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47화
심연 4402층 - 전사의 이름(3)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한다.
에길은 자신이 가진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타고난 힘과 체력.
이 어린 나이와 작은(?)체구에도 에길은 사냥꾼 무리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해냈다.
눈보라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어른들을 따라 짐을 날랐으며 결국 모두의 인정을 받아냈다.
“한번 쏴 보겠느냐.”
활이었다.
장난감이 아니라 정말로 어른들이 쓰는 활.
에길의 체구에는 아직 맞지 않았으나 당기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쭉 당기고 쏘고, 맞지는 않았으나 어른들은 이미 놀라워했다.
도축 작업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베고 피를 빼야하는지 배웠고 먹을 수 있는 부위와 아닌 부위에 대해 배웠다.
몇몇은 간단하게 무기를 휘두르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어린 에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역시 예의 그 음유시인이다.
이곳에는 많은 무기의 달인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이 혹독한 땅에 걸맞은 육체적이며 강인한 느낌의 요령이다.
* * *
기술이 부족하진 않으나 기술적인 휘두름이냐면 그것은 아니라는 느낌.
전쟁놀이 때도 타고난 힘이 좋은 에길은 무패였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도 그것은 큰 차이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신기했다.
아버지나 다른 위대한 전사들에 비하면 호리호리한 체격에 가느다란 몸의 음유시인이 그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돋보이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기술이었다.
뭔가 다른 영역에 있는, 혹은 다른 계열의 무기술.
적어도 에길에는 없는 것이며, 저 음유시인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무언가였다.
할줄 아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 혹독한 땅에서의 가르침이다.
일부 어른들은 은근히 에길의 그런 생각을 지지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저 음유시인은 강력한 전사였으며, 동시에 어딘가 궤가 다른 독특한 형태의 무기술을 구사하는 이였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에길을 지도하는 듯한 모습을 음유시인 앞에서 보여주는 것도 그 탓이었다.
이 시대의 낯선 방랑자란, 대개 강자이며 사연 있는 자다.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보다 큰 전력이 되는 경우도 드물다.
사연이 있으니 어차피 다 같이 라그나르를 피해 도피하는 마당에 가족이 되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낯선 땅으로의 항해를 준비하며 다들 그런 꿍꿍이를 품었다.
사실 꿍꿍이라고 부르기에는 상당히 순수한 마음이긴 했으리라.
실제로 사냥이라는 이름의 묘기에 가까운 모습들만 보고 있었으니까.
대머리 그림도 그 모습에 감탄한 인물 중 하나였다.
“내 살면서 자네보다 더 뛰어난 사냥꾼은 본 적이 없군.”
“저는 본적 있습니다. 빈란드에서 멧돼지를 잡던 사람이었죠.”
“빈란드? 그건 전설 아닌가?”
“저 바다 건너 또 다른 땅입니다. 쉽게 도달할 곳은 아니지요.”
“흠, 자네는 거기서 왔나보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독특한 언행도 여러모로 튀었다.
때때로 알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하는 점은 신비로움으로 다가온다.
스칼라그림 역시 음유시인의 기술이 에길에게 전해지면 어떤가를 넌지시 떠보곤 했다.
“우리 아들 대단하지 않나.”
“솔직히 네 살이란 게 믿기지는 않습니다. 정말 위대한 전사가 되겠군요.”
“하하하, 나도 저때 저런 체격은 아니었던 것 같군. 그래서 어찌, 사냥은 잘 배우던가.”
“물론이죠.”
“그렇군. 뭐 다른 것들도 잘 배우겠지. 가르치기만 한다면.”
“하하.”
에길은 때때로 어른들이 음유시인과 다른 이를 견주는 것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오르골이 에이릭과 결투한다면 어느 쪽이 이길까?”
“난 오르골에게 걸겠어.”
“나도 그래. 그럼 스칼라그림과는?”
“글쎄? 그건 좀 어려운 문제군.”
물론 에길은 아버지의 승리를 주장했다.
