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554화
심연 4402층 - 로키(2)
헬에게 저주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태생 그 자체였다.
어떻게 태어난 그 순간부터 라그나로크의 주역으로 운명 지어지는가.
그의 아비 로키가 항변했으나 소용없었다.
이유도 없고 논리도 없다.
그저 원래 그렇게 되는 것.
그런 이유로 헬을 포함한 남매들은 핍박받았다.
원망? 이젠 생기지 조차 않는다.
신들 역시 필사적이다. 누구나 필사적이다.
잘못한 것은 아무도 없다. 그게 자가실현적이건 무엇이건, 헬에겐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남은 것은 허무.
그리고 눈앞의 현실들.
그녀는 사후세계의 여왕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재앙이 될지언정 그 이전까지는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모든 이들은 죽어서 이곳으로 온다.
신들조차도 말이다.
오딘이 만물의 아버지라면 그녀는 만물의 종착점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적극적인 저항 끝에 처참한 꼴이 된 오라비들과 다르게 괜찮은 대우를 받은 탓도 있으나.
* * *
* * *
* * *
그 일 자체가 헬의 마음에 아주 들었기 때문이다.
운명도, 삶도, 죽음도.
모두 결국 그녀의 영지로 가라앉는다. 세상 모든 것의 끝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증오와 원념으로 타오르는 아비에게 공감하기는 힘들었다.
운명이 어차피 이루어질 것이라면 그걸 적극적으로 실행할 것은 또 무엇인가?
헬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의 영지가 얼마나 평화로운가다.
죽은 자들의 안식을 지키며 그 모든 것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은 재앙으로 태어난 그녀의 소망이며 동시에 안식이기도 하였으니.
물론, 아비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네가 그런다고 신들이 너를 가만히 둘 것 같으냐?”
“가만히 두지 않으면 또 어쩌겠습니까. 그럼 저승은 누가 맡죠?”
“배신했구나. 딸아. 아비의 편을 들 생각이 없어.”
“저는 처음부터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굳이 고르라면 죽은 자들의 편이겠죠. 이곳은 지켜져야 합니다.”
배신?
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을 파멸에 몸을 맡기는 아비가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격정을 결코 꺼트릴 수 없다는 점도 이해하고 말았다.
그녀가 덜 받았을 뿐이지 아비나 형제들이 당한 모욕은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으니.
“저는 아버지를 도울 수 없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여왕으로 남게 해주십시오.”
“그럼 쓸모가 없군.”
아비가 팔을 든다. 헬은 저항하지 않았다.
신성이 아니게 된 무언가가 뻗어 나와 검붉음으로 시야를 물들였다. 목이 틀어쥐어졌다는 사실을 잠시 후에 깨닫는다.
그래도 저항하지 않았다.
이것 또한 운명이라면 운명.
순응하고 싶었던 적은 없으나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들 죽을 수도 없겠지.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그녀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렇기에 죽은 자들을 영원히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독기라고 할지 저주라고 할지. 뒤틀린 신성이 몸에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헬은 눈을 감았다.
어? 이런 전개라고?
정말로?
애초에 보스조차 아닌 건가.
로키는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했다. 어둠 원소를 몸에 품는 것도 장기적으로 본다면 치명적일 수 있다.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는 뒤틀린 마력은 그 이상이다.
생명력이라 퉁쳐 부르는 무언가도 결국 마력의 한 종류니까.
그게 변질된다는 것은 마나라는 입자단위에서 정상적인 성질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신성이라면, 제 근본의 신성을 불태워 날뛰는 것이라면 더더욱 심해진다.
로키의 본질은 불의 신이다. 원전과 관계없이 [요툰헤임]에서 불의 신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로키의 신성은 뒤틀리더라도 불과 비슷한 형태를 띤다.
화덕을 데우는 따뜻한 불길이 아니라 원한으로 가득 찬 검붉고 칙칙한 화염이 로키가 들어 올린 헬을 휘감았다.
판단이 빨라야하는 순간이다.
헬은 저항할 생각이 없다.
이 자리에서 그대로 무력화되는 수가 있다.
그 후에 로키를 급습하면 그보다 깔끔하기도 힘들어진다.
예언의 재앙은 요르문간드와 수르트만 남는다.
선제 라그나로크는 대성공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 정지를 걸었다.
결국은 눈치 채겠으나 이런 식의 마법 운용은 본 적이 없겠지.
모습을 숨기기를 멈추고 헬의 목을 틀어쥔 로키를 본다.
