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556화 (55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56화

심연 4402층 - 로키(4)

도주, 기만, 협잡, 사기, 뒤통수 갈기기.

모두 로키라는 신의 주특기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남이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할지도 알고 있다.

로키는 자신에 딸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예언이 날 속였나?”

의심해 볼 법한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달려든 인간.

우선은 도주했다.

딸이 쉬이 자신의 편을 들 거라는 안이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추적자가 붙었다면 무조건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어떻게? 라는 생각은 빠르게 구석으로 집어넣었다.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마법의 신발 한쪽을 잃었다.

앞으로의 도주에 지장이 생기게 된다.

“흠, 인간. 인간이 아닌가? 힘은 인간이 아니군.”

상대를 가지고 놀려면 그 힘부터 파악해야 한다. 로키의 눈썰미는 무수한 강자들을 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는 순간 깨달았다.

적어도 토르급이다.

정면에서 그가 상대한다?

* * *

* * *

* * *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럴 이유는 없다. 정말로 전혀 없다.

“애시르 신족은 아니었어.”

그런 신성이 아니다. 무언가 다른 기이한 형태의 힘이다.

“그렇다고 거인도 아니지.”

로키는 거인 태생이다. 애시르 신족의 일원으로서 자각하고 있을 뿐, 본래 이쪽 신은 아니다.

“어렵군. 어려워.”

세상이 또 그에게 어떤 시련을 주려고 하는가. 그 빌어먹을 예언으로 풍비박산을 낸 후면 충분하지 않은가.

원한이 끓어오른다.

“안 되지. 안 돼.”

자신의 몸인 만큼 알고 있다. 그가 신으로서 지니던 힘은 어딘가 변질되었다. 별일이 없다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복수를 한 후라면 아무 미련 없이 떠나리라. 그 죽음이 딸의 저승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도 이미 깨닫고 있다.

“오딘……. 그리고 토르. 그 둘만큼은……. 죽인다.”

그 첫발자국은 역시 예언의 일부를 실행하는 것일 터였다.

이미 무언가 꼬이기 시작했다.

로키는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를 건너는 것이 거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안다.

“예언은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것은 운명대로…….”

그렇기에 불리한 예언은 막아야 한다. 라그나로크가 끝나고 모든 신들이 죽지만 그 후에 다시 인간들이 번성한다?

로키는 그것조차 싫었다.

그의 삶. 그의 가족의 삶.

그 모든 것을 희생하여 만들어진 평화다.

차라리 부숴 버리고 싶은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초인. 그 초인이 될 인간. 그런가. 라그나로크의 마지막에 나타난다는 그것인가.”

예언이란 자주 모호하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뿐인 경우도 많다.

그 어떤 지혜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읽어낼 수는 없다.

라그나로크의 끝에 모든 신들이 쓰러진 후 그 세계를 이끌 초인이라는 존재.

신이 아니라 초인이다.

인간 중에 있다.

그 단서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가.

“일단 죽여야겠군.”

로키는 한쪽 발을 잃은 채로 터덜터덜 걸었다.

흘러내린 피는 검붉은 불티를 일으키며 서서히 증발해 사라졌다.

신이 타락한다면 그것은 악신이리라.

미숙한 신을 다루는 법이라면 제법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신좌에서 미숙했던 신을 다루어야 했던 적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신화를 기반으로 한 메인 던전 테마는 제법 많다.

그 경우에는 진짜 태생 신의 미숙함을 커버 쳐야 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푸라나]가 악질이다. 힌두교는 신이 너무 많다.

그 세계에는 신좌도 너무 많다.

그냥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왕국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 끝에 망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고난이도 테마지.

그런 와중 헬이 조금 미숙한 저승의 신인 것은 아주 귀여운 일이다.

빠르게 진정시키고 정확한 상황을 파악한다.

내가 알던 헬의 영지는 제법 안정된 곳이었다.

