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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525화 (49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25화

심연 2676층 - 망령(1)

유배자는 필연적으로 무수히 많은 회차를 지내게 된다.

개중에는 운이 좋아 특출하게 강력했던 회차가 있을 수도 있으며 2층에서 온갖 불운에 휘말리며 허무하게 탈락한 회차가 있을 수도 있다.

그게 전부 지나간 과거에 불과하면 좋겠지만 미궁엔 망령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이전 회차에서 사망한 무수히 많은 ‘나’는 확률적으로 망령이 되어 나타난다.

저난이도의 구간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고레벨 지역으로 갈수록 점점 빈도가 늘어난다.

사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누구의 망령과도 마주치지 않은 것은 꽤 운이 좋은 일이었다.

반반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보통 두 번째 메인 던전에서는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만나지 않을수록 출현률은 점점 올라가니까.

그런 부분이 유배자의 멘탈을 많이 자극하기도 한다.

오래 살아갈수록 유배자가 정상이기 힘들어지는 또다른 요인이다

솟구치는 그림자는 곧 모습을 형성했다.

어떤 형태인가.

내 망령들은 하나같이 강력하기 짝이 없다.

플레이타임이 일정 시간 이하인 회차는 망령화되지 않으며, 그 시간을 넘어간다면 약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 * *

공감각이 가동된 상황에서 클럭도 올린다. 의식의 흐름이 가파르게 가속된다.

점점 느려지는 것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는 그림자의 모습을 최대한 빠르게 캐치한다.

똑같은 나라면, 일단은 지금의 내가 더 유리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더 선제 타격을 가할 수 있으니까.

그림자는 크게 솟구치지 않았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크기.

날개도 없다.

인간형 수준의 체격, 천사와 악마도 배제.

그리고 그림자의 크기가 어느 순간 안정된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보다 훨씬 큰 체격.

트롤이나 오우거 정도는 아니다.

켄타우로스라기에도 다리 형태가 다르다.

늑대인간?

오크?

형태가 조금 더 갖추어진다. 모피라고 부를만한 것은 없다.

수인이 아니라면 저 체격 저 근육, 오크다.

오크로 죽은 회차들을 빠르게 떠올려본다.

가장 강했던 회차는 지금 세팅으론 버거울 수 있다.

몸은 저절로 공격 자세를 잡으며 거리를 좁힌다.

오크는 방어력에 강점이 있는 종족이 아니다. 무조건 먼저 쳐야한다.

장비가 플레이트 류의 실루엣은 아니었다. 형태가 점점 갖추어지고 들고 있는 무기도 떠오른다.

봉?

지팡이?

지팡이다.

오크로 지팡이?

그럼 주술사.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돌격했다.

오크 주술사인 내 모습이 나타난다. 튼튼한 중갑이 아니라 오크 주술사다운 가죽갑옷.

복식은 완전히 야성과 죽음의 신 아래에 있는 강령술사에 가까운 주술사.

아직도 어느 회차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달려들며 형성되는 내 모습을 더 자세히 관찰한다.

손가락에 반지가 보였다.

나는 그대로 방향을 틀어서 굴렀다.

검은 불길이 내가 있던 자리를 지나친다.

그대로 마법을 형성한다.

주술은 원소 마법보다 느리다.

불길, 번개, 그리고 순간이동.

역으로 이용당하여 저쪽의 술식이 되지만 순간이동은 놓친다.

반응하여 지팡이를 들어올리고

검격이 튕겨나갔다.

그대로 어깨로 부딪힌다.

오크 주술사가 천사 전사를 피지컬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크게 밀려나며 원을 그리는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최대한 중화하며 그대로 돌격, 다시 반지가 번쩍인다.

저 반지는 내가 신의 총애를 받으며 수여받았던 것이다. 죽음의 검은 화염은 모든 내성과 방어를 무시한다.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천사 상태인 나는 저것만 아니면 무엇으로 공격당해도 즉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용돌이의 흐름을 역으로 따라간다. 망령에게 당황은 없다.

저것은 미궁에 의해 복사된 내 전법과 사고를 흉내 내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 차라리 아후라마즈다가 시도했던 그것에 더 가깝다.

심리전까지 구사했다면 머리가 더 아팠겠지.

화염을 피하고 지팡이에서 빛이 솟구치는 것을 본다.

거대한 광검이 내가 있던 자리에 내려찍힌다. 검을 들어 받아낸다. 버프를 가동하고 그대로 밀어 닥쳤다.

망령은 반지를 낀 손을 내밀었다.

화염일 리가 없다. 그건 2스택이다.

대신 일어난 일은 거대한 해골의 실루엣이 출현하는 것.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럼 아직 서른 개 정도는 더 남았군.