분노로 일그러져있다. 본디 제법 미남자였을 그 모습은 화염으로 추악하게 그을렸다.
반대로 그 너머의 헬은 화사하다.
검붉은 불길 속에서도 화사하게 빛나는 적발의 소녀. 고교생보다도 어려 보인다.
가만히 있다면 인형 같은 중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건 본인이 맞군. 펜리르는 솔직히 너무 커서 확신이 없었는데.”
늑대보단 인간형이 생김새로 구분하기 쉽다.
물론 소녀로서의 모습은 헬의 한쪽 면일 뿐이다.
저승의 여왕으로서의 헬은 이런 모습이지만 보스이자 죽음의 관리자로서의 헬은 노파의 모습이다.
보스전은 그 모습으로 하게 된다.
생각을 해보자.
미래의 헬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더라?
소극적인 재앙이자 보스.
지금도 그 마인드는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다지 라그나로크에 적극적이지 않으며 제 운명에 체념한 듯한 태도.
이건 미래에도 여전히 그런다.
유배자가 찾아가면 싸우기는 하지만 별다른 말없이, 저항이나 발악조차 없이 패한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어차피 다시 눈을 뜨게 될 테니까.
공략의 진행에 차질이 생긴다면 십여 번을 그렇게 보스전을 치러야하는 수도 있다.
그 와중에도 헬은 대사가 없다.
헬의 인기 원인이기도 하다.
노파일 때도 되게 카리스마 넘치는 간지 할머니거든.
그런 캐릭터가 강력한 보스로 존재하는데 몇 번을 죽여도 제 오빠들과 달리 대사 한 마디 없이 “…….”만 띄우고 쓰러진다고 생각해보라.
심지어 전투 개시 대사도 말줄임표 한 줄 뜨고 끝이다.
저주를 퍼붓는 다른 재앙들과는 좀 다르지.
수르트의 묵묵함과도 다르다.
“추측이야 많았는데.”
추측할 수 있게 여기저기 떡밥도 뿌려두었다.
헬은 보기보다 평화를 사랑하지 않냐는 식의 이야기도 있었다.
“지금까지의 정황대로만 봐도 로키 편은 아니고 오히려 로키가 화났단 말이야.”
그렇다면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저승의 주인.
운명으로부터 해방되고 싶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은 대사.
헬의 대사 자체가 너무 적어 정보가 적었는데 이건 또 재밌는 일이네.
인생을 바친 게임의 비하인드를 이렇게 보게 된다고?
새록새록한 감정으로 결정을 내린다.
“일단 살려보자.”
보스전을 하더라도 일대일이라면 승산이 높다. 여긴 그래봐야 4천 층대다.
로키와 갑자기 협력을 하더라도 나는 도주할 수 있다.
나는 신중하게 버프를 가동하고 검을 들었다.
일단 일격에 죽일 수는 없다. 헬을 이용해볼 생각이라면 로키를 제압하는 선에 그쳐야한다.
자신을 죽이려는 데도 얌전할 정도면 눈앞에서 죽는 걸론 일이 꼬일 수 있겠지.
아무리 낯설더라도 위화감을 느낄 시간은 지났다. 로키가 가장 먼저 시간의 틈새로 끼어들려고 할 때쯤.
나는 시간 정지를 멈추었다.
검이 휘둘러진다. 다리를 베었다. 로키의 신발이 빛을 발한다.
검붉은 화마가 불타오르는 로키의 눈이 일순 나와 마주쳤다.
놀람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분노.
그리고 불길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바닥에 남은 것은 신이 흘린 피와 잘려나간 한쪽 다리.
완전히 베어낼 생각이었는데 신발 한 짝 밖에 빼앗지 못했군.
이상할 정도로 빠른 발동이었다. 시간 정지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나?
스스로 터득했을지도 모르겠다. 트릭스터 소리 들으려면 꼼수에는 통달해야지.
그리고 로키의 피는 펜리르의 혈액처럼 저주 그 자체인 상태였다.
생각해보면 추격 가능하게 흘리고 다니는 저주들은 로키의 피에 해당하는 물질일 터다.
그는 이미 많은 손상을 입었고 어쩌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로키가 사라지자 공중에 들렸던 헬이 바닥에 떨어졌다.
인형이 툭 떨어지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슬린 머리카락이 펄럭인다.
그리고 그녀는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보더니.
모습을 바꾸었다.
“일단 보스전인가? 좋아. 지옥의 여왕. 재밌는걸 보여주지.”
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흠, 뭐 역시 그런가.
