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528화 (52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28화

심연 2857층 - 어떤 기지(3)

생각이 여러 바퀴를 돈다. 헛돌기도 했지만 결국 어딘가의 결론에 무사히 안착했다.

어째서 이 층이 이렇게까지 미궁답지 않은가에 대한 답이 방금 나왔다.

그냥 미궁이 아닐 수도 있다.

더 정확하게는 미궁이, 미궁이 아닌 곳을 고의적으로 만들어냈다.

그게 이 층일 수 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럼 이후에도 이렇게 흘러가나?

한번 틀어졌으나, 그 틀어짐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미궁이 그걸 포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그럼 나는 혹시 모든 파티원들의 출신지를 방문하게 되는가.

또는 그저 만난 적이 있는 이의 출신지마저도 방문할 수 있는가.

그렇게 온갖 곳에서 유배자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힘이라면 그 세계를 심연의 일부로 구현하는 것 따위는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 가능성이 있다.

그런 결론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고 다음 말을 꺼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초도 되지 않는다.

* * *

* * *

나는 지극히 ‘오르골’처럼 말했다.

“여기서 무엇을 했지? 보고하라.”

“네. 오르골.”

지극히 절제된 전달력으로 그리히의 보고가 시작된다.

짧고 직관적이었다.

‘오르골’은 편리한 남자다.

자신을 하도 숨겨대니 측근조차도 정확한 정체를 모른다.

그러니 내가 그의 행세를 하는 것도 더없이 쉽다.

말투나 행동에서 들키기도 힘들다.

오만하며 자신감 넘치는 사람의 행동 패턴은 특수하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쉽다.

그 비대한 자아는 아주 개성적이며 무엇보다도 쉽게 사고추적이 가능하니까.

잠깐 정도는 그보다 쉬울 수 없지.

그리히의 보고는 일기장과 다르게 엄청나게 짧으면서도 모든 내용을 축약하고 있었다.

그런 훈련을 받은게 분명하다.

블랑쉐도 곧잘 그렇게 브리핑하곤 했지.

“그렇군. 나 역시 현 상황에 대해서는 정보가 부족하다. 고립된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이 최선이었지.”

“고생하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해둬도 내 행방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는 않겠지.

그럼 이제 지금 시점이 오르골의 미궁행 전인지 후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내겐 정보가 이미 있다.

‘오르골’은 블랑쉐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다.

“블랑쉐가 사라진 게 아쉽군.”

그리히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일종의 라이벌이었다고 들었다.

누아르 이후 누가 그 자리에 설지에 대한 라이벌.

블랑쉐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리히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문제없다. 너는 충분히 잘 하고 있다. 일단 이 상황부터 어떻게 해보지.”

운은 띄웠다.

블랑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반응은 없다.

그럼 천천히 캐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오르골이 유배자가 되기 전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외계인 침공에 대해서 그가 몰랐을까?

그리고 나는 지극히 ‘오르골’답게 자신만만한 행동에 나섰다.

그리히는 그 사실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으며 의심하지 않았다.

효율추구의 변태라는 면에서 ‘오르골’은 나와 동명이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모로 닮았다.

애초부터 나에 대한 헌사로 들어간 설정이 아닌가 의심해볼만도 할 정도다.

그러므로 ‘오르골’이 작정하고 자신의 광신도를 양산하고 싶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미궁스러운 장비들을 집어넣고, 그리히의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빌렸다.

고블레타리아의 것에 비하면 품질도 기술도 아쉬우나 그저 깡스탯만으로도 이 곳의 전투는 무리가 없다.

고로 내 자신을 포장하는 것도 너무 쉬웠다.

적당히 썰어 제끼고 있어 보이는 말을 하면 된다.

“이 개체들에 대해 알려진 바가 있나?”

“제 개인 연구에 불과합니다. 이 섹터에 파견된 것은 오로지 저뿐이었으며 살아남는 데만 급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가. 살아남아 다행이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렴.”

“물론입니다.”

대화의 패턴 속에서 몇 가지 어색한 점을 느낀다는 징후를 발견한다.

어떻게 수정해야할지 역시 패턴이다.

어느 정도 아비 행세는 했던 모양으로 딱딱한 대화만을 주고받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 얼굴마저 숨길 정도로 변태 같은 점이 두렵다.

당면 목표는 화성 탈출이다.

“그 위치로 나를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우주정이라고 불러야할만한 물건이 있다. 행성간 항행에 사용될 정도의 물건은 아니지만 괴물들이 점령한 화성에서 자동차 정도의 이동수단은 될 것이다.

