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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544화 (54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44화

심연 3517층 - 시간을 넘어(1)

등불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파티원의 등대로서 심어둔 심연의 신도 블랑쉐가 비추는 등불이다.

이것은 블랑쉐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너무 멀리 가지 않았다면 보여야 한다.

일단 나는 너무 멀어졌다.

내 시간은 느려지는 방향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다른 파티원들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 내가 지구를 구하기 위해 보낸 그 짧은 하루는 다른 파티원에게 어느 정도의 시간일까?

게임 시절에는 답이 좀 더 간단하게 나오는 문제였다.

최대한도로 잡아도 100년이다.

더 이상 유배자가 아니게 된 파티원을 만나게 되거나 그 유해를 발견할 뿐이었다.

나는 일단 유해를 발견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심연은 난이도만 따지자면 36개의 테마 중 가장 낮은 축이다.

파티원들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는 몰라도 각각이 이겨내는 게 힘들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나 하나 빠진다고 굴러가지 않을 파티도 아니다.

애초에 심연 고정적으로 등장하고 넘길 방도도 없으니 게임적으로도 이 정도 스펙 요구가 옳은 설계다.

* * *

내가 겪고 있는 이런 기믹처럼, 스펙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설계를 요하는 던전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 뭐라 해야 하지.

심연만의 실력이라고 할까.

그런 고유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마력이 회복이 안 되는데. 미아는 계속 잘해나갔으려나.”

블랑쉐의 지구를 떠난 직후의 층은 평범한 심연의 층이었다.

랜덤으로 구성된 던전, 랜덤하게 출현하는 몬스터.

나는 1시간 정도 마력을 진정시키고 휴식을 취한 후 계속해서 움직였다.

심연은 마법사의 무덤이라 불린다. 제대로 마력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부재한 빛으로 회복하긴 했으나 한동안 마력 소모는 지양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천사 종족의 마검사로서 심연에 와 있다.

전진은 어렵지 않다. 육체적 스펙만으로도 마법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위종족이 괜히 사기겠는가.

심연은 레벨적 스펙 이상으로 종족적 스펙 역시 중요한 곳이다.

계단을 수없이 내려갔다. 끊임없이 확인해 보지만 블랑쉐의 등불은 보이지 않았다.

루시의 연락도 오지 않는다.

지구에서 보낸 마지막 하루가 심연에서 얼마나 뒤틀렸는지는 아직도 감을 잡기 어려웠다.

“적어도 혼돈의 신앙은 살아 있는데.”

내가 아직도 대전사의 직위를 유지 중인지 내 스스로 확인할 방도도 없다.

“누군가 좀 단서를 주면 좋겠어.”

그래도 더 내려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파티원들이 나를 기다리며 대기하던 곳이 있다.

어떤 식으로건 단서가 남아 있으리라 본다.

같은 파티로서 심연에 들어왔기에 그 연결은 계속 유지된다.

진행하다 보면 흩어지고 모이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모두가 모인 곳은 3517층이었다고 기억한다.

거기까진 최대한 빠르게 주파할 예정이다.

사소한 이벤트들이 꾸준히 출현했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블랑쉐의 지구 같은 본격적인 심연의 파편도 없었고 기껏해야 서버 내의 고레벨 던전 수준이 파편화되어 흩어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층에 도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간도 주관적으로는 3일가량.

3516층의 계단을 내려가자 푸른 들판이 나타났다.

작은 동산처럼 펼쳐진 것이 마치 흰 토끼라도 하나가 깡총거리며 나타날 것 같은 곳이었다.

보통 파티가 다시 모이는 곳은 일종의 휴식터 개념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많다.

그리고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여긴 2층의 숲이 생각나는 곳이네.”

동산 자체는 풀밭이지만 주변으로 숲이 자라 있고 기후도 좋았다.

헛웃음이 나온 이유는 한눈에 들어온 건축물들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너무 낡아 있었다.

“어디 보자 이거 에길과 아서가 지었겠군.”

마법으로 토대를 다진 듯한 느낌도 있다.

클래식한 마법이라기보다는 무식하게 실용적인 것이 내 흔적이 엿보인다. 확실하게 미아의 작품이다.

