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0화 (10/288)

하수도의 마법사(4)

이 대륙에서, 댈런은 수백 번이나 죽음을 맞았다.

당연하게도 그 수많은 죽음의 순간이 어땠는지,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의 초인적인 지능 수치도 어디서 죽었고, 누구에게 죽었는지 정도만 기억해낼 뿐.

그때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내진 못했으니까.

‘애당초 내가 직접 죽은 것도 아니다. 모니터 너머에서 캐릭터가 죽는 걸 봤을 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댈런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죽음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눈앞의 시체.

뒤틀린 사지는 인간보다는 연체동물의 다리에 가까웠다. 녹아내린 얼굴에서 사람의 이목구비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길게 자라난 여러 겹의 손발톱과, 흐물흐물한 민머리 위로 돋은 두 갈래의 작은 뿔.

무엇보다, 허리 아래가 잘려나간 채 굵은 말뚝으로 바닥에 박혀버린 그의 상반신.

“······.”

이 참혹한 몰골의 시체가 만들어진 순간만큼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사교도의 실험체가 된 용병의 시체]

- 청동 구역에서 괜찮은 평을 받던 용병의 시체다. 청동 경비단과 함께 역행의 사도들에 맞서 싸웠으나, 끝내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은가면 사도 델릭이 연구하던, 개선된 재생력 실험의 실험체가 되었다.

개선된 재생력.

몇 년 뒤 미래에, ‘역행의 사도들’이라 불리는 사교도 집단은 저들만의 마물화 기술을 완성한다.

사람을 이성 없는 마물로 바꿔버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성을 유지한 채 강력한 재생력만을 부여하기도 하는 기술.

놈들은 그 기술을 바탕으로 청동 구역을 내부에서부터 대대적으로 침공했고, 끝내 대부분을 점령했다.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줄 몰랐지. 놈들의 목적은 도시 전체를 전복시키는 것이었으니까.’

청동 구역을 장악한 뒤, 역행의 사도들은 더 진보한 기술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실험체로 만들었다.

놈들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댈런 역시 같은 신세가 되었다.

수십 일 낮밤을 계속되는 고문 같은 실험.

한낱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보낸 날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걸 다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르겠군.’

그저 게임 종료를 누르고, 새 캐릭터를 키우면 됐을 것을.

어쨌건 댈런은 그걸 묵묵히 지켜봤고, 결국 수천 번의 실패 끝에 사교도들의 실험은 성공했다.

‘용의 피에서 추출한 인자를 적용해, 이전의 방법들보다 더 강력한 회복력을 부여하는 수술.’

그 수술이 최초로 성공한 실험체가, 바로 댈런의 캐릭터였던 것.

그리고 실험이 성공적으로 완성된 그날 밤, 놈들은 댈런을 완전하게 폐기했다.

‘시체 흡수.’

잿빛 시체가 빛으로 화해, 손아귀 안으로 빨려들어온다. 댈런은 눈을 감았다.

[사교도의 실험체가 된 용병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체력 +1, 감각 +1, 마력 +2, 용혈의 재생 인자(C)]

모니터 너머로 지켜봤던, 수십 일의 지옥 같은 시간.

그 끝에 사교도들이 얻어낸 결과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세월을 지나 다시금 댈런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두근.

초인적인 육신과 과거로부터 비롯된 수백 갈래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

모니터 너머가 아니라 숨 쉬는 바로 이 현실에서, 사교도들을 부숴버릴 수 있게 된 그의 손 안에 말이다.

두근.

심장이 박동한다. 댈런의 초인적인 감각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두근.

사지육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섞여 들어갔다는 사실을.

쿠르르르.

피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심장에서 시작된 고열의 맥동이, 손발의 첨단까지 내달려 온몸을 뒤덮었다.

치이이―

붉게 달군 인두로 지지듯, 전신에 난 상처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가 닿은 곳마다 뼈가 자라나고, 혈관이 이어지며, 근육이 가닥가닥 재생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내뿜는 하얀 증기로 인해, 이미 누더기가 된 갑옷에 숭숭 구멍이 뚫려나고.