바깥의 상황에 대해서는 설명했다.

그리히는 창백해졌으나 나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고수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안정을 되찾는다.

가는 길도 수월했다.

애초에 내가 맨손이어도 천사의 스펙만으로도 이 괴물들을 압도할 수 있다.

거기에 솔직히 [은하의 포식자]가 이 녀석들의 상위호환이다.

구조 자체는 수렴진화인지 흡사하기에 내가 그리히에게 알려줄 수도 있었다.

“거길 베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쏠때도 그 부위가 아닌 이곳을 노리도록.”

“감사합니다!”

한쪽 팔을 잃은 상태에서도 곧잘 싸운다. 블랑쉐도 양손잡이였다.

그래도 전력으로서 기대가 되는 수준은 아니다.

이 세계 기준으로는 일당백의 초인이겠으나 미궁의 보정이 멀쩡하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생각해보면 [유니크 스킬] 금지였지.

평범한 랭커나 하이랭커에게는 엄청난 난이도였을지도 모르겠네.

우주정까진 순식간에 도달했다.

그리히는 조금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흠, 실제 ‘오르골’의 퍼포먼스를 너무 초과했나?

뭐 어때. 이미 고인인데.

그리고 우주정을 내가 운전할 필요도 없겠지. 이거 조작법 잘 모르겠다.

“네가 몰아라. 나는 잠깐 조치를 하지.”

마법을 건다. 광학미채 효과에 더해서 인식을 저해하는 것까지 했다.

물론 뭘 뜯어서 하는 척은 한다.

“하지만 이대로 올라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확인한 대로라면 사방이 괴물입니다.”

“탈출에는 일부 박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그런 곳에 있었으니까. 그들이 만든 좋은 기술들이 있지.”

이건 그냥 완전히 둘러대는 것이다. 이미 신뢰를 얻은 이상 그리히는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상식을 초월하는 일은 사실이기에 조금 주저하는 정도의 낌새는 있었다.

내 작업이, 사실은 진작에 끝났지만 끄적이고 있을 뿐이었던 일이 끝나고 그리히가 우주정의 운전석에 올랐다.

애초에 2인승이기에 나는 조수석이다.

엔진음이 꽤 컸다. 그리히가 움찔한다.

블랑쉐와는 많이 다른 반응이다.

그녀와 그리히의 우열을 가른 결정적인 부분은 그리히가 좀 더 감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들었었던 기억이 있다.

확실히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하자긴 하다. 지금도 나름대로 숨기지만 티가 팍팍 나는군. 포커는 잘 못 치겠는데.

그렇다고 거역하거나 실수를 하진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블랑쉐의 경쟁자 다웠다. 곧 무수한 괴물들이 어슬렁거리는 상공으로 접어들었다.

다른 돔형의 도시들도 멀쩡해 보이는 것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우리가 빠져나온 돔도 상당히 파손되었고 일부 섹터만이라도 무사한 게 기적에 가까웠다.

여러모로 인간의 시설들 자체는 외계 생명체들에게 어떤 용도도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최초에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공격한 이상으로 파괴되어있지는 않는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그리히가 생존할 수 있었겠군.

따라서 괴물들의 본격적인 밀집지역들은 돔형의 도시 그 자체거나, 그 주변은 아니다.

거기까지 확인한 후에, 생존자에 대해 고민을 좀 해볼 생각이었다. 그리히도 정보가 없기는 매한가지니 정보원이 필요한 탓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돔들은 내부에 공기가 남아있진 않아 보인다.

깨져서 부서진 틈으로 제멋대로 자란 생체조직들이 절반 이상을 뒤덮고 있다.

화성은 도리어 지구보다는 보랏빛으로 보이는 곳이 적었다.

도착한 곳은 비교적 멀쩡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리히가 움직이질 않는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것 같은 표정의 그리히를 다그친다.

우주정은 당연히 무엇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동하여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히 입장에서는 내 지시에 따라 경로를 잡는 것만으로도 저 괴물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몇 가지 기억을 더 떠올린 참이었다.

“아지트로 안내해라. 아직 무사할지 모르겠군.”

“알겠습니다.”

주요 위치마다 하나씩 조직의 비밀 거점이 있다.

이곳은 지구로 이동할 수 있는 우주공항이 존재하는 돔이었으며, 따라서 비밀 거점은 반드시 있다.

써도 위화감이 없는 무기들을 구해놓는 편도 좋겠지만 아지트를 관리하던 녀석들이 어떤 기록이라도 남겨는 두었겠지.

나는 위치를 몰라도 된다. ‘오르골’도 직접 뭔가 하기 보다는 언제나 명령을 내리는 태도였으니까.

