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562화 (56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562화

심연 4402층 - 대머리 그림(1)

가까운 시일 내 다시 부활할 것을 암시하듯 요르문간드의 혀는 뜨겁고 축축하다.

그리고 독기와 저주로 가득하다.

눅진하게 썩어들어 가는 죽음의 향기가 난다.

“어우, 입 냄새.”

맥은 뛰고 있다. 그러나 상태가 좋진 않아 보인다. 요르문간드를 죽여 버리진 못했다.

그래도 활동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힌 것은 확실하다.

번쩍번쩍하고 있는 미카엘의 무명검……. 혹은 미카엘 그 자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뽑아 들었다.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겠지. 그렇다면 진작 그랬을 테니.

“설명이 필요한데. 대체 왜 거기서 네가 나오는 거지?”

[나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언제부터 의식이 있었지?”

[네가 이 검에 모든 것을 모아들이기 시작할 때쯤이다.]

그렇다면 각성하는 데 어마어마한 수준의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미궁에는 자아를 가진 장비들이 꽤나 존재한다.

대부분은 저주받은 뭐시기들이지만 때때로는 선한 영혼들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미카엘이라면 선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나?

* * *

* * *

노골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지만 미카엘로부터 별다른 낌새는 없다. 적어도 내 마음을 읽는 식은 아닌 모양이다.

“좋아.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직설적으로 하자고. 우리 협상하던 때처럼 말이야.”

진짜 시간이 없다. 여길 나가서 또 로키를 쫓아야 한다.

로키의 도주 능력을 볼 때, 내가 아니면 그를 잡을 수 있는 신은 없다.

그러니까 예언이 그렇게 성공적인 신들의 몰살이었겠지.

미카엘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빛은 아직 살아 있는데? 이런 기능은 내가 혼자 찾아내진 못했다. 아마 미카엘의 권능 그 자체와 결부되어 있겠지.

그럼 갑자기 전원이 나간 것도 아닌데.

흔들흔들하다가 독기에 더러워진 것을 보고 닦기 시작했다.

전부 닦아가니 미카엘이 말했다.

[생각을 좀 해보았다. 유배자.]

“무슨 생각?”

[나는 그 메인 던전의 보스였고 그곳에 고정된 자였지. 혹시 내가 죽고 나서 보스킬 메시지가 나타났나?]

그렇지 않았다.

깨어 있던 제니도 그런 현상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카엘은 더 이상 보스가 아닌, 어쩌면 인간으로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했었는데.

[그 추측을 긍정한다. 더 정확히는 그 시점에 이미 나는 메인 던전의 보스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여기 들어가 있게 되는 건데?”

[내가 이미 내 본연의 모습을 상실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나.]

“그럴 거라고 추측은 했지. 실제로 마지막까지 인간형으로 싸우며 페이즈가 안 넘어간 데다가 네 입으로도 말하니까 확신했고.”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없지만, 검을 쥐고 있는 나는 그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난 내 본질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다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껍데기에 너무 정착해 버린 거겠지.]

“검술에 너무 심취하셨다?”

[무언가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 또한 나를 보지 않는가.]

“인간이 되었군.”

[마지막의 순간엔 그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왜 지금 검에 깃들어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이 된 것은 마지막 순간일 뿐이야. 심지어 그러고 죽었지. 껍데기도 남기지 못했다. 그건 이미 나 자신이었으니까.]

미카엘이 부르르 떤다. 칼이 진동하는 건 언제나 어색한 일이다.

[그럼 내가 이렇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나는 유배자의 방식을 알고자 무수한 노력을 했지만 닿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뿐이다.]

“검술이란 건가.”

[그래.]

검의 빛이 깜빡인다. 이건 미카엘의 감정에 기반한 것인가?

[사실은 그때 죽은 게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내 본질을 잃고 인간형의 껍데기 속에 융합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검이 어디서 왔는지 문득 깨달았다.]

“어디서 왔는데?”

[그 던전 바깥, 그 왕국 바깥이다.]

“유배자의 물건이었나 보군.”

조금씩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 돌이켜보면 미카엘은 단 한 순간도 몸에서 검을 떼놓은 적은 없었다.

[이 검을 쓰던 오크가 내 검술 스승이었다. 죽은 후에는 내가 사용했지.]

“의미부여를 한 거야? 바벨의 자식이?”

[솔직히 잘 모른다. 그냥 그러다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뭘 하고 싶은지?”

[그래. 바벨의 자식처럼 살 생각은 이미 없었으니까.]

뭔지 알겠다.

정말로 감상적인 기분으로 검을 거두었다기보다는 누군가를 추억하는 유배자들을 흉내 내어보았다는 뜻이군.

