 어느샌가다.
대다수의 저층 몬스터들은 위협이라기에도 새삼스럽다.
정말 귀하디귀한 것들이 가라앉아 있는 [메인 던전]으로서의 [심연]은 이제 슬슬 시작된다.
“그래도 제법 주운 게 많군.”
“심연 파밍이 시간이 뒤틀리는 위협만 빼면 아주 고효율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궁의 모든 것은 결국 마지막에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우리가 파괴해 버린 로스엘의 세계도 심연의 저 깊은 곳 어딘가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일반 던전으로서의 심연에서는 기껏해야 서버 내에 존재하는 수준의 물건밖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그곳에 켜켜이 쌓여온 역사는 고스란히 유배자의 힘이 될 수 있다.
“이제 와서 그다지 쓸 만한 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아티팩트도 많았군.”
“저도 예비 장비나 갑옷이 더 생겨서 기뻐요.”
다 누군가 쓰던 거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이 있겠나.
시간이 하도 꼬여 있으니 연식조차 알 수 없다.
어쩌면 우리 왕국의 미래에서 떨어져 내려온 장비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연의 모든 것은 굉장한 미지다.
“그것 또한 우리가 이용해야 할 힘입니다. 심연의 깊은 곳에 가라앉은 장비나 도구들은 전부 엄청나게 양질의 물건들이거든요.”
“그럼 결국 심연이란 곳의 어려움은 파티의 결속이군.”
“그렇죠. 솔로로 도전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 그런 곳입니다. 대부분의 페널티가 의미 없어지니까요.”
“솔로로 클리어해 본 건가?”
“한 번은요.”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당연히 다시는 하지 않았다.
클리어 자체도 설계고 뭐고 다 망가진 상태에서 억지로 한 것이었다.
“차원 수납 주머니를 잔뜩 가져오라고 한 이유는 알겠군. 그리고 앞으로도 소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어.”
“망령도 많이 나타나요. 도전자급 유배자의 망령이라면 보물 고블린이나 다름없죠.”
그러면서 다시 한 층 더 아래로 내려간다.
파티원들이 알아야 할 것은 다 알려주었다.
이제 내가 혼자 고민해 볼 문제가 있다.
시간, 시간이라.
심연이라는 메인 던전을 고른 것은 시간의 신이었다.
그렇다면 이 곳의 시간이 어떻게 된다는 걸까?
복선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마 시간의 신전을 보게 될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 시간의 신전은 어쩌면 크게 뒤틀린 시간의 흐름을 바로잡는데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일단 상황이 벌어진 후에 고민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종류의 고난이다.
“솔로는 무리지.”
그건 확실히 무리다.
그러니 이 [심연]을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개개인으로서는 몇 년 만에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를 얼굴들이다.
그리고 그런 감상을 느낌과 함께, 입질이 왔다.
“2700층 이전이라니 조금 빠르군요. 다들 다시 만나는 층에서 봅시다.”
시작은 우선 헤매게 된다. 어느 층에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파티원들이 저마다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긴장은 느껴지지 않는다. 믿음이 있는 것이리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나타난다.
[당신은 미궁을 넘어서지 못한 무수한 과거의 잔해들에 진입했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수 있으며, 당신들 또한 잔해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십시오. 이곳에서는 어떤 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시간의 신이 당신의 파티를 주시합니다.]
메시지가 조금 다르군. 원래는 대신격들이 우리를 주시한다고 떠야 한다.
시간의 신만이 주시한다고?
일단 그 이질성에 대해 파티원들에게 전달은 해두었다.
나는 믿고 나의 일을 하면 된다.
어둠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악마의 어둠은 아니었다.
어딘가 짙은 보랏빛이 은은하게 얽혀 있는 질척하고도 끈적한 느낌의 어둠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어딘가 기억에 있는 필드가 나타난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그저 원형인 곳.
이건 조금 특별한 층이다.
원래는 낮은 확률로 등장하는 것이 반드시 나타나는 설정의 층.
소름이 쭈뼛하고 돋았다.
감상에 잠길 때가 눈곱만큼도 아니다.
장난하나.
“이런 젠장. 시작부터 이거냐.”
그림자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망령과의 일대일에서 승리해야 하는 층이다.
망령은 과거 언젠가의 ‘나’들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