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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545화 (55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45화

심연 4402층 – 전사의 이름(1)

이곳이 에길의 세계인지 확인해봐야할 필요가 있다.

그냥 두말없이 비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흠, 용인가.”

미궁의 신과 같은 존재인 드래곤이 아니다.

서양 전설이나 설화에서 묘사되는 그런 커다랗고 날아다니며 불 뿜는 도마뱀 정도다.

사실 미궁식으로 생각하자면 와이번이라고 봐야겠다. 앞다리가 있는 와이번.

레벨도 딱 그 정도일까?

“에길은 용의 목을 베고 쓰러져 미궁에 도달했다고 했지.”

그럼 저런게 있을 수도 있다.

충분한 거리가 있었기에 용이 나를 발견하는 일은 없었다.

머리를 좀 긁적인 다음에 계속 더 높은 곳으로 비행한다.

아예 우주까지 올라가서 이 세상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느껴졌다.

그리고 더 높은 곳으로 비행할수록 나는 뭔가 잘못되었을음 깨달았다.

“이거…….”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다.

여긴 북유럽이 맞다.

* * *

더 아래에 유럽과 아프리카, 나아 아시아 대륙도 점차 보이기 시작한다.

기술력의 수준은 높지 않다.

관측되는 모든 건축물들이 정확히 에길의 시대에 맞아떨어진다.

의아함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굴곡이 없어서다.

“지구가 아닌데…….”

더 정확히는 지구는 맞다.

하지만 구가 아니다.

세상이 평평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오싹함이 전신을 휘감는다. 더 높이 더 높이 올라간다.

그리고 세상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맙소사.”

거대한 원반이었다.

지구본을 평면으로 펼쳐둔 것 같은 원반의 둘레를 얼음의 벽이 싸고 있다. 그 사이 틈새에는 바닷물이 폭포가 되어 흘러내린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 바닷물의 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

그야 말로 태초에 어쩌구하는 창세기에 나올법한 구멍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태양이 떠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관측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만두었다.

신성이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신성이다.

나는 곧바로 몸을 숨겼다. 마법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은신하자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충분히 높은 고도로 올라와서야 보이는데 눈부신 광구로만 보이던 태양은 사실 마차였다.

그리고 그 마차를 앞장서서 끌고 있는 이가 있다.

여인이다.

태양신 솔이로군.

북유럽 신화의 고증에 철저하게 맞아떨어진다.

다시 아래를 본다.

이제 가만 보니 지구의 둘레를 감싼 얼음벽은 그 속에 뱀을 품고 있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뱀이 지구의 원반을 휘감고서 얼음 속에 잠들어 있다.

저건 그럼 요르문간드인가?

어지럽네.

어이가 없어서 슬슬 재밌기 시작했다.

솔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고도를 낮추고 심연의 건너편 다른 곳을 본다.

다른 원반들이 보였다.

무지개 다리가 보이는 성스러워보이는 곳은 아스가르드다.

반대편의 좀 더 칙칙하고 황량해보이는 곳은 요툰헤임이다.

나는 다시 지구를, 아니 미드가르드를 보았다.

“에길 미안해요.”

진짜 급격하게 미안해진다.

발할라가 없어?

없긴 뭘 없어. 돌아가시겠네. 진짜.

에길이 믿던 신화은 온전한 사실이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신화의 세계에서 영웅으로서 살고 지내다가 죽어 미궁으로 왔다.

그의 믿음은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이었다.

“아……. 에길한테 측량이랑 천문학 이야기도 했었는데.”

지구는 사실 둥글다면서 서버의 미래 시간대에서 우주를 보여주기도 했다.

태양이 마차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직시한 적이 없었던 에길은 깜짝 놀랐고 시무룩해했었다.

“진짜 너무 미안한데.”

이래서 사람은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돌아가서 사과해야겠다.

당신의 발할라와 신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그리고 좀 쉬워진 것 같은데.”

여기가 북유럽 신화 그 자체의 지구라고 가정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주 단순할지도 모른다.

라그나로크를 막으면 될 것 같다.

처음 겪는 일들도 일관성이 있다면 점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미드가르드를 좀 더 내려다보다가 헛웃음을 지으며 하강했다.

처음 도달한 그 자리에서 무언가 할 수 있겠지.

