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40화
심연 2857층 - 구원자(2)
계단을 한 발 내디딘다.
루시의 판단은 분명히 옳다. 그녀는 다른 모든 파티원을 지켜본 가운데 이 던전의 공략이 진행됨을 우선하고 있다.
다음 발을 내디딘다.
내가 같은 입장이어도 똑같은 의견을 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 심연의 일개 층이 정말로 블랑쉐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녀는 진짜 미궁 바깥에서 왔는지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사실 그녀에겐 애초에 돌아갈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메인 던전의 일부로만 출현하는 형체 없는 기억이 블랑쉐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일 수도 있다.
뭐가 옳고 그른지, 아직은 아무것도 모른다.
나의 세계조차도 허구일 수 있다.
혹은 무언가 원본이 있어 다들 그 기억만 가진 채 복제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언제나 그렇듯 답이 없는 문제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판단의 근거가 된다.
다시 한 발.
* * *
어쩐지 멈춰 섰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불타는 하이브 마인드였던 것으로 뒤덮여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은 아주 우중충하다.
이 세상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암시하는 것처럼 재와 연기 그리고 불타는 고약한 냄새에 동화되어 있다.
액자처럼 둘러진 가운데 셀 수 없이 많은 주인 잃은 벌레들이 이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저 꾸물거리는 것들은 곧 미군에게 관측될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은…….
「왜 그러나?」
루시가 말했다.
특별히 감정이 담긴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의아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한다.
“루시.”
「흠.」
“제가 꽤 효율을 중시하는 행동 패턴을 고수한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랬지. 가끔은 경이롭고, 가끔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어. 공부가 될 정도였다. 지독한 것을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 얼마나 지독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게 제 패착 중 하나였다는 말도 했습니다. 루시는 무슨 말인지 알겠죠.”
희우를 거부하던 내게 트동트 영감님과 함께 끈질기게 권유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세상과 이격되어 있다는 이야기.
지나고 난 후에는 자연의 신, 파라켈수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왕국에서 그는 내게 현실로 돌아온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전까지 미궁은 그저 현실이 된 게임이었다.
가능성의 일부로서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할 배경이었지,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삶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블랑쉐는 고정 NPC지 않습니까.”
「뭐가 걸리는지는 알겠군.」
“저도 루시가 뭘 걱정해서 단언하는지 압니다. 여기서 내려가는 게 분명히 맞아요. 그보다 더 합리적일 수는 없어요. 이렇게까지 불확실한 것에 뭔가 걸 이유는 없으니.”
충분히 배제의 대상이다. 이건 가짜일 확률이 너무 높다.
“하지만 그건 블랑쉐 역시 틀림없는 가짜라 확신하는 일 같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군.」
“뭐죠?”
「처음 나와 만났을 때의 너라면 일말의 고려도 없이 내려갔을 거라는 점.」
“그렇겠죠.”
사실 나도 조금씩 깨닫고는 있었다.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똑똑한 사람이 마지막에 승리하는 이야기는 잘 없다.
나는 똑똑하게 굴려고만 노력했다.
게임은 세상이 아니다.
세상도 게임이 아니다.
올바른 공략법이 올바른 결말로 이끌어주는 것은 아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시. 제가 만약에…….”
「그럼 그렇게 해라.」
“무슨 말 할지 알아요?”
「이건 신도의 마음이 안 느껴져도 알지. 멍청아.」
루시는 피곤하다는 듯, 그러면서도 어딘가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마모라는 것은 말이다. 사실 굉장히 쉽게 일어나는 거야. 그걸 알지 못하고 지내는 유배자는 엄청나게 많지만 누구나 그렇게 되어요.」
“무슨 강의입니까 그건?”
「사람은 자신의 죽음에 무뎌지지 못하는 만큼 남의 죽음에도 무뎌지지 못해. 그렇게 된다고 착각할 뿐이지. 너도 그러고 있고.」
“뭐 인지 자체는 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안 떠올리려고 하죠. 심지어 제 손으로 죽였다면.”
무고한 희생자.
43서버의 그 테라포밍 행성에 거주하던 이들은 무엇을 잘못해서 우리 파티에게 그렇게 죽었는가.
사실 우리라고 하면 안 된다.
그걸 하고 싶어 했던 파티원은 없다.
내가 하라고 했다. 그 책임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살해한 그 생명들과 지금 이곳의 생명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점도 그간 내게 끊임없이 주저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알지 않나.
할 거면 끝까지 관철하라.
그런 짓을 해놓고 공평하지조차도 못하면 그것은 대체 무슨 행위인가.
내 발을 느리게나마 앞으로 밀고 있던 것은 그런 것들이다.
거기에 저 벌레들은 그럼 무엇을 기준으로 내게 죽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물면 그런 곳까지도 나아간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네가 말한 적 있지. 인간 카드를 통해 인간으로 돌아가야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미궁의 끝을 볼 수 있는 이유 말이다.」
“아, 그건 제 생각일 뿐이긴 합니다.”
「난 그게 맞다고 느꼈어. 미궁은 집요하게도 인간성의 언저리를 건드리는 느낌이 있지.」
“그렇습니까.”
「솔직히 이번 심연에 시간이 개입했다고 치면 이건 좀 노골적인 함정일지도 몰라.」
비로소 루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저건 억측이다.
