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51화
심연 4402층 - 신들의 황혼(2)
해야 할 일이 확실해지고 그 미래에 대한 레일이 깔린다.
지금까지는 그 레일이 나의 과거 경험과 지식이었다.
이번 회차는 그것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고 점점 늘고 있다.
특히 [심연]부터는 그게 더더욱 심해져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는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파티원들을 통해서, 혹은 내가 파티원들에게 알려주면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처음부터 그렇게 짜둔 메인 던전이다.
“왜 알던 것과 이렇게까지 다른지 모르겠어.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게 다 가짜였을 수도 있겠군.”
가짜라는 말에 그다지 무게감을 두지 않을 수 있게 된 점도 새삼스럽게 신기하다.
확실히 이제 나는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이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의 가능성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내가 무슨 깽판을 좀 친다고 큰 변수가 발생하진 않을 것이다.
에길의 존재로 인해 이 세계의 미래는 어느 정도 확정되어 있으니까.
어렴풋이라도 안다면 뒤틀릴 가능성은 극단적으로 낮아진다.
* * *
* * *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정말로 그뿐인 문제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라그나로크는 일어난다.
그걸 뒤틀 필요조차도 없다.
그러면 로키를 죽이건 수르트를 죽이건, 하다못해 지금 미드가르드를 감싸고 있는 요르문간드를 죽이건 자유다.
변수는 미래를 바꿔 버릴 정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이 세상을 구형으로도 다시 다듬어줘야 하니까 정말 상관없군.
헤임달에게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이 편지는 헤임달이 읽어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언어는 왜 통하고 있죠?”
“좀 더 일찍 궁금해졌어야 하는 문제 아니야?”
여기가 미궁의 내부에 속해 있다는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바벨탑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에는 있는 모양이지.
그 덕에 대화는 통한다.
나는 지금도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 헤임달도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중일 것이다.
“미드가르드의 모든 지역이 같은 언어를 구사하지는 않지요. 제 식견이 좀 넓다곤 해도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운명 바깥에서 온 자의 특전이라고 해둬.”
“그런가요.”
헤임달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세상이 둥글다는 것은 무슨 개소립니까?”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예언 같은 거지.”
“라그나로크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헤임달은 멍청한 신이 아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짐작 중일 것이다.
예언이라는 태연한 대답에 의심 없이 믿는 것은 바보라서가 아니라 시간의 인과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는 뜻이다.
예상대로 헤임달은 묻는다.
“그럼 이 예언은 우리가 승리했다는 뜻입니까?”
“나도 그걸 확실히 모르겠는데. 우리 에길 친구가 생존하는 건 확실하지. 너희 신들은 그에게, 나아가 미드가르드의 인간들에게 우호적인가?”
그건 중요한 문제다. 의외로 거인들이 인간에게 우호적일 수도 있다.
그럼 애시르 신족이 지는 거겠지.
“그…… 일단 우호적이니까 에인헤랴르 같은 것도 모집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거인들은 그런 거 안 하고 있습니다. 거인 신앙도 없고요.”
“그래. 그렇겠지. 알다시피 내가 바로 인간이란 말이야.”
“날개 달리고 머리 위에 링이 있는 인간이요?”
헤임달은 다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쨌건 이건 새로운 예언이군요. 라그나로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새로운 예언.”
“향방을 가를지도 모르지.”
“제가 이걸 오딘께 보고하게 해주시면 안됩니까?”
“아직은 안 돼. 내가 할 일을 더 확실하게 생각해 보고 가봐야지.”
“당신은 우리가 이기게 해주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솔직히 거인이 더 우호적일 거라곤 생각 안 한다. 원전도 그러하니까.
경우에 따라선 공멸일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그 모든 것을 넘어 인간은 생존했다.
난 사실 그거면 된다.
“그래서 말인데 난 너희 편을 들 거야. 오딘이 날 믿을까?”
“여기까지 보여주면 믿겠죠.”
“너의 신뢰도는?”
“낮지는 않죠.”
“그렇군.”
그래도 불안하다. 신이란 족속들은 보통 음흉하기 짝이 없다.
왜 신이던가.
인간보다 우월하고 오래 살아서 그런 것 아니겠나.
신을 바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헤임달은 좀 바보같이 잡히긴 했지만 나 같은 존재를 몰랐으니 별수 없지.
그래서 아서는 거의 미드가르드에서만 활동하며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조차도 나를 위한 배려일 것이다.
“전과가 있는 편이 좋겠지.”
“……전과요?”
“딱 하나 골라봐. 제일 애시르 신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무엇이지?”
“오딘을 삼킬 펜리르군요.”
“한번 붙어보자고.”
내가 아는 [요툰헤임] 스펙의 그 펜리르 그대로라면 기믹을 모르고는 아주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안다면 생각보다 수월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니 한번 겪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신화대로도 오딘을 삼키며 세상의 절반을 삼킬 늑대다.
좀 많이 강한 보스다.
그 전에 해결해 둬야 할 일은 있다.
아무리 그래도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참가할 수는 없었기에, 스칼라그림을 기다렸다.