천사 특유의 빛 속성 인챈트를 몸에 감는다.

밑도 끝도 없는 물량 공세의 내려찍기.

이어서 터져 나오는 폭발하는 듯한 인골의 공세.

사이에서 피어나기 시작하는 스켈레톤 오크와 고블린, 그리고 트롤들.

소환을 허용하면 장기전이 된다.

애초에 소환 시간을 벌지 못하는 위험을 대비하여 저런 장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죽음을 섬기는 주술사는 강력한 사령술사이기도 하다.

선조의 해골로 만들어진 군대가 일어서기 시작한다.

“귀찮아 죽겠네.”

위험하진 않다.

상성에서 우위이기 때문이다.

다행인 점이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진짜로 끔찍하게 긴 시간이었다.

시간 감각이 약간 무뎌질 정도로 싸운 끝에 과거의 오크 주술사가 보유한 모든 언데드들을 처리했다.

히어로 유닛의 해골도 심심찮게 등장했는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던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지금은 적이지만.

본체의 스탯으로 강화되어있던 영웅적인 오크들은 생전의 전투력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추가로 온갖 소모품의 세례도 날아온다.

주술사가 마력도 모두 소진한 후에나 겨우 뚫어낼 수 있었다.

“이걸 역시 나라고 해야 할지.”

상성에서 밀리는데도 최대한 늦게 지는 것을 실현했다.

갑자기 앞날이 깜깜해지는데.

시작부터 이러면 더 고스펙이나 상성에서 불리한 망령을 만났을 경우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와, 다시 칼 돌려달라고 할까.”

미아에게 넘긴 라파엘의 검이 아쉬워지기 시작하는데.

물론 반쯤은 농담이다.

이 또한 내가 감당해야할 무게다.

망령은 아직 죽지 않았다.

무력화되어 기절해있을 뿐이다.

어느 정도는 추억에 잠겨 그 모습을 관찰한다.

신체 단련에 아주 열심이었던 시기였다. 이때쯤에 기초 피지컬의 중요성에 대해 고려를 하기 시작했지.

소위 말하는 헬린이 시절.

근성장에 큰 장점이 있는 오크 종족을 고른 것도 그래서다.

그리고 주술사를 택한 것은 단순히 내 기초 스탯의 재능은 마법직에 있어서였다.

철저하게 효율 중시로 아직 자신감 넘치는 공략을 짜내려가던 시절이다.

시기로 치면 30년차 좀 넘어가서였으려나.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기나긴 세월이 지나서도 그때의 동료나 장비들은 깊은 인상이 되어 내게 남아있다.

“너 어떻게 죽었었냐?”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물어본다.

물론 망령이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마력 탈진 상태로 의식이 없으니 자아가 있더라도 대답하진 못했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팔과 다리를 날려버리고 주술을 쓸 수 없게 목도 한번 푹 찔러 성대를 망가뜨리고 천천히 생각해본다.

왜 죽었더라?

기억을 더듬고 있자니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때의 나는 굉장히 자신만만했다.

신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무수한 부하 언데드들을 거느렸다.

그린스킨 제국의 황제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우두머리였다.

세상은 그린스킨의 손에 떨어졌고 나는 공포의 주술사로 군림했다.

그렇게 지배하고 있던 서버만 해도 다섯 개다.

왕국에서조차도 철저하게 솔로 플레이를 고집하는 죽음 주술사는 경외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반은 완벽했으니 자연스레 그 다음은 메인 던전 공략이었다.

첫 번째에서 그대로 좌초되었다.

그때 테마도 [달 그림자의 도시]였지.

거긴 좀 코스믹 호러에 가까운 형태의 컨셉을 가지고 있기에 마주 물량으로 싸워야했다.

보스까지 도달은 했었다.

그리고 거의 짓밟혔다.

사령술사는 그 이후로 버렸다. 소환수 물량은 현실 보정을 받은 강력한 단일개체에게 생각 이상으로 무력했던 탓이다.

그때 만약에 그 보스를 잡았다면 그 녀석의 일부를 거느렸을 텐데.

어쨌든 아직 굉장히 희망적이던 시기였다.

최초로 메인 던전 보스에게 제대로 된 트라이를 했었으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이 첫끗빨이 개끗발이지. 98년까지 와버렸구나.

다 떠올렸기 때문에 검으로 찔렀다.

죽어 스러지는 망령은 다시 그림자로 돌아간다.

심연은 망령의 출현률이 유독 높은 곳이다.

이곳은 모든 미궁의 무덤.

결국 마지막에 가라앉아 눅눅하게 썩어가는 끝의 땅.

망령 역시 그런 곳에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겠나.

