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밤(1)
‘대사도께서는···악마를 소환하려 하신다. 지옥의 문을 열고 마물의 군대를 불러오실 거야.’
팔 한쪽이 뼈까지 으스러진 채, 은가면 주문쟁이는 그렇게 말했다.
‘제물이 없을 텐데.’
댈런은 반박했다.
‘최하급 악마를 소환하는 데에도 600명분의 인간이 필요하지. 놈에게 복종하는 마물들까지 소환하려면 그보다 더 필요하고.’
‘어, 어떻게 그런 것까지···?’
‘내가 질문을 하랬나?’
댈런의 발이 슬쩍 올라갔다. 주문쟁이는 곧바로 턱을 덜덜 떨며 대답했다.
‘그, 그분의 육신이, 곧 600명의 인간과 맞먹는다.’
‘···그렇군.’
그렇게까지 나오겠다는 건가.
댈런은 속으로 온갖 쌍욕을 하면서, 은가면 주문쟁이의 목을 끊어버렸다.
여기까지가, 오늘 낮에 있었던 이야기.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이곳은 살아있는 세계다.
모든 존재가 각각 지성과 감정을 가지고, 게임 속 알고리즘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어뜯듯이, 대사도 역시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겠지.
그 극단적인 선택이, 자기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지옥문을 여는 결정이라는 건 예상 밖이었지만.
‘그래서 그렇게까지 병력이 돌입하는 걸 막으려 했던 건가.’
턱살을 출렁이던 배불뚝이 지휘관을 떠올리며,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7구역의 경비대장이 배신자 중 하나인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애당초 게임에서도 놈은 밥 먹듯이 뒤통수를 치곤 했었으니까. 흔한 엑스트라 배신자 중 하나였다.
어쨌든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제물이 많이 필요할 뿐, 지옥의 문을 여는 의식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까.
최하급 악마를 소환하는 것 정도라면, 하루이틀 사이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기서 조금만 지체되어도, 지옥에서 기어나온 마물들은 승기에 취해 무방비해진 아군 병력을 덮칠 것이다.
공격은 최대한 빨라야 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누구를 공격에 가담시키느냐.’
은가면 주문쟁이에게 들은 바로, 청동 구역의 지휘관들 중 몇몇은 이미 사교도들에게 포섭된 상황이었다.
그게 누구냐가 문제였다.
드넓은 청동 구역에서, 수백 명의 병력을 통솔하는 지휘관만 수십이 넘어가는 바.
당장 지금 진영에 모인 경비단 병력만 봐도, 지휘관의 숫자가 서른 남짓 되는 판이다.
아무리 댈런이라도 그 중에 누가 배신자인지 일일이 선별하는 건 불가능했다.
머릿속에 무슨 모든 NPC의 명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계가 현실이 되면서 원래라면 등장하지 않던 이름 없는 NPC들마저 이름을 얻게 된 상황이니까.
이렇게 된 이상, 병력 전체를 동원하는 건 불가능했다.
필요한 건 사교도들뿐 아니라, 혹시 모를 마물의 무리에도 대적할 수 있는 소수의 전투원들.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을 수 있는,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가능한 정예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과 불러모은 것이, 바로 침묵중대장과 원로 마법사였다.
***
“···그리 된 게로군.”
심문의 전말을 들은 원로 마법사 펠버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가 들은 전말은 원래의 게임이 어떻고, NPC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제외하고 한 이야기였다.
“사교도들이 악마를 불러낸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봤네만, 그걸 이 도시에서 보게 될 줄이야.”
“당장 중대원들을 준비시키겠소.”
가웨인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펠버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나와 함께 온 친구들을 데려오도록 하지. 얼마 안 걸릴 걸세.”
댈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헐렁하게 풀어두었던 갑옷 끈을 조이고 내려놓았던 손도끼와 검, 방패를 장비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동안 8구역 경비대장에게 사정을 말해두도록 하지. 두 분 모두, 한 시간 뒤에 다시 보겠소.”
***
준비는 금세 끝났다.
침묵중대는 언제든 전투에 투입될 준비를 마쳐놓는 정예들이었고, 마법사들은 몸만 오면 될 뿐 준비랄 게 딱히 없었으니까.
새벽 3시.
경계를 서는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병력이 전투력 보존을 위해 침소에 들었을 시각.
끼이이―
임시로 구축한 간이 목책 문을 열고, 일흔 명쯤 되는 인원이 방어선을 빠져나왔다.
먼저 침묵중대가, 그 다음으로 엘가이아 마탑의 지원군이.
가장 마지막으로 나와 목책 문을 닫으며, 댈런은 안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젊은 지휘관에게 감사를 표했다.
“배려해주어 고맙소.”
댈런을 위해 몰래 문을 열어준 8구역 경비대장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8구역 경비대, 아니 8구역의 모든 시민들이 당신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댈런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좀 낯간지러운데.
낮 동안 이루어진 구출작전으로, 8구역에서 구출된 시민은 천여 명 이상.