헬은 특별히 놀라지 않았다. 시간이 잠깐 멈추어 있었나? 어떻게 했지?
꼭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의 아비 역시 하려고한다면 할 수 있다.
훨씬 더 자비 없이 깔끔했던 것을 보면 저 인간이 가진 어떤 보물이 제법 좋은 것이겠거니 싶다.
죽지 않으며 죽어도 다시 살아나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인 헬은 그런 것에 놀라지 않는다.
여왕으로서가 아니라 죽음으로서, 불경한 침입자를 맞이할 뿐이다.
손을 들어올렸다. 새하얗던 손은 쭈글쭈글하고 불에 그슬린 듯한 색이 된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도 하얗게 탈색된다.
소녀의 모습은 죽은 자들의 안식으로서 존재하는 만물의 종착점을 상징한다.
탄생과 순환.
반면 노파의 모습은 죽음 그 자체다.
누군가의 목숨을 직접 거두어야할 때 이렇게 된다.
운명이란 그녀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
헬은 주름진 손을 앞으로 내밀고 움켜쥐었다. 눈앞의 낯선 남자의 생명이 보인다.
남자는 검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생명을 붙잡는다.
그리고 움켜쥐었다. 하얗게 빛나는 생명의 불길이 꺼트려진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튕겨져 나갔다.
헬은 처음으로 얼굴에 당황을 띄웠다.
이건 누구지? 애시르 신족인가?
신은 그녀가 이런 식으로 죽일 수 없다.
그것들의 생명 역시 세상에 의해 그런 식으로 죽지 않도록 정해져있으니까.
다시 그 남자의 생명을 보려고 했다.
존재하고 있다.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존재는 아닌 것 같은데.
검이 날아든다. 낫을 구현해 붙잡는다.
그렇다면 직접 수확할 뿐이다.
그렇게 하려고한 순간 낫이 날아갔다. 그대로 배가 꿰뚫렸다.
헬은 아주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휴, 부활 스택 하나 썼네.”
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저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즉사 마법은 미궁에도 존재하지만 진짜 죽음의 신들이 구사하는 권능에 비하면 부족함이 있다.
그건 파훼 가능한 술식이다.
하지만 헬이나 하데스 같은 죽음 그 자체를 다루는 신들의 죽음은 직접 대응할 수 없다.
그래도 그런 죽음의 신들에게 즉사당한다면 그건 다음 회차를 의미하지 않는다.
권능에 의하여 묶여 그 세계의 저승에 존재하게 된다.
그 자체가 이미 기믹이다. 좀 불편해서 그렇지 한 목숨은 기본적으로 주는 거니까.
다시 죽으면 진짜 다음 회차로 사출되는 거지만 그렇게 즉사를 돌려 맞으며 버티는 식이다.
쓰러트린다면 저절로 산 자로 돌아온다.
내 경우에는 혼자라서 혼자 맞아야한다.
개전과 동시에 죽었지만 그 자리에서 즉시 부활했다.
스택을 반드시 하나는 가지고 다니는 이유다.
이런 식의 공격은 한번만 막으면 해결된다.
죽음을 기믹으로 다루는 대가로 자체적인 보스로서의 스펙은 좀 미묘하다.
심지어 부활 모션도 없이 스택만 하나 차감되고 끝난다.
마인드맵의 부활 스킬을 나타내는 열매가 깨져서 사라진다.
죽음의 신의 카운터는 당연히도 부활인 셈이지.
“다시 못 쓰게 좀 묶어야겠군.”
쓰러진 상태로는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눈만 잘 가리면 내게 죽음의 손길을 뻗을 수는 없다.
천사로서 가진 신성을 동원하며 눈가리개를 만든다. 내 생명력을 볼 수 없게 만들면 된다.
그리고 스스로 벗을 수도 없게 해야 하니까 묶어둬야겠군.
“다 해놓고 보니 어째 기분이 좀 이상한데.”
꼼짝도 못하게 묶어두고 눈도 가려서 침대 위에 얹어 두었다. 아주 범죄자가 된 기분이야.
“살리는 게 맞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천지창조를 혼자 할 수는 없지 않나.
제 영지를 가진 죽음의 신은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오딘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니 부활 스택도 하나 더 챙겨두고…….”
포인트를 항상 모아 둬야하는 이유지.
무슨 말로 꼬시지?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난 개 쩌는 존재인척을 할까?
혹은 죽어도 죽지 못하고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겠군.
정신 상태는 불안정해보였으니까 어떻게 잘 달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 안되면 찌르고 로키를 쫓으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