“대, 댈런 씨?”

화들짝 놀란 페니가 달려왔을 때는, 찢어진 갑옷 사이로 깨끗하게 돋아난 새살과 옅은 흉터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후우.”

댈런은 천천히 호흡을 고른 뒤 페니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쓰러져있는 금발 마법사를 바라봤다. 그가 말했다.

“어떻소?”

“아, 네? 아 그게···.”

뭐라 우물거리던 페니는 가까스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사람···맞으신 거죠?”

“뭐?”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자니 페니가 허둥지둥 말을 붙였다.

“아, 그러니까 사람이신 건 아는데! 북쪽에서 오신 분이라고 다 댈런 씨 같진 않으시잖아요! 막 개구리 인간 수백 마리를 주먹으로 때려잡고, 뼈가 보이던 상처에서 새살이 쑥쑥 돋고···.”

“아니, 이봐. 청소부 양반.”

댈런은 이마를 짚었다. 문득 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이 튀어나온 건가 싶었다.

이 정도로 튀는 캐릭터라면 스쳐지나가도 기억이 날 터. 분명 게임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동그랗게 눈을 뜬 페니에게, 댈런은 이마를 짚은 그대로 다시 말했다.

“나 말고 저 금발 마법사. 저 친구가 어떻냐고.”

페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건 한순간이었다.

***

“좀 명확하게 말하던가요! 그렇게 앞뒤 다 잘라먹고 한 마디만 툭 내뱉으면 어떻게 알아들으란 거예요?”

“알아서.”

“아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군.”

댈런은 페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흑마법사의 로브를 뒤적였다. 놈의 몸 곳곳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다.

‘재생력 증폭 약물의 초기 부작용이지.’

체구가 왜소한 흑마법사. 놈은 아마도 허약한 몸을 만회하고자 스스로 약물을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사교도들의 재생력 증폭 기술은 미완성 단계.

진액이 흘러나오며 재생능력을 증폭시키긴 하지만, 이렇듯 온몸에 피멍을 남기고 끊임없는 가려움을 유발한다.

어느 정도 단련된 육신이라면야, 이런 부작용도 그리 크지 않을 터.

하지만 흑마법사의 연약한 몸은 오히려 그런 부작용을 극대화시켰다.

모니터 너머에서나마 실험체가 되었던 댈런은, 그런 사실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쯧.”

소매 안쪽의 무수한 주삿바늘 자국을 마지막으로, 댈런은 흑마법사의 몸에서 손을 뗐다.

도끼를 회수하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의 보호막 주문을 부수고 두개골에 박히는 과정에서, 손도끼는 고물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우직―

손잡이를 잡자 도끼머리가 그대로 손잡이와 분리된다. 손잡이건 도끼머리건 다시 쓸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 그동안 얼마나 험하게 다루신 거예요?”

뾰로통해있던 페니가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댈런은 기억을 더듬어봤다. 딱히 험하게 쓴 기억은 없는데?

“혹시 평소에도 막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던져대고 그랬어요?”

“내 눈에는 항상 보였소.”

“···아니, 제발. 평범한 사람 눈에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군.”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생각해보면 제법 오래 쓰기는 했다.

저건 처음 이 땅에서 눈을 떴던 산골 오두막에서 가져온 도끼니까.

“저건 재활용도 안돼요. 기껏해야 고철값 정도 받으려나.”

“새로 사야겠군.”

“그런 의미에서, 저희 삼촌이 대장간을 하시거든요.”

댈런은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뭔데. 지금 영업하는 거야?

“아니 뭐, 꼭 오시라는 건 아니고. 지인이니까 싼값에 해드릴 수 있다 이거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겠어요?”

“생각해보도록 하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페니를 보며, 댈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저런 캐릭터를 게임에서는 왜 못 봤던 걸까? 심지어 시에나의 정보조직에 엮여있는 사람인데.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뒤로 한 채, 댈런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반으로 쪼개진 은빛 가면.

역행의 사도들이 상징처럼 쓰고 다니는 물건.

“······.”

