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553화 (55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53화

심연 4402층 - 로키(1)

신화적 짬밥이나, 현실적 짬밥이 아닌 오로지 미궁의 짬밥.

그러니까 지극히 게임적으로 장엄한 곳에 로키가 유폐되어 있었다.

거대한 세계수의 뿌리 아래, 깊고도 또 깊은 지저의 공동 아래다.

그렇게 말해봐야 펜리르가 쓰러져 있는 저 무저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무뿌리 아래 지하세계라고 하면 충분히 장엄하지 않은가.

다른 무엇보다 게임적으로 로키 같은 위험인물이 유폐되어 있기 적절한 곳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세계의 위그드라실은 비교적 자그마하다.

아홉 세계를 떠받치는 수준의 초거대 나무가 아닌 아스가르드의 등대마냥 솟구쳐 있는 자그마한 세계수에 불과하다.

물론 그게 진짜로 작다는 뜻이 되진 않는다.

그간의 스케일에 비해서는 세계수라기엔 좀 소소할 수 있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미드가르드의 면적이 지구와 동등하다고?

아스가르드도 그렇다.

그 중심에 뿌리내리고 미드가르드에서 북극성의 역할을 대신할 수준으로 빛나는 황금나무라면 과연 세계수라고 불릴 만도 하지.

그 아래 빛 한 점 들지 않는 칙칙한 나무뿌리에 우리 로키돌프가 묶여있다.

* * *

퀴퀴한 뿌리 냄새와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독에 고통받겠지.

더 방치하면 증오와 원념의 화신이 되어 세계수를 들어 올리고 독기를 흩뿌릴지도 모르겠다.

해킹당할 신수가 없는 게 다행인가.

위치상 직접 찾으려고 하면 심증이 있더라도 몰래 들어가긴 힘든 곳이었다.

헤임달이 설령 알고 있어서 내게 고했더라도 결국 오딘의 도움은 필요했을 터.

실제로 오딘만 아는 숏컷이 있었다.

오딘은 슬그머니 자신의 옥좌에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떠나기 전에 물어보아야만 했다.

“당신만 알고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나에게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되나요?”

“이게 어떻게 온 기회인데. 놓칠 수 있겠나. 난 늑대밥이 되고 싶지 않아.”

위엄 넘치는 만물의 아버지가 아니라 꽤 절실하게 살아남고 싶어 하는 노인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

“신이 그렇게 현실적이어도 됩니까?”

“신이기에 현실적인 거지. 오래 살면 누구나 이렇게 될 걸세. 난 아는 것도 많지 않나.”

말이야 맞긴 하다.

“대체 그 지혜라는 거 어떻게 작동하기에 운명도 알아봅니까.”

“그냥 보인다네. 어려울 것도 없지. 자네는 채워진 족쇄가 무엇인지 궁금할 테지? 그럼 라그나로크를 승리로 이끌게.”

거기서 어이가 없어 실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자네 운명에 대해서는 절대 말 안 해줄 거야. 날 죽여도 소용없네.”

이런 미친 늙은이.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뭔지 너무 잘 알잖아.

어째 지나치게 호의적이라 생각했다.

그렇다.

아무리 운명을 본다고 해도 초면에 곧바로 누군가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그런데 운명을 읽을 수 있는 오딘은 날 보는 순간 깨달았던 모양이다.

우리가 서로의 목줄을 동시에 틀어쥘 수 있다는 것을.

우습지만 이런 이해관계보다 더 확실한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오딘의 시야에 들어간 순간 이미 우리는 한 배를 탄 것이었다.

이 늙은이가 그냥 그렇게 결정해 버렸다. 내 의사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남한테 사기당한 기분인데도 도리어 유쾌해진다.

생각할수록 진짜 미친 늙은이다.

메인 던전의 오딘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 오딘이 이런 존재였다면 비록 딜이 좀 안 나오더라도 훨씬 쉬운 던전이 되었을 텐데.

