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1화 (21/288)

동부 지구 전선(1)

수백만이 살아가는 거대도시, 팔시온.

현대의 지구에 비해 교통의 발달이 몇백 년은 뒤처진 이 세계에서, 어떻게 그런 거대한 도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미궁의 입구 위에 세워진 인류의 보루.

그 자체가 하나의 마법진으로 동작하는, 초월자가 짜낸 진법의 결정체.

수백 년간 전 대륙에 걸친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대륙의 심장.

거대도시라는 설정 이외에도, 이 도시를 수식하는 수많은 이명들 모두가 비현실의 경계에 걸쳐 있다.

모니터 너머에서는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설정들.

그러나 이 세계로 떨어지고 나니, 그 설정 하나하나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현실로 그려내고 있는지 피부로 여실히 와닿았다.

그리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류 최후의 보루라는 단어의 실상.

‘제국의 십만 대군이 몰아쳐도 버틸 수 있는 방어시설과, 대부분의 물자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의 시스템.’

인류 최후의 보루.

그 위명은 단순히 높은 성벽과 수많은 초인들의 거처인 금강궁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다.

말 그대로 온 대륙이 불바다가 되어도, 이 도시만큼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단순한 밀가루나 나무그릇 따위의 생필품부터, 마석과 포션, 마법 무구 같은 마도공학의 산물까지.

일곱 성벽으로 나뉜 일곱 구역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해내는 한, 이 도시 안에서는 그 모든 게 생산되고, 또 소비되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중에서 청동 구역은 가장 낮은 수준의 원자재와 생필품을 생산하지.’

식료품, 가죽과 원단, 주괴와 목재, 그리고 사람.

청동 구역은 그런 1차적인 물자들을 생산해내는 장소였다.

원래라면 드넓은 토지와 막대한 노동력, 특수한 환경들을 요구하는 생산품들.

허나 금강궁 안에서도 가장 깊은 심처에 기거하는 초월자들의 능력은, 성벽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그 생산품들을 대량으로 쏟아내는 게 가능하게 만들었다.

‘남부 지구는 외부에서 끝없이 공급되는 인력을. 서부 지구는 곡식과 목재, 가죽, 고기와 같은 필수품을. 북부는 수산물에 더해 라이칸트 강을 따라 오가는 수상 무역을.’

그리고 동부는, 깊은 광산에서 나오는 철과 구리, 은금과 보석들을 생산했다.

다그닥. 다그닥.

댈런이 말을 타고 향하는 곳은, 바로 그 동부 지구의 8구역.

역행의 사도들이 도시 전역에 퍼져 있던 세력을 집결해, 경비단을 몰아내고 점령했다는 바로 그 지역이었다.

진짜 전장으로 달려가는 이상, 무장은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바.

말 위에 앉은 댈런의 외양은, 르베론이 밤을 새어가며 만든 갑옷과 무기로 인해 다시금 한 명의 베테랑 용병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곁.

함께 말을 달리고 있는 세 사람 역시 전장으로 나아가는 기사와 같은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번쩍이는 판금 갑옷에 남루한 로브를 걸친 이들은, 침묵중대장 가웨인과 그 휘하의 침묵중대원 두 명이었다.

“전황을 말해주시오.”

가웨인의 말 곁에 자신의 말을 붙이며, 댈런은 입을 열었다.

크게 소리지른 게 아니기에, 보통이라면 발굽과 바람 소리에 못 들었어야 하는 상황.

“상회에서 얻은 증거를 바탕으로, 경비단은 청동 구역 전역에 퍼진 사교도들의 거처를 습격했소이다.”

그러나 침묵중대장 역시 나름 초인의 경지에 다다른, 남다른 감각의 소유자였다.

“수천의 병력을 동원한 작전이었소. 그리고 대부분의 거처는 손쉽게 제압되었지.”

다그닥. 다그닥.

투구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말발굽 소리에 짓눌려 흐릿해진다.

그럼에도 댈런의 초인적인 감각은, 그 어절 하나하나를 명확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사실 그나 가웨인이나, 일부러 소리치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의 대화 내용은, 길거리의 다른 민간인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부류였으니까.

“너무 손쉽게라는 게 문제였소. 거처마다 주둔해 있던 놈들의 병력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적었던 것이오.”

“이미 병력을 움직인 거군.”

“그렇소.”

가웨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뒷이야기는 쉽게 예상 가능했다.

