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8화 (18/288)

한밤의 불장난(3)

텔리아 상회주, 아챌리스 필레놈.

은가면 사도 델릭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어차피 델릭은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장기패.

십 년이 넘도록 함께 대계를 준비해온 나머지 은가면 사도들에 비해, 델릭이 합류한 건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스트레이마저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챌리스는 더 이상 이 일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비록 하급 뱀파이어지만, 스트레이는 자신의 종족 특성을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암살자.

그런 그마저 죽었다는 건, 그들을 쫓고 있다는 전사가 대계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후드드득.

난데없이 성소의 벽을 부수고 들어온 거구의 전사를 보며, 아챌리스는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사도님께서 대계를 앞당기신 결정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

성큼성큼 걸어오는 야만전사.

갑옷은 없고 무기라곤 허름한 손도끼뿐.

그러나 그 도끼가 번쩍이며 공기를 갈랐을 때, 아챌리스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카아앙!

쇠와 쇠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소리.

밀실 성소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댈런이 도끼를 내리그은 순간, 아챌리스 역시 번개같이 검을 뽑아 가로로 휘두른 것이다.

촤악―

충격을 흘려내기 위해 다섯 걸음을 물러났다. 아챌리스는 저릿한 손아귀에 얼굴을 찌푸렸다.

다섯 걸음을 물러난 그와는 달리, 상대가 물러난 건 고작 두 걸음.

놀라움을 숨기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정말 괴물 같은 힘이군. 오크의 근력이라 해도 믿겠어.”

상대방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덤덤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여전히 후르르 떨리는 검을 부여잡고, 아챌리스는 천천히 은가면을 뒤집어썼다.

“···아니, 다시 말하지. 오크가 아니라 거인이라 해도 믿을 수준이야. 내 기사단에 있을 적에는 거인을 사냥하기도 했었지만, 그때의 나라 해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확신이 안 설 정도야.”

아챌리스는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낮게 주문을 웅얼거렸다.

그러자 괴인들을 잠재워두던 성소의 힘이 약해지며, 굳게 닫혀있던 성소 한쪽의 나무문들이 스르르 열렸다.

으르르르.

크어어.

그르렁거리는 숨소리.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수백 쌍의 노란 안광.

허나 아직 완전히 깨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챌리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한때나마 제국 기사단의 선봉 중 하나였던 그가, 지금은 괴인 무리가 깨어날 때까지 시간을 끄는 역할에 불과하다니.

“어서 덤비시게. 그대에게 시간이 많지 않으니.”

그러나 아챌리스는 기사인 동시에 상인.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 정도는 계산할 수 있었다.

비록 기사로서의 자존심이 그의 발목을 잡았으나, 대계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감수하지 못할 리가.

아챌리스는 두 손으로 잡은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오래 전 거인도 사냥했던 그의 검술이, 아직까지 무뎌지지 않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

“흠.”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생각보다 전개가 빨랐다.

모니터 너머에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원래 이곳에서의 전투는 지금과는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보스몹인 상회주 아챌리스를 두들겨패고, 놈의 체력을 어느정도 깎아놓는 게 첫 번째 페이즈.

그리고 나서 몰려오는 괴인 무리를 썰어재낀 후, 회복한 상회주를 다시 상대하는 게 두 번째와 세 번째 페이즈였다.

‘아예 시작부터 괴인을 깨우는 건 처음 보는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댈런은 그럴 만 하다고 느꼈다.

자신이 은가면 사도였더라도, 난데없이 밀실 성소의 벽을 부수고 들어오는 야만인과 일 대 일로 붙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어찌됐건 상관 없었다. 계획은 변하지 않았다.

상회주를 이 자리에서 죽이고, 괴인의 무리를 쓸어버린다.

그리고 괴인들에게 뜯겨먹혔던 옛 캐릭터의 시체를 회수한 뒤, 건물에 불을 지른다.

저벅.

댈런은 걸음을 내디뎠다.

상회주는 그에 맞춰 반 걸음 물러섰다.

로브 사이로 판금 갑옷이 번쩍이고, 날선 명검은 일렁이는 횃불 빛을 붉게 머금었다.

완전무장을 갖춘 채, 빈틈없는 자세로 그의 허점을 노리는 상회주의 모습.

제국 기사단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은퇴 기사라는 배경 설정이, 결코 무색하지 않은 기세였다.

그의 발 위치와 어깨의 각도, 검끝이 가리키는 방향 하나하나가, 모두 댈런 자신과의 미묘한 대치구도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마저 읽고 읽히는 달인의 수싸움.

댈런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냥 도끼를 던졌다.

패래랙!

쨍―!

본 게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휘두른 검.

“무슨···!”

상회주는 당혹감에 굳어버린 시선으로, 허공에 붕 떠서 튕겨나가는 손도끼를 바라봤다.

