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39화
심연 2857층 - 구원자(1)
멕시코였던 곳을 지나치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난 멕시코 여행 가본 적 없다. 미국도 없지.
일단 이곳이 지구라는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회전초가 굴러다닐 법한 황야에 온통 바위산, 그 사이사이 곳곳에 질척하게 칠해진 보랏빛 점액.
그 점액들은 냄새마저 지독하여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악취를 찔러 넣는다.
상사는 자원했다고 한다.
“역사에 내 이름 한 줄은 남기고 싶더군요.”
본래 소속이 미군도 아니었던 탓인지 이 캐나다인은 처음과 별다를 것 없는 태도였다.
“바다를 건너야하니 자라.”
“그래야죠.”
파나마 운하에서 단 셋이서 활주로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미군이 믿어주었다.
실제로 그랬다.
여긴 운하 주변이다. 바다가 보인다.
어느 부자의 별장 같은 곳인 모양이다. 넓은 부지에 개인 활주로가 있다.
그 위를 요원들이 치우고 상사가 착륙했다.
상사가 낡고 더러운 집구석에서 잠을 청한다.
* * *
여기까지 오는 것도 꽤 불안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버시어는 다 잡아 죽였지만 결코 안전한 하늘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이다음이 더 문제일 것이다.
대평양을 넘어 뉴질랜드로 향해야한다.
곧바로 남극대륙으로 갈 수도 있으나 그러면 내륙 지방에 붙어 비행해야했다.
포식자의 생태를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우주에 액체 상태의 물이 풍부한 행성은 드물다는 것이다.
유기생명체가 번성할지라도 물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수중 괴수는 급하게 이곳에서 변이시킨 일부밖에 없다.
포식자들의 홈그라운드는 지상이다.
저것들이 인류와 함대전을 벌인 적도 없으니 대공 사격도 있기 힘들 수밖에.
바다 위가 안전하다.
사실 그냥 여기서 뉴질랜드로.
그리고 그대로 남극대륙으로.
마지막에는 하이브 마인드와 함께 사망.
그렇게 간단한 경로만 남아도 후세에는 있기 힘든 일로 전해질 것이다.
그게 말이 되냐는 식으로 말이야.
그럼 이제 그걸 전할 사람을 관리를 해야 하는데 베르는 알아서 잘할 거고 그리히를 찾아보았다.
수영장이었던 곳이 보였다. 물은 썩고 더러웠지만 그래도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거기에 앉아 발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더럽다. 하지 말아라.”
“아, 넵.”
그리히가 벌떡 일어섰다.
나는 문득 그러고 싶어져 물었다.
“이런 풀장을 처음 보나.”
“잠입 암살 임무 때 본적이 있습니다.”
“좋아하나 보군.”
“들어가 본 적도 있지만 그냥 놀러가 본 적은 없구나 해서…….”
진짜 놀고 있었던 거군. 어이가 없어서 다시 풀장과 주변을 본다.
원래는 야자수도 멋들어지게 심어놓았을 것 같은 공간은 이제 뜯어 먹힌 지 오래 된 흔적뿐이다.
교외의 한적했을 분위기도 사라진지 오래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모래조차 형성되지 않은 황폐하고 쓸쓸한 황무지, 그리고 쇠락한 문명의 흔적뿐이었다.
그리히는 내가 뭔가 질타할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자진 납세한다.
“죄송합니다! 함부로 해이해지지 않겠습니다!”
블랑쉐의 말에 따르면 그리히는 자주 혼나고, 그래도 능력 하나로 처분 당하지 않았던 요원이라고 했다.
처분이란 말이 아주 쎄하긴 한데, 그러니까 저런 태도겠지.
베르가 구체적으로 나에 대해 설명하진 않은 모양이다.
결국 알게 될 텐데 왜 굳이?
바짝 얼어서 혼나길 기다리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져서 웃었다.
그리고 앉으라고 했다. 다 떨어진 낡은 선탠 배드 중 멀쩡한 걸 골라서 펴준다.
‘오르골’다운 행동은 아니겠지만 굴러다니던 파라솔도 꽂아주었다.
“기분이나 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마지막인가요?”
그럴 계획이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나?
아니, 진짜 모르나.