그는 하루 만에 돌아와서는 낙담을 숨기지 못했다.
“역시 타지에선 고생이야.”
“별로 좋은 소리는 못 들었나 보군요.”
“뭐, 도망자 생활이 편안할 거라곤 기대도 안 했어. 아무도 안 죽고 도착한 것만 해도 기적이지.”
정착지는 꽤 성공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너무 소리 소문 없이 갑자기 생겨난 곳이다 보니 알려지기도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적으로 돌리진 않았죠?”
“그다지 쓸모 있는 땅이라 여기진 않는 것 같으니 일단 방치하겠지. 브리튼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분란이 많은 모양이더군.”
칠왕국 시대니까 그럴 수밖에.
그리고 사실 브리튼인들은 이미 몰려났고 여기 있는 건 앵글로색슨족들이다.
일곱 왕국이 서로 견제하며 다투던 시기니만큼 이방인이 스리슬쩍 자리 잡긴 좋은 시기다.
이교도 대군세가 시작된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겠지.
“그래도 걱정이야. 겨울이 여기까지 몰려오지 않을까 말이네.”
“지금 이곳도 겨울은 겨울이죠.”
“훨씬 따뜻하지만 말이지.”
눈보라가 몰아치는 수준은 나도 보고 왔다.
그리고 지금 역시 몰아치는 중이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라그나르도 거기서 계속 버티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전력을 모으는 것이겠지.
“사실 제 생각에는 모두 결국 뒤따라올 것 같습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그저 핌블베르트도 함께 올까 두려워.”
라그나로크의 전조인 만큼 따라올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시베리아기단처럼 차가운 공기들이 점차 남쪽으로 내려오는 형태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
라그나로크가 시작된다면 에길과 가족들을 아서의 성에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그곳이 어찌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생활에 지장은 없는 환경이었다.
따로 생태계까지 구축되어 있었는데 미아의 흔적이 깊게 느껴진다.
아서로서도 좋은 공부가 되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전까지 바깥에서 식량 등을 비축할 필요는 있다.
아발론이라는 섬이 무한정 넓진 않으며 사람이 들어가서 살다 보면 결국 붕괴할 작은 생태계기도 하다.
나는 겨울이 길어질 것이라 경고했다.
“저는 겨울이 더 길어질 것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음유시인으로서의 말인가 전사로서의 말인가?”
“둘 모두입니다. 전사의 숙명은 고난 아니겠습니까.”
“하, 그리고 극복이지.”
척박한 땅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그렇다.
서버에서도 그린스킨들이 약탈하는 것은 그들이 야만해서만은 아니다.
습지거나 황무지거나, 어떤 식으로건 그들의 영토는 인구 부양력이 떨어진다.
스칼라그림은 나를 의미심장하게 보았다.
아마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강한 힘을 보여주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구축한다면 그 자체로 설득력이 부여되는 법이다.
현대의 합리가 아닌 이런 시대의 직관에 따라서, 스칼라그림은 겨울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날 사냥에 매진했다.
들짐승들의 씨가 말라 앵글로색슨들이 불평해 올 각오까지 하며 비축한다.
일단 에길의 가족들은 살려야 하지 않겠나.
“펜리르와 일대일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필요한 일이야. 어디 있지?”
헤임달은 떨떠름하게 아래를 가리켰다. 저 아래, 텅 빈 공동.
“완전한 무가 아닌가 보군.”
“모든 것이 가라앉는 심연이죠.”
“그 표현 아주 익숙한걸.”
바닥이 있구나.
아니, 잠시만 맵 바깥이 아니구나?
[요툰헤임]은 이런 구조가 아니기에 미처 생각 못 했던 일이다.
헤임달은 내가 정말로 미드가르드의 아래로 향하기 시작하자 걱정을 시작했다.
“펜리르가 예언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지목당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글레이프니르로 묶어 저 아래로 던져놓았습니다. 결코 풀리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그건 누구도 풀 수 없어요!”
그렇겠지. 글레이프니르는 실제로 펜리르를 풀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펜리르는 너무 커진다.
그 결과 늑대를 묶어둔 족쇄는 점점 그 몸을 파고들었고 종래에는 심장을 옥죄게 된다.
내 이야기를 들은 헤임달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오딘께 고해야 할 문제입니다.”
“아니, 기믹 보스니까 잡을 수 있을 가능성도 있거든.”
“목을 들고 갈 생각입니까?”
“라그나로크를 승리로 이끌겠다고 선언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헤임달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 눈빛에 나에게서 도주를 시도할까 하는 의문이 깃든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결국 헤임달은 나를 떠나지 못했다.
그대로 수직으로 하강한다. 너무 깊고도 깊은 무저갱이기에 따로 속력을 내야 할 정도였다. 자유낙하로 도달하는 건 무리다.
한참을 내려가고 빛이 한 점도 닿지 않기 시작할 무렵부터 새로운 환경이 시작된다.
빛이 없다라.
많은 기믹 보스들이 그렇듯이 시야 자체를 가리는 형태의 디버프가 가해지면 난이도가 현격하게 상승한다.