이 젊은 지휘관 역시 가족과 극적인 재회를 이루었다. 그의 눈시울은 아직까지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댈런은 짧게 인사했다.
“다녀오겠소.”
“저는 그동안 첩자들이 부대 내에서 분열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경계하겠습니다. 사교도들을 부탁드립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돌아 어둠 속으로 걸어나갔다.
횃불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길.
앞서간 침묵중대와 마법사들은 이미 어둠 속에 묻혀있었지만, 야간 시야 스킬의 보정을 받은 댈런은 저 멀리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인적 하나 없는 도로를 따라 걸으며, 불빛이 일렁이는 방어선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될 때쯤.
탓―
댈런은 뛰기 시작했다.
‘대사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끌려고 한다.’
놈은 은가면 사도와 수많은 병력들을, 그저 부대를 저지하는 용도로 내보냈다.
모든 병력을 모아 광산에서 결전을 벌였다면, 낮에 있었던 전투보다 더 나은 결과를 예상해볼 법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악마들 중 누굴 소환할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생각에 시간 벌이용으로 희생한 병력들보다 가치 있는 카드라는 거지.’
댈런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적당한 제물로 소환할 만한 악마가 뭐가 있을까.
‘리스트? 아냐, 이런 데 낄 성격은 아니지. 벨자이붑? 놈이 요구하는 제물은 지금의 대사도가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아니면···클라카로스?’
떠오르는 건 많았다. 후보가 하나가 아닌 게 문제였다.
애당초 네임드 악마만 수백 마리가 넘어가는 게임이다. 이름 없는 악마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끝없이 떠오르는 이름들. 댈런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끊어냈다.
‘당장 중요한 건 어떤 악마를 상대하냐가 아니다. 지옥문을 여는 의식을 저지하는 게 최우선 순위야.’
어느새 그의 신형은 앞서가던 침묵중대와 마법사들을 따라잡고 있었다.
댈런이 가까이 다가오자, 다른 일행들 또한 보조를 맞췄다.
“중대 전원, 속보로 이동한다.”
“엘르, 테힐탈라―”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대지술사들은 주문으로 발밑의 모래흙과 자갈을 움직여 속도를 높였다.
일반적인 경비단 병력의 행군 속도보다 배 이상 빠른 이동.
사교도들의 본거지가 있는 광산까지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광산 앞.
“여기인 듯 하오.”
살짝 가빠진 숨을 천천히 내쉬며, 가웨인이 말했다.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절벽이 솟아 있었다.
마치 산의 일부를 칼로 썰어다가 옮겨놓은 듯한, 기이한 모양의 절벽.
그 절벽 아래쪽에는 인공적으로 입구를 다듬은 동굴이 있었다.
끊어진 철로. 말라붙은 핏자국. 여기저기 넘어진 광산차들.
마치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의 입구는, 오래된 폐광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 음산함은 그저 기분때문만은 아니었다. 댈런은 감각 끄트머리에 걸리는 어떤 불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인 오감과, 그 오감이 초인의 영역에 들어서며 느끼게 된 육감.
그 둘 모두와도 전혀 다른, 마력을 느끼는 또 하나의 감각.
흔히 기감이라, 혹은 마력 감응력이라 부르는 마법사들의 감각이었다.
“맞는 것 같네. 불길한 마력이 느껴져.”
펠버는 천천히 수인을 맺으며 말했다. 다른 마법사들도 비슷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즉시 주문을 사용할 수 있게 미리 준비해두는 모습이었다.
침묵중대 역시 전원이 무기를 뽑아들고 자세를 낮췄다.
긴장감 내려앉은 분위기. 적막 속에서 들리는 호흡들.
댈런은 그 사이에서 가만히 광산 입구를 바라보다가, 그냥 혼자서 천천히 걸어나갔다.
“댈런?”
스윽.
도끼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던지지는 않았다.
그는 도끼를 천천히 던졌다 받았다 하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댈런? 지금 뭘······.”
찰박.
그리고 발소리가 들렸다.
뭔가 축축한 바닥을 내딛는 것 같은, 습기 가득한 발소리가.
댈런은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광산 입구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 끝, 주 갱도의 지지대가 달빛을 가려 만들어진 그림자 속에서 한 인영이 걸어나왔다.
찰박···. 찰박···.
진액이 질퍽하게 묻어나는 발걸음. 온몸에 긁히고 찢어진 상처 사이로, 왈칵이며 새어나오는 진액과 핏줄기들.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가 거진 다 벗겨져 알아보기 힘든 얼굴이었지만, 댈런은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다 뜯겨나간 갑옷 사이로 출렁이는 뱃살과, 갈기갈기 찢어져 살점이 대롱대롱 매달린 이중턱에서.
원래 붉던 얼굴은 이제 피범벅이 되어 새빨개져 있었다.
댈런은 끔찍한 몰골이 된 7구역 경비대장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들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때 그나마 멀쩡한 한쪽 눈으로 댈런을 발견한 경비대장이,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소리쳤다.
“으어, 으어어. 살려줘. 배, 배신, 놈들이―어억!”