풀밭 동산 위에는 제법 긴 시간을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남아 있었다.

“어디 보자, 많이도 삭았군. 루시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후에 지어진 거라고 봐야 하는데.”

형태가 온전하진 않았다.

잘 말린 통나무였을 집과 방들은 삭아서 쓰러져 있다.

마법으로 보강된 흔적이 보이는 점이 나를 오싹하게 했다.

매지컬 통나무집이 무너진다고? 미아 수준의 마법사가 설계하고도?

한두 십 년이 아닐 수도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사용된 것 같은 곳이 보인다. 길드 하우스를 닮아 있다.

벽난로도 누가 만들었는지 참 잘 만들었군. 2층도 존재한다. 날 기다린 시간이 어느 정도였지? 서너 달 정도였으려나.

확실히 생활의 흔적이 짙게 배여 있진 않았다.

추리하는 탐정이 된 기분으로 각 방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여긴 에길의 방이었겠군.”

삭막하디 삭막하지만 기도의 흔적이 있다. 에길은 특유의 방식으로 그가 믿는 신들에게 기도를 올리곤 했다.

실제로 만난 토르가 어쨌건 토르를 믿고는 있으니까.

바이킹답게 전투에 앞서 축복을 빌었던 것이리라.

그 문자들이 벽에 새겨져 있다.

습관 같은 거지.

그다음 방은 아서였다.

아서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별다른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서는 제 방에 무언가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잘 수 있으면 족해하는 사람이다.

그 뒤는 제니와 미아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 삭아 무너진 침대가 홀로 쓸 크기가 아닌 탓이다.

제니가 굉장히 미아를 보고 싶어 했지. 우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놀랍게도 고양이 털이 남아 있었다. 이 민트색은 제니일 수밖에 없군.

그리고 블랑쉐의 방.

이건 보자마자 느껴졌다.

작업대가 따로 있다.

그 위에서 뭔가 만지작거렸던 모양으로 취미생활의 일환으로 보인다.

부품도 일부가 녹슬어 굴러 떨어진 것이 보인다.

그다음 방은 복도와 벽이 함께 무너져서 거의 탁 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연스럽게 풍화도 심해서 침대의 틀이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아마 여기가 희우의 방일 텐데.

마력 탐지를 걸어보았다.

무언가 나타났다.

“흠터레스팅.”

시간이 왜곡된 공간이 보인다. 최근 들어 마법이 약해져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 같으나 잘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손가락을 튀기며 열어본다.

왜곡된 공간의 시간이 풀려나며 편지 한 장이 떨어졌다.

희우가 남긴 편지다.

앞은 길었지만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떠들고 있을 뿐이다.

[……오빠 말대로 시간의 신전을 찾으러 떠날 거예요! 여기서 보낸 시간도 꽤 나쁘진 않았던 거 같아요. 괴물도 없고 왕국 관리 같은 시끌벅적한 일도 없고. 언젠가 돌아가서 은퇴하면 오빠랑 이런 곳에 살아보고 싶네요!]

귀농 생활 그거 생각보다 힘든데.

뭐 여기선 농사까진 짓지 않은 모양이다.

웃긴 건 만약을 대비해 종자들을 각 파티원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종족이 언데드가 아닌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수십 년을 버틸 수는 없다.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기에 준비한 것이다.

“제기랄. 연대 측정 한번 해볼까.”

시간대를 정리해 봐야 하는 메인 던전도 간혹 있다.

우리가 시간여행을 하진 않더라도 과거에서 무언가 파헤쳐야 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단하게는 익혀두었다.

정밀하진 않지만 제일 상태가 좋아 보이는 나무 조각을 통해 확인해 본다.

“최대 200년…….”

기후가 좋다 보니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적게 잡아도 50여 년은 지났다.

심연의 절대적 시간이란 게 있다면 그것 기준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숨이 흘러나온다.

수명이 다했을 파티원은 없다.

그리고 각각의 상대 시간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많은 세월이 비켜 갔을 수는 있다.

“파티원들은 그렇다 치고, 루시와 왕국은 무사할까?”