그곳의 사망자들은 헬의 뜻에 진정으로 복종하고 있는 그런 전사기도 했다.

그래서 유배자를 공격한다는 게 사소한 문제긴 하지만, 아무튼 헬은 카리스마 여왕님이셨단 말이지.

차곡차곡 정리되어 가는 생각.

아무래도 그걸 만든 게 나다.

제일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저 신발 한 짝만 있으면 얼마나 이동할 수 있지?”

“한 켤레가 충분히 가까이 있지 않다면 작동 안 해.”

“오호.”

그럼 로키의 기동력은 사라진 거나 다름없다. 시간이 좀 있겠군.

추측하건대 로키는 원래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러 서두를 것이다.

“라그나로크 끝에 나타나는 두 명의 초인에 관한 이야기가 예언에 있어?”

“있다.”

라그나로크는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적으로 끝을 맞이하는 신화다.

그 마지막에 다시 세상을 이끌 것이란 위대한 존재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아마 에길이 그중 한 명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난가?

혹시 미궁에 도착하기 직전에 목을 베고 쓰러졌다는 용이 니드호그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진짜 신화적인 위업 달성인데.

“그렇군. 시간이 많지는 않아. 날 믿기로 했다면 해줘야 할 일이 있어.”

“…….”

헬이 갑자기 묵묵부답이다.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봤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하지만……. 이유는 설명해주길 바란다.”

“그 정도는 하지.”

“그거면 좋다.”

헬이 경청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녀가 영지를 어떻게 운영하는지를 확인한다.

저승이라는 것은 미궁 내에 속하는 작은 세계 곳곳에 생각보다 흔히 존재하는 것이다.

왕국에는 없다.

하지만 심연이 그 일부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며 메인 던전에 준할 만큼 거대한 홀수 층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정말 드물게 각 서버에도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경우에 저승은 신들 간의 합의로 만들어진 영혼의 보관소 같은 시스템이다.

그런 환경의 세계에는 환생이 실존한다!

유배자에겐 꽤나 찝찝미지근한 시스템이긴 하지만 말이야.

“흠, 그 부분은 효율적이지 못하군. 잠깐만, 이거 혹시 직접하고 있어?”

내가 너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나? 헬이 조금 주눅이 들었다.

“음……. 죽어서는 좀 좋은 집에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취지는 좋다 이거야. 하지만 저승의 주인이자 죽음이 신이 그렇게 직접 나서면 어떡해.”

“하지만 그런 통나무는 여기서 구할 수 없다. 요툰헤임으로 올라가야 하고 그건 나만 할 수 있다.”

“부하 없어?”

헬이 급격하게 시무룩해졌다.

아니, 대체 왜?

“……가름?”

“그것뿐이야?”

“응…….”

가름은 이 동네 케로베로스다. 지옥의 파수견. 헬의 애완동물.

생각해 보니 몰래 들어올 때 개꿀잠 자고 있던 개과 동물이 하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동네 똥개 같아서 차마 지옥의 파수견이라곤 생각 못 했던 것 같다.

“후우우우. 그럼 이 궁전은 직접 지었어?”

헬의 궁전 엘류드니르.

아주 크고 아주 웅장하다.

“모양은 죽은 사람들 도움을 좀 받았다. 그들이 짓는 것도 도와줬어.”

“왜 지었어?”

이제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위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스스로도 지금 자신이 없지? 위엄이 있다고 생각해?”

“……없어.”

조금 더 탐문을 해보니 헬이 인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드가르드에서 살다 온 망자들도 있고 이미 죽은 애시르 신족이나 거인들도 몇 있다.

거인과 신족의 혈통을 모두 가진 헬을 존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따르고 있지도 않다.

이곳의 주인으로서 존중할 뿐이다.

오히려 헬은 너무 쉽게 부탁을 들어주고 있다. 귀여움받는 느낌마저 있다.

