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성검(1)
댈런은 여관에서 일주일을 푹 쉬었다.
근력을 잘못 써서 고생한 게 벌써 세 번째. 그중에도 이번이 가장 후유증이 심했다.
고블린을 맨손으로 찢어발긴 첫 번째야, 그냥 약한 근육통이 며칠 갔을 뿐이었다.
당시에는 용혈의 재생 인자도 없었음을 생각하면, 그저 약간 삐끗한 수준이었던 것.
상회장을 반토막으로 잘라버린 때는 조금 심각했다. 하루종일 곯아떨어졌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세 번째인 지금은.
뚜두둑!
“···썩을.”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만성적인 근육통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중세랜드. 파스 하나가 없어서야.”
댈런은 투덜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거대한 덩치에 침대가 끼익거리며 신음을 토했다.
그래도 지난 일주일간, 댈런의 몸은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첫 사흘은 꼼짝없이 침대에서 곯아떨어졌다.
몇 차례나 죽을 정도로 망가진 몸을, 용혈의 재생 인자로 끊임없이 재생한 대가였다.
사실 나흘째부터는 근육통이 좀 있긴 해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댈런은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왠지 그러고 싶어서였다.
‘쉼이 필요하긴 했지.’
댈런은 뻣뻣한 어깨를 주무르며 생각했다.
이 도시에 도착한 뒤, 말 그대로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첫 시체를 회수하고, 시에나의 의뢰를 받고.
하수도의 마법사를 시작으로 은가면 사도들을 하나씩 처리하다가, 놈들의 대계에 휘말려 한바탕 전쟁을 벌이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었고, 많은 것을 얻어낸 몇 주였다.
자신을 향한 작은 보상의 의미로라도,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시간은 꼭 필요했다.
‘···너무 많이 빈둥거린 것 같긴 한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댈런은 고개를 털었다.
왜, 지구의 정신과 의사들도 쉼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나.
전문가가 괜히 전문가가 아닌 법이다.
꼬르르르륵.
“······.”
아침부터 아주 대차게 울어대는구만.
댈런은 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방을 나섰다.
타다닥. 타닥.
널찍한 거실에, 난롯불이 타닥거리면서 타오르는 소리만 맴돈다.
찻주전자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걸린 채 따뜻한 온도를 유지했고, 탁자 위에는 나름 진수성찬이라 해도 좋을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이곳은 칼과 방패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다. 심지어 숙박비도 공짜.
당연히 원래 공짜는 아니었다.
갈리오스 상단주인 볼크마 갈리오스가, 댈런 대신 납부하는 방식으로 머물고 있는 것.
이번 일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가 그인 만큼, 나름대로 은혜를 열심히 갚아보겠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역행의 사도들을 쓸어버리는 과정에서, 댈런이 텔리아 상회를 무너뜨리며 근방 상권은 한바탕 폭풍을 겪었다.
상회가 독점하던 상권은 조각조각 갈라져 다른 상인들에게 뿌려졌고, 수완 좋은 갈리오스 상단주는 이 기회를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상단의 몸집은 못해도 배 이상 불어났다던가.
시에나가 보내준 편지에 의하면, 앞으로 몇 년 안에 갈리오스 상단이 이전 텔리아 상회의 위치를 대신할 가능성도 있었다.
어쨌든 그만큼 큰 떡고물을 얻어먹게 되었으니, 볼크마는 댈런에게 무엇이라도 더 해주지 못해 안달인 상황이었다.
정작 댈런이 일주일동안 문을 걸어잠그고 아무도 만나주지 않아, 문전박대만 몇 차례 당하고 말았지만.
“음. 맛있군.”
댈런은 아침을 먹으며 시에나가 남긴 편지를 뜯어보았다.
빵조각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척 보기에는 치즈조각인지 종이인지 구분하기 힘든 편지.
시에나는 댈런이 방에 칩거하는 사이, 급변하는 도시 정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하루에 한 번씩 보내주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이번 일을 통해 간접적으로 얻어간 것이 많을 테니, 일종의 서비스 개념인 것.
호텔 조식과 함께 신문을 받아보는 느낌이라, 묘한 향수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당신 이름으로 온 의뢰들 때문에, 지명의뢰함이 터지기 직전이야. 거기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얼굴도 안 비추던 거물들이 술집을 몇 번씩이나 방문하고 있어. 만약 조만간 들를 생각이라면 조심해.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꽤 늘었으니까.」
이거 본의 아니게 연예인이 되어버렸군.
댈런은 편지를 반으로 접으며 낮게 웃었다.
그는 접은 편지를 난롯불에 던져넣고 아침을 마저 먹었다.
이 최상급 방에는 식사까지 룸서비스로 제공됐다.
물론 가격이 꽤 나갔지만, 볼크마가 내는 것이니 상관은 없었다.
콩과 양파,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가 작은 솥째 자리했고, 그 곁에는 아침에 막 구워낸 빵이 종류별로 한 덩이씩 놓여 있었다.
큰 그릇에 가득 담긴 샐러드와, 북부 지구에서 직송해온 듯한 생선 구이까지.