그곳의 시간은 또 다르게 흐르겠지. 골치 아픈 문제다. 아무 상관 없이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루시는 우리 쪽 시간에 관여하느라 거의 그쪽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체감 시간이 다르면 별문제는 안 생길 수도 있다.

“시간이 움직이는 스케일이 너무 커.”

시간의 신이 이곳을 택했다는 것이 그런 의미인가.

내가 알던 심연보다 훨씬 더 뒤틀림의 폭이 크다.

이대로라면 경우에 따라선 수천수만 년이 엇갈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게 나타내는 것은.

“믿음.”

알아서 잘할 거라는 믿음.

다시 만나더라도 아직 우리가 파티원일 거라는 믿음.

오로지 그것.

“여기서 왕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게 최악이니.”

그럼 이 시간의 뒤틀림을 되돌릴 모든 수단을 잃게 될 것이다.

파티로서 같이 입장했기에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대로 빠져나가면 영영 다시 좁힐 수 없다.

“파티원들끼리는 안 벌어졌으면 좋겠는데.”

블랑쉐를 중심으로 제대로만 되었다면 그럴 것이다.

나처럼 피할 수 없는 경우를 만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반대로 그랬다면 기껏해야 1~2년 후의 파티원을 만날 수도 있겠지.

[심연]이라는 광대한 공간 속에서 언제 어디서 어떤 시기의 동료를 다시 만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수명이 끔찍하게 긴 고위종족 위주의 파티 편성이어서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나 오크 같은 종족은 이 세월을 견딜 수 없다.

“불행 중 최고의 선택이었군. 블랑쉐의 지구를 방치할 수는 없잖아.”

블랑쉐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탐지를 걸어보았다.

또 다른 왜곡이 보인다.

그곳에서 편지 한 장이 떨어졌다.

블랑쉐의 필체다. 현대 영어를 문자로 구사할 수 있는 멤버는 애초에 블랑쉐와 제니뿐이다.

내용은 짧고 굵었다.

[고맙다. 리더.]

다른 파티원의 방에는 별다른 메시지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아직 이렇게 시간이 어긋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혹은 그렇더라도 시간의 신전을 찾는다면 해결될 문제라 여겼겠지.

시간의 신전.

그건 결국 아무도 발견 못 한 건가?

그건 더 내려가다 보면 알게 될 것 같다.

파티 플레이 구간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지. 이게 우리 파티지.”

죽은 보스는 너무 오래되어 뼈만 남아 있거나 뼈조차 남아 있지 않다.

딱히 뭐 남겨두고 간 것도 없다.

시원하게 박살 내고 지나간 느낌이 강하다.

우리 파티는 1+1이 2가 아니라 5쯤 되거든. 흐흐.

이미 다 박살을 내놨으니 시간이 걸릴 것도 없다.

층이 휙휙 지나간다.

별일 없었을 확률이 더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만나면 오랜만이라고 그러지 않을까?

미궁의 스케일에 익숙해지고 나면 1,000년 정도는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버리는 게 문제다.

그렇게 몇백 층이 아주 쉽게 지나가졌다.

뒤에서 늦게 따라오면 이게 또 별거 아닌 일이거든.

모두의 무사를 빌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시 개인플레이 구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 것은 세월이 느껴지지 않는 쌩쌩한 곳이 나타나서다.

층수를 확인했다.

심연 4402층.

다음에 다시 모이는 구간이 있겠군.

“그런데 여기가 어디람.”

그냥 탐지부터 터뜨린다.

사람이 많다. 넓다.

괴물도 많다. 아주 많다.

눈 덮인 설원이며 산세가 험하다.

침엽수부터 해서 뭐가 아주 많은데 근처에 바닷가도 있다.

해안선의 형태가 어딘가 낯익다.

얼마 전에 지구를 지키며 스캔해 대었던 터라 대충 알 수 있다.

[천리안] 따위를 동원하여 관측도 해본다. 어딘가 낯익은 복식이다.

“설마…….”

이번엔 북유럽인가.

여기도 지구 같은데…….

피곤한 가정이 하나 떠올랐다.

혹시 나, 모든 파티원의 세계를 순회하게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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