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31화
심연 2857층 - 덴버 탈환(2)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
내가 미국의 지리에, 나아가 지구의 지리에 그다지 밝지 않다는 점이다.
게임 세상은 지리를 몰라도 추측해서 때려 맞출 수 있을 정도의 짬을 쌓았으며 세계지도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다니.
문득 나 또한 외계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세계인인 것 까지는 명백한 진실인가 싶기도 하지만 말이야.
나는 일단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그리히를 보았다.
진짜 그냥 묵묵하게.
‘오르골’이라면 틀림없이 이랬을 거라는 판단 하에 한 행동이었다.
그리히는 눈을 두 번 깜빡인 후, 깜짝 놀란 듯 브리핑을 시작했다.
“미군의 장비 체계는 제가 알던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더 낡았고 그리 제대로 된 관리를 받고 있진 못한 모양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리히는 그렇게 말하고 눈치를 본다. 티를 거의 내지는 않지만 결국은 내비치고 만다.
“그런가. 알겠다. 일단 접촉해보도록 하지.”
그리히가 제 몸을 점검한다.
* * *
그 강하에서 기억을 잃은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를 모르겠다는 느낌의 행동이다.
대충 알아서 판단하게 두자. 잘 모르는데 내가 더 위의 입장이면 그게 최고다.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보나?”
그리히의 자세가 다시 빳빳해진다. 그리고 주의 깊게 전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제가 겪은 저 괴물들의 발톱이나 외골격들은 아주 강력했습니다. 전차가 어느 정도는 버티겠으나 그 이상은…….”
일단 자연스럽게 이 녀석들의 수장 노릇을 하려면 내 입장에서도 심리전이다.
다행스럽게도 금속에 대한 사전 지식은 많다.
마법적 힘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합금의 강도와 이미 상대해본 괴물들의 강도를 생각해본다.
도리어 괴물이 전차보다 친숙하다니.
대충 사이즈는 나온다. 전차는 한 대뿐이고 주변에 생체 반응은 아주 많다.
습격은 소규모지만 지키는 병력도 소규모다.
분위기로 보아서는 이쪽이 인류의 영역은 아니고 저들은 조사차 파견된 소규모 정찰대 내지 척후대겠지.
마지막 마력 탐지가 내게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이 주변은 제대로 된 둥지가 아직 없다.
정복이 끝나고 천천히 전진하며 밀고 올라오고 있는 단계로 보인다.
소형 개체가 수십, 중형 개체가 다섯 남짓.
대형 개체는 존재하지도 않지만 전차 하나 딸린 분대가 견뎌내기는 힘들겠군.
이쪽 지구의 파워 밸런스에 뇌가 점점 적응하기 시작한다.
매번 새로운 회차를 시작할때마다 하는 작업이기도 한데, 그 때문에 마치 내가 죽은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돕는다.”
결정에 이견은 없었다.
그리히는 한쪽 밖에 없는 팔로 중기관총을 능숙하게 들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 그냥 검을 빼들었다.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문제인가 순간적으로 생각해본 것이다.
지구가 이 꼬라진데 이미 진작에 협력하고 있겠지.
그리히의 엄호 하에 뛰어든다. 플라즈마 소드는 아티팩트급 물건이 드물어 자주 사용할 일이 없는 종류의 검이다.
마력으로 어느 정도 강화하자 베는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
“진정하시지. 나는 그대들의 적이 아니야.”
이 정도면 아주 ‘오르골’같다고 생각한다. 그리히는 수상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냥 이 녀석이 좀 바보라서 그런건 아니겠지?
블랑쉐의 경우에도 어딘가 그런 면이 있다. 유전자의 스탯이 피지컬에 몰빵되어서 그런가?
어쨌든 그렇게 평가할만큼 그리히의 전투력 자체는 훌륭했다. 블랑쉐의 라이벌일만한 존재다.
더 정확히는 초기 블랑쉐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수트는 손상되었어도 여전히 기가 막힌 오버테크놀러지이며 내장된 다양한 기능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덕분에 나는 적당히 묻어갈 수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조직의 분들이시군요.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어디 소속이신가?”
너무 자연스럽게 알고 있고 경례까지 붙인다. 그 바람에 입을 여는 도중 꺼낼 말을 수정해야했다.
대위 계급장을 30대 초반 정도의 군인는 친절하게 자신의 소속을 밝혔다.
“현 소속은 최전방 수색대입니다. 동향을 보고하는 일을 하죠.”
“과연, 수고하는군. 기지로 돌아가나?”
“이 정도 습격을 받았으면 귀환해서 알리는 수밖에요.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이미 어떤 임무를 수행중이라고 여기는지 더 이상의 질문조차 없이 깔끔했다.
부상자를 수습하고 귀환자들을 챙기기 시작하는 바람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다시 붙여야했다.
“우리도 귀환이 필요하네. 가장 가까운 곳 좀 알려주겠나?”