사교도들은 이미 각 거처에서 병력을 빼내어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그 장소가 바로 동부 지구 8구역의 어느 철광.

철광의 깊은 곳에 숨겨진 자신들의 처소에서, 역행의 사도들은 대대적인 역습을 시작했다.

해당 처소를 습격하려던 청동 경비단은 그대로 궤멸했고.

“결국 놈들이 8구역의 대부분을 집어삼킬 때까지, 경비단은 전황을 수습하지 못했소. 오늘 새벽에서야 간신히 8구역의 경계에서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해냈지.”

“옆구리를 찔린 거로군.”

“···그렇소이다.”

댈런은 달리는 말 위에서 턱을 쓰다듬었다.

상회를 습격한 지 고작 이틀.

그 이틀만에 전황이 몇 번이나 뒤집힌 것일까.

게임의 단순한 알고리즘이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예측 밖의 상황들이 시시각각 터져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댈런은 낮게 웃었다.

그가 수백 회차동안 경험해 온, 그의 머릿속 수많은 경우의 수를 빗겨나간다는 건.

결국 지금 걷는 이 길이, 수백 회차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멸망의 종착지에서 조금씩 빗겨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

거대도시는 넓었다. 네 사람은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말을 타고 달렸다.

대로를 전력질주에 가까운 속도로 달렸기에, 중간중간 역참에서 튼튼하고 기운 넘치는 새 말로 갈아탔다.

반면 갈아끼울 수 없는 사람 역시, 예상 외로 잘 버텨주었다.

초인적인 육신의 댈런이야 그렇다 치지만, 이 정도의 강행군을 평범한 사람이 소화하는 건 쉽지 않은 일.

침묵중대원 두 명은 갈수록 안색이 파리해지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입을 꾹 닫고 뒤처짐 없이 따라왔다.

댈런은 이로써 침묵중대의 명성이 그저 허울 뿐인 위명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당연한 거지. 중대장부터가 게임 후반부에 악마를 썰어대는 영웅들 중 하나니까.’

여느 때처럼 표정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가웨인을 보며, 댈런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편 어느 순간부터 주위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네모반듯하던 판석 도로는, 울퉁불퉁한 석재를 짜맞춘 길로 바뀌었다.

대로를 따라 솟아있던 고층 건물은 줄어들고, 대신 곳곳에 커다란 규모의 창고들이 하나씩 눈에 띄었다.

길은 점점 오르막이 되었다. 완전한 산지는 아니지만, 완만하고 긴 능선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점점 지대가 낮아지는 지형.

고지대에 지어져, 광업에 특화된 청동 구역 동부 지구의 전경이었다.

“8구역이면···동부 지구에서 가장 큰 철광이 있는 세 구역 중 하나군.”

경비단이 구축한 방어선에 도착해, 말에서 내린 댈런이 지나가듯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주변을 슥 훑어보았다.

건물은 활용한 임시 경계탑과 거리를 가로막은 목책, 그리고 그 위를 순찰중인 경계병들.

“으으···살려줘.”

신음을 흘리는 부상자들이 텐트로 이송되고 있었다.

고작 오늘 새벽에 구축된 방어선치고, 나름 튼튼하고 체계적인 모습이었다.

뒤따라 말에서 내린 가웨인은, 댈런이 지나가듯 한 말에 의문을 표했다.

“동부 지구를 잘 아시오? 몇 년씩 산 게 아닌 이상, 외지인들은 보통 청동 구역 하면 남부 지구밖에 알지 못하는데.”

그야 그렇겠지. 누가 서울 서초동에 살면서 저 위쪽 도봉동이 어떤 곳인지 알겠어.

교통이 불편한 이 세계에서는 당연히 그보다 더할 것이다. 댈런은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은. 이리저리 주워듣는 게 많아서.”

게임의 중후반부로 접어들면, 이런 세부적인 설정 하나하나에도 적절하게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구역 사이의 이권다툼에서 시작된 갈등이, 그 구역을 고향으로 둔 영웅을 악마의 기사로 만든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제 부모를 감옥에 가둔 옆 동네 촌장을 죽이겠답시고, 언데드 대군을 이끌고 도시 전체를 공격한 네크로맨서도 있는 판이었다.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해서, 강력한 책임감마저 수반되는 건 아니다.

