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불장난(2)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겨울밤.
청동 구역 뒷골목의 어느 건물 옥상에 두 남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두꺼운 로브 안쪽으로 가죽갑옷에 검을 차고, 얼굴에는 흑색 가면을 쓴 이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쓰벌, 겁나 춥네. 이번 겨울은 유독 춥단 말이야.”
삭삭삭.
남자는 손을 비벼대며 고개를 들었다. 골목 건너편에 5층짜리 벽돌 건물이 보였다.
뒷골목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고층 건물.
그곳은 바로 텔리아 상회가 매입한 창고이자, 이들이 지금 보초를 서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해가 안 가네. 뭐 중요한 일이 있다고 우리 같은 신도들까지 동원해서 보초를 세우는 거야? 건달 새끼들 시키면 될 일을.”
“좀 닥쳐봐. 그런 소리 하다가 금가면 사도님께 걸리면 어떤 벌을 받을지 몰라서 그래?”
“쓰벌,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남자는 아예 가면도 벗고 손으로 얼굴을 문댔다. 추운 손과 얼굴을 어떻게든 덥혀보려는 몸부림이었다.
저 멀리 텔리아 상회의 창고는, 안팎으로 횃불을 내걸어둔 채 북적거리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상단이 뭔가 큰 거래를 성사시켜서, 방치해두던 창고를 활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
실제로는 다 헛소문이었다.
남자는 임시 신도였지만, 그래도 저 북적임이 상회의 거래 때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무슨 대계를 앞당긴다나 뭐라나 하던데. 거기서부터는 윗사람들의 일이니 딱히 관심은 없었다.
남자의 동료가 초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요즘 부쩍 부랑자들을 많이 데려온다더라. 어제만 해도 삼백 명이 넘게 들여왔다고 하고······. 뭔가 있긴 한가 봐.”
“흐흐흐, 그중에 반반한 년 하나 없으려나. 요새 내 아랫도리가 너무 놀았는데.”
“적당히 좀 해. 심각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아침부터 백가면이랑 금가면 사도님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거 못 봤어? 대계를 앞당긴다는 이야기 들었을 거 아냐. 이건 신의 뜻을 받든 혁명이자 전쟁이라고.”
에휴.
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그의 어린 동료는 매사에 너무 진지해서 탈이었다.
대계가 어쩌고, 혁명이 어쩌고 하는 건 결국 다 윗사람들의 일이다. 그와 같은 임시 신도는 그런 데 신경 쓸 거 없었다.
애당초 그 신인지 악만지랑 인사나 해 봤나?
뒷골목 건달 생활을 꽤 오래 한 남자와는 달리, 그의 동료는 어디 산속에서 공부하던 샌님이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편이었다.
남자는 흐흐 웃으며 동료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흐흐흐, 이 샌님 새꺄.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그런 데 관심 기울이면 안 돼, 임마. 그저 위에서 까라면 까고, 죽이라면 죽이고, 여자를 따먹으라면······.”
남자는 말하다 말고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어깨동무를 한 팔이 무슨 2미터짜리 담벼락에 매달린 것 같았다.
그의 동료가 이렇게 키가 컸었나? 아닌데. 분명 땅딸보라고 종종 놀려먹을 정도였는데.
무심코 더듬거리는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생소하다.
2미터는 될 것 같은 키. 떡 벌어진 체구. 돌덩이 같이 큼직큼직한 근육.
‘···쓰벌.’
등줄기에 소름이 좍 돋았다.
손을 더듬거리길 멈춘 남자는, 달달 떨리는 입술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료는 없었다.
대신 검은 로브를 입은 거한이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
“여자를 따먹···어···누구···?”
“지랄.”
거한의 손이 순간 흐릿해졌다.
우두둑!
그게 남자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
“사교도 새끼라고 입에 걸레를 물었나.”
댈런이 중얼거렸다. 그는 목이 돌아간 두 흑가면 신도의 시체를 적당한 곳에 던져두었다.
이로써 그가 처리한 신도들의 숫자는 무려 서른.
역시, 사교도 놈들이 아무런 방비 없이 상회의 창고를 거점 삼은 건 아니었다.
5층짜리 창고 건물의 주변으로, 옥상과 골목 사이사이마다 보초가 배치되어 있었다.
적게는 두 명, 많게는 여섯 명까지.
흑가면과 백가면으로 구성된 보초병들은,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위치들을 전략적으로 선점하고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적은 숫자가 다가오면 그대로 매복했다가 덮치고, 다수가 몰려오면 시간을 끌면서 한두 명이 상회 건물로 뛰어가 소식을 알리는 것.
그러면 창고 안의 본대가 우르르 몰려나오던, 증거를 모조리 은폐하고 도망가던 할 테다.
‘효율적인 전략이야. 청동 경비단이 직접 몰려와도 완벽한 기습은 힘들었겠군.’