형태가 먼저 생기고 만들어지는 감상도 존재한다.

미카엘은 그랬는가?

[솔직히 그렇진 않았다. 난 언젠가부터는 이 검의 원주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거의 잊고 있었다고 하는 게 맞겠군.]

“그러나 검술이라는 것 자체에는 한없이 진심이었고 열심이었겠군.”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것이 그거였으니 아주 진심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본인도 긴가민가하지만, 그것이 너무 긴 세월 이어진다면.

수만 년이라는 세월은 현실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그리고 마법적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다.

“한 가지 질문. 항상 이 검만 썼어?”

[그래.]

“왜 안 부서졌어?”

[보호했으니까. 실제로 이 무기로 적을 벤 적은 거의 없을 거다.]

“그 보호라는 건 권능이었겠군.”

이 검의 재질이 이상한 이유를 알겠다.

정체불명인 이유도 알겠다.

미카엘은 인간형 껍데기에 깃든 게 아니다.

바벨의 자식은 언제나 자신의 권능을 이 검에 쏟았고, 의미도 부여했다.

그렇게 수만 년이 지났다.

미카엘은 검이 되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네.”

[그런 것 같다.]

나는 이 결과 자체는 본 적이 있다. 원래 에고 소드라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적극적으로 그리하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연히 이렇게 되는 일은 본 적이 없다.

“흠, 운명적인 세계관에 들어와 있어서 그런가. 아주 운명적이군.”

[그건 무슨 소리지?]

오케이. 미카엘은 이 세계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확인.

의심하기엔 너무 자연스럽다. 이건 천상의 군주 본인의 호기심이다.

사실은 깨어난 지 좀 더 오래되었는데 입 다물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로키가 무슨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마저도 고려하고 있었다.

아닌 듯하다.

아무래도 본인도 맞고, 아니, 그 이제 본검인가?

하여간 문제없다.

“혹시 원하는 게 있어?”

미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루어졌다.]

“과연.”

그 순간 검의 이름이 바뀌었다.

[어느 천사의 검]

이 검은 내가 임의로 미카엘의 무명검 같은 식으로 부르고 있긴 하지만 메시지가 알려준 정확한 이름 있었다.

이름이 뜨기에, 단지 아티팩트가 된 증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기존의 이름이 떠오르고, 거기에 덧칠되듯이 새로운 이름이 떠오른다.

[미카엘מיכאל]

그렇겠지.

“그저 미카엘. 어떤 수식도 없음이라.”

미카엘이 마지막 페이즈 때 했던 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 천사는 메인 던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로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펜리르가 쓰러져 있다.

그리고 곧이어 위쪽에서 그의 둘째인 세계의 뱀이 떨어졌다.

떨어져?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던가.

미드가르드의 귀퉁이가 무너지긴 했지만 명백하게 상대의 의도다. 세상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아작을 내야 하는데 좀 흔들리고 마는 게 무슨 멸망인가.

그리고 빛이 떠올랐다.

큰 뱀과 수없이 싸우고 결국 쓰러뜨렸다.

요르문간드는 입을 닫고 침묵한 채 저 멀리, 무저갱의 귀퉁이까지 날아가 침몰해버렸다.

세상의 멸망을 기도해야 할 것들이 멀쩡한 것이 없다.

라그나로크가 일어났음에도 세상을 삼켜야 할 재앙들은 침묵하고 있다.

“예언이……. 대체 예언은 어디로 간 거지?”

처음에는 거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신들이 일부러 그를 멸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간의 모든 예언은 가차 없이 이루어졌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로키는 어느 순간 결심했다.

그렇다면 그 예언이 되어주자.

내가 예언이 되겠다.

라그나로크가 되겠다.

아스가르드의 파멸이 되고 말겠다고.

그렇게 체념하고 목숨마저 내버렸건만, 이제 와서 예언이 틀어진다고?

“그럴 수는 없다. 그것만은 안 된다. 그럼 나는 대체 왜. 지금까지 무엇을…….”

어둠이 짙어진다. 저주가 된 신성이 더 짙게 타오른다.

로키의 마음속의 불길이 커지는 것에 비례해 머리는 차갑게 식어간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목숨을 내버려 무수한 자신을 만들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신들의 무기에 수작을 부렸다.

어떻게 하더라도 그 모든 보물은 그의 손으로 돌아오게 된다.

무기 없이 거인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오딘에 의해 유폐되었음에도 해낸 것들이다.

어떻게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지?

대체 내가 무엇을 못 한 거지?

팔이 떨린다.

몸이 떨린다.

예언은 어째서 아무것도 그의 뜻대로 해주지 않는가.