“생각해 보니까 그 녀석들은 이미 죽었으니 죽음이 두렵지가 않겠구나.”

너무 큰 맹점이었다. 헬도 고개를 끄덕인다.

“……못 이길지도.”

흠, 이거 좀 심각하군.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아무리 그래도 재앙으로 태어난 존재다.

거기에 부여받은 권한도 강력하다. 저승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지워 버린다면 문자 그대로의 즉사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빼더라도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다.

레벨 3천 초과가 뉘집 개 이름은 아니다.

내가 강했을 뿐이며 기습이 먹혔을 따름이다.

평범하게 박투를 벌이더라도 이 세계 최상위권에 속하는 강자가 눈앞의 이 소녀이자 노파다.

그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 자체가 정말 세상을 잘 모르며 자신의 힘도 잘 모른다는 뜻이다.

“너 바보지?”

“……아니다.”

처음부터 교육해야겠다. 하데스가 보면 자신과 동일한 지위에서 이러고 있다는 것에 피가 거꾸로 솟을지도 모른다.

“좋아. 그럼 일단 이렇게 생긴 애들을 찾아봐.”

“왜?”

“부하로 삼아야 하니까.”

강글로트와 강글라티.

다행스럽게도 [요툰헤임]에서 본 적이 있어 인상착의를 안다.

그들은 신화에서도 미궁에서도 헬의 충실한 하인이다.

아직은 없는 것 같으니까 죽은 자들 중에 있을 것이다.

이게 모집한 거였다니.

신화란 건 자주 재밌군.

“난 다른 용무가 있으니 좀 갔다가 오도록 하지. 해낼 수 있지?”

“……해볼게.”

카리스마라고는 병아리 눈곱만큼도 안 느껴지는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온다.

“어허, 목소리 더 크게!”

움찔하더니 끄덕인다.

“할게!”

좋아. 후딱 우리 바이킹 친구들을 아발론에 옮겨놓자.

암만 로키여도 거길 찾아낼 방법만큼은 없을 거다.

미아는 만만하게 설계하지 않았고, 아서의 시공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단 신발을 일은 로키보다는 내가 훨씬 빠를 것이다. 로키는 잉글랜드를 직접 가 본 적도 없을 것이니까.

신탁이나 계시로 보는 것과 직접 가는 건 좀 다르다고.

에길을 지켜야 한다.

스칼라그림은 자신이 처한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이었다.

겨울이 정말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라그나르가 기어코 여기까지 추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피로함.

새 이웃들이 그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있다는 불편함.

어떤 신화적인 사태가 현실이 되어 그와 그의 동료, 그리고 가족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없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는 광인이다.

그런 가운데 음유시인이 말했다.

“스칼라그림. 그대는 신을 믿소?”

“토르께서 언제나 우리를 가호하시겠지. 늘 믿고 있다네.”

“그렇게 말고 말이야.”

“흠, 똑똑한 척하는 이런 전사들이 제기하곤 하는 그런 의문 말인가?”

그럴 때가 있다.

아주 진지하고 집요하게 신의 실재에 대해 물어보는 아이들.

어려서 그렇겠거니 하며 넘기는 것도 어른의 덕목이다.

음유시인의 농담이겠거니 생각했으나 상대는 사뭇 진지했다.

“농담을 하려는 건 아닌 듯하군.”

“꽤 중요한 이야기지. 라그나르는 딱히 당신에게 유감이 없을지도 모르겠어.”

“다 죽을 뻔 했는데?”

큰 도움이 되어준 이기에 참아본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재앙이 오고 있으니까요.”

“흠, 뭐 추격자라도 도착할 예정인가?”

“그렇죠. 로키 좋아하십니까.”

“재밌는 신이지.”

딱 그 정도의 인식이었다. 로키에게 기도를 하는 것은 아녀자들의 일이다.

가정의 평화를 빌고 불의 수호를 바란다.

“신이랑 싸우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시오?”

