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거리의 사냥꾼(2)
댈런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님이 늘어야 장사가 잘 되는 집이지. 여긴 장사를 잘 하는 곳인가 보군.”
여자의 얼굴에 옅은 당혹감이 스쳤다가, 곧바로 지워졌다.
그녀는 빠르게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며 댈런을 위아래로 훑었다. 긴 속눈썹이 예쁜 눈이었다.
“내가 수완이 괜찮긴 하지. 북쪽에서 온 손님치고는 말을 잘 하는걸?”
여자는 살짝 미소지었다. 도발적인 눈웃음이었다.
“야만인 주제에라는 걸 돌려서 말한 건데, 혹시 알아들었으려나?”
“알아들었소. 그리고 이민 2세 야만인쯤 되면 말도 꽤 하지 않겠소?”
한국어를 섞은 대답에 여자의 눈웃음이 살짝 비틀렸다.
“이민···뭐?”
“문명화되었다는 소리요. 정보 길드라 들었는데, 답지않게 외국어에는 약하신가 보군. 실망인데.”
외국어 못하는 정보상.
댈런은 마주 미소 지으며 그렇게 도발해주었다.
여자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깔깔대며 웃어젖혔다.
“아하하하! 미안해. 보통 북방 사람들은 말로 도발하면 주먹으로 대답하거든. 이렇게 신사적으로 한 방 먹일 줄이야. 내가 사과할게.”
“괜찮소. 주먹으로 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으니까.”
“빨리 사과하길 잘했네. 그런 주먹에 맞고 싶지는 않거든.”
여자는 댈런의 주먹을 슬쩍 곁눈질하며 웃었다.
“들어와. 그쪽 말대로 손님이신데 차라도 한 잔 내드려야지. 아직 영업시간 전이니까 술은 안 돼.”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댈런은 그제야 그녀의 손에 들린 석궁을 발견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문 뒤에서 석궁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시위가 다섯 개나 걸려있는 연발 석궁을.
‘주먹으로 대답했으면 그대로 벌집이 될 뻔했군. 역시 저 성깔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댈런은 서늘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여자를 따라갔다.
***
두 사람은 짧은 복도를 지나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이 방도 술집처럼 마력석 조명으로 은은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뒤쪽으로는 책과 두루마리 따위가 빼곡히 꽂힌 큰 책장이 몇 개. 그 앞으로 넓은 책상과 안락해 보이는 의자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 손님용 나무의자가 여럿이었다.
가구들은 조명과 맞물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역시 청동 구역과는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여자는 책상에 석궁을 올려놓고 방 한쪽의 장롱 앞으로 걸어갔다.
낮은 장롱 위에는 찻주전자와 고급스러운 찻잔, 그리고 말린 찻잎을 담은 유리 단지가 줄지어 있었다.
“내 소개는 들었겠지만, 통성명 정도는 해야겠지? 나는 시에나라고 해. 여기 까마귀 둥지를 운영하고 있지. 별 거 없어. 작은 술집과 조촐한 정보상이 끝이야.”
“댈런. 여기 오면 여러 의뢰를 받을 수 있다고 들었소.”
“원하면 그런 것도 가능하고. 홍차 괜찮지?”
달그락.
시에나는 찻잎을 주전자에 적당히 덜어넣고 물을 부었다. 그리고 주전자를 난롯불 곁에 걸어놓았다.
“그런데 조금 전 그건 고향 말이야? 북방 사투리도 듣는 것 정도라면 할 수 있는데, 아예 들어본 적 없는 방언이었어. 부족별로 완전히 다른 언어 체계를 사용하기도 하는 건가?”
“내가 언어학자는 아니라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글쎄. 북쪽에 이 말을 쓰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한국어는 이 세계에서 외국어가 아닌, 외계어일 텐데.
주전자에서 금세 보글거리며 김이 끓어올랐다. 시에나는 고풍스러운 나무잔 두 개에 차를 따르고, 말린 과일과 빵조각까지 쟁반에 얹어 가져왔다.
그녀는 먼저 찻잔을 들어 홀짝였다.