“자네 운명의 방향은 우리 세계를 향하고 있지 않아. 그냥 거쳐 가는 손님일 뿐이겠지. 안 그런가?”

“정확하시군요.”

“물론이지. 헤임달은 내가 눈깔을 왜 바쳤는지 자주 의문스러워했지만 말이야.”

나도 바칠 수 있으면 바치고 싶은데?

이런 게 가능하면 삶이 얼마나 쉬울까.

하지만 그럼에도 제 운명의 족쇄를 풀어낼 수는 없기도 했다.

오딘에게 지혜는 축복이자 저주였겠군. 나와도 비슷하다. 미궁의 지식은 저주이기도 했지.

빤히 아는데 못 깨는 것만큼 억울한 게 어디 있겠나.

“이봐. 우린 서로 절실해. 그렇지?”

“그렇죠.”

“그럼 된 거야. 얼른 가서 로키 모가지나 좀 따고 오게.”

“아니, 당신 아들 아닙니까? 말도 안 되게 냉혹하시군요.”

“지 애비를 손주 밥으로 던져주는 후레자식은 말이 되고?”

하여간 신화는 죄다 콩가루 집안일 수밖에 없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했다.

“그걸 모두 알면서도 로키와 자식들을 방치했습니까?”

“난 바꿀 수 없었네. 1,400만 개의 가능성 중 그게 최선이었다고 하면 믿겠나? 보이는 게 너무 많은 것도 저주야.”

“숨이 턱턱 막히는군요.”

“여기까지 들었으면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도 알겠지. 그 기쁨을 망치지 말게.”

“알겠습니다. 얼른 갔다 오죠.”

이건 또 미아가 생각나는 발언이었다.

물론 미아의 눈은 이제 저주가 아닐 것이다.

다들 잘 지내거나, 잘 지냈겠지?

오딘의 옥좌 아래는 깊고도 깊은 수직굴이 파여 있었다.

그대로 뛰어들고 아스가르드의 크기를 감안해 전력으로 가속한다. 순식간에 뿌리 아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좀 좋지 않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혹시 걀라르호른 불어서인가?”

진지하게 그렇게 의심해 볼 만하다.

로키가 묶여 있었던 흔적만이 남아있다.

이 자식 튀었어.

그 뿔피리 자체에 무슨 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라그나로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답게 온 아스가르드에서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로키도 들었을 것이다.

“이 새끼.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었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이미 증오와 원념의 화신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

끈적끈적하고 검붉은 저주가 주변을 잠식하고 있는 것을 보니 진짜 로키돌프가 따로 없다.

“이것도 게임답긴 하군.”

쉽게만 풀리면 그게 게임이던가.

이쯤에서 로키 추적 정도는 등장하는 게 맞다.

“흠터레스팅. 어떻게 탈출한 거지?”

오르골 센스를 가동하고 살피기 시작한다. 마법이 윈시적인 이 세상에서는 신들도 내 추적을 피할 수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저주라는 형태로 변질된 마력을 질질 흘리고 있다.

“아, 그 신발. 그걸 어떻게 꼼쳐두고 있었나 보군.”

결코 이 세계의 마력운용방식으로 나올 수 없는 깔끔한 공간이동이었다.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다면 추적하지 못하게 지울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아티팩트의 기능에 의지한 순간이동이다.

과연 북유럽 신화 제일의 트릭스터군.

하지만 나도 굳이 따지면 트릭스터 타입의 플레이를 하는 게이머다. 이런 짓은 하는 것도 쫓는 것도 익숙하다.

손바닥을 펼치고 공간이 열렸던 곳에 뻗는다. 술식이 펼쳐지고 이동했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공간이 아가리를 벌린다.

뛰어들었다. 곧바로 서늘한 냉기가 나를 덮쳐온다.

눈 덮인 침엽수림이었다.

