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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526화 (497/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26화

심연 2857층 - 어떤 기지(1)

블랑쉐의 등불은 계속 건재했다.

심연의 신도인 그녀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급박하게 흐르는지를 체크할 수 있다.

나아가 다른 파티원들이 어떤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심연의 신앙은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심연 공략의 치트키다.

솔로 구간의 존재로 파티 플레이의 중요성이 덜해짐에도 불구하고 파티를 꾸려도 되는 이유기도 하다.

누군가 하나가 심연의 신앙을 가지면 여러 수단을 통해 그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혐오체들이나 다른 그림자 같은 괴물들, 세상의 찌꺼기나 다름없는 것들을 상대한다.

여기까지 오면 [메인 던전]이 아닌 구역의 몬스터들은 그냥 야생 짐승이나 다름없어진다.

사람이 곰이나 호랑이를 상대하는 것이 쉽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손에 중기관총이 들려 있다면 좀 달라지는 법.

공략 파티급 전력에게 일반적인 심연의 몬스터가 꼭 그런 존재다.

물론 그런 괴물들만 있는 게 아니라 여타 메인 던전의 중간보스급 존재들도 허다하게 돌아다닌다.

다른 파티원들은 나름대로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는 모양이지만 솔로로서의 나는 그렇지 않다.

내 98년 중 심연에 있었던 시간만 10년 가까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드나든 입장이기에 슬슬 지루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몇 십 층 더 지났으니 슬슬 뭔가 등장할 텐데.”

이것은 확률의 문제다.

심연의 일반적인 층은 그저 켜켜이 쌓인 세상의 퇴적지지만 간혹 기이하게 남겨진 파편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시련으로서 누군가 앞에 대령되는 심연이라는 메인 던전의 진면목이다.

그런 곳에 도달하면 단순 로딩 장면이 아니라 그 꼴보기 싫거나, 혹은 반갑기까지 한 팁이 등장할 텐데.

딱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왠지 모를 예감이 들었다.

메시지가 떠오른다.

[TIP : 이번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거지 같은 놈들. 이거 뻥 아닌데.”

팁 메시지의 해석 방법에 대해서도 파티원들에게는 알려주었다.

위험한 층이 등장하면 정말로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질 때쯤, 거짓을 말하기 시작한다.

심연은 어떻게 보면 테마 전체가 자신과의 싸움인 셈이다.

부드럽게 완급 조절마저 해내는 악의다.

“이런 메시지가 뜨면 보통 뭔가 악조건이 걸리는데. 뭐가 뜨지.”

재수 없으면 불살을 조건으로 요구하기도 한다.

반대로 몰살이어도 머리가 아파진다.

그 외에도 뭔가 금지당하는 경우가 있다.

대신 버프가 걸릴 때도 있지만, 아무래도 버프보단 디버프가 더 뼈아픈 법인지라.

부유감이 끝나고 발이 단단한 바닥에 닿는다.

제일 먼저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바닥도 위험하지 않고 대기의 구성 성분도 정상이다.

위협적인 생물도 없으며 수상한 인물도 없다.

온건한 시작이다.

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니크 스킬이 비활성화 됩니다.]

“좋은데?”

어차피 없다.

용사도 내다 버렸고 내가 가진 건 현재로선 통상 스킬들뿐이다.

추가 유니크 스킬을 탑재할 필요가 없다기보다는 뭘 넣을지 상황을 보겠다는 의미.

심연은 9,999층까지 존재하며 절반도 넘지 않은 이 시점에 벌써 전력을 다 할 필요는 없지.

어렵다곤 해도 망령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넘길 만한 상황일 것이다.

꼭 그렇게 생각하며 위험이 아닌 주변의 상황 그 자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버려진 콜로니인가?”

중세나 현대는 아니다. 어느 세계의 파편이 구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근미래 이상의 기술력을 가진 상태.

이곳은 서버였던 곳일 수도 있으며 메인 던전이었던 곳일 수도 있다.

속단은 금물이다.

차근차근 확인해 나간다.

“바닥 재질은 강철인가? 합금이로군.”

마법을 통해 재질을 확인. 기술력의 수준도 확인.