모니터 너머에서 겪어온 이 세계의 온갖 인간군상은, 이 게임의 난이도를 폭증시키는 주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댈런은 가웨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게임에서는 우직하고 충성된, 인류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는 영웅들 중 하나였던 침묵중대장.

허나 그런 영웅이라고 해서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현실이 된 이 세계에서, 그는 과연 게임 속과 얼마나 유사한 인물일까.

약점이야 끝내 극복하면 된다지만, 그의 우직함과 솔직함은 과연 이곳에서도 빛을 발할까.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웨인은 조금 늦게 도착한 두 중대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베톤, 레이. 오늘 먼 길 오가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댈런, 혹시 잠시 시간 괜찮으시오?”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웨인이 향하려던 방향을 슬쩍 쳐다봤을 뿐.

저 멀리 횃불에 둘러싸인 커다란 막사는, 아마도 경비단의 간부들이 밤늦게까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을 회의장일 터.

자연스레 그를 저 막사로 이끌고 있는 가웨인의 모습을 보아하니, 단순히 힘 좀 쓰는 용병으로 이곳에 데려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쯤에서 확실하게 해 두지.”

댈런이 운을 띄웠다.

“내 도움이 어디에 필요한 건지 말해보시오.”

“······.”

사실 별 거 아닌, 용병이라면 으레 할 수 있는 질문.

하지만 가웨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짧지 않은 정적 끝에야 입을 열었다.

“까마귀 둥지의 정보상은 나와···오랜 친분이 있는 사이요.”

댈런은 대답 없이 끄덕였다.

“그녀가 말해주었소. 귀관에 대해서. 귀관이 이 싸움에서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나를 설득했소이다. 많은 걸 말하지는 않았으니 오해는 없길 바라오.”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귀관이 사교도들에 대해 뭔가 많은 내막들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웨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입술을 잘근 씹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댈런이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는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귀관이 사실 북쪽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

“푸흐.”

댈런은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무래도 그 생각 많은 정보상은, 댈런이 북방 야만인이 아니라는 게 많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가웨인에게 무슨 1급 기밀을 이야기하듯이 귀띔했을 것이고.

이 단순한 전사는 그걸 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댈런의 가장 중요한 비밀인 양 어렵게 입을 연 것이다.

‘대체 어디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거야?’

어찌됐건 시에나는 이 도시 최고의 정보상이 될 인재.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능력 하나는 출중했다.

이 짧은 시간에 그의 지난 2년간의 행로를 조사해낸 정보력에 감탄하며, 댈런은 말아올렸던 입꼬리를 추스렸다.

가웨인의 무뚝뚝한 얼굴이 어딘가 살짝 멍한 표정이 되었다.

“왜 웃으시오?”

“···아니, 그냥. 그럴 일이 있소.”

“어쨌든 귀관이 사교도들과 어떤 관계였던 건지, 난 거기에 대해 추궁하고자 하고 싶지 않소. 그럴 생각도 없고.”

가웨인은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검 하나만 잡고 여기까지 온 무식한 사람이지만, 어쩌면 그런 단순한 인간인지라 더 잘 알고 있소. 귀관 같은 사람에게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오.”

댈런은 별 대답 없이 가만히 들었다. 가웨인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귀관 같은 사람은 더욱 신뢰할 수 있지. 우리를···도와주시오.”

젊고 무뚝뚝한 지휘관이 고개를 숙였다.

첫만남 당시, 불타오르는 상회의 건물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댈런은 피식 웃었다.

“맨입으로?”

“······.”

“농담이오. 거참 농담 한 번 못하네. 그쪽은 용병 업계에는 들어오면 안 되겠군.”

가웨인의 무뚝뚝한 표정이 순간 살짝이지만 일그러졌다.

부하들이 곁에 있었다면 그 표정에 잔뜩 겁을 집어먹었겠지만, 댈런은 저게 쩔쩔매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도와주겠소. 걱정 마시오.”

댈런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찬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며, 이 세계가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

멸망을 향한 단초들은 꺾되, 멸망에 맞서는 숭고함들은 지켜내는 게 그가 해야할 일.

그리고 침묵중대장은 그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댈런은 지켜낼 숭고함이 하나 더 늘었다는 점에서 만족했다.

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들어갑시다. 회의가 끝나기까지 얼마 안 남은 듯하니.”

***

커다란 막사 안은 북적거렸다. 그건 그만큼 지금 상황이 심각한 것이라는 증거였다.