내 것도 펴고 드러누웠다. 정장이 더러워지겠지만 마법으로 세탁할 수 있다.
언제나 깨끗한 정장 간지의 비결이다.
그리히가 눈치를 살살 보더니 옆에 눕는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그래봐야 의미는 없지만.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궤도상에 존재하는 초대형 생체 전함들은 구름의 역할을 대신하며 지상에 어둠을 드리운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루시가 나한테 연락하진 않나 생각 중이었다.
그리히가 물었다.
“하이브 마인드가 죽고 지구를 되찾으면 이제 우리는 뭘 하게 되나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뭘 하고 싶지?”
“어……. 그러게요.”
“그것도 모르면서 묻나?”
“아니, 그…….”
나는 혀를 찼다.
“그냥 뭐든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조직은 어차피 만천하에 드러났다. 영웅까지 되었지. 세계 정복은 딱히 할 필요도 없어.”
“어? 정말요?”
이 녀석은 진짜 그걸 믿고 있었나. 이 조직은 어떻게 되먹은 거야.
“마음대로. 그냥 살아라. 나는 이제 관심 없으니.”
그리히의 눈이 동그래졌다.
블랑쉐와 닮은 얼굴로 본인은 절대 안 지을 표정을 보여주니 위화감이 넘친다.
“진짜 우리 아버지가 아니군요.”
“베르가 말했군.”
“안 믿었어요.”
“그래?”
그리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죽었구나…….”
어딘가 처연해 보이기에 가만히 있었다. 별 생각은 안 든다. 미궁에선 너무 흔한 일이니까.
심지어 그 ‘오르골’이 미궁으로 넘어와서도 자기 나름대로 호의호식하다가 죽었다고 말하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냥 아무 말도 안 해야지.
그리히는 제 혼자 뭔가 정리하듯이 중얼거리더니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큰 상관없을지도 모르겠어요.”
“뭐가?”
“아버지를 사모했어요.”
“푸헉. 뭐?”
“그야. 보고 자란 남자가 그뿐이니까.”
“말이야 맞다만.”
그리히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맨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어. 맨날 속내는 감추고 투덜투덜 혼내면서도 은근히 자상하고. 훈련 때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면서도 열심히 지도해주고 어릴 때는…….”
그리히가 주저앉았다.
“똑똑한 베르는 그게 다 세뇌의 일부이며 심지어 기억조차도 어느 정도는 거짓이라고 말하지만. 뭐 어때요 저한테는 진짜였는데.”
“흠.”
“그런데 죽었다니.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네요.”
그리히는 그냥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저 한참을.
나는 하늘을 보며 뭔가 저 멀리 꿈틀거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가 뜬다.
연료 보급 없이 그런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가 약간 의심했었는데 역시 24세기다.
가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으되 가는 길이 문제일 수 있다.
베르와 그리히는 어차피 ai가 제어하는 기총 대신 자신들의 중화기를 들고 사수석에 섰다.
개조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 수준의 초인이 아니라면 아무리 그래도 전투기에서 사격을 할 수는 없다.
최대한 공중전에 대응할 생각이었던 것인데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 하루가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상사는 뉴질랜드에 착륙한 후 내게 경례했다.
“솔직히 죽음을 각오했었습니다. 젊은이들을 보낼 바에야 내가 가야겠다 싶었죠.”
“살아남아서 다행이군.”
“그리고 역사에 이름을 새겨 넣었군요.”
“굳이 지금 돌아가지 말게.”
“어휴, 돌아갈 생각도 안 하고 있습니다. 여기 있으면 별 일도 없겠지요.”
뉴질랜드의 생존자들은 생각보다는 숫자가 많았다.
물론 진짜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곳은 한번 괴멸했고, 벌레들이 수지가 맞지 않는 수준의 수색작업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딱 그만큼의 인구가 살아서 어떻게든 재건해나가고 있다.
상사가 몰고 온 수송기에는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핵심적인 장비들이 상당 수 있었다.
생존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상사 역시 이곳에 남아 여러 가지 도움을 주게 되겠지.
대표자라 할 만한 사람 몇 명과 인사하고 주변의 오버시어를 또 청소했다.