내부에 다른 설비도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배관들이 확인되었다.

천장은 환풍? 아니지 이건.

“공기를 공급하고 있군. 생명 유지 장치인가?”

그렇다면 버려진 지 얼마 안 된 콜로니일 가능성이 있다.

지구 계열이어도 지구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혹은 궤도상일 수도 있겠군.

바깥을 관측할 수단이 필요한데.

버려진 것 같다고 파악한 것은 한눈에도 관리가 안 된 모습 덕분이다.

유지는 되고 있으나 단지 그뿐, 노후화가 충분히 진행된 흔적이 잔뜩 보였다.

“이 정도면 고블레타리아 연방이 승리한 정도의 미래는 아닌데. 그보다는 좀 더 근미래군.”

현대 지구를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를 판단하는 것은 내가 그 시대의 사람이 별수 없을 것이다.

블랑쉐라면 이곳이 현대라고 생각하겠지.

천천히 걸어본다.

곧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었네?”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났다. 미라화되어 있다.

미생물은 없는 환경인 것 같다. 혹은 여러 정화 장치가 제대로 작동해서 건조 미라가 된 것일 모르지.

그러나 창은 없다.

유리를 사용하기 힘든 환경이었을까? 특수한 강화유리가 필요한 환경일지도 모른다.

미라들은 더 발견되었다.

별다른 일이 있어 죽은 것 같지는 않다.

문득 불길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바이러스인가?”

천사인 현재 내 종족은 대체로 병에는 강하다.

그래도 간혹 저항력을 뚫어내는 미친 질병들이 있다.

우선 주변에 방벽을 형성하고 대기 성분을 분석한다. 종족이 천사라서 너무 방심했을지도 모르겠군.

사실 대뜸 우주공간이어도 딱히 죽을 걱정이 없긴 해서.

“좋아, 그런 것도 아니군.”

으레 있을 법한 수준의 무언가들 밖에 없다.

도리어 평범한 자연의 대기보다 맑고 건강하다.

“몬스터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조금 더 스케일이 큰 층일 수 있다.

천천히 걸었다.

복도는 길었고 곡률이 있다. 어떤 원형의 구조물 내부를 크게 돌아가는 길인 듯하다.

곳곳에 방은 있었다.

거주 시설이나 연구 시설, 혹은 군사 시설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곧 앞에 파손이 보였다.

무너져 내렸다고 보기에는 뭔가 강한 외력으로 찌그러진 느낌에 더 가깝다.

닫힌 후에 바깥에서부터 통째로 구겨져 버려서 작동하지 않게 되어버린 전자 개폐식 문이다.

방화벽이나 차단벽에 가까운 형태였던 것 같다.

검을 꺼낸다. 미카엘이 남긴 [어느 천사의 검]이다.

결국 이 검의 아티팩트로서의 기능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튼튼하고 쓰기 좋으며 재질도 훌륭한 검임은 분명하다.

자체적으로 빛의 속성도 띠고 있다.

그러면 이제 들고 다니면서 알게 되는 때를 기다리면 된다.

“뭔가 대놓고 메시지가 목표를 제시해 주지는 않았는데. 좀 알려주면 좋겠는걸.”

사실 진짜 그걸 바라지는 않는다. 만약 메시지가 대놓고 뭔가를 알려준다면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

알고도 힘든 끔찍한 일이 기다리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버프가 걸린 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수준이니 지금의 상황은 순조롭다.

방심은 하지 않은 채 문짝을 썰어 열고 전진한다.

지금도 외력이 벽을 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추가로 붕괴하지는 않았다.

“약간 분위기가 다른데.”

코를 킁킁대 본다. 냄새가 난다.

지금까지는 정말로 깨끗하고 깨끗한 공기였다.

하지만 이건 유기물질이 존재하는 듯한 냄새.

아주 미세하지만 어디선가 흘러들어 와 후각을 자극한다.

조용히 소리를 들어본다.

소음은 없다.

마력을 발동해도 될 것 같다.

기술력에 마법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을 튕겼다.

마력의 파문이 크게 번져 나갔다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시 어떤 벽에 닿을 때까지, 그리고 그 벽을 투과해 미약해진 후의 파동까지.