바로 이전의 지구에서는 신과 같은 힘을 휘두르며 신화를 만들고 왔는데, 여기서는 진짜 신들과 부대끼게 생겼다.

“신들이 얼마나 강할 지부터가 큰 문제네.”

나는 에길의 세계 역시도 지킬 것이다.

이미 앞에서 그러기로 했으니까.

조금 초심으로 돌아간 느낌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제일 먼저 찾아야할 것은 신들에게 닿을 단서.

물론 위에서 그대로 아스가르드를 향해 날아가거나 태양신과 접촉하는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쉽게 만들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에길의 동료라거나 지인들을 만나보고 싶은 욕구 역시 있었다.

다시 작은 스케일로 돌아오자 세상은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그때 그 시절의 북유럽이다.

9세기 정도가 확실해 보인다.

태양은 이제 망원경으로 보더라도 마차로 보이진 않을 정도로 멀다.

설원을 천천히 걷는다. 근처에 사는 사람이 있을 텐데.

일단 신원을 감추기 위해 두터운 망토와 후드를 둘렀다. 계절은 겨울, 이런 복장을 하기엔 자연스럽다.

실제로도 튜토리얼에서 등장한다면 아주 힘들어질 정도의 추위기도 했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마법을 너무 남발하는 것도 조금 곤란하다.

이 세계에는 마법이 느껴진다.

애초에 저런 초자연적인 신들이 버젓하게 존재하니 없을 리가 없다.

블랑쉐의 세계보다도 난이도가 높은 것도 자명하다.

층 수가 다르지 않은가.

그래도 위협적이냐면 그 정도는 아니겠으나 이상한 변수를 만들 바에야 이게 더 낫겠지.

그래도 짐승들의 상태가 이상함은 확연하게 느껴졌다.

마냥 평범한 9세기는 절대 아니다.

“늑대가 원래 이렇게까지 크진 않을텐데. 너 뭐 펜리르의 자식이니?”

곰이랑 싸워서 이길 것 같은 늑대 무리가 덤비는 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고기는 맛이 없으므로 버리려고 하다가 혹시 몰라 챙겼다.

내부는 평범한 늑대와 크게 다를 것 없다.

그나마 누린내가 덜하고 맛있을 부위만 챙기고 가죽도 제일 큰 놈을 벗겨서 둘러멨다.

현지인인척 하자.

난 지금부터…….

“너는 누구지?”

한 무리의 사냥꾼이 다가오고 있음은 알았다.

내 생각보다는 약간 빨랐다.

과연 인간도 평범한 스펙은 아니군.

전체적으로 내가 아는 역사의 9세기보다는 하이 파워다.

“오, 혹시 당신들의 사냥꾼을 제가 가로챈 셈이 되었습니까?”

“그렇다.”

“실례했습니다. 덤벼드는 녀석들에게 그저 당해줄 수는 없는지라.”

당연하지만 표정이 풀리진 않았다.

그것이 사냥감을 빼앗긴 것에 대한 적의로 보이지는 않는다.

확실히 단신으로 이런 늑대무리를 척살한 사람을 보면 경계하겠지.

“너는 로키인가?”

“신의 이름을 함부로 읊는 것은 아니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에길이 뭐라고 그랬더라.

“……너는 전사인가?”

“전사라는 이름을 버린 떠돌이입죠.”

“거짓말마라. 나는 너처럼 강한 자를 본 적이 없다.”

여기서는 조금 처연하게 웃음 지으면서.

“이제는 그저 떠돌이 음유시인입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전리품을 조금 넘겨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단의 사냥꾼 무리들은 그럼에도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대표로 나서고 있던 덩치 큰 거한이 한숨을 내쉰다.

대머리에 거대한 근육덩어리라니. 우리 헨리 신관이 생각나는군.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당신을 거절할 수 없지. 혹시 묵을 곳이 필요한가?”

해는 아직 떠있다고 생각했지만 로우 파워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지금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는 헤매다가 죽을 확률도 높겠지.

시간이 더 흐르면 태양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질 것이다.

“기꺼이.”

“……골칫거리를 대신 제거해준 것은 감사하지. 나는 스칼라그림 크벨둘프손이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대답한다.

“저는 오르골 에길손입니다.”

“에길손?”

“뭔가 이상하십니까?”