어른들은 농담이라며 낄낄거렸다.
그래도 에릭 역시 알 수 없다고 내심 생각하기는 했다.
라그나르 왕을 거역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위광이었다.
감히 이 노르만과 데인의 최강을 다툰다고 할 수 있는 위대한 전사.
위대하고 또 위대하여 라그나르 왕조차도 회유하고자 노력한 토르의 화신.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현실적으로 행동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남에게 배운 지식들이 큰 도움이 된다.
미신의 시대다보니 좀 수상한 낌새를 보였다간 위험해질 수 있다.
마법은 그냥 발자국을 찾는데 사용하고, 어떻게 찾았는지는 둘러대야한다.
옛날 사람들이라고 어리석은게 아니다. 눈치는 오히려 현대인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
안 그러면 죽으니까.
어쨌건 마녀사냥은 서버에서 활동할 때도 주의해야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선동은 쉽지만 해명은 어지럽다.
그 점에서 우리 사냥꾼 아재가 보여줬던 눈밭 속에서 식량 찾기는 큰 도움이 되었다.
디테일 있게 둘러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항해 중에도 틈틈이 찾아봐야겠는데.”
습격의 다음날부터 곧바로 수색을 시작했다.
내가 여기 없어도 되는 시점은 한밤중이다.
자는 듯한 내 모습의 환영을 남겨두고 무슨 일이 있으면 신호가 오게도 해둔 다음 움직였다.
날개를 펴고 광활한 밤하늘을 가로지른다.
작정하고 속력을 내면 오래지않아서 미드가르드를 가로지를 수 있다.
얼어붙은 요르문간드의 빙벽을 넘으면 펼쳐지는 대공허.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깊은 구멍이다. 저 아래에는 뭐가 있을까?
게임이었다면 아득바득 기어 내려가서 뭐가 있을지 캐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그리고 사실 게임에서 저런 곳은 기어 내려가 봐야 고도가 일정 이하로 떨어졌다며 그냥 사망하거든.
소위 말하는 맵 바깥이다.
미궁이라면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지.
그렇게 날아서 무엇을 하냐하면 로키를 찾는다.
아스가르드에 있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 발두르를 죽인 로키는 그 대가로 신들에게 붙잡혀 유폐된다.
라그나로크만을 기다리는 복수의 화신이 된 상태다.
영원한 겨울인 핌블베르트의 조짐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미 거기까진 진행된 후다.
라그나로크는 눈앞이다.
신들과 거인족이 전쟁을 벌여 이 세상이 홀라당 망해버리겠지.
에길이 살아서 미궁의 일원이 된 것을 보면 나는 그걸 막게 된다.
시간여행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신화속의 운명과도 흡사한 면이 있다.
이런 세계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로키는 발견될 것이다.
내가 찾고자만 한다면.
아스가르드 근방까지 도착했다.
확실히 아름답다.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는 희우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장관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메인 던전으로서의 북유럽 신화와 차이점이 떠오른다.
거긴 아홉 개의 세계가 위그드라실의 가지 위에 있다는 전승을 따르는 세계였다.
거기가 진짜일지 여기가 진짜일지 알 수 없군.
길 가던 시녀의 모습으로 바꾸고 아스가르드로 잠입했다.
로키가 유폐된 곳을 찾아 일대일로 이길 수 있을지 간을 봐야겠다.
가능하다면 거기서 슥삭, 그 후 펜리르와 요르문간드 같은 라그나로크의 주역들과 수르트까지도 슥삭하면 꽤 일이 편해진다.
아스가르드에 잠입하는 건 또 처음인데.
신들의 궁궐은 과연 휘황찬란하다.
세상은 푸르고 맑으며 하늘에는 언제나 무지개가 떠있다.
그 가운데 흰색을 기조로 한 눈부신 대리석같은 재질의 건축물들이 온 사방에 세워져있다.
현대의 마천루도 감히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다.
바벨탑 정도는 되어야 비교할 수 있겠는데.