타닥―

댈런은 앞으로 내달렸다. 그는 손을 위로 뻗어 튕겨나가던 손도끼를 도로 잡아챘다.

그리고 지체 없이 상회주를 향해 내리찍었다.

까아앙!

내려찍는 손도끼와 검이 부딪혔다.

묵직한 충격이 손아귀를 타고 내려와, 상회주의 두 어깨마저 짓누른다.

스르릉―!

검을 바깥으로 휘둘러 그 충격을 떨쳐내자, 이번에는 돌덩이 같은 주먹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상회주는 다급히 허리를 틀었다.

퍼걱!

“크으!”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주먹. 은색 가면의 끝자락이 후드득 깨져나가며, 찢어진 턱에서 선혈이 방울져 흩어진다.

상회주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가로로 낮고 빠르게.

그러나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검격은 어느샌가 돌아온 손도끼에 가로막혔다.

쨍!

상회주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마치 관성을 무시하는 듯한, 이해할 수 없는 도끼의 움직임.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곧장 수십 회의 공방이 이어졌다.

쩌저저정―

검과 도끼가 맞부딪힌다. 튕겨나가고, 다시 얽혀들었다. 힘싸움을 했다가, 주먹과 발로 상대를 가격하고, 눈속임으로 물러서는 척 하면서 무기를 내질러 허점을 노린다.

짧은 시간 공방을 교환하며, 댈런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상회주는 그가 지금껏 싸워본 적 없는, 검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오래 전 은퇴했다고는 하나, 전성기에는 제국의 기사단에서도 나름 실력있는 검사로 인정받던 상회주.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단단한 육신은 크게 흔들림이 없었고,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라도 몸에 새겨진 검술은 풍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떠엉!

“크으···!”

그에 맞서는 댈런 역시, 제국에서 유래한 격투술의 달인이었다.

“맨손으로 판금갑을 우그러뜨리다니. 인간이 맞기는 한 겐가!”

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는 악신의 사도인 상회주의 신체능력마저도 뛰어넘은 바.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 댈런을 두 쪽 낼 듯 위에서 아래로 베어들어오는 검.

덜컥.

그 검을, 절묘한 순간에 도끼를 걸어 바깥으로 흘려버린다.

후웅―!

그렇게 드러난 빈 가슴팍을 향해, 도끼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뻗어지는 댈런의 발끝.

터엉!

상회주가 검을 당겨 십자막이로 받아내려 하지만, 오히려 그 찰나의 순간 발끝이 흔들리며 검을 든 손을 쳐내버리고.

콰앙!

다시 한 번 비게 된 가슴팍을,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 무게를 실은 팔꿈치로 가격한다.

“커어―!”

우당탕!

밀실의 바닥을 구르는 상회주. 로브 안의 판금갑옷이 없었다면, 그대로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격이었다.

“에낙사···타레온!”

핏덩이를 토하는 그의 입이 무어라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성소 중앙의 제단에 화륵 불이 피어올랐다.

화르르르!

제단 위, 허공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

그와 동시에 오랜 시간 잠들어있던 수백 마리의 괴인이, 잠시간의 예열을 마치고 마침내 답답한 우리를 벗어났다.

크어어어어!

캬아아!

먹잇감을 향해 우르르 달려드는 괴인의 무리.

[검을 쓰는 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 위에서 일렁이는 메시지를 보며, 댈런은 씩 웃었다.

‘이거 잘하면 시체 회수에 레벨업까지 하겠군.’

그 순간, 선두에서 달려오던 괴인이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도끼가 번쩍였다.

***

아챌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연결부의 끈을 잘라내 갑옷을 벗어버렸다.

땡그렁! 땡강!

무슨 고철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판금갑옷.

여기저기 우그러져 수리조차 힘들 것 같은 상태인지라, 실상 반쯤은 고철이나 다름없기도 했다.

‘어떻게 사람의 힘이······.’

맨손으로 쇠를 치면 손이 부러지는 게 당연한 이치다.

날고 기는 초인이 많은 미궁도시라지만, 적어도 이런 청동 구역에서는 그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 상식을 보란 듯이 무시했다.

한 술 더 떠서, 그는 어디서 배웠는지 격투술에도 수준급의 조예가 있었다.

그것도 그가 젊을 적에 익히 보아왔던, 제국의 기사라면 의무적으로 배우게 되어 있는 데하만의 갑주격투술을.

콰직!

데하만의 갑주격투술은 기사 하나로 경보병 여럿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술.

지금도 도끼가 베어버리는 괴인의 숫자보다, 손과 발로 으스러뜨리는 숫자가 더 많을 지경이다.

수백 마리의 괴인들에게 둘러싸였으나, 압도당하기는커녕 도리어 괴인들을 갈아버리는 전사.

오히려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린 모습은, 숱한 전장을 통과해 온 아챌리스마저도 소름돋게 만들었다.