세상은 그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가.

“크크크크. 흐흐흐. 크흐흐흐. 흐크크크.”

로키는 실성한 듯이 웃었다.

운명조차 그럴 져버리는가?

그렇게 두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도 머리는 회전한다.

싸워서 이길 수 없다.

요르문간드를 정면에 쳐서 무너뜨렸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로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예언의 주인공들을 어떻게든 막는 것이다.

정면 승부가 되지 않으면 이후에 도래할 초인이나 다른 신들이라도 죽이자.

저 남자는 몸이 하나다.

그렇다면 문제없다.

로키는 하나가 아니다.

펜리르의 곁에 있는 로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라고 생각을 하겠지.

로키의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판단력은 흐려졌으나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그 속에서 본능적으로 답을 찾아낼 것이다.

그걸 한 번 더 비틀어낸다?

그러긴 힘들다.

사실 비틀 방법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럼 로키는 높은 확률로 스칼라그림을 노릴 것이며, 신들을 노릴 것이다.

하지만 에길네 가족은 아발론 속에 넣어뒀거든.

로키가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한 지금, 완전히 끝낼 필요가 있다.

“요르문간드 찌를 때, 도와준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내 권능을 사용하고 있더군. 그러면서 어설펐어.]

“아니, 쓰는 줄 몰랐으니까. 당연하지.”

미카엘이 깨어나며 그가 보스로서 가지고 있던 권능이 되살아났던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평범한 보스무기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원래 미카엘의 전리품은 이런 게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나도 광속을 낼 수 있나?”

[아까 하는 걸 보니 네가 그랬다간 죽는다.]

“역시 그런가.”

[좀 천천히 가면 되겠지.]

편리한 에고 소드다. 그리고 미카엘에게 검술에 대한 지도를 좀 받아볼까.

심리전의 승리였지 진짜 칼질로 이 천사를 이길 수 있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꼼수는 중요하다.

하지만 기본기는 더더욱 중요하다.

빛을 몸에 휘감아본다.

레바테인을 쓸 때와 큰 차이는 없이 권능을 활용할 수 있다.

저 멀리, 정말로 아득히 먼 곳에 3개의 세계가 떠 있는 게 보였다.

원소화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다. 그냥 빛으로 내 몸을 감싸고, 한 발 내디뎠다.

세상이 조금 흐려졌다.

공간이동과도 전혀 다른 감각.

하지만 그 한 발짝으로 아주 가까워졌다.

“이건 아주 쓸 만하군. 이 좋은 걸 혼자 쓰고 있었어?”

전투에서 활용하는 것은 너무 직선적이라 한계가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적에게는 내가 로키에게 했던 것처럼 카운터 당한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이동 수단으로서의 성능이 너무 좋다.

이곳이야 마력이 넘쳐나고, 블랑쉐의 세계는 나만이 마법사였다.

하지만 심연은 기본적으로 마력 회복이 더디거나 거의 안 되는 곳이다.

마법조차 아닌 이 이동 수단은 아주 유효하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요툰헤임에 도달했다.

수르트가 보인다.

활활 타오르고 있다.

오딘과 토르가 거기에 엉겨 박투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잘못 봤나?

그렇진 않았다.

미카엘의 검을 든다.

“기능 소개 좀 해줄래?”

[봤으니 알지 않나.]

“넌 칼질만 보여줬어.”

[……그렇군.]

에고 소드 안에 깃든 것이 사용자에게 우호적일 경우, 일종의 정령처럼 기능할 수 있다.

자율적으로 제 안의 힘을 꺼내어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본래 미카엘의 권능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검은 처음이라서 잠자코 있었다.

빛무리가 흩날렸다.

사방을 메꾼 빛들이 점차 실체화되며 신들과 거인들을 모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한다.

아름다운 수정들이 곳곳에 보인다.

난 이게 뭔지 안다.

“영역을 편다고?”

[무슨 문제라도?]

“보스일 때 하던 거 다 할 수 있어?”

[출력은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래. 그런 것 같군.]

개사긴데?

이미 겪어서 알겠지만, 영역이라 함은 도주할 수 없는 어떤 아공간이다.

로키가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잡았다. 요놈. 이제는 내 눈에 보이는 순간 끝이다.

그리고 다른 활용법도 떠오른다.

즉석으로 만들어내는 아주 튼튼한 아공간.

그리고 수르트의 3페이즈.

저거 폭발하잖아.

어떻게 미드가르드를 둥글게 만들어야 하나 고민을 좀 했는데.

세상에!

이거 뭐 보스로 크래프팅 하는 것도 아니고.

월드 에디터인가.

좀 신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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