지구 전체로 보면 작은 섬이라 그런지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 위협적인 괴물들도 깨끗하게 제거하고 충분히 남은 사람들이 대응할 수 있는 정도의 환경을 조성한다.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다지 병력이 남아있지도 않은 탓이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어딘가 저항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찜찜함을 안고, 동시에 감사를 받으며 다음 이동을 기다린다.
상사는 여기까지다. 이다음은 배가 준비되어 있었다.
당연하지만 전부 나를 미쳤다고 생각했다.
보여주기 전까지는.
“조종법은 숙지했나?”
“애초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요원들의 교육만큼은 어딘가 나사 빠진 감성과는 별개로 철저했다.
운전하지 못할 것이 없다.
장거리 비행에 있어서는 좀 더 전문가에게 맡겼을 뿐이다.
요트라고 해야 할 물건이 출격한다. 군용도 아니고 휴양용으로 꽤나 호화로웠다.
그리히는 멀쩡한 풀장을 즐겨볼 수 있었다.
둘이서 교대하며 배를 몬다.
비행기가 빠르긴 하겠지만 남극까지 가는데 자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없다.
우리에게 감사하면서도 다들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뉴질랜드에서조차 느껴진다.
이런 게 신화가 되는 법이지.
나는 가능한 신사적이고 멋들어진 행동을 유지했다.
연극하는 기분도 나쁘진 않다.
사이비 종교를 이끌었을 때는 더한 짓도 많이 해보았다.
바다는 썩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부패와는 느낌이 다르다. 여러 괴물들이 최초에 상륙하여 마주했던 저항의 흔적들이다.
지구 기반이 아닌 생명체들의 체액이 바다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청소부가 사라졌음은 안다.
뭐가 되었건 회수할 가치가 없는 사소한 유기물들을 처리할 것들이 거의 남지 않았다.
저인망이 휩쓸고 간 것처럼 죽은 바다에 사람의 잔해나 괴물의 잔해 같은 것들이 곧잘 보였다.
바다의 빛깔도 이상하다.
여러모로 지독했다.
그리고 공중 병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제 거리낄 것도 없으니 그냥 마법을 갈긴다.
마중 나온 벌레들 중 누구도 우리를 탐지하지 못했다.
적당한 거리까지 왔다고 느꼈을 때 베르와 그리히를 불렀다.
그리고 공간을 열었다.
우리는 남극에 도달했다.
“막상 여긴 다른 게 없군요.”
“방금 그거 뭐에요? 대체 뭐야? 잠시만?”
뒤는 그리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막았다. 그리히가 버둥거리다가 조용해졌다.
“당신도 숨기는 게 많군요.”
“그렇다고 해두자고.”
베르가 그리히를 조금 한심하게 본다. 아마 나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은 했지만 안 믿다가 이제야 믿는다는 그런 식의 눈이다.
마력 탐지를 광대하게 건다. 대륙 전체를 타고 흐를 정도로 막대한 마력을 투자했다.
돌아오는 흐름은 하이브 마인드를 지키는 대군세들.
규모는 억으로 세야할 정도는 된다.
제 아무리 에너지 효율을 중시하더라도 군단의 머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여러모로 진짜 [은하의 포식자]와는 대비된다.
여기 있는게 마력 그 자체를 섭식 대상으로 여기는 존재였다면 이미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리라.
인류가 버티건 버티지 못하건 이 행성은 다시는 쓸 수 없게 죽어버렸을 것이다.
위험한 마력이 포진하는 것보다는 아무런 마력이 없는 것이 더 위험하다.
그렇게 된 행성은 점차 바스러져 사라진다.
진정한 의미의 플래닛 이터다.
지금까지 봐온 바대로라면 이것들을 물리치고 나면 인류는 충분히 재건할 수 있으리라.
생태계는 어떻게든 복구할 수 있겠지.
“온다.”
검을 뽑아들었다.
물량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들이 나를 죽일 수는 없겠지만 시간을 지연 시킬 수는 있다.
하나하나 다 죽여 버리는 것도 아주 힘든 일이다.
“한 번에 돌파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저것들을 다 죽일 필요는 없다.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통과하고 닫았다.
그리히가 입을 떡 벌리고 끝없이 설원의 풍경이 변해간다.
눈 덮인 거대한 산맥 앞까지 도달했다.
저 안쪽에 생체 반응이 있다.
