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35화
심연 2857층 - 파나마 운하까지(1)
나는 이곳의 인류가 어느 정도 전력을 가졌는지 정확히 모른다.
어느 서버였다면 도리어 알 수 있다. 하루 이틀 봐온 전쟁도 아니고 내가 지휘한 적도 흔하니 말이다.
24세기는 여러모로 아리송한 곳이다.
되다만 포식자 쪽이 더 친숙하다.
그래도 덴버를 왜 그렇게 되찾고자 하였는지는 알겠다.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일부 대도시는 이미 확보한 곳이 많다.
그리고 그 대도시들에 전력을 공급하던 원전들도 대체로 다시 확보한 상태다.
포식자들은 유기물에 관심이 있기에 숲이나 목장, 농업지구 따위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서 유기물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산업단지나 발전소 등은 고스란히 방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막대한 전력을 사용할 인구가 없죠.”
「그래서 이걸 못 썼던 거군.」
루시는 덴버 공략의 중간쯤부터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세계는 미궁의 인물에게는 어떤 식으로건 흥미로운 모양이다.
「이족보행병기를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이런 형태는 참 신기해.」
* * *
“스케일은 좀 소소하죠?”
「마법이 없는 탓인가. 하지만 디테일이나 마감은 더 훌륭하군.」
서버의 미래 세계에 이족보행병기가 출현하는 일이 아주 드물지는 않다.
그러나 지상에서 활동하는 것을 상정하기보다는 우주 전용이기에 체급 자체가 다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기껏 해봐야 전차 수준의 체급이니 전함 수준의 체급인 그것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물리적 스펙에서는 마법이 동원되는 미궁의 압승이다.
“그래도 이런 식의 설계 자체는 배워볼 만하군요.”
「나는 공학은 잘 모르지만 인간을 본떠 만든 것이라면 어느 정도 알지. 확실히 마법이 부재한 세계의 기술은 또 다른 방식으로 대단해지는구나.」
“그치만 이것의 전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또 별개의 문제란 말이죠.”
진짜 잘 모르겠다.
포식자들도 약화되어 있고 인간의 전력도 약화되어 있다.
미궁에 비하면 그렇다.
도통 디테일한 예측을 할 수가 없다.
「너는 그 층을 얼마나 책임질 생각이지?」
세계라고 말하지 않고 층이라고 말했다.
결국 심연의 일개 층.
블랑쉐의 부탁이 있다곤 해도 어디까지 이들을 돕느냐의 말이다.
유사 포식자의 완전한 섬멸은 불가능하다.
그건 아마 오랫동안 이 세계의 인류에게 숙제로 남을 문제가 될 것이다.
“하이브 마인드만 썰면 바로 빠질 겁니다.”
「그럼 이들이 감당할 수는 있고?」
“오버시어들만으로는 하이브 마인드 같은 판단을 내리기 힘들죠. 각자의 군벌로 쪼개질 거고 생존 경쟁이 불붙으면 동족들 또한 일개 유기체로 볼 테니까요.”
「호오, 그렇게 되는 거군. 그게 원본 포식자들의 공략이기도 한가?」
“맞아요. 내분 일으키기. 하이브 마인드를 잡은 이후도 문제인 곳이죠.”
대신 [은하의 포식자] 테마는 내부에 존재하는 아군 역시 그만큼 강하다.
애초에 거긴 전쟁이 테마니까.
개인의 전투력보다는 국가 단위의 팩션을 이끄는 능력이 중요해지는 테마다.
“좀 미니 버전이긴 해도 마지막까지 책임지긴 힘들어요. 계단도 아마 그 근방에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 지금 하이브 마인드 위치는 남극이라고 하니까 거기서 발견될 것 같습니다.”
「네 뜻대로 되면 좋겠군.」
“다른 파티원들은 어때요?”
루시가 말없이 메시지들을 띄워 올렸다.
