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48화
심연 4402층 - 전사의 이름(4)
무력으로는 내가 위다.
거의 확실하게 토르나 오딘보다도 위일 것이다.
변수는 라그나로크의 주역들인 로키의 자식들.
신들이 죄다 펜리르 따위의 괴물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라그나로크의 엔딩이다. 그러니 그것들은 신들보다 강할 것이다.
그렇다면 헤임달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대체 이 세계의 신적 존재들은 힘 말고 뭘 가졌는가다.
“그건 좀 흥미로운데.”
“저도 흥미롭습니다.”
헤임달은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친 끝에 결국 내게 큰 흥미를 가지게 된 모양이다.
전령계열의 신들은 원래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마음대로 써먹기 편한 것도 이런 계열의 신들이다.
신을 테마로한 메인 던전은 은근히 많은 편이라 숙지하게 된 공략이다.
헤임달은 그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했다.
사실 이들 입장에서는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을 것이었다.
“에인헤랴르는 그런 식으로 수집하는 거구나.”
“기술이라기보다는 의식 같은 거죠.”
결국 신들 본연의 능력으로 뭘 하는 것은 아니었다.
* * *
오래 전에 신들이 탄생하기 전부터 만들어져있던 기능을 활용하는 것에 더 가깝다.
아스가르드도 그렇고 미드가르드도 그렇다.
오딘이 태초의 거인인 이미르를 죽여 그 육신으로 만들어내었으며 그 바람에 깃든 여러 힘들이다.
신들은 이용할 뿐이지 근원도 근본도 알지 못한다.
그들도 거인도 최초의 존재인 이미르에게서 태어난 것일 뿐이니 당연하다.
기술적으로 뭔가 얻어갈 것은 없군.
사실 메인 던전으로서의 북유럽 신화에서도 비슷했다.
애초에 거기 신들은 죄다 유배자 출신이다.
그 왕국의 유배자였던 이들이 또다른 형태의 신좌에 어쩔 수 없이 앉아있는 것에 가깝지.
세상에 만능열쇠는 없는 모양이다. 이곳의 신들 역시 그런 원리를 해명해보고자 노력했으나 성과가 없다는 듯하다.
궁니르니 묠니르니하는 아티팩트들도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원래 있던 무언가를 무기의 형태로 가공하는데 겨우 성공했을 뿐인 그런 문제였다.
이 세계가 이대로 어찌 이어진다면 왕국과는 또 어떻게 엮이게 된 것일까?
그건 이 시간대 기준으로는 너무 먼 미래일 것 같으니 그냥 내버려두자.
헤임달은 꽤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주로 이 세계만의 특질에 대해서다.
좀 더 정밀하게 깽판을 칠 수 있게 되었군.
원래 강력한 이방인이 낯선 세계에 도착하면 대충 거길 갈아엎는 것이 국룰이다.
헤임달 역시 로키가 지상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듣고는 조금 놀랐다.
“흠, 예언을 따라 그런 일을 한다라.”
“그런 예언은 없어?”
“이 세상의 운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로키가 그런 식으로 인간들의 꿈에 등장했다면 전부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죠.”
미궁에서도 마법사, 그 중에서도 좀 더 원시적인 힘을 다루는 주술사나 강령술사 계열은 꿈을 중시한다.
이 세상은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이며 내가 느끼기로도 그래보였다.
라그나로크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발버둥치는 이 신들이 그 증거다.
내가 아무리 뭘 잘 안다고 해도 실제로 이 세상에서 까마득한 세월을 살며 살고자 발버둥친 이들보다 잘 알 수는 없지.
그런 면에서 헤임달은 아주 쉽게 나를 믿었다.
“전 로키를 죽이자는 쪽이었습니다. 위대한 오딘께서 반대했죠.”
“죽이는 게 좋았을 건데.”
“사실 일리는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죽음으로서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 녀석은 더 큰 고통을 받아야합니다.”
그건 또 어려운 문제지만 발할라가 그런 식으로 작동하여 죽은 전사들을 오딘의 전사 에인헤랴르로 만드는 것이긴 했다.
그거까지 고려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긴 하다.
로키라면 대표적인 트릭스터니 모종의 수단이 있다고 봐도 대충 맞겠지.
골치 아프네.
“로키를 철저하게 죽일 수 있다고 하면 해결될까?”
“글쎄요. 그렇게 쉽진 않을 것 같은데요.”
라그나로크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가?
신들의 편을 들어 라그나로크에 참전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펜리르, 요르문간드, 헬 같은 로키의 자식들이 문제가 된다.