원래라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어야 할 경비단의 지휘관들이, 이례적인 사태 때문에 한 곳에 모인 것이니까.

그리고 머리가 많아지면 항상 문제가 생기는 법.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고함과 윽박지름을 들으며, 댈런은 가웨인과 함께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들어갔다가 궤멸되면? 그러면 대체 누가 책임지겠다는 거요!”

쾅!

원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지르는 중년의 지휘관.

주름 가득한 붉은 얼굴에, 사나운 눈썹.

평소에도 화가 많을 듯한 상의 남자는, 그 화만큼이나 푸짐한 뱃살을 갑옷으로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눈 아래 그늘이 짙은 젊은 지휘관이, 배불뚝이 남자의 말에 항의했다.

“그렇다고 8구역의 시민들을 그냥 버려두자는 겁니까?”

“어허, 버리다니!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소이까!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섣불리 진입했다가 패퇴함으로 인해 오히려 시민들의 희망이 사라질 수도 있는 것 아니요!”

대충 들어보니 사교도들을 빠르게 진압할 것인지, 아니면 상황을 두고 지켜볼 것인지에 대한 의견 충돌이었다.

물론 댈런은 정답을 알고 있었다.

역행의 사도들과 같은 악마 숭배자들은, 내버려두면 둘수록 악마의 힘을 빌려 더 세력을 키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괴물과 악마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생각이 좀 박혀 있는 지휘관이라면 그 정도는 다들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배불뚝이 남자는 무슨 생각인지, 빠른 진입을 주장하는 지휘관들의 생각을 강경하게 막아서고 있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요. 저 간악한 사교도 놈들이, 어렵게 구축한 방어선을 넘어 도시를 침공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것! 그럼으로써 순은 구역에서 우리의 지원 요청에 응답할 시간을 벌고, 시민들에게 우리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오!”

“7구역 경비대장님, 그 말이 결국 저 8구역 안의 시민들을 방치하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말은 잘 해야지. 8구역 경비대장, 당신이야말로 가장 먼저 꼬리를 말고 도망친 장본인 아니오?”

배불뚝이 남자는 오히려 8구역 경비대장을 매섭게 물아붙였다. 댈런은 그걸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원래 이런 게임이었지.’

요즘 하는 일마다 잘 풀리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다.

이 게임에서 가장 골치아픈 적은, 괴물도 악마도 아닌 바로 같은 인간이라는 걸.

“다른 구역들과는 달리, 깊은 철광이 있는 동부 지구의 몇몇 구역들은 낮은 거리로 이어지는 길이 없소. 8구역도 그중 하나고. 그저 우리가 땅 위만 막아두면, 보급이 없는 놈들은 알아서 자멸할···.”

“자멸하지 않는다.”

격양된 남자의 말을, 낮고 굵은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원탁의 반대쪽 끝.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반대쪽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고 있는 용병을 향해.

“오히려 몇 배로 불어나 반격하겠지.”

댈런은 무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사람이 그···.”

“이번에 텔리아 상회를 무너뜨렸다는···.”

곳곳에서 수근거림이 퍼지기 시작한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어딜 가나 소문은 달리는 말보다 빠르다. 그리고 소문이라는 건 원래 양날의 검과 같은 법.

지금 같은 경우에는, 운 좋게도 그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원탁을 둘러싼 작은 웅성임의 중심에서, 댈런은 그가 예상하는 미래를 덤덤하게 풀어놓았다.

“7구역 경비대장의 말대로, 결국 순은 구역의 지원군이 해결을 해주긴 할 거요. 하지만 그 엉덩이 무거운 양반들이 움직일 즈음에는, 이미 청동 구역의 절반은 전쟁터가 되어 있겠지.”

톡. 톡.

두드리는 손가락이 순간 멈춘다. 댈런은 낮게 웃었다.

“뭐, 적어도 여기 있는 인원의 태반은 괴인들이 뜯어먹고 남은 뼈다귀가 되지 않을까.”

사실 이건 예상이 아니었다.

이건 댈런이 모니터 너머에서 몇 번이나 겪어왔던, 역행의 사도들에게서 도망쳤던 플레이의 결과들.

청동 구역의 절반이 불바다가 되는, 일종의 분기점이자.

“그런 미래를 원하시오?”

끝내 멸망에 도달하게 될, 수많은 길목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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