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38화
심연 2857층 - 파나마 운하까지(4)
루시와 연락이 되었다.
신좌는 다양한 시간의 흐름에 적응할 수 있게 만들어져있다.
놓치는 흐름은 그간의 행동 패턴에 따라 자동으로 신도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되어 있는 것도 그래서다.
애초에 신좌에 도달할 정도로 강력한 유배자라 해서 모두 신노릇을 잘할 수는 없다.
루시는 꽤 잘하는 편이지만 어쨌건 저 신좌에 기록된 패턴은 세 명이나 된다.
루시, 나, 헨리.
풀오토를 돌려도 서버 관리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어차피 46서버의 고블레타리아 말곤 달리 없기도 하고.
「기다리고는 있다만 사실 잘 모르겠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단 거군요.”
「다른 쪽을 보다가 네 쪽을 보면 아주 그냥 슬로우 모션 비디오를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자주 끼어들기도 뭣하지. 네 시간에 동화되어있으면 그동안 다른 파티원의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거든.」
“몇 배쯤 차이나는 것 같습니까?”
「아무리 못해도 열배는 나고 있어.」
“더 나게 될 것 같은데…….”
* * *
* * *
* * *
쓰레기 같은 경우네.
최대한 노력하고 있어도 내 시간의 지연을 완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다.
다행히도 뭐 파티플레이 구간에서 강제진행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 뭐냐. 그냥 잘 지내고 있다는 듯하다.
식량이라면 진짜 산더미에 산더미만큼 챙겨갔으니까.
거기에 심연은 이블 상인들이 활동하는 곳이기에 저번에 들렀을 때처럼 거래를 할 수도 있다.
우리 파티는 혼돈의 신도가 많으므로 이블들은 순순히 거래에 응할 것이다.
문제는 없다.
그래 그냥 지연되고 있을 뿐이다.
블랑쉐를 위해 모두가 동의한 지연.
하지만 나는 찜찜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쉽게 풀린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게 말이죠. 뭔가 큰 문제가 생길 예감이 자꾸 드는데.”
그래도 순조로운 것은 사실이다.
진짜 순조롭다.
한번 에너지 절약 휴면에 들어간 포식자 병력들은 그리 단시간에 기상하지 못한다.
짜잔하고 갑자기 병력을 투하해댈 수는 없다.
애초에 인류의 잔존 세력은 나를 지금이라도 빼버린다면 무가치할 정도로 약하다.
화성에 남은 것들은 지구를 밀어버리는데 필요하지도 않다고 판단해서 거기 남은 거다.
그리히를 괴롭히던 녀석들은 최소한의 수확꾼들에 불과하다.
하이브 마인드가 정신이 나가서 버리지만 않으면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뭐, 사실 열배정도는 큰 상관없지. 백배여도 큰 문제는 없어. 심연은 시간이 문제인 던전이니까.」
“뭐 사실 여긴 원래 솔로용 던전이니까요.”
현실화되고 나니 솔로로 클리어가 힘들 뿐이다.
충분히 고였다면 모든 메인 던전을 솔로로 밀고 다닐 수 있었던 게 게임 시절의 미궁이다.
대통령을 포함한 ‘상식적인’ 사람들은 내가 기사단장으로서 주장한 작전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표했다.
신뢰와는 별개로 그러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러니까 멕시코 국경까지 전진한 후에는 떠나겠단 거군.”
“그렇다. 그때부터는 요원 몇몇과 남극으로 향할 예정이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나?”
타당한 질문이었다. 누가 봐도 무리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니까.
아마 대통령은 내가 취침 시간이 거의 없을 지경이라는 점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를 감시하는 인원은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 감시자는 딱히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하려고하면 할 수 있겠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 내게 그를 붙인 대통령도 그냥 좀 볼 테니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말하는 셈이지.
“난 바쁘다.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이야.”
“시한부라도 된 말투군.”
툭 던진 말이다. 그러나 꽤 진지하게 떠보는 거라는 걸 왠지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좋겠군. 계단으로 사라진 후에 그냥 전사한 셈 처리되면 얼마나 좋아.
아마 하이브 마인드를 치고 나면 계단이 나올 것이다.
진짜의 유해도 그곳에 있을 테니 정말 어려울 게 없군.
“밤새 나다니는 것은 알고 있다네. 우리 위성도 알고 있지. 그리고 자네가 정말 노력해주는 것도 말이야.”
“그냥 위성 카메라로는 몰랐을 텐데.”
“에너지 준위가 높이 올라가는 곳을 보면 알 수 있지.”
