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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555화 (55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55화

심연 4402층 - 로키(3)

이딴 곳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다보면 억측의 적중률이 올라간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죽어서인지, 경험의 총체로서의 직관 덕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게이머로서 직관을 지지하는 편이다. 미궁은 불가능한 미션을 주지 않는다.

언뜻 불가능해 보인다면 당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헬은 이 상황에서 아군내지 중립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캐릭터일 확률이 높았다.

내게 지금 주어진 과제는 라그나로크를 승리로 이끌기, 그리고 미드가르드를 동그랗게 만들기다.

해와 달도 따로 만들어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가면 해도 해도 너무하니 제외한다.

달까진 어떻게 만들어도 항성을 만드는 건 좀…….

헬은 마침 전사계 보스는 아니다.

내구력이 약하며 기절 저항력도 낮다.

치명적이며 대처 불가능한 권능의 반대급부다.

그렇게 단 한방에 격침시키는 것까지가 딱 좋았다.

이제 어떻게 꼬셔볼까?

헬을 중립으로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한다.

뭐, 한두 번 죽어본 것도 아닐 테니 이런 폭력에 감정이 상할 녀석도 아니다.

최대한 내가 알던 메인던전의 헬, 그러니까 미래의 헬에 대해 떠올려본다.

이 죽음의 여신 역시 그렇게 되어야할 것이니.

“제길. 떠올릴게 없잖아.”

너무 과묵한 캐릭터였다.

그럼 남는 것은 조금 전에 알게 된 사실. 바깥에서 나돌던 무수한 추측.

헬이라는 보스가 어떤 삶을 살았을까에 대한 재구성이다.

나는 유배자스럽게 접근하기로 했다.

죽어도 죽지 못해 고통 받는 이들은 생각 외로 흔하다.

미궁에 적응한 자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만, 결국 그러지 못한 이들은 왕국에조차 도달하지 못하고 죽음을 바란다.

드문 일이 아닌 만큼 많이 보아왔다.

헬은 신이지만, 미궁의 신은 정말로 신적인 존재였던 적이 없다.

이해하기 조금 더 힘든 초인적인 무언가일 따름이다.

그래서 헬이 눈을 떴을 때, 나는 가장 먼저 허세를 부렸다.

마음을 꿰뚫는 능력? 그런 건 이 신에게는 없다.

“내가 인간인건 확인하셨을 테고. 지금 앞이 보이나”

“안 보이는군.”

그리고는 그대로 침묵한다.

몇 초 사이에 이걸 어쩌지 하고 고민하는데 다행스럽게도 현실이 된 미궁의 헬은 좀 더 말이 많았다.

“아버지를 쫓아왔나? 넌 에인헤랴르인가.”

“그건 아니지만 비슷하다고 해두자고. 난 내 편의를 위해 움직이니까.”

“건방진 발언이야.”

“하지만 죽이려 했는데도 죽지 않은 건 놀랐지?”

“…….”

유배자가 출현하지 않았던 세계다. 부활 스택? 마인드맵? 그런걸 알 리가 없다.

새삼 메인 던전의 보스들이 유배자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난관인지 알 것 같다.

이세계 깽판물에 이세계 서바이벌이 되는 셈이군.

헬은 이후 침묵했다.

넌지시 떠보자.

그 위대한 오딘마저도 어쩌지 못하고 있던 것이 이 세계에서 말해지는 운명이다.

헬이라는 캐릭터에게는 어떻게 와 닿고 있었을까?

“별로 전쟁을 바라진 않더군.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렇지?”

“…….”

“지금 이미 라그나로크가 일어난 것을 아나?”

“…….”

“로키가 말했겠지. 하지만 넌 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을 거야. 예언대로라면 지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흠,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케이스면 내게도 딱히 방법이 없다.

일단 저항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묶은 것은 풀어준다. 나를 보고 곧바로 죽이려고 든다면 곤란하겠지만 반응할 준비는 되어 있다.

헬은 누운 자세에서 일어나 가만히 앉았다.

손을 들어 눈을 가린 것을 풀려고 하자 내가 검을 들이대었다.

한숨을 내쉬더니 멈춘다.

“어차피 죽지 않는다면서 경계는 하는군.”

“손해가 없는 건 아니니까. 저승의 신을 다루려면 조심해야겠지.”

“그 원리를 설명해라.”

“무슨 원리?”

“지금 예언이 어긋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설명해라.”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로키의 면전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중이었을까?

“난 이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그거군. 그래서 할아버지가 전쟁을 일으켰나. 결코 승산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지. 아버지를, 아니 로키를 죽이려고 왔나.”

“맞아.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지.”

