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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549화 (54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49화

심연 4402층 - 전사의 이름(5)

충분한 힘이 있다면 머리 아프게 두고 볼 필요가 없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그건 그 세계에 내가 미칠 영향력이 어느 수준일지 확신이 설 경우의 이야기다.

잘 모르는 곳에서는 사리면서 지켜보고 확신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전세계를 내가 지킬 이유는 없다.

블랑쉐 월드의 그 짓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그냥 힘들었다. 가능하면 안 하고 싶다.

내 편이 확실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전황을 바꿔주기만 하는게 가장 편하다.

애시르 신족은 그런 의미에서는 신뢰할만한 놈들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한동안 더 다람쥐 모양의 신과 바이킹 정착지에 머무르기로 했다.

에길은 대놓고 추근거리진 않았지만 이제 제법 친근하게 굴기 시작한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여기까지 왔으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의아할 것이다.

그럼 에길은 모른 척을 한 건가?

그리고 때때로 묻기도 했다.

“오르골, 당신의 그 칼놀림을 어떻게하면 흉내낼 수 있을까요.”

* * *

* * *

“아가야, 남의 기술을 함부로 배우려고하면 안 된단다.”

“그럼 제가 어떻게하면 당신에게 배울 수 있죠?”

저돌적이군.

에길의 강함에 내가 일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하기에 해보기로 했다.

간단한 놀림을 가르친다.

사실 뭐 대단히 배울 것도 없다.

네 살은 아직 타고난 힘에 의지해 무언가를 휘두를 나이다.

그 힘이 비상식적일 뿐이다.

에길 역시 그 사실을 아는 듯 했으나 기본의 충실함을 벌써 아는 모양인지 별 불만 없어했다.

스칼라그림은 그 모든 모습이 나쁘지 않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자네가 온 뒤로 너무 많은 일이 생겼군. 얼마나 지났다고…….”

“저도 압니다. 제가 몰고 온 재앙이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죠.”

“난 그걸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안타깝지만 사실일거다.

일단 평범하게 정착지의 일원으로서 안정될때까지 기다렸다.

갑작스레 출현한 이방인에 대한 적의가 없긴 힘들 것이고 일종의 외교를 준비하는 과정까지 지켜본다.

스칼라그림은 꽤 유능했다.

사실 뭐 안 유능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이 세계의 북구일 것이다.

잉글랜드의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날씨는 여기 사는 앵글로색슨들도 말랑말랑하게 만들겠지.

바이킹이란 족속은 생각보다 현명한 이들이다.

에길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래서 며칠 지켜보자 스칼라그림이 알아서 잘 하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여유가 좀 생기자 개인적인 호기심을 해결해볼 차례가 돌아왔다.

여전히 다람쥐의 모습은 헤임달이 따라오려고 한다.

“넌 왜?”

[운명 바깥에 있는 일들을 구경하고 싶은 건 정상적인 발로가 아닐까요?]

“그러시던가.”

잉글랜드인으로 보이도록 대충 변장을 한다.

이 시대에도 나름대로 대도시라고 부를만한 곳은 존재한다.

현대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충분히 많다.

서점이나 이야기꾼들을 찾아다니며 아서왕 전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실존하고 있었다.

“내가 알던 것과 크게 다르진 않나.”

[인간들이 지어낸 이야기 아닙니까?]

“너희 신들과 거인들도 어딘가에선 인간들이 지어낸 이야기야.”

헤임달이 짧은 혼란에 빠진 동안 좀 더 움직였다.

책이란 건 아주 귀한 것이기에 함부로 소지하거나 가져갈 수 없다.

마법을 통해 멀리서 내용만 스캔한다.

큰 난관에 부딪혔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 시절 문자를 읽을 수는 없었지 참.”

[제가 읽을 수 있습니다!]

다람쥐가 도움이 된다. 묘하게 첫 번째 테마의 쥐새끼가 생각나는군.

그건 진짜 쥐기라도 했지만 이건 반반한 남정네가 본체라 좀 이상한 기분이야.

[흠, 아서왕과 그 뭐지 원탁의 기사들 어쩌고하는 이야기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없는데요. 왕이라는 언급은 자칭했다고만 되어있군요.]