물론 댈런은 그 완벽한 기습이 가능했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개인이었고, 동시에 인간 같지 않은 무력과 초인적인 감각을 지닌 전사였으니까.
고작 30여분 만에, 댈런은 홑몸으로 보초들을 전부 죽여버리며 감시망에 구멍을 뚫어낼 수 있었다.
저벅. 저벅.
댈런은 골목의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횃불 하나 없는 야심한 밤의 뒷골목이지만, 평소와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달랐다.
댈런은 머잖아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건 이 시간쯤 뒷골목 곳곳에 죽치고 있어야 할 걸인이나 중독자들이, 눈을 씻과 찾아봐도 한 명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처에 보이는 부랑자들은 죄다 끌고 간 모양이군. 괴인 군대를 최대한 더 불리기 위해서.’
텔리아 상회건, 역행의 사도들이건 간에 하는 짓거리가 점점 더 물불 가리지 않는 수준으로 치닫는다.
대계를 코앞으로 앞당긴 마당에, 스스로의 존재를 숨길 생각 따윈 없다는 소리겠지.
그리고 그 점이 댈런에게는 오히려 다행이기도 했다.
‘놈들이 어지간히 청동 구역 곳곳에다 깽판을 쳤으니 망정이지. 만약 안 그랬다면, 멀쩡한 상회 건물을 뒤엎는 작전에 경비단이 순순히 동의했을 리 없다.’
은가면 암살자를 처치한 뒤, 시에나는 청동 경비단과 다시 한 번 접선을 시도했다.
그 내용인즉 댈런의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경비단과 함께 공조 작전을 실행할 수 있겠냐는 것.
그게 어제였고, 경비단 측의 연락을 받은 건 오늘 아침이었다.
청동 경비단은 시에나를 통해, 공조 작전에 동의하며 협력하겠다는 전언을 남겼다.
작전의 골자는 간단했다.
댈런이 불을 놓고, 경비단은 불을 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이랬다.
보초들의 감시망을 뚫고, 댈런이 먼저 창고의 1층으로 쳐들어간다.
그리고 건달이건 사도건 간에 다 족치고 불태우며 1층에서 농성을 시작한다.
그렇게 적당히 불을 질러 놓으면, 좀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던 청동 경비단이 화재를 진압하러 왔다가 ‘우연히’ 사교도의 증거를 발견하는 것.
그야말로 깔끔하고 완벽한 각본이었다.
‘이제 창고로 쳐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게 계획대로겠군.’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이 골목만 빠져나가면 창고 건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댈런은 그 계획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흠.”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텔리아 상회의 창고가, 5층짜리 벽돌 건물이 보였다.
사실 이곳은 역행의 사도들과 싸우게 되면, 꼭 한 번쯤은 거치게 되는 놈들의 주 거점들 중 하나였다.
‘여기서도 한 번 죽었었지.’
은가면 사도 중 하나인, 텔리아 상회주를 공략하려다 실패한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때 상회주는 건물의 5층에 있었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막혀 있는, 마치 고대에 악신을 모셨던 유적과도 같은 5층 밀실.
대계가 머지않은 지금, 상회주는 반드시 그 밀실에 머무르고 있을 테다.
요지는 이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그가 1층을 기습하면, 텔리아 상회주는 경비단이 올 때까지 건물 안에 남아있을 것인가?
아니면 쥐도새도 모르게 도망친 뒤, 이후에 있을 진짜 결전을 대비하며 칼을 갈까?
‘모르는 일이지.’
댈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만약 이 작전 중에 그를 놓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올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결과라는 사실.
‘사교도든 악마의 끄나풀이든, 그런 부류의 놈들이랑 싸울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하나 있지.’
그건 바로 밟을 수 있을 때, 확실하게 밟아버리지 않는 것.
원래라면 역행의 사도들은 이대로 힘을 키워, 몇 년 후 청동 경비단을 능가할 정도로 성장했을 테다.
댈런은 그걸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미리 놈들을 짓밟음으로써, 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고가는 수백 가지 사건들 중 하나를 영원히 제거해 버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댈런은 더 강해질 것이다.
놈들에게 죽었던 캐릭터들의 시체를 회수하고, 덤으로 레벨업과 물질적인 이득까지 챙기면서.
텔리아 상회주를 놓칠 수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놈이 더 이상의 변수를 만들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마저 지워버리고,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까지 얻어간다.
저벅.
댈런은 지나왔던 골목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제 얻은 스킬을 시험해보기에도 딱 적당한 기회가 되겠군.’
***
댈런은 골목을 빙 돌아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그의 기억 속, 상회주가 머무는 밀실은 건물 뒤쪽에 붙어있기 때문이었다.
창고 건물로부터 한 블럭쯤 떨어진 골목. 댈런은 건물 5층을 바라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스읍.
온몸에 넘치는 힘. 발끝이 흙바닥을 파고든다.
근력 수치가 3이나 올라가며, 원래부터 초인적이던 댈런의 힘은 다시금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다.