돌아온 마력의 파문은…….

“……잠시만, 너무 끔찍하게 많은 거 아냐?”

강함을 측정할 수는 없으나, 압도당할 것 같은 물량의 생명체들이 이 앞, 나아가 이 기지 전체에 감지되었다.

이곳이 어떤 기지의 가장자리임도 알 수 있었다.

내부에 있는 것보다 바깥에 더 많았다.

“[은하의 포식자]……?”

방심을 하지 않으면 되는 수준으로는 모자라다. 공감각을 작동시킨다.

그리고 외벽을 베어서 작은 구멍을 내었다. 두껍기에 무너질 걱정도 없이 깊이 찔러 벤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도 광대한 영역에 걸쳐서 마력 탐지를 걸어본다.

마력의 반향정위는 지나치게 금방,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가져왔다.

“탐지가 온전히 돌아오는 것 보면 [은하의 포식자]는 아닌데? 유사한 형태의 외계 생명체인가.”

스위치를 차곡차곡 바꾸어 나간다. 여긴 판타지가 아니라 온전한 SF인 듯하다.

그 증거로 대놓고 마력으로 내 위치를 몇 번이고 노출시켰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다.

구멍을 뚫은 김에 마저 한다.

바깥 대기 분석.

“이산화탄소 비중이 엄청나게 높고…… 질소와 아르곤.”

나는 과학자 출신의 유배자를 만날 일이 많았다.

필요하다면 어떤 지식이건 머릿속에 구겨 넣어뒀다.

이런 대기 조성이면 좀 낯익은 게 있다.

“화성이군.”

외벽을 더 크게 썰어내고 공기의 유출만 마력방벽으로 막아둔 후 바깥으로 나간다.

붉은 토양이 보인다.

[천리안] 같은 관측 마법으로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 행성의 전경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고 한때 문명이 있었다는 흔적도 수없이 보였다.

패러테라포밍이 이루어졌었던 화성, 수없이 많은 돔형의 도시가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사이를 잇고 있는 대중교통이었던 무언가들도 보인다.

여긴 개발 중이던 화성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곳에, 벌레나 갑각류를 닮은 온갖 크기의 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눈에 띄는 거대한 생체 구조물들은 대부분의 돔들을 잠식 중이었으며 지금도 괴물들은 만들어내고 있는 모체로 보인다.

붉은 토양의 대부분은

궤도상에는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전함들이 보인다.

그 자체로 온전한 생체문명을 구성한 어떤 외계 종족.

그리고 태양, 지구가 보였다.

“돌겠네. 지구가 파란색이 아니네.”

대륙의 형태는 내가 알던 것이 맞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푸르딩딩한 구체가 아니라, 보랏빛으로 물든 곳이 많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뭘 해야 할진 알겠네.”

SF에서 대뜸 판타지의 천사가 무쌍난무를 하는 장면이 나와야 하는 그런 목표가 주어진 거로군.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은하의 포식자]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이 녀석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생각보단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물량을 청소하다 보면 내 시간의 흐름이 너무 격렬하게 빨라질 것이다.

그럼 파티원과 내 시간은 멀어진다.

아주 귀찮은 기믹이다.

전투는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단서를 찾아보자.

저 구체적으로 전투를 최소화할 만한 단서를 말이다.

상황으로 보아, 이미 화성은 물론이요 지구까지 어떻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처음 떨어진 구역은 안전하고 멀쩡하게 작동하기까지 했다.

그럼 무슨 단서가 있어도 있을 것이다.

“들키지 않고 숨어 있다가 굶어 죽은 미라들이었군.”

혹은 희망을 잃고 자살일지도 모르지.

안심해라, 이 심연의 파편에 거주하는 지구인들이여.

그대들을 구원해야만 하는 천사가 여기에 있으니.

그래도 지구 그 자체인 곳은 정말 오랜만이다.

각 서버들의 미래에는 결코 지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특수한 곳에서나 진짜 지구가 등장하는데, 그런 곳은 심연이 아니면 만나기도 힘들다.

“여기가 내 지구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야.”

어쨌건 전투 자체는 좀 쉽지 않을까 싶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기지 내부로 돌아가서 구석구석 탐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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