하이브 마인드의 크기만큼은 진짜 포식자에 비해 아쉬울 것이 없다.
이 정도라면 위성 카메라에서도 생생하게 잡힐 것이다.
그야 말로 산맥이라 불러야할 정도의 위용.
역시 이 녀석들이 나중에 [은하의 포식자]들이 되는 건가?
그런 식이면 내가 여기서 이걸 죽여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 부질없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심연의 일개 층이니까.
하지만 또 진짜일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지.
“베르. 유해는 어디 있지?”
“이런 식의 연속 순간이동이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기억하고 있는 좌표가 있었다.
무수한 벌레들을 뒤로하고 진짜 오르골을 찾아 나선다.
조직의 남극 기지는 텅 비어있었고 인원들도 없다. 하이브 마인드가 남극에 내려올 쯤의 시점에 비워졌다고 한다.
“여기도 거점을 만들어뒀어?”
“필요한 경우가 있었지.”
“어처구니가 없네.”
거기서 베르가 알던 경로를 따라 이동한다.
공간이동을 동원하여 빠르게 이동하니 금방금방 발견되고 있다.
베르는 금방 적응 했지만 그리히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거 뭐에요? 이런 게 되요? 그럼 대체…….”
“베르, 그것까진 설명 안 했어?”
“받아들이질 못하는 게 보였는데 어떻게 설명해.”
그게 또 그런가.
어쨌든 ‘오르골’이 지구에서 최후를 맞은 자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내 복장과 완전히 똑같은 시신이 보인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냉기로 얼어붙어 미라화 되어 있었다.
사인은 몸 곳곳의 자상들.
주변에 벌레 시신을 보면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승리했으나 결국 쓰러졌던 모양이었다.
이곳은 얼음을 깊이 파고들어 만들어진 벙커였다.
시신을 본 요원 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주변의 벌레 시체들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것 같다.
“여긴 세상에 무슨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만들어둔 쉘터 같은 곳이었지.”
“이 조직 정말 어지간하구나.”
“설마 남극에 무슨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베르는 간신히 여길 탈출할 수 있었다는 모양이다.
‘오르골’의 마지막은 보지도 못했다고, 다만 살아날 수 있는 환경은 결코 아니었다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런 곳의 유해라면 굳이 회수하러 오지도 않겠지. 무엇이 있나 확인 차 밀려들어왔었겠군.”
“위협이 되긴 했다고 생각한다. 오버시어도 하나 죽였으니.”
“대단한 전과인데?”
적의 본거지에서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위업이 맞다.
지구 기준이어서 그렇지.
그리히가 시신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변장이 벗겨졌다.
블랑쉐도 지구에 있을 때는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고 했지.
드러난 것은 생각보다 평이하게 생긴 남자였다. 정말 특이한 것 없는 특별히 잘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남자.
기억에 잘 남지도 않을 것 같은 얼굴이다. 사실 이게 첩보원에겐 더 잘 어울리는 생김새지.
그리히는 그 모습을 잠깐 보더니 바디백에 시신을 집어넣었다.
지퍼가 닫힌다.
베르에게 말했다.
“내가 떠나면 이렇게 되었다는 걸로 해줘.”
베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히는 베르를 보고 말했다.
“나중에 마저 설명해줘.”
떠날 때가오니 한 발 떨어져서 보는 기분이다.
여기까지 해줬으면 블랑쉐가 나머진 다 수습하겠지.
돌아올 수 있을 것이고 돌아올 것이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럼 하이브 마인드를 죽인다. 그리히와 베르는 여기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어. 베르가 적당히 지어내줄 거야.”
아예 소설을 쓰라고 했다.
그 편이 더 좋을 테니.
공간을 열고 둘을 배로 다시 돌려보냈다.
혼자 하이브 마인드라는 이름의 산맥 상공으로 이동했다.
답답한 위장을 집어넣는다. 날개와 링이 떠오른다. 하이브 마인드는 나를 보고 있으려나.
이걸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단번에 처리하지.
그런 고민을 약간 하기 시작했다.
마력을 그러모은다.
계단이 어디쯤 생길지도 생각을 해봐야할 문제다.