“철의 숲인가? 요툰헤임이겠군.”

행성 간 공간이동 수준인데.

이건 내 마법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공간이동 거리다.

역시 북유럽의 장비빨은 미궁 제일이네.

“신발부터 조지거나 빼앗지 않으면 못 잡겠어.”

일종의 잠입액션이 되겠다. 로키가 날 인지하는 순간 엄청나게 골치 아파지니까.

로키가 요툰헤임에서 과연 어디로 갔을까?

수르트 같은 건 말이 통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이건 좀 답이 뻔했다.

로키의 자식은 삼남매다.

펜리르, 요르문간드, 그리고 헬.

막내딸인 헬은 오딘의 말을 잘 듣는 척하면서 제 영역에서 얌전히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옥의 여신 헬.

오딘도 그녀가 라그나로크에서 배신하리라는 것은 뻔히 알았겠지.

근데 뭐 그게 최선이었다니 어쩌겠어.

다만 이 세계는 니플헤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헬의 영지가 있어야할 세계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요툰헤임에 있는게 더 모양이 좋다.

“수색에 또 수색이군.”

노심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지구 스캔을 한 번 더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행성 스케일의 마력탐지는 본디 마법사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마법사들이 부담을 나누어 받거나, 아예 마도 공학적 장치를 이용한다.

종족이 천사건 마법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건 이걸 자주 하는 것은 몸에 부담을 누적한다.

부하의 정도를 생각하며 마력을 끌어모으고 퍼뜨렸다.

눈부신 파문이 번져 나간다. 로키도 거인들도 이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세세하게 돌아오는 데이터 대부분을 뭉개서 쳐내고, 중요한 구조물들만 파악하기 시작했다.

요새 같은 것들이 여럿 보이고 광활한 자연 역시 보인다.

산과 들을 넘어 다양한 형태의 랜드마크들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요툰헤임도 어쨌건 생물이 살아가는 곳이긴 하다. 미드가르드보다는 훨씬 포악한 생태계지만 제법 흥미로웠다.

내가 아는 메인 던전의 요툰헤임과 거의 일치한다.

요툰헤임과 아스가르드의 일부가 후에 메인 던전으로 편입되는 일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요툰헤임]은 게임 시절에도 유래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테마였다.

유배자 출신의 오딘이나 토르도 알지 못한다. 그들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물려받았을 뿐이니까.

어떻게 이런 꼴이 되었을지 상상하게 만들게끔 신화를 비틀어 놓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비틀어 놓은 것일 줄이야.

“이러면 찾기가 더 쉽지.”

기억하고 있는 [요툰헤임]의 지도가 보인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같다.

그리고 내가 전혀 모르는 지역이 탐색되었다.

“여기군.”

지옥의 아가리 같은 것이 입을 벌리고 있다. 후에 니플헤임이라 불리게 되는 곳으로 떨어져 나가는 헬의 영지다.

“어째 니플헤임과는 스타일이 좀 다르다 했어.”

헬은 비밀이 많은 존재였다.

그녀 역시 일종의 현상으로서 기능하는 재앙이지만, 그런 기믹들 중에선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했으니까.

세상이 왜 이꼴이 되었는지 유일하게 알고 말할 수 있는 보스였다.

암시만하지 결코 말하진 않았지만.

“가 볼까.”

힘 자체는 느꼈을 것이다.

그게 탐지라고 생각하지 못할 뿐.

공간을 연속적으로 열며 이동한다. 소닉붐만은 누군가가 느끼겠지. 물리적 이동을 지양하고 소리 없이 마력으로만 움직이는 방식이다.

움직이는 와중 비프로스트가 요툰헤임에 도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위는 무지개가 닿기도 전에 그 위를 이미 달려가고 있는 신들의 모습도 보인다.

거인들이 어리둥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앞장선 것은 오딘과 토르다.

번개가 번쩍이고 붉은 번개와도 같은 창이 사방을 지졌다.