“아참, 그걸 안 물어봤네. 누가 여기를 소개해줬어?”
“은패 용병이오.”
“여기가 어디 변방 소도시인 줄 알아? 청동 거리만 해도 널린 게 은패 용병인데. 이름이?”
“부크반.”
후릅거리는 소리가 잠시 멎었다. 댈런은 큼직한 손으로 앞에 놓인 잔을 톡톡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여길 알려주면서 이 말도 같이 하더군. 술을 내오면 마시되, 차를 내오면 마시지 말라고.”
“···별 걸 다 말하고 다니네. 목숨이라도 구해 준 거야?”
“비슷하지.”
수백 회차에 달하는 플레이에서, 몇 번쯤은 동료로 삼았었으니까.
목숨을 구해준 것도 열 번은 넘었다. 직접 죽인 것도 두어 번인가 있긴 했지만.
“도시를 떠나고 1년이나 소식이 없길래 죽은 줄 알았는데. 잘 살아있나 보네.”
“그렇소.”
적어도 아직은.
뒷말은 생략했다.
부크반은 게임의 주요 NPC중 하나였다. 동료로 삼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아도 큰 사건 하나의 발단을 만드는 중심 인물이 된다.
그 발단에서 본인이 처참하게 살해당한다는 게 문제지만. 굳이 이야기할 필요 없는 미래였다.
“그쪽이 문을 두드린 암호, 내가 진짜 친구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준 거야. 보통은 그걸 마음대로 떠벌리고 다니진 않지.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이 알고 왔을까. 그래서 떠봤어.”
“그냥 떠본 것치고는 담보가 좀 비싸군. 목숨값이라니.”
“정보상 일 자체가 종종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하거든. 막말로 네가 내 친구들 중 하나를 죽기 직전까지 고문해서 알아낸 거면 어떡하라고?”
시에나는 댈런 앞에 놓인 잔을 도로 가져갔다.
치이익!
그녀는 안에 담긴 차를 난롯불에 부어버리곤, 똑같이 생긴 다른 잔을 가져와 차를 따랐다.
“홍차 괜찮지? 이건 독 바른 잔 아니야.”
“방사능 홍차가 아니라면.”
“···그런 못 알아먹을 소리 하지 말아줄래? 욕처럼 들리니까.”
“알았소.”
댈런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맛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물론 감상은 그게 끝이었다. 지구에서도 차보다는 술을 더 좋아하던 그였기에.
“그래, 어쨌든 싸움을 원한다는 거네? 다른 북쪽에서 오는 손님들처럼. 하다쉬의 천상궁전인가, 무슨 궁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다쉬의 영원궁전. 맞소.”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설정상 서리고원을 넘어온 야만인들은 다들 싸움을 원한다. 그들의 신앙과 연관된 풍습이었다.
사실 이 몸뚱이가 북쪽에서 태어났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는 노릇.
하지만 다들 북쪽에서 온 것처럼 생각하니, 댈런은 그에 맞춰 행동하고 있었다.
충분한 힘이 없는 지금, 굳이 튈 행동은 자제하는 게 좋았다.
이 세상에는 댈런조차도 가볍게 압살할 수 있는 초인이 수없이 많았으니까.
“솔직하게 말할게. 난 아직 당신을 잘 몰라. 부크반의 목숨을 구했건, 아니면 그를 협박해서 정보를 캐냈건 간에 당신과 나는 오늘이 초면이야. 그렇지?”
“맞소.”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싸움을 원한다고 했지? 그런 의뢰를 골라주긴 할게. 하지만 당장 맡길 수 있는 건 자잘한 의뢰들, 실패해도 내 영업에 큰 지장이 없는 것들뿐이야.”
“그거면 됐소. 말했다시피 우린 초면이니까.”
“좋아.”
시에나가 씩 웃었다.
“그럼 고블린도 동강낸다는 우리 대전사님 실력 좀 봐 볼까?”
***
댈런은 청동 구역의 골목길을 걸어갔다.
그의 손에는 현상금 의뢰서가 들려 있었다.
의뢰서에는 필요한 정보들이 정갈한 글씨체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의뢰 내용부터 대가, 목표 대상의 대략적인 행적 등등. 시에나가 직접 쓴 것들이었다.