“흠, 못 이기지 않을까?”

“전사인데도?”

“그렇게 말하면 이긴다고 말해야겠지. 토르 그거 망치 좀 잘 쓰는 전사 아닌가.”

스칼라그림은 이 농담의 진의가 궁금했다.

그래서 음유시인을 빤히 바라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재밌는 걸 보게 되겠군요.”

스칼라그림은 정말로 이 음유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실없는 농담을 하는 이로 보이진 않았으나 가끔은 그럴 수도 있다.

세상 누구나 간혹 이상해질 수 있지.

스칼라그림은 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날을 보냈다.

신경 쓸 다른 일이 많았다.

하늘에 갑자기 무지개가 뜬 것도 그랬다. 그건 해가 뉘엿뉘엿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 스칼라그림은 자신의 아들을 보았다. 음유시인이 바짝 붙어 다니며 이것저것 가르치고 있었다.

몇 살은 위로 보이는 강건한 체격의 에길은 저번 사냥으로 인정받은 후 완전히 한 명의 전사가 되었다.

전사란 원래 주변의 인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에길은 앞서 나가지 않고 겸손하게 어른들에게 기술을 배우고자 했으며 잡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음유시인과 몇몇 사냥꾼들과 함께 조금 먼 곳까지 사냥을 갔다 온다. 그 준비가 한참이었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것은 몸만이 아니다.

스칼라그림은 대머리가 된지 오래인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 저주가 자식에게는 가지 않기를.

풍성한 모발 역시 전사의 자존심이다. 수염뿐인 것보다는 머리도 있는 것이 좋다.

아들을 배웅하고, 그렇게 또 하나의 날이 저물어간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다.

잉글랜드의 따스함이 조금씩 그가 알던 고향의 겨울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스칼라그림은 집으로 돌아왔고 아내가 홀로 있음을 보았다.

사랑을 표하는 것을 아낄 이유는 없다. 스칼라그림은 그런 사내다.

그리고 그는 아내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다가갔다.

푹.

배를 찔렸다.

“당신……. 무슨?”

그리고 아내가 아님을 깨닫는다. 이것은 변장한 무언가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낮의 대화.

“로키……?”

무언가 울긋불긋한 기운이 번져 나가며 아내의 모습이 변한다.

기이하게 뒤틀린 신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를 찌른 단검을 뽑아서 한 번 더 찌르려고 했다.

물론 그전에 의구심을 짧게 표한다.

“어떻게 아는 거지? 요즘은 정말 모르겠어. 너무 오래 갇혀 있어서 녹슬었나.”

검붉은 기운이 단검에 깃든다. 스칼라그림은 저것에 맞았다가는 반드시 죽는다고 느꼈다.

전사로서의 본능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로키는 한순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그대로 떠밀려서 굴렀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굴러? 평범한 인간 따위에게?

롱하우스에 불길이 번진다. 그 위험한 인간이 지금 근방에 없음을 안다. 모두 죽이고 떠날 것이다.

“참으로 녹슬었군.”

그리고 로키는 검붉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스칼라그림의 뒤에 나타난 그는 좀 더 확실하게 힘을 담아 이 인간을 처리하려고 했다.

매서울 필요조차 없는 근거리였다. 그냥 찌르면 된다. 그뿐이다.

로키는 팔목을 붙잡혔다.

“으음?”

느껴지는 악력은 토르와도 같았다.

로키는 정말 오랜만에 분노가 아닌 당황을 느꼈다.

그 직후 시야를 가리는 바위가 출현했다.

그것이 제 얼굴을 강타하는 순간 바위가 아니라 주먹이란 것을 깨닫는다.

신에게 인간의 주먹질은 타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멀리멀리, 아예 불타기 시작한 롱 하우스의 벽을 뚫고 날아가 처박혔다.

끔찍한 굴욕이 로키의 마음에 새겨졌다.