“그것들의 강함은 이미 우리 애시르 신족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딘은 그걸 왜 내던진 거야?”
순수하게 신화적인 의문이었다.
안 그러고 그냥 잘 길렀으면 도리어 신들의 편이었을 수도 있지 않나?
“그건……. 예언 때문이죠. 그것들이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예언.”
“차라리 죽이지 그랬어. 아 그 죽음으로서 더 자유로워지는 그거?”
“우리가 모르는 섭리가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아도 말이죠.”
재밌네.
그러니까 신들이고 거인들이고 결국 이 세상에 대해서 뭘 제대로 아는 녀석은 아무도 없단 뜻이다.
확실한 것은 예언으로 알려진 라그나로크라는 현상을 비롯해 여러 미래들.
“거기서 벗어난 적이 지금까지 있어?”
헤임달이 씁쓸하게 웃었다.
“없죠.”
“그래도 노력하는군.”
“그냥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에인헤랴르는 신들 나름대로 필사적인 이유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죽어 발할라로 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들었다.
발할라의 전사들은 결국 에인헤랴르라는 이름으로 라그나로크의 최전선에 서게 되는 존재다.
에길은 아마 기꺼이 싸움에 나서려고 하겠지만 속사정은 모르는 편이 더 좋겠군.
사정을 다 알게 되자 헤임달이 묘하게 순순한 것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한 번도 운명에서 벗어나본 적 없는 신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운명 바깥의 존재.
내가 주장한 것이 그것이니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형편 좋게 잘 풀려가는군.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도달했다. 스칼라그림의 집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손님으로서 불침번은 면제받고 있다.
“모습을 감추고…….”
“어차피 인간들 사이에서 위장하고 있다고 했으면 저까지 인간일 필요는 없겠죠.”
헤임달은 인간의 모습에서 뛰어오르더니 다람쥐로 변해서 떨어졌다.
“라타토스크?”
“전 그 다람쥐 꽤나 좋아합니다.”
세계수의 뿌리에 산다는 약삭빠른 다람쥐다.
헤임달과 라타토스크라.
뭐 크게 안 어울리진 않는데.
그래도 내 어깨에 올라오는 건 좀 그렇다. 이거 수컷이잖아. 기분이 별로 안 좋네.
옆에서 자라고 하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내 경우엔 그냥 눈 감고 명상하는 것에 더 가깝다.
다음날 스칼라그림이 모두를 모았다.
“라그나르 휘하에 있는 친구들이 몰래 알려주기를 우리가 더 빨리 떠나는 것이 좋다는 모양이야.”
“정확히 어디로 갈지는 이제 결정 되었습니까?”
“잉글랜드.”
뭐 역시 그렇게 되나 싶다. 빈란드는 아메리카인데 거기까지 갈 수는 없지 않나.
바이킹은 역시 영국을 침공해야 제 맛이지.
지금 시기를 생각하면 이교도 대군세가 시작되기도 전에 먼저 상륙하는 무리가 될 모양이다.
에길이 죽을때까지 잉글랜드에서 활동했던 것도 그런 배경이 있어서일지 모르겠네.
생각해보면 아서왕 전설 역시 이런 식의 이교도 침공에 따른 불안으로 형성된 설화라는 말이 있다.
이 동네에 내가 아는 아서가 있을 리는 없으니 어떻게 전개될지는 흥미가 좀 생긴다.
식량은 더 훈연하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스펙 자체가 높은 인간 종족답게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았다.
“고기가 좀 상해도 탈이 나진 않으니까.”
“오, 그렇군요.”
위장도 스펙이 높아.
솔직히 말하면 라그나르 대왕은 로키 때문에 누명을 쓴 것에 가깝지만 별 수 없지.
헤임달은 흥미롭게 지상의 전사들을 관찰하고 있다.
에길이 내게 물었다.
“오르골, 그 다람쥐는 무엇인가요?”
“어제 갑자기 어깨에 올라오더니 계속 따라다니는군.”
“신기하네요. 그게 음유시인이라 가능한건가요?”
“주술도 좀 배운 적이 있어서.”
어쨌든 그날 하루는 다 같이 이주를 준비했다.
마을이라곤 해도 이 시절의 바이킹들은 대규모로 뭉쳐 사는 경우가 드물었다.
부족사회 느낌에 더 가까울 것이다.
바이킹하면 생각나는 바로 그 배.
롱쉽 세 척에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들어간다.
짐은 많이 버렸지만 어차피 가서 만들겠지. 이때는 그런 시기니까.
