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546화 (54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46화

심연 4402층 - 전사의 이름(2)

그린스킨의 전사로서 그들의 일원이 되어 활동한 적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 그룹에 속한 전사의 일원이 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유배자 입장에서는 그럴 바에야 그냥 과감하게 오크 정도 하는 게 나은 탓이다.

효율적으로 종족을 고를 수 있는 입장이 되면 궁합이 나쁜 클래스와 종족의 조합을 기피하게 된다.

나는 특히나 효율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전사를 할 거면서 인간을 고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트리플 클래스를 넘어 쿼드러플 클래스를 수행하려고 할 때나 인간 플레이를 했다.

그런 경우엔 무특성이 곧 특성이 되니까.

“성능을 떼고 보면 또 상당히 괜찮네. 이거.”

“음? 음유시인 나으리, 무슨 말이신가.”

“아, 그냥 혼잣말입니다.”

일단 위생적으로 훨씬 낫다.

겨울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오크나 트롤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냄새가 나는 종족이다.

인간의 체취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그린스킨만큼 더럽다면 엄청나게 단명하겠지.

“그나저나 눈보라가 좀체 나아지질 않는군.”

* * *

* * *

“그렇군요.”

이미 일주일 이상 불어닥친 모양이다.

슬슬 나아질 때가 맞다는 것을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 정도로 길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과업도 끝났는데 이리 묶여 있을 필요는 없겠지.”

자연스럽게 철수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길을 헤매지는 않냐는 말에 스칼라그림이 웃었다.

“그럼 여기까진 어떻게 찾아왔겠나.”

눈보라 사이에서 길을 찾는 짬이라.

진짜 훌륭한 사냥꾼들에게 물어보면 그냥 눈보라 때 가지 말라고 말할 거다.

확실히 이 세계는 뭐라고 해야 할까, 똑같은 인간이어도 스펙 자체가 높다는 느낌이 든다.

같은 종족이어도 환경이 더 험난하면 강인해지는 법이지.

강인하지 못하면 다 죽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동하는 도중에 마력탐지를 꾸준히 흘렸다.

눈보라 속에서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위그드라실이 빛나는군.”

“그렇군요.”

그냥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 이상으로 웅장한 황금빛을 내뿜는 나무가 보여서다. 눈보라 속에서도 안 보일 수가 없다.

저 나무 아스가르드에 있었던 것 같은데. 대충 세계수겠거니 했는데 이런 기능도 있군.

길을 결코 잃지 않을 수 있는 재밌는 기능이다. 낌새를 보니 주기적으로 빛나는 것 같다.

어째 에길은 묘하게 길치스러운 면이 있었다. 길 찾기 할 때만 되면 입을 다물었지.

그렇게 따라서 이동하며 다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귀를 열고 듣는다.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딱히 그렇진 않았다. 그냥 겨울이 계속되면 어쩌냐에 대한 걱정들이 대다수다.

식량 비축이나 신들에게 기도하는 느낌의 발언들도 있다.

확실히 곧 죽어도 싸우다 죽으면 되는 그린스킨보다는 좀 인간적이라고 해야 하나.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눈보라를 하루 꼬박 헤치고 지나가서 해가 떨어지기 직전에야 겨우 도달할 수 있었다.

“대단한 체력이군. 솔직히 누군가 낙오될까 걱정할 정도의 강행군이었네.”

“지금 같은 시기에 떠돌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죠.”

눈보라 속에서 며칠을 걸쳐 주파한 길을 단숨에 지났으니 그럴 법하지. 실제로 체력이 떨어진 몇몇 전사들은 위험해 보일 정도였다.

“푹 쉬면 나아질 걸세. 자네도 쉬어야지.”

롱하우스는 보면 웅장해지는 부분이 있다.

그린스킨 놈들은 쓸데없이 강인하다 보니 그냥 하늘을 이불 삼아 드러눕는 경우가 너무 많다.

거주지 꼴도 집이라기보단 움막인데, 바이킹의 롱 하우스는 궁궐이나 다름없는 느낌이지.

연회가 시작되었다.

승리했으면 술과 고기.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최근 겨울이 거세지며 식량난도 컸던지라 늑대 고기들은 그 자체로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었던 모양이다.

소개받고 소개하고, 축배를 들고, 인사하며 자연스럽게 섞인다.

무용담에 고개를 갸웃하는 녀석들도 몇몇 있지만 내가 얼마나 오래 여기 지낼지 모르니 별 상관없겠지.

그리고 마침내 에길을 만날 수 있었다.

“네 살이라고요?”

“그렇네.”

미아를 처음 보았을 때보다 큰데? 내가 아는 에길이 체격을 생각하면 그게 맞긴 하지만 실로 두렵군.