물론 그건 못 외운 놈들의 문제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헤임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거대하게 성장했단 말은 사실인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이렇게 싸워서는 안 됩니다. 제가 아스가르드의 원군을 불러오겠습니다.”
“일단 한번 봐.”
나도 확신이 필요하다.
펜리르의 패턴이 같다면 나오는 결론이 있다.
메인 던전 [요툰헤임]에 존재하는 신들은 진짜 그 신들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좌다.
토르라는 이름을 계승하는 유배자.
오딘이라는 이름을 계승하는 유배자.
심지어 로키조차도 그렇다.
그러니까 그 이전, 그런 계승이 시작되기 훨씬 전이 바로 지금 이 에길의 세계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럼 ‘현상’인 괴물들은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펜리르가 여기서 내게 쓰러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수르트가 그랬듯이 [요툰헤임]의 보스들은 [빛과 어둠의 경계]가 그랬듯이 각자의 목적을 가진 객체가 아니다.
그저 세계 멸망을 기도하는 현상에 더 가까운 존재다.
예언에 따라 펜리르는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펜리르를 죽이지 않고 묶어둔 이유?
죽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
“펜리르는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았죠. 활동을 멈출지언정 다시 부활하여 눈을 떴습니다.”
“주기적으로 죽여야 했어. 꾸준히 약화되도록 말이야.”
“로키의 자식이니 그것만은 무리였습니다.”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신들은 사라진다.
그리고 자리로서 남는다. 그게 에길의 시대는 아닐 수 있다.
메인 던전 [요툰헤임]의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아스가르드의 파편만이 남아 있으며 괴물과 거인들의 땅인 요툰헤임이 주가 되는 곳.
그곳에 미드가르드는 없었다.
분리되는 거군. 내가 분리시켜야 한다.
라그나로크의 결과로서 미드가르드를 분리하고 따로 어딘가로 가져간 거다.
이 세계는 그대로 남아 다른 곳에서 어떤 왕국으로 흘러들고 그 결과로서 메인 던전이 탄생한다.
왕국의 멸망이란 것은 대개 외부의 어떤 것을 통해서 시작되었던 모양인가 싶다.
이건 게임 시절에도 알 수 없던 정보였다.
기획자 녀석은 알고 있었겠지?
이 지경이 되고서도 묘하게 즐거워졌다.
게임 시절에는 결코 알 수 없던 비하인드를 알게 된 기분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펜리르가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거대한 빛을 터뜨렸다. 천사로서 가진 빛의 원소와 신성이 무저갱의 어둠을 잠깐이나마 밝힌다.
“저 거대한 산은 뭐죠?”
“펜리르의 이빨.”
“맙소사.”
“너희들이 방치한 위험의 결과다. 저걸 줄여주지.”
이빨 하나가 산으로 보일 정도의 크기. 지금 우리는 이미 거대한 늑대의 입안에 있다.
“길은 알고 있지.”
심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펜리르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던전인 괴물이다.
“다람쥐로 변해.”
“예?”
“넌 너무 느려.”
헤임달을 대충 품속에 구겨 넣은 후 날개를 펼친다.
입을 벌리면 위턱이 하늘에 닿으며 아래턱이 대지에 닿는다는 늑대.
그리하여 세상의 절반을 먹어치운다는 늑대의 입속으로 그대로 질주한다.
“30분쯤 걸릴 거야. 내가 아는 그대로인 것 같으니까 말이지.”
[요툰헤임]은 기믹으로 가득한 테마다.
세상을 멸망시킬 온갖 현상들을 공략하여 무력화시킨 후, 그것들이 부활하기 전에 어떻게든 결말을 지어야 하는 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원전 신화의 컨셉을 잘 살린 테마라고 늘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이게 진짜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건 곧바로 기도를 통해 늑대의 폐로 파고든다. 그리고 혈액 속으로 녹아들었다.
심장으로 가는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빠른 루트다.
대륙 스케일의 생명체는 혈관도 거대하다. 혈류의 속력은 말할 것도 없다.
내부를 비춰주는 빛도 없다. 위그드라실의 빛이 이 녀석 내부를 환하게 투영해 주는 게 이 녀석 공략의 대전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동맥까지만 도달하면 문제없지.”
한 테마 내에서 반복적으로 공략해야 하는 기믹 보스인지라 강제되는 보스전은 없다. 심장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정확히 30분 만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1시간 20분 후, 좌심실을 파고들어 심장을 옥죄고 있는 슬레이프니르를 발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걸 다시 활성화시켰다.
펜리르는 쓰러졌다.
3일 정도 후엔 다시 눈을 뜰 거다. 크기도 좀 줄어들 거고.
“이제 아스가르드로 가볼까?”
“혹시 완전히 죽일 방법은 없습니까?”
“내가 아는 한에는 없긴 한데.”
뭐 승리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펜리르도 잠든 이상 라그나로크를 곧바로 터뜨린다.
왜 거인이 공격해 오길 기다려. 신들이 침공하면 될 일이다.
선제 라그나로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