[2912층 에길 : 대뜸 바다뿐인 행성이 배경으로 등장해 인어가 되었다. 이거 나쁘지 않군. 포세이돈이라고 했나? 도끼가 아니라 삼지창이었으면 더 좋았겠어.]
사진이 첨부가 되어 있다.
신좌의 계시 같은 기능을 응용한 건가. 어이가 없네.
「어허, 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해라.」
어쨌든 하반신이 꼬리지느러미가 된 에길이 근엄한 표정으로 도끼를 들고 셀카를 찍은 모양이다.
당혹스럽지만 건강해 보인다.
[3000층 아서 : 나는 고대의 기사들과 함께했다네. 모두 명예를 아는 훌륭한 기사들이었어. 원탁이 그립군. 리더는 블랑쉐 아가씨의 세계에 가 있다지? 어쩌면 카멜롯도 방문할지 모르겠어.]
[3126층 미아 : 심연은 미궁의 퇴적지라 너무 흥미로워요. 정말로 우리가 왔던 모든 곳들이 이 아래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죠. 아서 할아버지 본인이 직접 원탁의 기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본인들이 남긴 메시지 외에도 루시에게 물어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내 시간이 상당히 느리게 흐르고 있다고 한다.
블랑쉐의 등불을 확인해 보면 상당히 멀어져 있음이 보인다.
“이거, 가능하면 부상만 입히고 요원들에게 막타를 치게 했는데 그래도 좀 많이 죽였나 보군요.”
「숫자가 숫자다 보니 별수 없지.」
낼름이라는 놈들은 혀만 썰어버리는 식이었다. 타이탄 같이 요원들의 화력으로 단기간에 잡을 수 없는 대형 개체들만 직접 제거하며 시간왜곡을 최소화했다.
땅굴에서조차도 나는 철저하게 무력화에 집중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물량이 너무 많다.
“하이브 마인드까지 잡으면 시간이 많이 느려질 것 같은데. 골치 아프네요.”
「사실 그냥 무시하고 가도 좋지 않느냐? 하이브 마인드 하나만 단독으로 썬다면 순식간이지. 블랑쉐도 가능한 선까지만 이 세계의 평화를 바랄 거다.」
“옳은 말입니다. 옳은 말이죠.”
하지만 너무나도 마음에 걸리는 것 한 가지.
시간의 신이 이 심연에 무언가 부여했다는 것.
달라진 부분은 이런 식의 파티원의 세계가 출현하는 것 그 자체다.
그럼 시간의 신이 뭔가 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봐야 한다.
시간의 신전에서 사냥꾼이 도달한 결말을 생각해 보자.
진실의 파편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정 NPC인 블랑쉐가 돌아갈 세계가 여기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군.」
“그리고 그때 블랑쉐에게는 미궁의 은혜가 없을 겁니다.”
이어지는지 독립된 다른 곳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가진 단서는 시간의 신이 개입한 무언가라는 것 정도뿐이다.
“그 정도 심증이면 이 정도 수고는 할 수 있죠.”
「네 판단을 존중하마.」
[3131층 미아 :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저는 이미 보름쯤 지났어요. 다른 분들은 시간이 얼마나 흐르셨나요?]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그사이 키가 좀 더 자란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초등학교 2학년 정도로 보였다면 이젠 3학년은 되어 보인다.
원래 나이가 그게 맞으니까 성장 상태가 제 나이를 찾아가는 셈이군.
“완전 건강해 보이네요.”
「솔로로도 잘 적응하고 있더군. 네 걱정은 좀 기우였을지도 몰라. 그 뭐냐. 보고 배운 것들이 있지 않겠나.」
하긴 주변에 유배자 최강급의 전사들이 득실거리고 있긴 하다.