그러면서 과열된 총열에 물을 끼얹고 있는 그리히를 가리켰다.
대위는 그녀의 한쪽 팔이 없는 것을 보더니 표정이 변했다.
“전차에 타시겠습니까?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히.”
그리히는 모두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른 장비를 수습해서 쫄랑쫄랑 따라왔다.
병사 한 명이 그 등에 진 무게에 감탄한다.
“안 무겁습니까?”
“이 정도는 일상이죠.”
그리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는 전차 위에 제 장비를 적재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무게를 버틸려나.”
“그렇게 무겁진 않아.”
“나도 알아. 그냥 감탄한 거야.”
생각해보면 중기관총을 사람이 들고 쏘는건 상식적이지는 않지. 그리히는 그 외에도 덕지덕지 챙겨서 제 몸무게의 몇 배는 짊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새삼 기분이 묘하다.
여긴 정말 평범한 지구구나.
탱크 데산트는 유서 깊은 이동 전략이다. 병사들이 주변을 행군하고 나와 그리히는 움직이는 전차의 주포 옆에 올라앉았다.
그리히에게 슬며시 운을 뗀다.
“조직은 완전히 알려진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녀석도 모르네. 하긴 냉동인간이 된 당시 기준으로는 여전히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국제 용병 비슷한 존재였을 것이다.
첩보전은 블랑쉐의 시대에 다시 부활한 냉전의 유산이었다고 하니까.
그게 이렇게 외부의 침략으로 끝장나버리니 막상 인간들끼리는 평화로워진다.
병사들의 얼굴에 근심이 없다고는 못하지만 우리에 대한 경계 역시 없었다.
조직은 굉장히 신뢰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은, 이런 괴물들이 창궐하는 가운데에는 같은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호감과 신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는 길은 이미 정찰이 끝난 곳이었다.
나는 추가적인 습격의 위험에 대해 대위에게 질문했고 그는 약간은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최전방의 둥지들이 죄다 섭취한 유기물을 소화하기 위해 휴면기에 들었습니다. 이 근방에 활동 중인 벌레는 저게 다일 겁니다.”
안 그랬으면 저희가 여기까지 정찰을 나왔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대위는 운이 아주 나빴다며 부하들에게 사과한다. 부하들은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더 희망차다. 뭔가 다른 수단이 더 남아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단순히 되다만 포식자들이 여유를 주어서일지도 모르겠지.
그나저나 전기로 움직이는 전차는 제법 신기했다.
마도공학으로 만든다면 그린스킨제가 아닌 이상 완전한 무음도 가능하다.
이 전차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미세한 소음, 가깝다면 시인 가능할 정도의 위이잉 하는 소음은 존재한다.
무한궤도가 아니라 살짝 떠올라 있다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자기부상인가? 아래에 궤도도 없는데.
이런 기술에 대해서라면 배워볼 필요도 존재하는 것 같다. 고블레타리아가 쓰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의미 있는 발견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주변 병사들의 잡담이 들려왔다.
본인들은 절대 들리지 않을 거리에서 절대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속삭이겠지만, 천사의 귀는 쓸데없이 좋아서 말이야.
“야, 케빈. 저 섹시한 여자 그 요원들이지?”
“교육 받을 때 졸았냐? 그게 아니면 저런 바디수트를 누가 입고 다녀.”
“근데 그럼 저기 저 X나 뻐킹 잘 생긴 남자는 누구야?”
“몰라, 요원이 여자만 있는 건 아닌가보지.”
미군과 조직 간에는 아주 공식적이고 단단한 상호 협력이 존재하는 모양이군.
“대위님은 기사단을 본 적 있나봐.”
“아닐걸? 손가락 자꾸 꼼지락거리는 거보면 긴장했어.”
“그건 죽을 뻔해서 아니야?”
기사단은 뭔 소리야.
어쨌건 대위는 이쪽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의 그 대응은 매뉴얼이었나.
조직의 규모는 적다. 협력관계라고는 해도 하부조직으로 편입되는 식으로 붕괴하진 않고 온전히 체계를 유지하는 모양이다.
‘오르골’이 없는 이상 기본적인 지침이 변하지도 않겠지.
누가 물려받았을까.
블랑쉐의 정보에 따르면 코드네임 베르가 유력하다.
같은 유전자임에도 성격들이 많이 다른 자매들 중에서 가장 지휘관 타입이었다고 한다.
비상시를 대비한 지휘체계는 없었냐고 하니까, ‘오르골’은 어차피 자신이 없는 조직은 무가치하다고 여겼기에 그런 건 없었다나.
정말 악의 비밀결사가 따로 없음에도 이렇게 된 게 신기하군.
“칼로 저렇게 싸우는 게 말이 되나? 난 뭘 들려줘도 근접전은 무리야. 총 쏘다가도 오줌 지렸다고.”