생일을 슬쩍 물어보니 곧 다섯 살이 되긴 한다.

곧 초등학생이 될 미취학 아동이로군. 무섭다 무서워.

지금부터 에길에게 뭔가 하려고 기를 쓸 필요는 없다. 그냥 가볍게 인사만 하고 말았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에길이 생존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꼭 라그나로크가 아니더라도 뭔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나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 트러블메이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시기 그런 장소가 아니면 굳이 여기 내가 떨어질 이유가 있나.

밤이 깊어가고 다들 잠든다.

나는 여전히 주기적인 마력탐지를 퍼뜨렸다.

밤중에 무슨 일이 있을 법한데.

아니나 다를까 야심한 새벽 무슨 일이 있었다.

습격이다.

이 눈보라를 뚫고 잘도 달려오는군.

솔직히 좀 고민했다.

모두를 지키려고 하면 지킬 수는 있지.

그래야 하는가?

생태계 교란종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따라서 나는 전투가 시작되고 밤을 지키던 이들이 모두를 깨울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에길만 무사하면 된다.

그래야 한다.

이상한 것을 건드리려고 드는 순간 모든 것이 망가지는 수가 있다.

“로키의 이름으로!”

뭔가 실마리가 될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데.

“죽여라! 모두 죽여라!”

“무슨 짓이냐! 너희들은 명예와 긍지를 모르나!”

“죽음 앞에 명예가 있는가! 발할라는 거짓이다!”

어린 에길의 가치관 형성에 아주 주요했을 것 같은 이벤트인데.

나는 일단 평범한 전사처럼 싸웠다.

대체로 에길과 그 가족을 지키는 방향으로 상대의 습격을 방어한다.

어느 정도 일단락된 것 같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의 멱살을 틀어쥐고 눈밭으로 뛰어들었다.

그대로 땅을 파내며 지하까지 들어가고 공동을 형성한다.

어안이 벙벙한 우두머리를 벽에 붙여두고 심문을 개시.

“로키라고? 좀 자세하게 이야기해 볼까?”

“너 너는 누구냐.”

“로키가 어떻게 너에게 이 습격을 사주했지?”

약간의 퍼포먼스가 필요하겠군.

환영을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요긴한 능력이다.

나는 세상의 파멸과 로키가 그를 배신하리라는 것을 예언처럼 연출하며 보여주었다.

우두머리는 기겁하고 당황하며 공포에 잠겨 눈물마저 흘리더니 이윽고 굴복했다.

샤크마가 했던 것처럼 완전한 정신지배를 하려고 든다면 설비와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정신이란 것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거든.

그냥 스스로 굴복하게 만드는 게 가장 편리하다.

우두머리는 혼이 빠진 채 실토하기 시작한다.

“로키께서 내 꿈속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예언에 따라 이 부족에 세상을 구원할 이가 있으니 이 날 공격하라고…….”

그렇게 하면 종말 이후의 부귀영화를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식의 흔한 이야기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싸우다가 간신히 승리한 척을 한다. 눈보라 속이니 제대로 보이진 않을 터.

내가 녀석의 목을 들고 선언했다.

잔당은 전의를 잃고 패주하지 않았다.

싸움은 계속되었고 습격자들이 전멸할 때까지 이어졌다.

생각해 볼 시간은 충분하다.

구원할 녀석이 있다는 건 내 이야기인가 에길의 이야기인가.

에길에 신화적인 이야기를 그리 많이 듣지는 못했다.

그저 어떤 이유로 발할라를 찾아 헤매고 있다고는 알고 있다.

돌이켜 보면 그랬다.

그 무수한 에길들과의 만남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아닌가.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 1회차에서 전쟁의 신이었던 에길은 내게 꽤나 호의적이었는데.

진짜 겁나게 전사답게 표현한 알아본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기에 잘해준 건가?

그때의 에길은 나를 기억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말이다.

지금의 에길은 알고 있을까?

일단 뭐, 이 녀석의 꿈에 나왔다는 로키는 아마 진짜일 거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여기 올 이유가 없지.

그리고 나를 예언하며 이런 녀석들만 보낼 리는 없으니 에길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에길의 최후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브리튼에서 용의 목을 베고 쓰러졌다고 했다.

이곳의 용은 날개 달리고 불 뿜는 티라노사우르스 정도긴 하지만 총도 없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재앙이지.

솔직히 어떻게 흘러가서 그렇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해야 할 일을 하면 될 것 같다.

날이 밝았다.

스칼라그림은 가족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 자네가 왔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군. 그리고 고맙네. 아니었다면 여기서 우리 모두가 끝이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 슬픔 이전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겠지.

“라그나르 왕의 부하들이군. 대체 무슨 일이지? 로키라니 그건 이미 쫓겨나 형벌을 받고 있다고 아는데.”