[솔직히 말하면 미드가르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새 많은 변화가 있었군요.]
헤임달은 진짜로 그 모습들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에인헤랴르는 중대한 전력 아니었어? 알아둬야 하지 않나.’
[대충 알지 않습니까. 그냥 지푸라기도 잡는 거죠. 오딘께서는 에인헤랴르의 규모를 불리려고 전란이 끊이지 않는 저주마저 미드가르드에 내렸는걸요.]
아, 그게 여기서는 진짜야?
너무한 양반이로군. 파티원 에길이 알면 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오딘을 때려잡겠다고 나설지도 모르지.
우리 파티원 에길의 스펙이면 실제로 오딘을 때려잡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것 같아서 더 무섭다.
신과 같은 힘을 지닌 분노한 바이킹이군.
그게 바로 라그나로크 아닐까.
혹은 갓 오브 워일지도.
불편한 진실이 너무 도처에 널려있는데.
롱쉽이 출발하고 곧이곧대로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마법을 구사해 마구 바람을 불러 일으켰고 물살을 만들어 배를 밀었다.
뛰어난 항해사들인 바이킹들은 여러모로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칼라그림과 친구들은 모르는 일들도 많았다.
‘이건 로키가 보낸 거라고 보면 되나?’
[그럴 것 같습니다. 제가 있는 줄은 모르는 것 보니 무슨 수단을 동원해 간섭하는 진 몰라도 실시간 관측은 아닌가보군요.]
헤임달이 여기 왠지 있단 걸 아는 순간 거대 오징어나 바다뱀 따위로 어떻게 할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에길이 목표인가.
현대 지구에 나타나도 충분히 괴물 소리를 듣고 인명피해를 낼법한 사이즈의 바다생물들이었지만 존재감조차 과시하지 못하고 바닷속에 수장된다.
헤임달이 어이없어했다.
[그건 무슨 힘입니까?]
‘마법.’
[이게 마법……? 그럼 우린 지금까지 대체…….]
어설프게 초월적인 힘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다보니 마법에 대한 연구는 뒤떨어진 면이 있다.
체계적인 마법이라기보다는 미궁의 주술에 더 가까운 원시적인 형태의 마법이다.
막연히 제물 바치고 의식 치르고, 기도 올리고 그러는 거 얼마나 효율이 나쁜 방식인데.
미궁에서는 흑마법사들도 그런 식으로 힘을 부여받진 않는다.
하여간 옛날 마법사들은 이걸 몰라요.
미궁 마법의 원리에 대해 강의를 조금 더 해주자 헤임달이 굉장히 시무룩해졌다.
[오딘께서는 대체 왜 한 쪽 눈을 잃으신 거지…….]
‘괜찮아. 나도 이 세계의 고유 기능에 대해서는 원리를 짐작조차 못하겠으니.’
솔직히 말하면 그냥 미궁의 섭리 같은 무언가지 싶다.
마법적으로 해명하려면 수천 년은 걸릴지도 모르지.
그런 와중 도착했다.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벌써 육지가 보이는군.”
어처구니 없어하는 스칼라그림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대변한다.
덴마크에서 잉글랜드까지니까 거진 1000km를 내달렸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속력이 맞다. 비행기도 아니고 말이야.
어처구니 없는 항해 속력에 다들 조심스럽게 저곳이 그들이 아는 거기가 맞는지 의문을 가졌다.
뭐 나는 상공에서 관측하며 방향을 유도한 것이니 100%다.
작은 소요 끝에 해안가에 정박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계속해서 마법을 통해 그들의 정착활동을 지원했다.
블랑쉐 월드의 차도살인 깐츄롤보다는 훨씬 쉬웠다.
다들 나무가 이상하게 잘 쓰러지며, 식량이 아주 쉽게 발견되고, 현지인과의 마찰도 없음에 의아해했다.
그리고 이 시대답게 모두들 신께 감사했다.
“신들께서 우리를 돕는구나. 토르시여, 그리고 헤임달이시여 감사합니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넌 왜 감사받아?’
[흠, 저희 어머니가 아홉 파도라는 해신이시거든요.]
여긴 그런 설을 채택하고 있구나.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전령신들은 여행의 신이란 느낌도 어느 정도 있으니까.
애초에 헤임달과 헤르메스도 먼 친척 같은 놈들이지.
그래서 나는 어깨의 헤임달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올렸다.
‘너도 일해 임마. 감사 받았으면 값은 해야지.’
[끙.]
그리하여 실제로 신이 도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