“아, 너 저리 꺼져. 이 냄새 너였구나.”
대위가 그 말을 들은 모양이다. 그 병사는 서둘러 탈취조치를 받았다.
병력이 없을 것이긴 해도 흔적을 남기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전체적으로 심각함과 유쾌함이 뒤섞인 분위기다.
얼핏 좋아보이지만 아주 좋진 않다.
사람이 죽음이 스쳐 지나갔음에도 저리 유쾌할 수 있다는 것은 대표적이 PTSD의 증상들 중 하나다.
그러나 절망에 먹혀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꽤나 체계가 잘 유지되고 있으며, 수뇌부가 아래쪽에 희망을 잘 유지키시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아포칼립스 상황에 처한 인류 국가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양호한 상태다.
아마 좀 더 심연 고층이었다면 더 끔찍한 상태가 된 후의 지구로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보급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듬성한 숲을 빠져나가고 황폐한 도로가 보였다. 11년간 방치된 탓에 아스팔트는 갈라지고 곳곳에 잡초가 돋아나있다.
“여기서부터는 함께하지 않으셔도 찾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어떤 문제가 있다면…….”
“아니, 문제없다. 대위. 자네들의 기지 사령관을 뵈어야겠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호위라고 생각해도 좋네. 우린 인력이 부족하지 않나.”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것도 매뉴얼이군. 조직은 여전히 미군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맞는 모양이다.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받는 듯한 느낌도 마음에 든다.
비로소 책임에서 해방된 듯한 표정으로 대위가 전진을 명한다.
신경을 많이 쓰는 것도 쓰는 것이지만 존중과 동시에 어딘가 공포 역시 엿보인다.
확실히 이런 초인들은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지.
그리히를 살피자 반쯤은 익숙한 듯, 그리고 나머지 반은 낯설다는 듯이 대위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그냥 무슨 감정인지 알 것 같았다.
“양지의 햇살은 어떤가? 그리히.”
“좋습니다. 경외 받는 일은 익숙했지만 감사 받는 일은…….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
곧 기지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초승달 모양의 저수지로 보호받는 거대한 전선기지다.
민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좀 더 북쪽에 있는 모양이다.
강하하며 본바 그대로라면 미국 본토 남동부는 보랏빛 점액과 둥지로 뒤덮였다.
인간의 영역이라 생각되는 곳은 캐나다와 알래스카 정도뿐이다.
화성에서 본 기록에 따르면 최남단인 남극에 상륙한 후, 사방으로 뻗어나갔다고 하니 이해가 가는 전황이다.
보랏빛 점액으로 뒤덮인 곳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숨 쉬는 모든 유기물은 수확 당했으리라.
지구의 북쪽 약간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에도 생명이 숨쉬고 있지 않다.
미궁에선 흔해빠진 일이지만 이곳이 지구라 생각하면 각별해진다.
우리는 곧장 기지 사령관에게 인도되었다.
별 3개가 빛나는 계급장이 우리와 마주하게 되었다.
조직은 여전히 강력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면담까지는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기지 사령관은 계급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내게 제일먼저 물었다.
“혹시 코드네임 오르골 되십니까?”
“그렇다.”
솔직히 반말할 상대는 아닌 것 같지만 ‘오르골’이라면 분명 그랬겠지.
“이미 미군은 우리 조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모양이더군. 코드네임 베르에게 연락해주겠나.”
“물론입니다. 수송기를 수배하겠습니다. 곧바로 대통령각하가 계신 곳으로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우리 조직이 미군과 어떤 관계를 유지 중인 것이지?”
중장은 내가 어디까지 모르는지, 내가 어떤 환경에서 귀환하였는지에 대하여 잠깐 갈피를 잡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곤 입맛을 다시더니 말했다.
“음, 어떻게 여기실진 모르겠지만. 우리는 당신들을 농담 삼아 기사단이라고 부릅니다.”
“기사단?”
“병사 위의 기사 아닙니까. 대형 괴수를 단독으로 토벌할 수 있는, 아니 거기다가 토벌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전력들을 다수 보유했다면 그런 식의 별명이 붙기도 하는 것이죠.”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해했네.”
진짜 오르골이 이걸 마음에 들어 했을지 모르겠다.
블랑쉐라면 마음에 들어 했을 것 같다.
대충 알 것 같다.
초자연적인 괴수들을 상대로는 비현실적인 전투력을 지닌 초인들로 대응한다.
희망이란 그런 것이지.
나 또한 왕국에서 자주 써먹던 거라서.
그래서 대위가 우리에게 조심스러웠으며, 그곳의 병력들이 나와 그리히가 보인 퍼포먼스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블랑쉐의 초기 스탯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제대로 된 군대와 함께 움직인다면 더더욱 그렇다.
요컨대, 오르골이 남긴 조직의 요원들은 이 지구의 히어로 유닛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