그리히는 이제 정말 아무 의심도 없는 것 같았다.

아마 미궁의 본래 의도는 그리히를 동료로 삼는 것까지였을 것이다.

내가 ‘오르골’에 대해 너무 잘 아니까 그냥 부하로 부리는 것이지.

강력한 이세계인이 구원자가 되는 것 역시 클리셰긴 하네.

가는 길은 그리히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하게 험난했다.

애초에 절반은 침식당해있다.

상위 개체들도 엄청나게 많았으며 감지 능력이 뛰어나 마력을 동원해도 너무 들이대면 느낄 것 같은 녀석들도 있다.

나는 그냥 사일런스를 걸어 소리가 일정 이상으로 퍼지지 않게 해두고 하나하나 쏘거나 베어 죽였다.

그리히는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움직이다가 이내 내 보조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쓸모없음을 자책하는 듯 하다.

“무사하군.”

“다 다행입니다.”

무사할거라고 생각했다.

제일 가까운 곳에 지구로 떠날 수단이 존재하고 그곳에 지부도 있다?

그리히가 동료였어도 들리고자 했겠지.

무기를 보급하는 의미도 있겠고 말이야.

그리히는 열심히 무장을 보충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대화로 캐낸 정보에 따르면 그녀는 비교적 경무장으로 침투해있었다.

암살 대상은 외계 생명체들의 침공과 함께 사망한 했으며 사회 자체가 붕괴한 아포칼립스 상황에서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협력하는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단적으로, 마지막의 순간까지도 그녀는 그저 그 섹터에 근무하던 여의사였다.

나는 굳이 남은 사람들의 최후를 언급하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오르골’답지는 않았으니까.

“아…….”

아주 짧고 작은 탄식.

내가 돌아보자 그리히가 움찔한다. 그녀는 내 옆에 죽어있는 아지트의 관리자를 본 모양이다.

사인은 권총자살.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원래는 인원이 더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어느 괴물의 육체를 구성하는 단백질이 되어있지 않을까?

기록도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조직의 규율에 따라서 철저하게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점점 형식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록을 멈추지 않았으며 조직을 배신하지도 않았다. 이 자살한 시체가 아마도 기록원이었겠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기에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몇몇 다른 아지트의 위치나 재원, 조직의 구성에 대해 있는 대로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지구 쪽은 아직도 희망이 있어 보이는 군. 기록의 신뢰도가 높다.”

지구는 완전히 먹히지 않았다.

국가 자체는 모조리 붕괴했으나 그 기반들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항하고 있는 모양이다.

마지막 기록 역시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이 세계의 현재 날짜를 알게 되었다.

2311년 1월 8일.

그리히가 냉동된 것이 2297년이었으니 인류는 약 14년 동안 저항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블랑쉐의 사망 시점도 그리히가 보지 않을 때 슬쩍 확인할 수 있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녀는 확실하게 임무 실패로 유배자가 되었으니까.

2294년 7월 8일이 코드네임 블랑쉐의 마지막 기록이다.

그럼 3년이 더 지난 상태에서 이 개판이 시작 된 거고, 오르골은 이미 유배자가 된 후다.

그냥 이 신분 그대로 적당히 지구를 해방하고 다음 층으로 떠나면 되겠군.

무장을 끝마친 그리히가 그 사실을 보고하러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표정이 살짝 무너질뻔 했다.

그리고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며 그리히가 내게 건네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정장과 페도라.

이걸 이렇게 자연스럽게 내게 건넬 정도란 말이야?

‘오르골’ 이 변태자식.

하지만 시티즌에서조차 그러고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이걸 거절하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럽다.

어쩔 수 없이 환복했다.

이 시대 기준으로는 방탄부터해서 온갖 기능이 다 있는 하이 테크놀러지 정장이겠지만 미궁 기준으론 참 미묘하다.

그래도 거울을 보니 멋있긴 했다.

희우한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디자인은 잘 뽑았군. 멋쟁이 녀석.

실로 ‘오르골’답게 페도라를 눌러쓴 후, 우주왕복선이 존재하는 구역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느낌상 지구에 가면 조직의 생존자들이 주축이거나 적어도 군대였던 이들과 협력하고 있을 것이다.

이 신분을 유지하면 자연스레 편리한 영향력이 생기겠지.

그런데 왜 사이즈가 딱 맞지?

기분이 좀 나쁜데.

블랑쉐가 괜히 5층에서 그리 쉽게 넘어온게 아닐지도.

이 녀석 진짜 나를 모델로 만들어진 놈 아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