그리고 그림자로 돌아간 망령이 스러지고 그 자리에 반짝이는 장비 하나가 남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희우는 이런 운이 좋을까? 하지만 그 녀석은 망령을 안 만나겠군.”

망령은 소지품을 하나씩 떨어트리게 되어있다.

좋은 것을 떨어트릴 확률은 낮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것에 대비하고자 했고, 내 망령들은 어지간해서는 소모품을 잔뜩 보유하고 있다.

이번에 떨어진 것은 심지어 요리재료였다.

“참기름 맛있긴 하지.”

저땐 아직 바깥의 음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고추장도 만들었는데 나올 거면 그거나 나오지.

“반지가 1등상인데.”

편린급이 아니라면 치명적인 데미지를 가할 수 있다.

저거 꽤 날로 먹는 아이템이다.

계단을 내려갔다.

층이 바뀐다.

짧은 로딩에서 어렴풋한 보랏빛이 등불처럼 보였다. 아주 가까이 있다.

“난 좀 오래 걸렸는데. 다들 고생한 모양인데.”

이번에는 꽤나 평범한 층.

그냥 몬스터들이 있고 층계 보스가 존재하는 평범하디 평범한 심연의 메인 던전 구역이다.

“루시 들려요?”

「오오, 빠져나왔군. 네가 제일 늦었다. 망령이라도 만났나?」

“잘 아시네요.”

「그걸 못 본 게 너무 아쉽군.」

“망령방은 철저하게 차단되는 곳이니까 어쩔 수 없죠.”

심연이 신앙 캐릭터의 무덤인 이유다. 망령방을 넘는 게 너무 힘겹다.

“다른 파티원들 소식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심연의 신도인 블랑쉐와 시간의 신도인 희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이건 둘 모두 받아들인 사항이다.

블랑쉐는 애초에 마법사와는 또 다른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포지션이며 희우는 우리 파티의 최중요 크랙을 담당하고 있다.

로그라이크에서 다시하기 기회는 아주 귀하다. 로그라이트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 둘은 루시와의 연결 없이 독단적으로 심연의 솔로 구간을 공략하게 될 것이다.

다른 파티원들은 나나 루시의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이 조금씩 다르니 루시도 실시간으로 전달하기 힘들다. 애초에 그렇게 말을 전하는 것도 힘들기에 메모하는 형태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로 되어있다.

루시가 메시지로 게시판처럼 메모들을 띄워 올린다.

[2678층 제니 : 저는 벌써 이틀째에요. 자고 일어나도 이런 곳에 혼자라니 우울하네요.]

제니는 시간이 좀 빠른데?

[2677층 에길 : 저녁 시간이다. 리더의 요리가 그립군.]

에길은 평소 같군.

[2676층 아서 : 마법을 실전에서 사용해보려고 하다가 실패했네. 심연 추방이 발동했는데 여기가 이미 심연이라 문제없군. ㅎㅎ]

아니, 그거 웃으면서 할 이야기가 아닌데.

그보다 아서는 초성체를 어디서 배운 거지? 미아인가.

[2676층 미아 : 제니한테 배운 검술을 써먹어봤어요!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데미지 자체는 검에 바른 인챈트로 넣은 거지만 동작은 매끄러웠다고 생각해요!]

각자 솔로가 되자마자 다양한 전술을 실험해보는 모양이다.

[메인 던전] 영역이 되기 전의 몬스터들은 아무래도 너무 싱거웠겠지.

나는 루시에게 전달해서 메모를 작성했다.

[제니는 시간 흐름이 좀 빠르니까 조심해. 블랑쉐의 등불을 절대로 놓치지 말고.]

[에길은 그러게 평소에 요리 좀 배우겠냐고 제가 많이 물어봤지 않습니까.]

[미아는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절대 검을 쓰지 마. 조심해야 해. 아직 리치도 짧으니까.]

별다른 특기사항은 없다.

“미아가 인챈팅 메이지 전략을 취할 때, 주의 깊게 살펴주세요.”

아무런 전사적 보정이 없더라도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고 무기에 마법을 걸어 딜링을 만들어내는 마법사 전법이다.

이렇게만 들으면 약해보이지만 좋은 전사용 장비가 확보되었을 때 취하기도 하는 방식이다.

솔로 메이지라면 어쩔 수 없이 익혀야하는 전법이기도 하고 말이야.

「나도 늘 주시하고 있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아서 말이지.」

“정확히는 심연에 내놓은 어린아이입니다.”

「거 참 대단한 스케일이군.」

“이런 건 처음 보죠?”

「예전 생각나는구나. 이렇게 너희 파티의 모습을 지켜보며 즐거워하던 때 말이다.」

아무튼 걱정인 것은 주로 미아다.

마법사는 솔로 난이도가 가장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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