나는 일이 일어난 즉시 그 사실을 느꼈다. 로키가 노리는 것은 에길이었으니 고의적으로 정착지와는 거리를 두고 있던 참이었다.

로키의 변장 역시 이 세계 고유의 어떤 기믹에 가까울 것이다.

내가 그걸 구분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항상 곁에 있는 것이 최선이다.

“에길이 아니라고?”

“네?”

어린 에길이 놀란다.

“잠시만 여기 그대로 있어라.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날개를 펴진 않았다. 그대로 숲 그림자에 모습을 숨기고 공간을 열었다.

제기랄, 그냥 힘으로 아발론에 다 집어넣을 걸 그랬나.

자연스럽게 유도할 생각이었는데.

공간의 세 번쯤 열어젖히자 로키가 보였다.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있었다.

“어?”

장난감처럼 날아서 굴러온 로키가 내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기가 막힌데?”

발검은 보이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미카엘의 검은 소리 없이 신의 몸을 갈랐고 로키는 그대로…….

불길이 되어 스러졌다.

서둘러 마력을 끌어올린다. 사방에 탐색을 깔고 뒤틀린 신성의 흔적을 찾아낸다.

“이런 제기랄. 지맥을 타고 도망치는 수도 있나.”

마력이 쓸데없이 풍부한 세계다. 바로 그래서 마법이 발달하지 못했나 생각을 했는데…….

“제 몸을 원소화할 수 있다니. 이 자식 너무 훌륭한 마법사잖아.”

마법사로서 로키의 평가를 세 단계쯤 상향 조정한다.

지맥을 타고 도망치는 것은 추적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마력이 풍부한 세계라면 더더욱 그렇다.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칼라그림에게 다가갔다. 치명상이라도 입었을까 걱정했으나 신성의 독기를 제외하면 너무 멀쩡하다.

“후우, 후우. 오르골 에길슨. 자네는 누군가? 자네는 대체 뭐지? 이 일을 알고 있었나? 네가 말한 재밌는 게 이거였나?”

얼마나 멀쩡한지 나를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힘 엄청 세네.

전사로서 로키의 평가는 세 단계쯤 하향 조정했다.

아닌가? 스칼라그림이 지나칠 정도로 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에길의 유전자가 여기서 온 게 확실하군.

스칼라그림은 찔린 상처의 독기만 제거해 주자 완전히 건강해졌다.

나는 설명을 해야 했다.

“여길 떠나야 합니다.”

“그건 정말로 로키인가?”

“후, 계시를 받았다고 해두죠. 제가 왜 당신들과 만났겠습니까. 오딘께서 의도하신 일입니다.”

“맙소사.”

뻥은 아니야. 오딘도 이걸 바랄 테니.

한 가지 문제는 있었다.

“오, 세상에.”

“제길. 제 탓입니다. 더 빨리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 이해하네. 겪지 않고는 믿지 못할 이야기였으니.”

스칼라그림의 아내, 그리고 에길의 어머니는 살아 있지 못했다.

끔찍한 최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소리 없이, 흔적 없이.

그냥 그렇게 떠난 모양이었다.

숲의 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로키는 들키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우길 원했을 뿐인 모양이었다.

“그녀 또한 전사였지. 마지막이 명예롭지 못했군.”

발할라가 막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닌데. 물론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스칼라그림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신을 죽일 방법이 있겠나?”

박력만으로 레벨 5천 초과의 치천사인 내 몸이 반응한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달렸다. 분노한 드라간도 이 정도의 박력이었지.

그런 강렬한 불길이 그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진정하세요. 스칼라그림. 물론 저는 당신의 복수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저승의 지배자와도 아는 사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우선 아내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세요.”

“……?”

“그래야 아무도 모르게 다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실수한 거니 책임은 져야지.

헬의 저승은 굉장히 체계 없이 굴러가고 있다. 행정이 만들어지기 전이라면 영혼 하나 정도 횡령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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