헬은 조금 더 침묵했다. 이번에는 진짜로 고민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얌전히 정보를 제공하기로 했다.

“어디까지 바꿀 수 있지? 네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저승을 거부할 정도는 되지.”

“목적은 뭐지? 운명을 뒤트는 것이 쉬울 리는 없는데.”

“여길 떠나려면 그렇게 해야 해. 내 목표가 아니거든.”

“방법은 있나? 라그나로크를 막는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어차피 신과 거인은 앙숙이야. 그 사이에 평화가 있다고는 믿을 수 없군.”

“분리할거다. 아예 분리해서 다른 곳으로 둬버리면 다툴 일도 없겠지.”

거기서는 저승의 신도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분리? 세계를 분리한다고?”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다. 증거를 보여라. 너는 내가 협력하길 바라는 것 같은데.”

쯧. 지금 뭔가 잘못 파악하고 있군.

하긴 불우한 운명이니 뭐니 해도 날 때부터 강대한 힘을 지니고 태어난 신의 일원이다.

겁박당하는 입장이라는 것에 익숙할 리가 없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난 반드시 너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야. 그냥 로키를 잡으려다가 꼬셔볼만한 것 같아서 찔러보는 것에 불과하지.”

“……?”

“난 시간이 많지 않아. 믿기 싫으면 믿지 말도록 해라. 어차피 라그나로크에 동참하게 둘 생각은 없어.”

깔끔하게 검을 들어올린다. 죽어도 다시 눈을 뜨겠지만 그 때까진 일을 다 끝낼 수 있을 거 같다.

선제 라그나로크는 해야 할 전쟁의 시간을 극적으로 줄여줬으니까.

“이해가 필요하다면 더 볼일은 없어. 내가 모든 증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 편리하길 원하는군.”

검을 베려고 했다. 헬은 의연하게 잠깐의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것 같았지만.

“으읏.”

한순간 움츠러든다. 죽음에 무디다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인간적이며 겁에 질린 반응이었다.

조금 악당같이 가볼까.

“계집아이 같은 비명이군. 저승의 신답지는 않아. 죽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다시 되살아날 것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죽어보지 않은 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억눌린 목소리였다. 그리고 많이 들어본 종류의 감정이었다.

유배자들은 모두 저 과정을 거친다.

죽지 않을 수 없기에 어디 한구석에서 생존의 본능을 내다버리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필요에 따라 택한다면 중증이라고 볼수 있다.

나는 중증 중에서도 중증이다.

부활 스택 역시 죽음이라는 의미에서는 다음 회차로 사출 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으니까.

틈을 찾은 것 같다.

확실히 지금의 헬은 미래의 헬과는 다르다.

더 미숙하고 연약하다는 느낌.

죽음을 두려워하는 저승의 신이라니.

뭘 당한거지?

“많이 죽어본 것처럼 말하네.”

“셀 수 없이 많이 죽었다. 나와 오빠가 세상의 종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아는 신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였는지 아느냐.”

“그럼 로키의 분노도 참으로 정당해 보이는데.”

“나도 그 분노에 동조한다. 하지만 그 분노의 결과도 알고 있을 뿐이다.”

이번엔 감정이 드러나고 있다. 상대의 감정이 움직이고 있다면 절반 이상의 성공이다.

헬은 이런 캐릭터가 아니다. 아마 앞으로 보낼 세월이 지금껏 보낸 세월보다 길 것이다. 그렇게 저승의 여왕이 담금질 되겠지.

지금 눈앞의 이것은 아직 공주에 불과하다.

오딘은 이걸 알고 여기 두었을까?

아는 캐릭터의 프리퀄을 보는 것 또한 재밌는 일이군.

“우리 가족은 세상을 멸망시키겠지. 그 후에야 나는 자유로워진다. 그 전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이 사실을 알고 싶진 않았어…….”

재미있는 발언이야.

“몇 번 죽었지?”

“셀 수도 없이 많이.”

“그렇게 말고. 한 번 세어봐.”

“무슨 의미를 찾는 거지?”

“내가 죽어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헬은 유배자로서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제 목숨마저 도구로 삼게 되고 마는 망가진 인간들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

“열 번은 죽었겠지? 하지만 백번은? 천 번은? 정말로 그 이상을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나?”

“죽음은 본디 한 번 뿐인 것이다…….”

“평범한 이에게는 그렇지. 나는 평범하지 않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많은 이들이 네가 모르는 곳에 존재한다. 어리석은 공주.”

슬슬 목소리 좀 깔고 감정을 채워본다. 죽음을 받아들여야할 때의 그 공포를 되새긴다.