상공에 있으니 저 멀리서 호위 병력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예 공간을 접어서 이동하는 식일 거라곤 생각 못했던 모양인지 이렇게 되고 있다.
아마 관측당한 적이 없나본데.
주변의 마력을 그러모아 마력로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강력한 에너지 반응 정도로 여겨지지 않을까.
수십 개의 반응로를 천천히 만들어갔다.
산맥이나 다름없는 것을 날려버리는 것도 일이다.
술식을 조절하고 날아드는 대공사격을 방어한다.
가능하면 깨끗하게 날려버리자.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미군이 여길 위성으로 보고 있기야 하겠지만 나 개인을 식별할 수 있으려나?
생각해보니 가능할거 같은데.
뭐 아는 사람들만 아는 비밀로 부쳐지겠지.
반응로를 폭주시키기 시작한다.
막대한 마력이 사방으로 뒤틀리며 날뛴다.
그대로 투하했다.
빙하가 갈라지고 세상이 조각난다.
눈부신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한동안 기상이변을 일으킬 정도의 위력인 것 같은데 그 사이로 눈 덮인 하이브 마인드의 조각난 몸체가 날아올랐다.
그리고 불타 스러진다.
초고열의 화구가 사방을 집어삼키며 번져나갔다.
어, 좀 심했나? 해수면이 올라가겠는데.
기온도 좀 올라갈 것 같다.
여긴 빙하기던가 잘 모르겠네.
대륙이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아씨, 힘 조절 잘못했나? 아니지? 얼음이지?”
조금 더 관측해본 결과 조각난 건 두꺼운 얼음이다.
그 아래의 대지가 쪼개지진 않았다. 어휴 깜짝이야.
여파가 잦아들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혹시 모를 숨통도 끊어둘 겸 그대로 뛰어들었다.
작열지옥 속에서 하이브 마인드였던 것을 헤집고 다닌다.
계단 어디 있어?
하이브 마인드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몇 시간 찾아 헤매다가 빠져나왔다.
여기가 아니라 주변 어디인 모양인데.
마력이 진정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제대로 된 마법의 구사가 힘들 정도다.
하루 정도는 더 기다릴 생각으로 적당히 자리 잡았다.
할 일이 없으니 루시를 불러야겠네.
그리고 하늘이 다시 꾸물거리는 것을 본다.
꾸물거리는 게 아니다.
“뭐야, 저거. 달? 화성?”
[천리안]을 응용해 먼 곳을 확대했다.
이 드넓은 우주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질량이겠으나.
그것은 분명히…….
저게 왜 오고 있어?
화성에 주둔하고 있어야 할 휴면 중인 군단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먼저 달에서 이미 출발한 것들이 지구 가까이 도달하고 있었다.
“루시? 루시! 지금 급해요! 들려요?”
루시는 응답할 수 없다.
아니 지금 이걸 알게 되더라도 내 시간에 동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건 비상사태다.
계단은 생겼나?
루시의 응답을 기다리며 계단을 수색했다.
위치는 알 수 있었다.
여길 그저 내려가기만 한다면 끝이다. 나는 2858층에 도달할 것이며 이 세계는 심연 속으로 무너질 것이다.
그래 그럴 거다.
하지만 아니라면?
이곳이 정말로 블랑쉐가 돌아갈 어딘가라면?
“루시!”
「무슨 일인가? 대전사여.」
연락이 되었다.
“지금 블랑쉐와 연락 됩니까?”
「시간의 흐름이 개판이라 쉽지는 않지만 가능하지. 그보다 계단이 옆에 있군. 안 내려가고 뭘 하는 거지?」
“저기 좀 보시죠.”
루시가 기함했다.
「막은 거 아니었나?」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하이브 마인드가 총공격 명령을 마지막에……. 아니 이미 진작 내려뒀던 모양입니다.”
루시는 잠깐 침묵했고 이내 신언으로 대답했다.
「막을 거냐?」
“모르겠습니다.”
진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걸 막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랬다간…….
「일단 나는 그냥 계단을 내려가라고 말하고 싶군.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 더 신경 쓸 필요가 있어?」
“그러니까 블랑쉐 연결해주세요.”
「그냥 말하지 않으면 된다.」
루시는 단호했다.
나는…….
“후, 좋습니다. 맞아요. 그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죠.”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