하다못해 제니조차도 어엿한 하이랭커가 맞다. 이제 스펙을 빼더라도 제니는 최상위권의 강자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3116층 제니 : 저는 이제 두 달쯤 지났어요. 블랑쉐 씨와 헤어져서 슬프네요. 외로워요. 보고 싶어요 미아. ㅠㅠㅠㅠ 흐어어어엉.]
[3131층 미아 : 제니! 제니는 고양이가 아니에요! 사람이야! 사람! 사람은 분리불안증후군에 시달리지 않아!]
[3116층 제니 : 몰라요 ㅠㅠㅠㅠ]
어이가 없어서 웃기네.
루시도 큭큭거린다.
「저 대화는 다들 직접 봤어야 하는데. 참 아쉬워.」
[2917층 에길 : 서브 리더를 만났다네. 안부 전하지.]
근엄한 인어 에길과 옆에서 브이를 세우고 있는 기천사가 보인다.
활짝 웃고 있다.
“저기도 별문제 없나 보네요.”
「문제 생기기에는 너무 저층이긴 하지.」
사실 내가 걱정이 많은 거긴 하다.
이제 한 7천 층이 넘어가면 슬슬 쫄리기 시작해야지.
젠장, 나도 마음이 너무 약해졌나.
「아주 좋은 현상이로군. 난 처음부터 네가 그렇게 되길 바랐거든. 영감님도 그랬을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고 아직 여유가 철철 넘쳐흐르니 그런 걱정을 하는 거지.」
그 말도 옳다. 결국 이걸 위해 천사 장비를 선행 파밍하고 분배한 거니까.
그 외에는 아서가 여전한 마법사 스타일의 복장으로 수염을 쓰다듬는 사진이 몇 장 있었다.
포즈를 나름대로 취하는데 그럴싸한 마법사 같아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양이다.
「아서가 기사들 만난 이야기도 되게 웃긴데, 복장이 저렇다 보니 마법사로 오해를 받았거든?」
“그럴만 하죠. 누가 봐도 마법사 아닙니까. 로브 속의 갑옷도 워 메이지면 드문 일은 아니고.”
「끝까지 마법사로서 역할을 완수 했지. 얼굴이 시뻘개져서 술식을 짜는 그 모습을 모두가 봤으면 했어.」
“루시 요즘 참 즐겁겠군요.”
「신좌에 잠깐 앉아 있는 거 꽤 괜찮은 일인 것 같아.」
모두가 그렇다니 다행이다.
나는 꼼꼼하게 각각의 파티원들에게 보내는 코멘트를 남겼다.
그리고 덴버의 격납기지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베르가 도착했군요. 그럼 이만 여기 일 좀 보겠습니다.’
「무리하진 말아라.」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나? 루시와 혼돈의 여신은 갭이 좀 크군.
「또 무언가 불경한 생각을 했구나 신도여. 이 대사 오랜만이군. 후후후.」
“어휴.”
협력을 구한 이후부터는 내가 미군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베르 입장에서도 더 편할 것이다.
나는 떠날 입장이고 그녀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전달하지. 오르골.”
다만 직접 하는 것은 나기에 베르에게 먼저 이해시키고 그녀가 미군을 상대하게 될 뿐이다.
“멕시코까지 선을 그어둔 다음에 따로 활동할거야. 이쪽에 시선이 쏠리겠지. 그 방어들은 사람들이 해야 해.”
“당신은 암살에 나서고?”
“기사단이니 뭐니 해도 그게 본분이지?”
하이브 마인드의 위치나 여러 가지 정보에 대해서는 아직 살아 있는 미군의 위성들이 제공할 수 있다.
내가 있던 지구에서 한참 이슈던 스타링크인지 뭔지는 이쪽에선 옛날 옛적에 실현된 낡은 기술에 더 가까웠다.
무기물에 관심 없는 녀석들이 그 많은 위성들을 다 솎아내지도 않으니 상상 이상으로 멀쩡하게 작동 중이다.