이 넓은 곳에서 어떻게 로키를 찾지?
신성이 곳곳에 느껴지는 관계로 마력은 사용하지 못한다.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네임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왜, 그 토르나, 오딘. 뭐 그런 존재들 있지 않나.
주요 등장인물 근처에 있어야 뭘 주워들어도 주워듣겠지.
다행스럽게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스가르드는 명백한 전시 상태였다.
아마 요툰헤임쪽으로 가더라도 똑같겠지.
“최후의 때가 도래하였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와아아아!”
발할라의 전사들에게 토르가 나서서 사기를 고취하고 있다.
내가 아는 토르와는 좀 다른 사람이지만 어쨌건 들고 있는 것은 묠니르가 틀림없다.
근데 잠시만……. 내가 아는 묠니르랑 너무 똑같이 생겼는데?
세상을 떠난 트동트 영감님이 들고 휘두르며 신세졌던 바로 그 물건이다.
그리고 가끔 미궁 곳곳에 떨어져 메인 던전의 토르가 잃어버리는 그 망치.
일단 계속해서 움직이며 내가 아는 북유럽 신화 테마의 메인 던전 [요툰헤임]과 공통되는 부분을 찾아나간다.
오딘의 궁니르도 내가 아는 궁니르다.
여러 가지 아티팩트들이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용자만 다르다.
“이런 쓰벌. 혹시 난가?”
진짜 난가?
거기에 한 가지 가설을 더 추가할 수 있다.
모든 메인 던전들은 어쩌면…….
강력한 고정 NPC들의 고향이 출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들의 고향은 대부분 그만한 위험에 처한 것일까.
“그럼 그것들에 관여한 것이 되는 나는 뭐지.”
혹시 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고정 NPC라거나.
그런 존재일지도 모르겠군.
좋아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에길의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만드는 것 그 자체다.
시간선은 거의 고정되어 있지만 신화의 운명과는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다.
확률은 아주 낮지만 충분히 실패할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면 나는 거기서 끝이다.
다른 시간선의 오르골이 성공한 것이 정사가 될 뿐이지.
나 한 개인으로서는 여기서 반드시 성공해야할 문제가 된다.
“하루 이틀로 되진 않을 테니 일단 좀 빠져나가볼까.”
장소와 인물을 눈에 익혀두었다.
전쟁 준비 중이라 경계가 삼엄한 동시에 허술하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있으니 생기는 틈도 많다.
일단 이 신들이 이기는 게 맞겠지?
라그나로크의 원래 결말은 대충 다 망한 후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아스가르드의 승리여야 한다.
그런데 그게 맞을까?
원전이 없는 결말을 만들어야 한다.
아스가르드의 승리가 꼭 미드가르드의 행복이 아닐 수는 있다.
흠. 이거 참 곤란한 문제로군.
결론 짓는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좋다. 일단 요툰헤임보다야 아스가르드가 낫겠지. 생긴 것도 인간이랑 비슷하고 감성도 그렇고 말이야.
거인들은 그 뭐라고 해야하지, 좀 그린스킨에 가까운 놈들이다.
사고방식은 그러하다.
인간에게 행복한 방식은 아니다.
스칼라그림의 롱하우스로 돌아가기 위해 날개를 편다. 빠르게 세상을 가로지를 준비가 되었고 그대로 비행을 시작한다.
음속을 돌파하고 더 멀리 나아갈 무렵 갑작스러운 빛무리가 발생했다.
강력한 신성이 함께 감지된다.
빛의 신이라면 헤임달. 나를 감지할 수 있는 것도 헤임달이다.
병력을 거느리고 오지는 않았군.
새하얗고 잘생겼으며 뿔피리를 들고, 카두세우스 지팡이까지 지닌 그림 같은 헤임달이 빛과 함께 출현했다.
“거기 너! 누구지? 혹시 로키냐? 탈출했어?”
오, 과연 변신의 대가인 로키로 오해받기 좋을 수는 있겠는데?
신성의 강도를 미궁식으로 측정해본다.