땡그랑! 땡강!

아챌래스는 모든 갑옷을 벗어던졌다.

판금갑 안의 천갑옷마저 벗자, 여기저기 찢어진 헐렁한 천옷만이 남았다.

주르륵.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재생력을 증폭시키는 진액이 왈칵이며 흘러내린다.

은가면 사도부터는 전원이 받은 재생력 시술은, 아직 부작용이 많긴 했어도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거기다 아챌리스의 굳건한 몸은, 그 부작용마저 어렵지 않게 이겨낼 수 있었고.

덕분에 원래라면 죽었어야 할 부상마저도, 이렇게 빠르게 회복하고 다시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움푹 내려앉았던 가슴팍과 곳곳에 찢겨나간 살점은 이제 거의 다 수복된 참이다.

크아아아―카악!

콰직!

물론, 저 용병에게 달려들던 수백의 괴인 무리도 이제 채 삼분의 일이 남지 않았고.

처음에 생각했던 괴인 무리와의 협공 계획은 없는 게 되어버린 셈이다.

‘그래도 아직 괴인들이 모두 죽지는 않았으니, 기회는 있다.’

아챌리스는 검을 끌어올렸다. 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괴인이 죽어가는 속도를 생각하면, 기회는 단 한 번.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그 한 번의 기회로 저 용병의 목을 벨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스칸덴의 두 개의 검.’

남부 제국의 기사단.

수많은 영웅과 대전사들이 거쳐간 그곳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는 여러 비기들 중 하나.

오래 전, 기사단을 나온 뒤로는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기술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노쇠한 육신과 쇠퇴한 기량으로는, 자칫하면 스스로를 해칠 수도 있었기 때문.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는 결심했다.

이곳에서 자신과 상회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 전사만큼은 쓰러뜨리고 말겠다고.

“스으―”

깊은 숨을 들이쉰다. 전신의 근육과 신경이 올올이 깨어난다.

용병에게 달려들던 괴인은 채 스물도 남지 않았고.

덕분에 놈의 굳건한 바위같던 기세도, 미세하지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

아챌리스는 달려나갔다.

타닥!

돌풍에 가면이 벗겨진다. 주변의 풍경이 순간 반죽을 잡아당기듯 늘어져 보였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가속. 그러나 이 비기의 절정은 그 가속에 있지 않았다.

우웅―

두 손으로 그러쥔 검. 그 검에 마력이 흘러들어간다.

검을 쓰는 이들에게 있어, 마력을 운용한다는 개념은 마법사와는 전혀 다르다.

마탑과 학파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교육 체계가 구축된 마법사와 달리, 검사의 마력 운용법과 비기는 스승에게서 전승되는 형태를 띈다는 점도 있겠으나.

우드득!

그보다는 마력을 과하게 불어넣은 육체가, 그 반동으로 처참하게 망가질 위험을 끌어안고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게 더 주된 이유일 터.

찌직―

근육이 찢어진다. 피부가 갈라진다.

마력의 폭풍을 감당하지 못한 혈관이 끊어져, 어깨부터 팔까지 보랏빛 반점이 피어오른다.

하지만 그 대가는 확실했다.

쌔애애액―!

화살처럼 쏘아진 아챌리스가 검을 뻗어내자, 그의 팔과 검은 한순간 마치 두 개가 된 듯 보였으니까.

아니,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각기 다르게 움직이는 두 검은 모두 진짜. 눈속임이나 환영이 아니다.

하나의 검이 둘이 된다는 건, 물질계의 현실상 불가능한 일.

허나 육체와 검에 실린 마력은 현실을 뒤틀기에 충분했고.

둘로 나뉜 검은, 용병의 심장과 목덜미를 정확하게 노리고 찔러들어갔다.

‘됐다!’

아챌리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서걱!

방금 막 괴인 하나의 목을 잘라낸 손도끼가, 기이한 궤도를 그리며 비틀렸다.

‘······!’

어떠한 마력의 운용도 없다.

그저 순수한 육체의 힘일 뿐.

관성이고 뭐고 다 무시한 채, 마력이 담긴 검마저 능가하는 빠르기로 움직인 손도끼는.

그렇게 머리 위로 추켜올려진 뒤.

스각―!

두 개로 나뉜 아챌래스의 검이 목표에 닿기도 전에, 벼락같이 떨어져 그의 상반신을 사선으로 쪼개버렸다.

꽈르르릉!

번개에 천둥이 뒤따르는 것처럼, 성소 내부를 우르르 울리는 후폭풍.

뇌에서 피가 채 빠져나가기 전, 잘려나간 상반신 째로 공중에 붕 든 아챌리스의 귀에 이상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왜 뜬금없이 즉사기 패턴이 튀어나오냐.”

“즉···뭐라······?”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한때 기사였던 상인은, 두 동강난 채 성소의 돌바닥을 뒹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