실제로 북미가 아닌 곳에도 숨어 지내는 생존자들은 있는 모양이었다.
인간의 개체가 충분히 줄어든 후의 타겟은 주로 식물이나 해양생물이었던 탓이다.
“협력을 구할 수 있을 만한 곳들도 있었지.”
“도움받는 입장에서 묻기는 좀 그렇지만, 그냥 하이브 마인드만 제거하면 되는 것 아닌가?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지금 당장에라도 날아서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난 이 세계를 좀 더 보전할 생각이다.
“이 경로대로면 오버시어들을 하나씩 썰면서 진행할 수 있어. 그게 아니더라도 이 세계에 어떤 신화를 새길 수 있겠지.”
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직이 패권을 쥐길 바라는 건가. 네가 떠나더라도.”
“그것도 포함해서 말이야. 넌 그 일에 부정적인가?”
“솔직히 말하지. 난 아버지가 죽어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
“블랑쉐와 생각이 비슷하군.”
베르는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블랑쉐는 누구보다 오르골에게 충실했다면서.
거, 뭐. 자세한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 없겠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내 방침을 더 세세하게 전달했다.
베르는 훨씬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미군에게 전달할 것이다.
그리고 베르 역시 내게 미군의 의견을 전달했다.
“퍼레이드? 그건 과한데.”
“그쪽이 생각하기엔 이 기적 같은 전과가 다시 나오긴 힘들 거라 보는 모양이야. 의욕 고취가 필요한 단계인 거지.”
내정적 관점에서는 이해한다. 하지만 하이브 마인드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이 전과를 더 확대하는 편이 좋다.
이미 오버시어들은 사태를 파악했을 것이다.
미군이 알기로는 북미에 존재하는 오버시어는 둘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미군이 파악하지 못한 개체가 셋은 더 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동대 혹은 특수작전부대의 사령관 같은 존재다. 빠르면 곧장 내일 휘하의 병력을 동원해 올 것이다.
“거절한다고……. 아니지. 잠시만 기다려 봐. 더 극적으로 연출할 수 있겠군.”
“어떤 의미지?”
“정찰을 좀 해보도록 하지. 잠시 기다려 봐.”
공간을 열고 사라졌다. 오버시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기 위해서다.
마음껏 마력을 흩뿌려도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장님들 사이에서 나 혼자 눈을 뜬 것과 다름없다.
덴버 주변을 모조리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버시어 하나가 발견되었다.
하이브 마인드는 아직까지는 있을 수 있는 트러블 정도로만 여기는 모양이었다.
나라는 개인에 대한 경계도는 올라갔겠지만 그뿐이다.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이 녀석은 바로 오늘 새벽에라도 습격해 오겠군. 그건 좀 미루고.”
직접 해친 것은 아니다. 아주 신경 쓰이도록 사방에 노이지를 흩뿌렸다.
마법적 폭발이나 온갖 수단들이다.
그리고 놓치지 않도록 마법적 태그를 달아두었다.
이제 너무 멀어지지만 않는다면 어디에 있어도 이 녀석의 위치는 내게 알려진다.
“퍼레이드 때 습격해라.”
베르에게 그 사실을 전달했다.
“내가 지금까지 뭘 해왔던 건지 모르겠군. 너에겐 우리도 장난감이나 다름없지 않나? 솔직히 말해서 블랑쉐 때문에 돕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고맙지?”
“기적이란 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걸어 다니고 있다는 느낌이야.”
감사는 미소로 대신한다.
“그 감사를 블랑쉐에게 보내도록 해.”
솔로였다면 그냥 날아다니면서 하이브 마인드 위치만 찾고 슥삭했다.
그랬다면 통제를 잃고 각각의 오버시어들이 개별행동을 하게 되니 인류에겐 훨씬 큰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멕시코까지 밀어버린다면 방어선이 좁혀진다.
광대한 시설들이 다시 가동한다.
오로지 이들을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