빛의 신이라면 미궁에도 존재한다.
그 권능이 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결국 여기도 미궁의 일부인 듯하니 미궁 스타일 전투력 측정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추정컨대 헤임달의 레벨은 3천 정도 되어보인다.
과연 강력하군. 이곳의 인간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레벨이다.
“말을 하기 싫다면 여기서 죽겠다는 거로 받아들이겠다. 이 첩자야!”
아스가르드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 잠시 살폈다.
충분히 멀다.
아무도 모르겠군.
“이게 웬 떡이야. 아스가르드를 제 발로 벗어났군.”
나는 검을 들며 말했다.
헤임달은 코웃음 쳤다.
“광명의 신 헤임달님을 이기겠다고? 보아하니 거인은 아닌 것 같은데 건방지구나 힘이 좀 강한 인간아.”
딱 3분 걸렸다.
“3천렙 따리가 어딜 도망가. 야, 너 로키가 어디 유폐되어 있는지 알아?”
“모 모릅니다.”
“알잖아.”
“진짜 모릅니다! 오딘께서만 알고계십니다.”
몇 대 처 맞더니 아니다 싶었는지 빛이 되어 도주하려 했다.
그런데 진짜 광속이 아니다.
정말로 광속이었던 미카엘이 생각나네. 좀 너무했지.
“너 자리 비우면 오딘이나 토르가 알까?”
“모 모를 것 같은데요.”
“원래 자주 쏘다니지?”
“네…….”
“비프로스트 문지기 안 해?”
“아니, 그 이제 어차피 곧 라그나로크라서.”
그럼 들고 가도 되겠군.
“대충 좀 인간같이 변신 해봐.”
“예? 그건 로키가 잘하는 거지…….”
“할 수 있어? 없어?”
“하겠습니다.”
멀끔한 미남자가 나타난다. 별로 신성해보이진 않고 촐싹거리는 느낌이다.
“딱 좋네. 가서 진흙 좀 칠하고 하면 더 바이킹 같겠어.”
“네?”
“미드가르드로 간다.”
멱살을 틀어쥔 채 이동하기 시작했다. 헤임달이 얼떨떨해하는 게 느껴졌다.
힘으로만 구슬리는 건 좀 별로지.
북유럽 신화는 이미 라그나로크가 예언으로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다.
“야, 너.”
“넵.”
“로키랑 같이 죽게 될 운명인건 알고 있지?”
“……그래요?”
“라그나로크에 대해서 아는 게 뭐야?”
“이겨야 한다는 거?”
이거 참 웃긴 놈이네.
나름대로 쫄아 있긴 한데 입은 죽질 않는다. 원래 좀 정찰병이나 전령 역할을 하는 놈들은 이렇긴 하지.
“이길 수는 있고?”
“예언대로라면 지겠죠.”
“그런데 준비해?”
“그래도 해야 하니까. 실현되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삶 아니겠습니까. 결국 운명에 거역해야하는 거죠.”
그런 느낌이로군.
“난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야. 운명으로부터 자유롭단 거지.”
“오……. 과연.”
“좀 열쇠같지 않아?”
“오딘께 보고해도 되겠습니까?”
“아직 안 되니까 따라와.”
놔주니까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탓인지 순순히 비행하여 따라온다.
결정했다. 일단은 거인을 밀어버리자.
헤임달의 위상이면 약하진 않다. 그게 이 정도면 거인들도 대충 두들겨 팰 수 있을 것 같은데.
포식자들처럼 홀로 쓸어 담기가 힘들 뿐이다.
“그래봐야 아직 4천 층이로군.”
좀 덜 사려도 되겠다.
신이라기에 혹시나 해서 좀 쫄았네.
신좌에 앉은 유배자들이 더 셀 거 같다. 이놈들 생각보다 전투 경험이 많지 않은 느낌이다.
하긴, 그러니까 죽은 인간들 모집해서 에인헤랴르를 꾸리지.
쯧쯧. 지들이 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