무지개의 입구, 원래라면 거인들이 라그나로크 때 출정해야 할 요새가 위병소째로 폭파당했다.

이곳의 거인인 유배자의 플레이어블 종족 거인의 근원에 해당한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강하다.

20미터 가까운 거체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것까지 감지된 후 마력 탐지가 보내오는 정보가 끊겼다.

“흥미롭군.”

이런 라그나로크를 어디서 또 보겠나.

그리고 헬의 영지, 말하자면 저승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곳이 보였다.

전사로서 전장에서 죽는다면 발할라로 간다.

침대에 누워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세상을 평온하게 뜬다면 이곳으로 간다.

이름이 헬이라 그렇지 딱히 지옥은 아니다.

헬은 말이 잘 통하고, 그래서 더 곤란한 보스였다.

동일 스펙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만만치 않을 수 있으나, 로키만 잡으면 되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로키의 스펙은 오딘에게 제압당할 정도니 틀림없이 높지는 않으리라.

전체적으로 높아봐야 3~4천 레벨이다. 레벨을 초월한 괴수보정을 받는 것들이 있을 뿐이다.

일대다라면 이길 수 없다.

일대일이라면 내가 최강이다.

투명화를 걸고, 소리도 지우며 여러 가지 마법적 조치와 암살자의 움직임대로 지옥의 아가리 속에 들어갔다.

수직으로 깊게 파인 동굴을 내려가자 익숙한 헬의 영지가 보인다.

로키가 흩뿌린 저주의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이 지내는 도시와 마을들, 그리고 헬의 성.

그 사이로 이어져있다.

헬은 아버지에게 동조했을까?

꽤 특이한 보스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성은 크고 넓었지만 침투는 어렵지 않다.

여전히 원시적인 마법만이 간신히 존재하는 세계다.

나를 감지할 수 있는 특정 아티팩트들만 조심한다면 투명인간이나 다름없지.

그림자 속에 스며들어 보초들을 피한다.

헬은 보스지만 꼭 쓰러뜨려야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세상을 멸망시키는 두 오빠와는 다르게 소극적으로 제 언데드 병력들만을 배에 태워 보내온다.

끊임없는 잡몹 웨이브의 담당자다.

가서 처리하면 좋겠지만 결코 약하지 않기에 그냥 방어를 하는 편이 더 좋았다.

[요툰헤임]의 결말은 아홉 세계를 분리시켜 유배자 신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아스가르드라고 불리던 땅에서 조용히…….

언제고 그들이 심연에 가라앉을 때까지의 평온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엔딩.

헬은 의외로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던 보스다.

멸망에 소극적인 재앙.

게임 시절에도 꽤 인기는 많은 캐릭터였다.

옥좌의 방 위치가 대충 어디더라. 너무 오랜만에 오긴 했군.

어떻게 찾아가자 대화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분노에 찬 남자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에코가 서려 있다.

아마도 로키겠지.

마력이 저주가 될 수 있듯, 신성 역시 그럴 수 있다.

어둠의 원소처럼 좀 해로운 정식 원소가 아니라 마력 재해에 더 가까운 현상이다.

지금의 로키라면 신성 재해라고 할 수 있겠군.

상대하는 목소리는 아주 어리고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

“너는 나를 도와야 한다! 내 딸이니까!”

“진정하세요. 아버지. 멸망만이 모든 것의 답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분노를 다른 방식으로 풀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네 오빠들의 꼴을 보지 못했느냐? 나는 라그나로크만을 기다리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헬이 난처해하고 있군.

로키보다는 예언의 재앙으로서 태어난 헬이 더 강하다.

여기서 헬이 묵인한다면 로키를 쉽게 죽일 수 있다.

헬이 로키를 지킨다면 놓칠 확률이 높다.

어떻게 할까?

대화를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엿듣기 또한 RPG의 기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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