지금까지의 통제력을 가지고는 쉽게 조절할 수 없을 정도.
사실 어제부터 노력했음에도, 아직까지 완전히 제어하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
후우.
숨을 내쉰다. 다시 들이쉰다. 폐부를 파고드는 차가운 산소가, 혈관을 따라 사지 육신으로 새로운 활력을 공급한다.
퍼엉!
댈런은 달렸다.
퍼벅! 퍽!
디뎠던 흙바닥이 파도처럼 터져나가고, 새로운 디딤발마다 물웅덩이를 밟은 듯 흙더미가 튀어오른다.
말의 전력질주에 비견될 속도를 내던 그는, 어느 한 지점에서 발을 강하게 내디뎠다.
쿠웅―
바닥이 순간적으로 물결처럼 출렁인다.
뛰어오른다는 의념을 구체화한다.
온 몸의 근육을 한데 묶어, 발밑의 저항을 밀어내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도약.’
콰앙―!
화약이 터진 듯 흙더미가 쏟아지며, 댈런의 신형이 마치 포탄처럼 쏘아졌다.
지상에서부터 5층 높이에 이르기까지, 포물선이 아닌 거의 완벽한 직선으로 날아가는 몸.
‘밀실의 벽은 몇 중으로 보강되어서, 거의 성벽만큼 단단하다고 하지.’
게임으로 익혔던 설정을 되새기며, 댈런은 주먹을 내뻗었다.
성벽만큼 단단하다는 창고 5층의 외벽과 내벽이지만, 상관없었다.
설령 진짜 성벽이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인간을 한참이나 초월한 그의 육신과 스킬의 조합은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니까.
그 주먹이 건물 벽과 맞닿는 순간.
꽈과과과광―!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나오고, 댈런은 어느새 밀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쿠궁! 쿵! 쿠르르르.
그의 주변으로 이리저리 굴러가는 돌덩이들과, 후두둑 떨어지는 크고 작은 파편들.
댈런은 뜨거운 김을 뿜어대는 주먹과 오른팔을 천천히 내리고, 여상한 태도로 자잘한 잔해들을 툭툭 털어냈다.
‘오랜만이군.’
후르르 가라앉는 흙먼지 너머.
모니터 너머에서만 보던 전경이 또 한 번 모습을 드러낸다.
창문 하나 없이, 군데군데 달린 횃불만이 유일한 빛인 밀실.
그 횃불의 일렁임을 받아 사이한 느낌을 내뿜어대는, 방 곳곳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과 형상들.
그가 부수고 들어온 외벽 반대편, 감옥문처럼 작은 철창을 달아둔 채, 줄지어 늘어선 단단한 나무문들까지.
‘저 감옥이 괴인의 군대를 채워두는 곳이지.’
부랑자들을 잡아다 괴인의 군대를 만들고, 악신을 섬기는 성소인 이 밀실의 힘을 이용해 그들을 잠재워둔다.
수백 수천의 괴인 군대를 도시 안에서 만들어내면서도 지금껏 들키지 않은 데는, 그만큼 철저한 관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스럭.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댈런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대사도와 함께 신의 임재마저 목격했거늘.”
인기척이 난 곳은 성소의 한가운데, 악신을 위해 만든 작은 제단 곁이었다.
제단 곁에는 검은 로브를 걸치고 손에 은빛 가면을 든 중년 사내가, 황당한 얼굴로 댈런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같이 내 두 눈이 환각에 취한 건 아닐지 의심이 된 적은 처음이군. 주문이라도 쓴 건가?”
중년 사내가 물었다.
댈런은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중년 사내가 있는 제단 쪽으로, 성큼성큼 내딛는 보폭이었다.
공석에서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그 본명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텔리아 상회주.
세간에는 그에 대한 기이한 풍문이 많이 돌았다.
남부 제국에서 쫓겨난 마약상이라니, 저 동쪽 브리튼 왕국에서 기사의 첩이 낳은 자식이라니 하는 소문들이었다.
물론 그걸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텔리아 상회주는, 그저 이른 노년을 바라보는 수완 좋은 상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소문 쪽에 가깝지.’
아니, 어쩌면 떠도는 풍문 따위보다 실상이 더 비현실적이었다.
텔리아 상회주, 아챌리스 필레놈.
그는 제국의 기사단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은퇴 기사이자, 뒷골목의 마약과 매춘 사업을 한 손에 꽉 쥐고 청동 구역 상권을 집어삼킨 암상이었으니까.
거기다 그는, 은가면 사도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두 보스몹의 하나이기도 했다.
댈런은 도끼를 뽑아들었다. 어깨에 내려앉은 흙먼지가 발자취를 따라 후두둑 떨어졌다.
“주문 같은 건 모르겠고.”
텔리아의 상회주, 아챌리스 필레놈의 면전까지 걸어간 그는 도끼를 들어올렸다.
“눈이 아프면 안과를 가, 돈 많은 상회주 양반.”
손도끼가 내리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