마무리는 얼음을 가득 채운 시원한 맥주 한 잔이었다.
“크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후식으로 곁들여진 제철과일까지 입에 털어넣은 댈런은, 물수건으로 손과 입을 슥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푹 쉬었으니, 다시 바쁘게 움직일 시간이었다.
일주일동안 방구석에서 칩거하는 바람에, 밀린 일정이 상당히 많은 상황.
‘일단 까마귀 둥지부터 들러볼까.’
댈런은 천옷 위에 허리띠를 걸치고, 손도끼를 대충 꽂아넣었다.
시에나가 저렇게 편지를 남길 정도면, 그의 명성이 도시 전역으로 알음알음 퍼지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숨어다니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댈런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봐야 파리들은 계속 꼬여들 테니까.’
어차피 앞으로 그의 명성은 늘어만 갈 터.
곁에서 뭐라도 얻어먹으려는 이들 역시, 별다른 조치 없이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날 것이다.
놈들로 인해 무언가 잘못되는 걸 사전에 방지해두기 위해서라도, 이 기회에 확실하게 선을 그어둘 필요가 있었다.
‘파리한테는 충격요법이지.’
어디 파리채 한 번 휘두르러 가 볼까.
댈런은 허리춤의 도끼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방을 나섰다.
***
그날 오후. 청동 구역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남부 지구의 대로변.
느지막한 오후의 붐비는 인파 사이를 뚫고, 댈런은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자박. 자박.
판석이 점점 사라져 흙길이 되어가고, 횃대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한편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건달이나 부랑자들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시간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평소의 모습과 비교하면 꽤나 느슨한 분위기.
얼마 전의 폭풍 같은 일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듯했다.
경비단이 뒷골목을 한바탕 들쑤시고 갔으니, 알아서 한동안은 몸을 사리는 것이겠지.
뒷골목의 실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청동 경비단이 뒷골목을 방임하는 건 인력난 때문이지, 결코 그 자체의 무력이 약해서가 아니라는 걸.
스윽.
댈런은 문득 품속에 손을 넣어 손바닥만 한 패 하나를 꺼내들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금박 입힌 용병패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시에나의 술집으로 향하기 전, 그는 청동 경비단에 들렀었다.
고객이 사례를 하겠다고 했으면, 찾아가서라도 받아내는 게 용병의 도리니까.
‘용병 길드와 이야기를 해서, 이번 일을 귀관이 청동 경비단의 공식 의뢰를 맡아준 것으로 처리했소. 귀관의 공로에는 미치지 못하는 약소한 보상이지만, 부디 받아주시길 바라오.’
침묵중대장 가웨인이 그렇게 말하며 건넨 게, 바로 이 금패와 금화 서른 닢.
이로써 시체를 잔뜩 회수해 일신의 능력이 향상된 것 이외에도, 이번 일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 역시 주어진 셈이었다.
돈이야 많을수록 좋지.
명성이나 지위도, 잘만 다루면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자원이었고.
댈런은 금패와 함께 받은 돈주머니의 묵직한 감촉을 즐기며, 천천히 시에나의 술집으로 걸어갔다.
[까마귀 둥지]
[영업시간 : 오후 4시 ~ 오전 2시]
그렇게 영업시간이 약간 앞당겨진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상 외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번에 갈리오스 상단이 포목업 쪽으로 확장을······.”
“경비대 몇 곳이 감사 대상으로 올랐다는군. 글쎄, 경비대장이 배신자였다지 않나?”
“필로폰네 과수원 가봤나? 어허, 아직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구먼.”
테이블마다 두셋 이상씩 꽉꽉 들어찬 손님들.
왁자지껄한 가운데 풍겨오는 연초와 주향(酒香).
영업시간이 앞당겨졌으니 술집 특유의 시끌시끌함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평소보다 손님의 숫자가 눈에 띄게 많은 것 역시 사실.
그 원인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끼이익.
술집을 가득 채우던 소란함이, 반지하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댈런의 발걸음에 따라 썰물처럼 밀려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동부에서 왔다는···.”
“······쉿.”
“······.”
왁자지껄 오가던 말소리가 줄어든다.
사람들의 이목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뚜벅. 뚜벅.
댈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테이블에 다가갈 때쯤에는, 술집에 완전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단 한 사람을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동자들.
“멜론드 하이랜더 한 잔.”
댈런은 그 시선의 집중이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레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했다.
달그락.
잔을 닦던 버번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술을 따른다.
그동안 댈런은 주점 안을 한 번 슥 둘러봤다.
“큼! 크흠! 그래서 이번 거래가 말일세···.”
“북부 지구에 양식장을 확장한다는 소문, 그게 진짜란 말인가?”
그 무던한 시선에,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저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 서로 좀 편하게 마시자고.
댈런은 픽 웃으며 버번이 건네주는 잔을 받았다.
잔을 홀짝이며 좀 더 관찰해보니, 다른 손님들 역시 술병이며 안줏거리를 잔뜩 시켜놓은 채였다.
고급 양주나 포도주,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말린 과일이나 과자 따위의 안주들.
‘술집 매상이 못해도 배는 올라갔겠군.’