“아니, 내 아들 이름이 에길이라 그렇네.”

어이가 없긴 하지만 진행이 빨라서 좋다.

그냥 속으로 웃었다.

에길의 풀네임은 에길 스칼라그림손이다.

대머리 그림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바이킹식 작명.

톰의 아들 톰슨, 피터의 아들 피터슨 같은 식으로 현대 영어권 이름에도 흔적을 남긴 작명법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대머리고 에길에게 유전을 참 잘해준 근육 거한인 바이킹은 에길의 아버지다.

이 가계의 일이 어떻게 라그나로크와 이어지는지 한번 살펴보자.

늑대들을 죽일 때는 조금 신경을 썼다.

초현실적인 무언가로 보이기보다는 아주 강하고 빠른 전사로 보이도록 노력한 셈이다.

따라서 나는 곧 칭송받을 수 있었다.

“그 용맹함을 믿을 수 없군.”

“어떻게하면 그렇게 잘 싸우나?”

“술 한잔 하게.”

“대낮부터 그래도 됩니까?”

“우리 일은 당신이 끝냈어.”

터덜터덜 야영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꽤나 멀리까지 원정을 나온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저 늑대 무리는 최근 마을의 골칫거리였다는 모양이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끝에 마침내 토벌대가 조직되어 원정을 떠났고 재주도 좋게 빠져나가는 것들을 추적 중이었다고 한다.

나는 계속해서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었다.

야영지는 꽤나 본격적인 천막들이 쳐져있었으며 곁에 동굴도 있었다.

이런 겨울날 바깥으로 나올 정도면 그 정도 준비는 해야겠지.

천막이 철거되었다. 어차피 두면 눈 속에 묻힐 것이다. 동굴은 곰이 살았던 곳으로 보이며 곰은 이미 술안주가 되어있다.

불이 피워지고 술통이 굴러 떨어진다.

내 위대한 승리를 축하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강인한 힘을 보여준다면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의심을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나 나를 사연 있는 전사로 대해주는 것은 고맙다.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음유시인이라고 둘러대었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걸 아주 잘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마법의 도움을 받으면 그럭저럭 봐줄만한 것이 나온다.

다들 대충 즐거워하고 어느 정도 친해진 것 같았고 밤이 왔다.

눈보라가 거세어 숙박 후 좀 잠잠해지면 마을로 돌아갈 모양이었다.

서버에서 지냈던 여러 나날들이 생각나서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좀 의문이 하나 있다.

“스칼라그림, 당신의 아들은 몇 살입니까?”

“음?”

그가 손가락을 굽히며 에길의 나이를 센다.

“이제 네 살이군.”

흠, 돌겠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어째 너무 젊더라. 이렇게 젊을 리가 없잖아.

다시 만나면 에길에게 혹시 나를 기억하는가 물어봐야겠다.

미궁은 역시 재미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런 RPG 스타일 스테이지의 국룰대로 야밤에 불침번을 함께 서겠다고 했다.

본래 같으면 아직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도 자제하겠으나 붙임성 넘치게 군 보람이 있어 대장인 스칼라그림과 함께 설 수 있었다.

단 둘이 눈보라 속에서 모닥불을 쬐며 바깥의 거센 냉기를 이겨낸다.

“요즘 뭔가 이상한 일은 없습니까?”

“흠, 그렇군. 겨울이 참 길어. 자네도 느끼지 않나. 어디서 왔는지는 굳이 묻지 않게네만. 핌블베르트의 시기가 온 것일지도 모르지.”

핌블베르트는 라그나로크가 시작되기 직전의 끝없는 겨울이다.

어쩌면 어린 에길이 그렇게까지 신앙이 깊었던 것은 이런 상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블랑쉐와는 경우 자체가 다르다.

에길은 내가 이 세계를 지켰기에 살아남아 1회차의 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전쟁의 신 에길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

이건 해내야하는 종류의 일이 되었다.

“그렇군요. 힘든 시기가 올 것입니다.”

“이겨내야겠지.”

이 세계의 이교도 대군세는 그럼 이 영원한 겨울 때문에 영국으로 내려가는 게 되나?

브리튼은 또 아서의 나라인데. 같은 곳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서왕 전설은 기독교적인 전설이잖아.

이렇게 북유럽적인 곳에서 성배탐색은 넌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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