글씨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눈웃음이 떠올랐다. 게임 화면으로 보는 것과 현실에서 보는 건 확실히 차이가 컸다.
더 예쁘기도 했고.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여우 같으니라고.’
당신을 잘 모르기는 개뿔.
결론적으로 그녀는 댈런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상단주가 떠들어댄 이야기부터, 어젯밤 뒷골목의 건달들을 때려죽인 것까지 전부.
그녀는 명실공히 청동 거리 최고의 정보상이었다. 게임에서도 그녀는 머지않은 미래에 미궁 도시에서 손에 꼽는 정보 길드의 주인이 된다.
댈런이 청동 구역의 수많은 정보상들 중 그녀를 선택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가 아무리 강해진다 해도, 멸망에 홀로 맞설 수는 없으니까.
찰박.
발밑에서 물 튀는 소리가 났다. 댈런은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의 가죽신이 웅덩이를 밟고 있었다. 구석에서 졸졸 흐르는 실개천도 보였다.
습기 머금은 흙길은 그가 목적지에 근접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지표였다.
어느새 그는 청동 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낮은 거리의 현상금 의뢰라.’
일곱 성벽으로 둘러싸인 일곱 개의 구역 중, 가장 넓은 건 최외곽인 청동 구역이었다.
하지만 그 청동 구역조차, 팔시온의 불어나는 인구를 다 감당할 수는 없었다.
뒷골목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조차 쫓겨난 이들이 선택한 건, 성벽 바깥이 아닌 밑으로 내려가는 것.
수백만이 사는 미궁도시의 복잡하고 거대한 하수도의 일부는, 그렇게 슬럼화되어 ‘낮은 거리’라고 불렸다.
이번 의뢰 목표는 낮은 거리의 초입부. 반쯤 지하에 묻힌 빈민가에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한 달째 실종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종자는 대부분 혼자 있는 여성이나 아이. 짧게는 3일, 길게는 5일을 주기로 실종자가 나타났다.
현장에는 격한 저항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근방 주민들이 범인을 찾아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거기다 지난번 실종 대상은 성인 장정이랬지.’
범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점점 대담해지는 게 분명했다. 혹은 갈수록 제 능력에 자신감이 붙어가고 있거나.
찰박.
댈런은 예민한 감각으로 점점 지대가 낮아지는 걸 느꼈다.
발밑은 이제 반쯤 진창이었다. 건물들은 전부 단층이나 낮은 2층이었고, 언제 무너질 지 모를 정도로 낡은 것도 많았다.
그리고 햇빛은 점점 더 희미해져갔다. 해질녘이 아님에도 그랬다.
하수도 천장의 틈이나, 곳곳마다 나 있는 배수구 정도가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통로였다.
‘이쯤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종이에 적힌 글씨는 더이상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댈런의 높은 지능수치는 그 내용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실종자가 주로 발생하는 위치는 이 근방. 인적은 없었다.
아마 실종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이 근처로 다니는 걸 피했기 때문이리라.
‘너무 안 보이는데. 횃불이라도 가져와야 하나.’
그렇게 생각할 찰나였다.
찰박.
저 골목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댈런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슴츠레 눈을 떠 봤지만 골목 안쪽은 너무 어두웠다.
대략 서른 걸음 안팎까지만 보일 뿐이었다.
댈런은 발을 뗐다. 그냥 들어가볼 생각이었다.
낮은 거리에서 뭐가 나오더라도, 추가 능력치로 초인이 된 그를 위협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말이다.
“배, 배가···.”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라기에는 쇠 긁는 소리가 너무 선명한, 짐승의 것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배가, 배가 고파······.”
어둠 속을 뚫고 괴인이 걸어나왔다. 흉측하게 생긴 몰골이었다.
하지만 댈런의 시선은 놈의 몰골이 아닌, 그 위에 주르르 나열되는 글자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험체에게 먹힌 사냥꾼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TIP : 누군가에게 잡아먹히거나 흡수당한 시체는, 그 대상을 처치함으로서 계승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