댈런은 독한 술로 목을 축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이, 청동 구역의 유명한 영웅 아니신가! 거 얼굴 한 번 보기 참 힘드네 그려!”
취기에 약간 절여진 듯,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다가온다. 댈런은 무시하고 가만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 사이 남자는 친근한 척 댈런의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치며, 다른 팔꿈치를 바 테이블에 턱 하고 기댔다.
뭐야 이 새끼는?
“바텐더! 그 뭐냐, 멜랑드로 하이랜더? 나도 이 용병이랑 같은 거 한 잔 부탁하겠어.”
댈런은 뚱한 눈으로 남자를 돌아봤다.
고급스런 원단의 제국식 옷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허리띠춤의 장식 화려한 검. 기름을 잔뜩 바른 머리칼과 수염. 남부 특유의 혀 꼬부라진 발음까지.
뭐 하는 놈팽인지는 단박에 결론이 나왔다.
‘제국 출신의 젊은 귀족이군. 어설프고 경험 없는 귀족가의 자제.’
갓 스물이나 넘겼을까.
수염을 길게 길러 연륜 있어보이게 노력한 티가 나는 젊은 귀족은, 댈런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
“자네, 은패 용병 주제에 명성이 아주 자자해! 하지만 아무리 이름값이 높다 해도, 그렇게 낯짝을 두껍게 깔면 안 되는 법이야.”
넘치는 자신감을 가장한 목소리.
그러나 그 속에 숨겨진 초조함을 읽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댈런은 귀찮아지기 전에 날파리를 쫓아내기로 했다.
“자네, 내가 자네를 찾으러 이 술집에서 헛걸음을 몇 번이나 한 지···.”
“곱게 술이나 마시지.”
낮고 굵은, 위협적인 목소리.
젊은 귀족이 움찔하며 말을 멈춘다.
“어, 어어···.”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다가, 혼자 발이 꼬여 엉덩방아를 찧었다.
콰당탕!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는 젊은 귀족.
그 뒤에서 살기등등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호위기사는, 단번에 검을 뽑아들고서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댔는지 아느냐! 이분은 대제국의 충성스러운 세브론 남작, 그 남작가의 삼남이시다!”
아주 쌍으로 지랄을 해대는구만.
댈런은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얼음만 남은 잔을 내려놓은 그는, 호위기사를 똑바로 노려보며 사납게 미소지었다.
“글쎄. 철없는 어린애라는 건 알겠는데.”
“감히 뚫린 입이라고―”
그래.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거지.
예상대로 호위기사는 검을 휘둘러왔고, 댈런의 시간은 순간 느려졌다.
시이이이―
검끝이 유려하게 그리는 호선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 보인다.
댈런의 극도로 예민한 감각과, 그 감각이 받아들이는 자극을 모두 감당하고도 남을 지능 수치로 말미암은 현상.
그 여유로운 간극 속에서, 댈런은 충분히 고민할 수 있었다.
이 놈을 여기서 죽여?
아니면 적당히 패서 내쫓아?
‘사실 죽여도 큰 문제는 없는데.’
말이 귀족이지, 제국에는 남작 호칭이 붙은 사람만 백 명이 넘는다.
거기다 이곳은 제국이 아닌, 팔시온을 위시로 한 도시연합의 심부.
남작 본인도 아닌 아들, 그것도 셋째 아들의 호위기사 정도면 죽인다 해서 큰 후환이 뒤따르지는 않을 테였다.
‘그렇다고 사람을 막 죽이는 야만인 이미지는, 한 번 쓰면 벗기 참 까다롭단 말이지.’
다만 고민하는 이유는 역시 평판이었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 댈런의 소문을 듣지 못한 이는 한 명도 없을 터.
쉽게 말해, 여기서 댈런이 취하는 손속에 따라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결정된다 보면 되었다.
쉽게 보이는 건 최악이다.
허나 마냥 손속 잔인한 야만인으로 보이는 것도 차악.
최선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찰나, 댈런의 느려진 시간을 가르고 들어오는 다섯 개의 기척이 있었다.
댈런은 속으로 웃었다.
역시, 집주인이 해결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퍼버버버벅!
원래대로 되돌아온 시간감각 속.
호위기사의 팔다리에 정확히 다섯 발의 화살이 연달아 꽂혔다.
좌중의 시선이 댈런에게서 화살이 날아온 쪽으로 쏠린다. 댈런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또각.
굽 낮은 구두가 마룻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숙련된 손놀림으로 5연발 석궁에 화살을 끼우는 긴 흑발의 여성.
“어처구니가 없네. 싸구려 술만 쳐마시면서 며칠째 빌붙어앉은 주제에, 내 손님한테 무기까지 휘둘러?”
“끅, 끄윽······.”
술집의 주인이자 정보상인 시에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장전을 끝마쳤다.
그녀는 팔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호위기사의 머리를 지그시 짓밟은 채, 그 가슴팍에 석궁을 겨누며 말했다.
“진상 짓도 정도껏이지. 제국의 기사님 눈에는 미궁도시가 무슨 쥐새끼 소굴로 보이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