“그건 그럴 법 해.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나중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거든. 이 시기엔 없겠지.”

[미래에서라도 오신 것 같은 발언이군요.]

“실제로 그럴걸?”

간단한 설명 끝에 헤임달이 좀 더 혼란스러워했다.

[이걸 오딘께 어떻게 보고해야하지…….]

“알아서 잘 보고해야 할 거야. 나와 아스가르드 전체가 싸우더라도 피해가 적진 않을 테니.”

[큰일날 소리죠. 그때 두들겨 맞아보고 느꼈습니다. 아아, 토르님이 와도 처 맞겠구나.]

“너 혹시 토르한테 좀 맞고 사니?”

[전 도망을 잘 치니 안 맞습니다.]

까불긴 한단 거네.

[당신한테선 도망도 못 쳤지만요.]

확실히 힘은 중요하다.

헤임달에게 이 정도 박력을 심어낼 정도의 힘은 있었으니 빨리 감기라도 되는 거지.

안 그랬다간 진짜 평생에 걸친 모험이었을 거야.

“그냥 평범하게 내가 아는 아서왕 전설일 것 같군. 됐으니까 요툰헤임을 보러갈까.”

[거길 왜 갑니까?]

“내가 얼마나 이 세상에 대해 잘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필요하다면 가서 참수하고 올 녀석들이 있다.

추정컨대 로키의 자식들인 거대 괴수들을 제외하면 수르트 정도가 위협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 수르트는 내가 아는 수르트인가?

딱 그것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흠, 이거 재밌네요. 보관은 알아서 할테니 하나만 가져갑니다.]

“그러던가 말던가.”

그래도 신은 신이다.

빛무리가 되어 헤임달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책 주인은 많이 당황하겠지만 거기까진 내 알바가 아니지.

바이킹 정착지는 굉장히 빠르게 안정화되었다.

롱하우스가 보기 좋다.

에길은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도 이제 에길의 권위를 이길 수 없다.

사실 힘도 못 이긴다.

스칼라그림을 비롯한 어른들은 근면하게 술을 퍼먹고 있다.

가져온 마지막 술이다. 내일 주변 브리튼인들과 이야기하러 가본다는 모양이다.

일단 술부터 구할 생각인 것 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간 스펙도 더 높은 건가.

곧 아이들의 전쟁놀이가 시작된다.

아주 살벌하지만 이 시대는 원래 그렇다.

저렇게 놀다가 한 명쯤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시대다.

죽을 정도로 휘두르진 않아도 다칠 정도로는 휘두른다.

서로 무기를 휘두르며 편을 갈라 싸우고 여기저기 다친다.

미아는 무사할까.

애기들을 보니 그 생각부터 나는군.

에길은 눈에 띄게 힘조절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랬다간 놀이가 성립을 안 하겠지.

다른 네 살짜리들은 구경만 하는데 저기 껴있는 것부터가 기가 막힌다.

그리고 아이들은 미숙한 법이다.

에길은 두들겨 맞고 순간 발끈했고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대로 정수리를 찍었다간 친구가 죽을 거란 사실 역시 도중에 깨달은 모양이다.

어정쩡하게 날아간 도끼가 나를 향해 사납게 회전했다.

별 생각 없이 팔을 들어 받아낸다.

하는 김에 멋있으려고 흘려냈다. 그대로 힘의 방향을 통제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되돌려줬다.

나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오던 도끼는 거울에 반사된 빛처럼 제자리를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에길의 바로 옆에 퍽 소리를 내며 박힌다.

“친구를 죽이면 못써.”

“죄송해요.”

“그래 알면 되었다.”

에길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한 것 같다. 심성 고운 바이킹이란 말이지.

사실 타고난 힘이 저 정도면 도리어 선해지는 케이스가 있다.

다들 약하구나.

이 생각을 하는 순간 조심스럽게 되고 남의 입장을 고려하게 되는 법이거든.

그게 아니면 뭐, 힘에 취한 광전사라도 되겠지만.

에길은 그날 밤 잠을 잘 수 없었다.

대체 뭐였지?