많은 유배자들에게 정신에 간섭하는 어둠 원소가 약점이나 다름없는 것은 너무 많은 죽음을 겪고, 그로 인해 잃었기 때문이다.

“죽어도 다른 세계로 가지 않아. 그 자리에서 조금 후에 부활할 뿐이지. 운명에 의해 징징대며 그 자리에서 묶였다고 울며 그걸 타파하려고는 하고 있지 않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무언가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감정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내가 그랬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송세월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헬은 생각을 했고, 제 오빠들처럼 되지는 않았다.

그녀의 몸에 저주가 되어버린 신성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뿐이다.

“네가 죽음을 안다고 생각하나? 죽음은 상실이다. 그 후에 잃는 모든 것이 그 죽음의 의미를 구성한다. 되살아나지 못함. 돌이킬 수 없음. 그것이 죽음이다.”

형편 좋게 저승씩이나 마련되어서 현세와 소통할 수 있는 세계의 죽음에 얼마나 무거운 의미가 있는가?

같은 세계에 소속되어 있다는 그 소속감이 얼마나 큰 안심감을 주는가.

누군가들은 어디에서 자신이 진짜인지에도 번민하며 가짜일지도 모르는 과거를 그리워한다.

다시는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그 추억에 몸부림치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마저 두려워하게 된다.

“아버지를 바로잡으려고 해보았나? 형제들을 되돌리려고 해보았나? 이렇게 피마저 저주가 되어 질질 흘리고 다니는 네 아비를 보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나?”

헬은 반박하기 시작했다.

“했다! 노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어떤 식으로 신성이 타락하는지 원인을 조사해보았나? 그것에서 법칙을 찾으려고 해보았나? 너에게는 힘도 시간도 너무나도 많았을 텐데.”

“그런 게 있다고? 오딘도 모르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할 수 있냐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 해본 다음에나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리고 실제로 운명은 마법의 일부다. 아직 규명되지 않았을 뿐 세상의 흐름은 마법의 원리 위에 있다. 적어도 이 미궁은!”

말하다보니 진짜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 말은 어느새 폭언이 되었다.

난데없이 낯선 세상에서 수없는 죽음을 반복해야한다.

그것에 비하면 북유럽 신화의 비극은 차라리 행복이다. 너희들은 적어도 신이라는 자리를 보장받지 않는가.

미드가르드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며 살아가는 에길과 스칼라그림손은 무엇이 되는 거지?

신화적인 운명론은 언제나 현대인에게는 이질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문화니 존중한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시간여행의 앞뒤를 맞추기 위해 사리는 것도 이상해보일 테니.

하지만 이 녀석은 생각보다 멋진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울며 비극의 히로인이 되고 싶은 공주일 뿐이다.

오딘은 이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저승을 주었구나. 거기에 정을 붙여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게 하기 위해서다.

그가 본 수많은 가능성 중 가장 나은 게 이거라니. 끔찍한 일이긴 하다.

헬은 전쟁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바꿀 생각이 없다.

퍼질러 앉아 울기만 한다.

내 스스로의 멘탈마저 상하기 시작함을 느낀다.

멘탈을 잘 추슬러야 하니까 그냥 지금 죽여야겠다.

“여왕이 되려면 멀었구나. 공주. 그냥 그렇게 자고 있어라.”

찌르려고 했다.

내 팔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저승의 신이 말했다.

“알겠어……. 미안해……. 시키는 대로 할게.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해야…….”

그 다음 말은 조금 슬펐다.

“죽어 사라질 수 있을까? 세상을 그대로 둘 수 있을까? 파괴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헬은 울고 있었다. 눈물이 펑펑 흘러 눈가리개가 젖어있다.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라그나로크가 싫어. 내 백성들이 좋아. 죽은 자들의 도시에 평화를 줘. 제발 세상의 파멸을 막아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지.

생각해보니까 소극적이고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는 것은 내 맘대로 휘두르기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휴, 순간 화나서 실수할 뻔 했네.

“흠,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럼 같이 라그나로크를 흐지부지하게 만들어보자고.”

머리가 식으니 드는 생각.

아, 그래서 저승이 니플헤임으로 멀쩡하게 이주해있었구나.

혹시 그것도 내가 해주는 건가?

어지럽네.

그래서 헬의 침소에 털썩 주저앉았다. 침대에서 울고 있는 꼬맹이라, 기분이 참 이상한데.

희우도 처음에는 요만했지. 이거보단 컸나?

아, 희우보고 싶다.

그때 헬이 갑자기 옷을 잡아당겼다.

반사적으로 경계했으나 전혀 다른 동작이었다.

“어어어? 야! 남의 옷에 코 풀지 마!”

크으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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