클리어가 더 쉬운 방법이 틀림없이 있음에도 먼 길을 돌아가려고 하는 나를 위한 억측이다.
내가 마음이 편했으면 하는 그런 억측.
무엇하나 근거 없으나 그렇기에 나를 위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궤변이었다.
「이게 정답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파티원들이 저보고 병신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죠?”
「아서라. 계단에 발 디디지도 않았을 거다. 네가 그런 놈들만 모은 것 아니냐?」
블랑쉐는 어떨지 모른다는 것도 옛말이다. 도리어 그 때문에 더더욱 여기서 계단을 저버렸겠지.
「시간이 얼마나 뒤틀릴지 모른다. 내가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시는 그 마모를 알겠죠.”
「그래서 이미 한 번 나 스스로를 죽여 무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으니까. 지금은 신좌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으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지.」
내가 잠깐 앉았을 때나, 헨리의 경우는 오랫동안 신좌에 잠식당하지 않았어서 괜찮았다.
루시가 그 자리에 계속 앉아야 한다면 그건 알 수 없는 일이 된다.
「위선을 마지막까지 관철하면 그것은 선이다. 위선 떨고 싶다면 실컷 떨어야지. 리더.」
나는 생각한다. 이게 정말로 옳은 길, 옳기에 돌아가야 하는 그런 길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내가 아니라 파티원들이 말이다.
“심연 깊은 곳에서 시간의 신전을 찾으라고 전해주십쇼.”
「일 리 있는 선택이군. 거기서 뭘 해야 할까?」
“전 모르죠.”
「야……!」
그런데 정말 모른다.
내게는 충분한 단서가 없다. 앞으로 그 단서가 나타날 확률은 높으나 그걸 내가 보게 될 확률은 너무 낮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결국 나 혼자서 해결하게 되는 수도 있다.
시간이란 본디 앞도 뒤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무엇을 위해 블랑쉐의 세계를 내 앞에 펼쳤는지, 그리고 심연의 더 깊은 곳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호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이거 딱 맞는 시련 아니냐?」
“그것도 그렇네요. 시간은 그래서 심연을 골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 리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내가 전달하지. 그리고 모두가 너를 기다릴 거다.」
내가 여기서 이곳을 지키기 시작하려면 직접 나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 층에서의 내 시간은 점점 느려질 것이다.
나는 파티원의 그 어느 시간 속도에도 맞추지 못한다.
이 층을 떠난다면 파티원들이나 왕국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러 있을지 알 수 없다.
블랑쉐의 등불이 그냥 보이지조차 않을 수 있다.
혹은 모든 것이 끝나고 나 홀로 남아 아직 파티원들이 나를 기다릴 것이라고 믿고 전진할 뿐일 수도 있다.
심연의 뒤틀림이 어디까지 가는지는 나도 모른다.
게임 시절에는 그 한도가 있었으나 지금은 어떠한가?
근거가 부족하다를 넘어 그냥 없다.
불확실성이 높은 것을 넘어 그냥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정에 이끌려 말도 안 되는 도박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리더는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지론이었으나.
“생각나는 말은 최대한 해보죠. 제가 저 녀석들을 베기 시작한 이후로는 다시 만나기 힘들 테니.”
다른 파티원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나는 그때 나처럼 뜻대로 하라고 전했다.
그리고 개개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앞으로의 주의점, 지식을 최대한 전달한다.
되다만 포식자들이 내게 충분한 시간을 저어서 다행이다.
누구도 없는 남극에서 나는 한참을 루시에게 기록시킨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내가 이 세계를 완전히 지킨 후에 돌아와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계단을 내려간 후에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제가 실패해서 다른 회차에 그대로 정착할 수밖에 없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 나는 이미 이 회차에 묶여 버린 몸이다만, 그래도 너를 기억하마.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저 역시 그럴 겁니다. 루시뿐만 아니라 모두를요.”
나는 조심스럽게 정장을 벗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페도라도 벗었다.
그리고 곱게 갠 정장 위에 올려두었다.
“당신이 하지 못한 일을 했어. 그리고 마저 해주도록 하지.”
생각해 보면 이 ‘오르골’이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쓰레기 같은 남자마저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어디 조용한 곳에서 모든 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요원들과 그 자신의 능력을 생각할 때, 미국을 포함한 모든 것이 황폐화된 후 이 세상을 재건할 수 있었다.
그럴 만한 조직을 구성해 두었다.
기껏해야 10년만 더 기다렸다면.
그랬다면 되다만 포식자들은 세상에 남은 몇몇 유기 생명체들을 굳이 수확하지 않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정확한 심정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내 것인 세계를 감히 집어삼키려고 하느냐 따위의 정신 나간 발상일 수도 있다.
어쨌건 그는 그렇게 했다.
나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내 손에 닿는 것만 챙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건 내 손이 닿는 문제였다.
루시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기 전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마지막에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요. 그러는 거 꼭 그래야 했나.”
하긴 뭐, 이상할 정도로 고지식한 녀석이지.
“하, 맺어주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부끄럼을 무릅쓰고 서브 리더에게 남긴 그 절절한 내용을 보면 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에잉. 쯧쯧쯧.”
그리고 너무 뒤틀리기 전에 그 시간의 흐름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