피와 진액이 진득하게 굳어버린 가면을 보며, 댈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허리춤의 주머니에 가면을 넣은 그는, 잠시 바닥에 눕혀두었던 금발 마법사를 들쳐업었다.

“갑시다.”

세 사람은 왔던 길 그대로 하수도의 공동을 빠져나갔다.

공동에는 죽은 마법사와 무수한 프로그맨의 시체. 그리고 언제나 쏟아졌던 오수의 폭포만이 남아 자리를 지켰다.

***

청동 구역 어딘가의 석실 내부.

어둠이 마치 안개처럼 내려앉은 방에는, 네 명의 인영이 마주보고 도열해 있었다.

하나같이 긴 로브 차림에, 얼굴에는 은빛 가면을 낀 이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델릭이 죽었소.”

나머지 셋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첫 말문을 연 중후한 목소리의 사내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 그게 사도회를 급하게 소집한 이유요.”

“어떻게 죽었답니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다른 사도들보다 비교적 왜소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우리 중 가장 마지막에 입회했다고는 하지만, 델릭이 그렇게 쉽게 죽을 만한 위인은 아닐 텐데요. 오백이 넘어가는 프로그맨의 군세는 어떻게 된 겁니까?”

“절반은 죽었소.”

크흠. 사내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도망쳤고. 델릭 본인의 마법으로 붙들고 있던 놈들이니, 주인을 잃은 순간 패잔병마냥 도망친 게지.”

“범인은 경비단이오?”

이번에는 굵고 낮은 목소리였다.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굵은 목소리의 주인. 그는 은가면 뒤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가면 너머에서도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의 번들거림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말했다.

“침묵중대. 그 넝마쟁이들인가?”

“아니오.”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명이 벌인 일이었소. 정확히는 두 명이지만, 하나는 그저 청소부였으니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한 명이라니?”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지금 한 명이 오백 마리가 넘는 프로그맨을 썰어죽였단 말인가요?”

“절반은 도망쳤다고 했소. 삼백 마리 정도요.”

“지금 그딴 숫자놀이나 할 때예요? 단신으로 프로그맨 군대를 상대했다니. 설마 순은 구역의 원로 마법사가 직접 행차한 건 아니죠? 델릭 그 새끼, 왜 병신 같이 원로의 직계 제자를 납치해 가지고···.”

“펠버 발렌티노는 움직이지 않았다.”

석실을 낮게 울리는 목소리. 여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르르륵.

석실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다른 이들처럼 로브에 입이 과장된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남들보다 한 뼘쯤 큰 키, 동빛으로 번쩍이는 가면은 그가 이 사도회의 수장임을 말해주었다.

“대사도님을 뵙습니다.”

“대사도님을 뵙습니다.”

고개 숙인 네 명의 은가면을 지나쳐, 대사도는 석실 끝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다.

“그대들을 이 자리에 불러모은 것은, 그런 은패 용병 나부랭이에게 겁을 집어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설마 고작 은패 용병이 마물의 군대를···.”

“그만!”

구르릉.

석실이 작게 요동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자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대사도는 네 사람을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대계의 날짜를 앞당기겠다. 원래부터 델릭은 우리의 계획과는 상관없던 자. 있으면 도움이 되겠으나, 없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크흠.

처음 입을 열었던, 중후한 목소리의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계를 앞당기신다 하는 뜻은······.”

“자금을 풀어라. 비약의 재료들을 사들이고, 병장기를 다룰 수 있는 자들을 데려와라. 풀리지 않는 일이 있다면 상회의 힘으로 압박해라. 이럴 때를 대비해 양지에 키워둔 힘이 아니더냐?”

동빛 가면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들겼다.

“변한 것은 없다. 역행의 질서는 우리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금강석이 흑필로 변하고, 일곱 성벽이 무너질 날이 머지않았다.”

쿵.

대사도는 지팡이로 바닥을 찧었다. 그 신호에 네 명의 은가면이 곧장 허리를 숙였다.

“일곱 성벽이 무너지는 날을 위해.”

“일곱 성벽이 무너지는 날을 위해.”

석실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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