로키가 발두르를 죽이고 쫓겨난 후인가 보군. 거기에 라그나르 왕이라고?

바이킹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는 전설적인 군주다. 그의 후손들이 곧이어 이교도 대군세를 일으켜 잉글랜드를 개판으로 만들게 된다.

현대인이 아는 바이킹이라는 이미지도 그때 만들어졌다.

판타지 대체역사인가? 너무 흥미진진한데.

그래도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에길의 사가 자체도 그다지 영웅적인 이야기는 아니긴 하다. 충분히 인간적이고 추악한 이야기에 더 가깝지.

미궁식으로 어레인지 된 짬뽕탕인 모양이데.

그리고 정말 무서운 건 내가 아는 에길의 사가가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지.

미궁이 원본일 수도 있다.

한밤의 습격과 전투가 끝나고도 어린 에길은 울지 않았다.

대신 습격자의 시체들을 노려보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런 게 네 살?

“라그나르 대왕과 악연이라도 있었습니까?”

“대왕? 우린 그걸 대왕이라고는 부르지 않아. 악연이라면 있지. 밑에 들어가길 한사코 거부하고 있었으니.”

그건 충분히 악연이긴 하군. 대충 시점은 맞아떨어진다.

진짜로 신화가 실재하고 있으며 라그나로크가 다가오고 있을 뿐이지, 내가 아는 9세기의 북유럽이 맞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역사의 흐름? 에길의 흐름? 그것을 따라가기 위해 말해야 했다.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겠군요. 이 땅에서 대왕의 미움을 사고서 어떻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명예를 아는 자라고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굴복하더라도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군. 자네 말이 옳아. 우리가 마지막까지 여기에 남을 수는 없겠지.”

요컨대 좀 더 명예로운 방식으로 스칼라그림을 굴복시키려고 할 거라 여겼다는 거다.

내 생각엔 실제 라그나르 대왕은 그러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심문 때, 라그나르 대왕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고. 이거 로키가 문제군. 로키가 문제야.

원래 북유럽 신화가 얽힌 상황에서 로키가 만악의 근원인 것은 정석이나 다름없다.

애도하는 가운데 미안하지만 갑자기 편안해진다. 대충 로키를 족쳐보면 뭔가 답이 나올 것 같다.

두 파트로 나눠서 진행하면 될 것 같다.

아스가르드나 요툰헤임 같은 곳으로 날아가 깽판 치는 동시에 에길을 보호하면 되겠군.

“가능한 빨리 떠나야겠군. 어차피 우린 챙길 것도 없다네. 다 불타 버렸어. 식량이 그나마 문제로군.”

철저하긴 했다.

“사냥꾼이 필요하십니까?”

“……자네는 이대로 떠나도 될 텐데.”

“어차피 저도 대왕에게, 아니 라그나에게 찍힌 몸 아니겠습니까. 도피하는 게 옳겠죠.”

대머리 그림은 미래의 에길처럼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가. 그럼 고맙게 생각하도록 하지.”

자연스럽게 에길네 가족의 은인이 되는 것에는 성공했다. 문제없군.

에길 스칼라그림손.

위대한 전사 대머리 그림의 아들.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는 스스로를 전사라 여겼다.

그것만 보아왔기 때문이며 그것을 미덕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힘이 센 탓도 있었다.

전쟁놀이를 할 때도 늘 그랬다.

그는 위대한 전사로 자랄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입을 모아 칭찬했다.

그런 말은 어린아이에게는 예언과도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틀림없이 이루어질 무언가라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에길은 그래서 한밤의 참상에도 울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나중에 자라서 복수하겠노라 여겼다.

그것이 전사다운 행동이기 때문이데. 이제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명이었다.

그 와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떠돌이 음유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물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곱상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그야말로 짐승처럼 싸웠다.

피와 눈으로 얼어붙은 가운데도 철철 넘쳐나는 여유는 아버지와는 또 다른 대단함이었다.

에길은 배우고 싶은 어린이다.

그 음유시인이 사냥에 나선다고 할 때 에길은 손을 번쩍 들었다.

“에길, 너는 아직 어려.”

“많이 죽었습니다. 짐을 나르는 것이라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많이 살아남아 있다.

또래는커녕 몇 살 위의 형들도 도움이 되냐면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에길은 달랐다.

세상 모든 것이 그에게는 너무 가볍고 연약했다.

에길은 이 어린 나이에도 그것을 알고 있다.

어른들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일단은 짐 없이 따라만 와 보거라. 따라오지 못하면 돌려보낼 거다.”

에길은 그렇게 사냥꾼의 무리에 합류했다.

더 빨리 배우고 더 빨리 강해져야 한다.

어린 나이에 겪는 전투란 그런 것을 마음에 새기게 만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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