24세기엔 그딴 기술도 있나?
아니, 왜 사이보그는 없으면서 그런 건 있지?
사실 마도공학이라면 아주 쉽게 가능한 것이긴 하다.
고블레타리아도 특별히 사이보그 같은걸 쓰진 않는 걸 생각하면…….
역시 과학과 마법은 처음부터 하나인건가.
서로가 서로를 발견할 때까지 발전해나갈 뿐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할 것이다. 통제를 일시적으로 잃은 병력들 상대로 지진 않겠지.”
“그럼 우리가 시선을 끄는 셈이군.”
“정확하다. 하이브 마인드도 내가 단독으로 암살하러 간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테니.”
“과연 타당하군. 내가 알던 타당이 이런 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실제로 다 이루어졌으니 할 말도 없어.”
대통령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 뭐. 이건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건데 말이네.”
“말해라.”
“화성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걸 둘러댈 생각은 안 해봤는데.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자 대통령은 입맛을 다셨다.
“뭐, 진짜 그냥 가끔 드는 생각이 있어서 말이야.”
“뭔가?”
“하이브 마인드를 너무 친근하게 불러. 친구라도 되는 것 마냥.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 것 같아. 그러니 한 번씩 그 생각도 한단 말이야.”
대통령이 스스로도 믿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저것들이 여기로 온거 자네 때문인가?”
생각보다 정확한 통찰인데?
과정을 뛰어넘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비범한 자들이 곧잘 보여주곤 하는 일이다.
나는 그냥 피식 웃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윽시. 그럴 줄 알아쓰.”
그리고 대통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갔다.
나는 그를 설득할 수 있었다.
“나도 따라간다.”
“왜?”
“유해를 수습하려고.”
베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의리가 있었나?”
“애증이란 그런 거다.”
“그렇군.”
그리히는 본인이 싫다고 해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블랑쉐가 따로 부탁하기도 했다.
베르에 관해서는 뭐, 딱히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잘할 녀석이라는 것 같아서 별 생각 없었다.
베르에겐 블랑쉐의 현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고의다. 미궁이란 상상도 못할 무언가에 대해서 이들이 짐작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 것이다.
설명한다고 알 것도 아니고, 몰라도 되는 일이다.
“그럼 양손의 꽃이로군.”
“미쳤다는 점에선 원본과 꼭 닮았군.”
“괜찮아. 내 꽃은 다른 곳에 따로 있으니까.”
파티원들과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의욕 떨어지는 일이다.
적들이 오랜만에 강하지도 않으니까 더더욱 쉬어가는 기분이 되기도 한다.
파워 인플레의 차이가 너무 격심하니 발생하는 차이다.
덕분에 흔들림 없이 냉정한 모습만 보여주기가 쉬우니 다행이긴 하군. 별다른 노력을 안 해도 긴장 같은 게 되진 않는다.
“그럼 빨리 준비해서 와라. 당장 출발할 테니.”
“이미 했다.”
그렇게 베르가 합류했다.
기사단을 베르가 혼자 운영해온 것은 아니다. ‘오르골’의 복제인간들은 그 능력을 물려받은 이들도 많았다.
정말로 걸출한 인물은 맞다.
진지 끝자락으로 중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대통령은 아무리 그래도 이런 최전선까지 나올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되찾은 땅이 있을뿐더러 미국의 동부는 여전히 적의 손에 떨어져있다.
동부개척의 시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
“오버시어가 다시 돌아온 조짐이 있으면 돌아올 테니 연락 잊지 마시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싫어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중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강력한 전력이 이탈한다고 생각 중인 모양이다.
군사 전문가 입장에서는 치트키나 다름없었겠지.
멕시코 국경지대에 도달한 후, 내가 요구한 것은 작은 트럭 하나였다.
이미 수뇌부는 내가 그들에게 정상적인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뇌가 잘된 요원들이나 그런가보다 하지 어딜 봐도 현실적인 힘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내가 뭘 하겠다고 할 때 나를 걱정하는 일은 없다.
요원들을 위한 물자가 탑재되고 그리히가 운전하여 출발했다.
한때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보랏빛 점액과 무기물뿐인 황무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다.
딱 파나마 운하까지 보이는 모든 오버시어들을 처리한 후에 그곳에서 상사와 합류한다.
공중길은 내가 뚫는다.
누구도 어떻게라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가는 길에 대단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땅떵이가 좁으니 수색도 어렵지 않다.
나타나는 것들은 전투다운 전투도 벌일 필요가 없었다.