날아든 도끼가 그대로 돌아왔다.

그는 알고 있다.

이미 전력으로 휘둘렀기에 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놓아버렸다.

이제 객관적으로 자신의 힘을 안다. 방심하고 있었다면 어른들도 위험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일 것이다.

실제로 늑대 한 마리를 전력으로 던진 도끼로 잡아냈으니까.

너무 신기하고 놀라운 광경이었다.

에길은 그 장면을 평생 간직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흉내 낼 수 없다.

사실 흉내 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음유시인 오르골은 에길에게 기술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했다.

호랑이가 고양이의 방식을 알 필요는 없다면서.

옆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도 그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맞는 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저 음유시인에게 며칠간 배운 것은 그 힘을 더 잘 다루는 법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는 것도 알 것 같아졌다.

에길은 그 기묘한 기술을 마음속에 간직만 해두기로 했다.

그의 손으로 구현하진 못하겠지만, 그런 게 있다고 알아만 두더라도 언젠가 목숨을 한 번 구하겠지.

헤임달은 아서왕 전설이 꽤 재밌다고 생각했다.

초자연적인 존재와 싸우는 어느 위대한 기사의 일대기였다.

“약하면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군.”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에게 야생용을 잡으라고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길이길이 칭송될 위업일 것이다.

“그래도 과장이 심해. 인간은 그런 짓 못한다고.”

물론 허구니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헤임달은 아서왕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 용을 단칼에 베었다는 부분을 읽으며 낄낄거렸다.

“인간한테 날개가 어떻게 있어.”

물론 인간 중에서도 초자연적인 힘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이 있다.

주술사라 불리거나 마법사라 불리는 이들.

하지만 진짜 마법사는 그가 이번에 만난 운명 바깥의 존재다.

얼치기 마법사들은 기껏해야 환각이나 보여줄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 현상을 일으킬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인간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한들 신들의 눈에 들어 어떻게든 되었겠지.

특히 로키가 그런 걸 참 좋아했었다.

기나긴 역사에서 그런 장난을 많이 쳐대었으니.

가끔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고 그들의 위업은 구체적으로 전승되기도 하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다.

“그의 성검 엑스칼리버는 낡아 있어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건 보물이 아니지.”

별 생각 없이 계속 읽는다.

이 전설은 생각 이상으로 구체적이긴 했다.

그래서 그 비현실적인 부분이 구체적으로 서술된 부분이 우습다.

헤임달은 마지막 장을 덮었다.

결말은 아서왕이 무덤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죽었다는 말도 없군. 에인헤랴르 중에 이런 노인은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긴 하다. 발할라에 전사가 한둘이던가.

헤임달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다람쥐의 모습에도 상당히 익숙해졌다.

그냥 뒹굴기에는 인간의 모습보다 이런 짐승의 모습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널브러지기에 아주 좋은 신체구조가 아니니까.

그러다가 문득, 운명 바깥에서 온 자에게 두들겨 맞았을 때가 생각난다.

“어?”

일단은 인간이었다고 했지.

그리고 날개가 있었다.

날개가 있었다.

“묘하게 구체적이다 싶었는데.”

마침 그가 들어오고 있었다. 헤임달은 얼른 달려가서 자신이 알게 된 사실에 대해 말했다.

운명 바깥에서 온 자의 표정이 굳었다.

“하나하나 자세하게 말해봐.”

헤임달은 그렇게 했다.

이야기의 내용이 진행될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갔다.

“이런 제기랄. 아서가 왔었군. 대체 어떻게 온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머리를 싸매던 그가 이윽고 말했다.

“무덤이란 걸 남겼다고? 단서 없어?”

헤임달은 일이 진지해졌음을 깨닫고 두뇌를 최대한 가동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홀로 카멜롯이라는 성을 세웠다고 그랬는데, 그 위치를 아무도 모른다던데요. 거기다 묻히고 싶단 소리를 했단 식의 서술이 있긴 했죠.”

“우리 파티원이나 나는 찾을 수 있게 해두었겠군. 그게 언제 일이지?”

“3백년 쯤 전?”

“그냥 흔적이 남아있을 수도 있겠네. 바로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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