콰직!
그리고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그는 눈을 까뒤집었다.
“역겹군. 배신자 새끼가 배신을 운운하다니.”
“커억, 어으으······.”
경비대장의 가슴팍을 관통한, 두툼하고 굵직한 팔뚝.
손과 팔 전체를 덮은 매끈한 파충류의 비늘이, 피에 젖은 채 달빛을 반사해 광택을 흘려댔다.
“그 어디에도 쓸 데 없는 버러지 같은 네놈의 생명이지만.”
그와 똑같이 생긴 두꺼운 손이, 천천히 경비대장의 머리를 잡아채고.
“걱정 말도록. 제물로서 분에 넘치는 영광을 누렸으니.”
짐승의 것처럼 그르렁대는 굵고 낮은 목소리가 말을 맺는 순간, 우악스런 손아귀 안에서 경비대장의 머리가 폭발했다.
콰지직!
후두둑 떨어지는 하얗고 붉은 조각들.
댈런은 머리를 잃고 쓰러지는 시체 뒤, 산만 한 덩치의 은가면 사도를 가만히 쳐다봤다.
놈은 세로로 죽 찢어진 눈을 번뜩이며, 마법사와 침묵중대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때맞춰 손님들이 오셨군. 늦지 않게 대접해드릴 수 있게 됐어.”
쿠웅―
놈의 뒤.
묵직한 울림이 갱도 입구를 메아리쳤다.
쿠웅―
댈런만큼이나 큰 사도의 덩치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자가 광산의 입구를 비집고 나타난다.
쿠웅―
달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건, 수십 인간의 육신이 한데 붙어 만들어진 듯한 괴생명체.
긴 꼬리를 뒤쪽으로 늘어뜨리고, 아름드리 나무만큼이나 굵은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한 괴물은.
끼에에에에에에―!!
수십 개의 입으로 동시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지, 지옥의 마물!”
그 담력 강한 침묵중대마저 움츠러든다.
인간 수십의 팔과 다리, 머리, 몸통이 역겨운 형태로 한데 뒤섞인 괴물은 충분히 그럴 정도의 위압감을 뿜어댔다.
침묵중대장 가웨인마저 이를 악물고 놈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평소와 별 달라지지 않은 건, 댈런 한 명뿐이었다.
휘릭, 툭. 휘릭, 툭.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도끼를 들었다, 받았다 하는 그의 손.
마지막 남은 은가면 사도는 그걸 보더니 낮게 클클거렸다.
“역시 대사도께서 경계하시는 전사답군. 여유로워. 대체 그 머리통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꺼내보고 싶을 정도야.”
댈런은 별 대답 없이 은가면 사도를 힐끗 보고는, 다시 괴물을 올려다봤다. 도끼를 던졌다 받았다 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게 그 유명한 손도끼군. 우리 은가면 사도들 중 절반 이상을 죽인 그 도끼 말이야.”
“아닌데.”
“···무슨 소리지?”
“이거 그 도끼 아니라고, 부숴먹었거든.”
가면 너머, 세로로 길쭉하게 찢어진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아니다. 최근에 만난 주문쟁이는 이걸로 죽인게 맞군. 내가 잘못 생각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말하긴 뭘 말해.”
댈런의 손이 흐릿해졌다. 패래랙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약간 늦게 들렸다.
은가면 사도가 황급히 몸을 틀며 팔을 들어올렸지만, 도끼를 피해내기엔 너무 늦은 동작.
퍼억―!
날붙이로 두툼한 가죽을 찍어내는 소리와 함께, 놈은 가면 파편을 흩날리며 버려진 광산차 안에 처박혔다.
댈런은 휘휘 손을 풀며 말했따.
“그냥 블러핑 좀 한 거지. 고지식하기는.”
그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 오랜만에 힘을 좀 써도 될 것 같았다.
저번 레벨업으로 얻은 능력치를 체력에 투자했고, 상회에서의 전투 이후로 용혈의 재생 인자도 숙련도가 많이 오른 상태.
몸 풀기로 저 시체괴물 정도면 딱 적당했다.
키에에에에에―!!!
은가면 사도가 쓰러지자 괴성을 질러대는 시체괴물.
언제라도 달려들 듯이, 놈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침묵중대! 돌격―”
“엘르···.”
마물의 비명 앞에서, 숙련된 전투원들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가웨인이 돌격을 외치고, 마법사들의 입술이 달싹이는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
그리고 그보다 반 박자쯤 앞서서.
콰아앙!
댈런이 서 있던 자리에서 폭발하듯이 흙더미가 튀어올랐다.
그리고.
뻐어어엉―!
울부짖던 시체괴물의 아래턱이, 바위로 찰흙덩이를 내려친 듯 터져나갔다.
끼에에에에―
댈런은 덜렁거리며 남아있는 위턱에 매달린 채,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웃었다.
“어디, 처음 만나는 지옥 마물은 얼마나 경험치를 주는지 확인해 보자고.”
그건 사납게 입꼬리를 말아올린, 포식자의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