보는 이가 적으니 이제는 정말로 마음대로 마법을 뿌려댄 탓이다.
그리히는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베르가 밤중에 무언가 설명하는 것을 알았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운전이나 설명을 대신해줄 누군가가 필요해서 데려온 것에 가까우니까.
사실 그냥 날아가면 제일 편하겠지만 일부러 인간의 경로로 움직이고 있다.
그래봐야 며칠 차이다.
신화의 관측자도 많이 만들고 오래 구전되는 어떤 전설로 만들어둘 것이다.
블랑쉐가 돌아왔을 때는 그 후광을 등에 업고 지낼 수 있겠지.
이 정도 다져두면 정말 할 수 있는 건 다 한 거라고 본다.
하이브 마인드가 빠르게 죽으면 화성의 괴물들도 일제 공습을 감행하진 못하겠지.
나머지는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하이브 마인드는 억제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을 느꼈다.
검은 사내는 탄생한지 오래 된 이 괴물이 전혀 알지 못하는 힘을 다룬다.
동시에 괴물은 그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을 마주하게 되면 절망을 넘어선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숭배다.
오버시어는 그것과 다른 객체인 동시에 동일체다.
그것이 듣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하이브 마인드도 느낄 수 있다.
죽어나간 오버시어들의 마지막은 하이브 마인드 또한 겪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이브 마인드는 무력하게 죽었다.
그가 이 우주를 떠돌며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모든 수족들이 그 남자에겐 통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도 되지 않는다.
생체 전함들을 부랴부랴 깨워 포격도 해보았다.
포격이 시도되기도 전에 저지당했다.
생체 플라즈마를 몸에 축적하고 있던 시점에서 대상을 관측하고 있던 모든 관측병들이 일제히 죽었다.
공중의 생체 전함도 숨을 거두었다.
어떻게?
모른다.
대기권 밖에서의 공격마저 감지 당하고 수포로 돌아갔다.
급하게 변이 시킨 거대하고 비효율적이지만 강함만큼은 최선이었던 새로운 객체도 있었다.
하이브 마인드는 그것에게 자아마저 부여했다.
군단의 한 구석에, 자신의 한구석에 깃들어버린 공포가 문제가 아니었나 하여서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야성이 깃들기를 기대하며.
소용없었다.
그 야성이 오히려 그 남자에게 그 괴물을 굴복시켰다.
야수는 겁에 질려 날뛰었으며 이윽고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마주했다는 것을 받아들인 듯 했다.
군단에 심어진 공포가 문제가 아니다.
저 검은 남자는 죽음이다.
급기야 굳이 지금 처리할 이유가 없기에 살려두었던 다른 인간들을 잡아먹었다.
유기물질로서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뇌에 연결하여 이 행성의 종족들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연구했다.
그 덕분에 하이브 마인드는 신의 존재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더없이 초월적인 존재.
모든 것을 굽어 살피는 무언가.
그리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저 검은 남자는 신이라 불리는 존재인가.
종교의 개념을 이해한 후부터 하이브 마인드는 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인간들과 같지는 않았다.
태생부터 탐욕으로 진화했던 것이다.
위대하고도 숭배 받아 마땅한 저 신을 삼키리라.
그리고 자신 또한 신으로서 거듭나고 말겠다.
죽음마저 극복하고 그 죽음 위에 선 진정한 군단이 되리라.
하이브 마인드는 지난 며칠간 지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휴면에는 들 수도 없었다.
군단이 모아온 에너지들을 미칠 듯이 소모하며 짜내고 또 짜내고 통하는 방법은 없다.
그야말로 절대적이고도 압도적인 힘.
그렇다면 이쪽 역시 그 신을 맞이하기 위해 걸맞은 힘을 동원하리라.
하이브 마인드는 비명 같은 신호를 올려 보내었다.
우주 공간을 넘어 빛의 속도를 넘어 저 멀리 이미 정복한지 오래인 위성인 달과 화성까지 도달했다.
가장 먼저 깨어난 것은 오버시어들이다.
뒤이어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무언가 얻지 못한다면 그들 또한 굶어 죽을 것이다.
차디찬 우주 공간에서 소화할 수 있는 힘은 그리 많지 않다.
모든 것이 동원된다면 이 지구의 모든 유기물을 집어 삼키더라도 다음 세계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죽거나 죽이거나.
그리하여 군단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 비축해둔 모든 병력들, 모든 자신들, 모든 수족들.
수로 센다면 조라는 단위로 세어야할 괴물들 지구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