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성검(2)
장전된 석궁의 시위만큼이나 팽팽하게 당겨진 술집의 분위기.
어느 순간에 방아쇠가 당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공기 속.
“시에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댈런이 입을 열었다.
“······.”
그 말에 술집의 주인, 시에나가 댈런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미간에 주름이 팍 들어간 채, 사납게 째려보는 눈빛.
댈런은 그 시선을 무심한 표정으로 받아내며, 잔에 남은 얼음을 오도독 씹었다.
이거 맛있네. 마법으로 얼렸나?
“······이번만 봐주는 건 줄 알아.”
시에나는 분한 듯 숨을 씩씩거리며, 바닥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호위기사에게 속삭였다.
또각.
그녀는 기사의 머리를 짓밟던 구둣발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선 아직까지도 자빠져 있는 젊은 귀족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야, 네 호위기사 데리고 내 술집에서 꺼져. 애먼 곳에서 기사 하나 잃고 너네 아버지한테 혼쭐나기 싫으면, 빨리 신전이건 약재상이건 찾아가는 게 좋을 거야.”
“으, 으어. 아, 알았다. 쏘지 마.”
“당장 꺼져. 셋 센다. 셋, 둘,···.”
“으아아아!”
줄어드는 숫자에, 젊은 귀족이 허둥지둥 일어난다.
그는 팔다리가 화살에 꿰인 자신의 기사를 부축하더니, 쏜살같이 술집을 빠져나갔다.
쿵.
두 사람이 떠나는 걸 끝까지 노려보던 시에나는, 술집 문이 닫히자마자 몸을 휙 돌려서 뒷문으로 향했다.
“댈런, 좀 늦었네. 당신 앞으로 온 지명의뢰들에 관해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러지.”
와자작.
댈런은 잔 안에 남은 얼음을 입에 털어넣은 뒤,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이 뒷문으로 빠져나간 뒤.
스윽. 스윽.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술집 안에는 한동안 버번이 잔 닦는 소리만 들렸다.
정적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까 하던 거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말일세.”
“동부 지구에서 사교도 조직이 토벌되었다는 소문 들었나?”
하나 둘.
손님들은 다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웬 놈팽이 하나가 봉변을 당한 거야, 그 놈의 팔자일 뿐.
청동 구역의 뒷골목 정보상까지 찾아온 손님들은,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 하나 죽는 거야, 이 동네에서 으레 있는 일.
겁을 집어먹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사건이다.
오히려 대부분은 댈런과 시에나의 반응을 곱씹으며, 어떻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댈런의 몸값은 좀 더 높게.
접선하는 경로는 되도록 까마귀 둥지의 정보상을 통해서.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은, 그런 계산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이었다.
“동부 지구 7구역은 쇠퇴기로 접어든 게 확실하다더군.”
“침묵중대가 신규 인원을 차출하고 있다던데. 아는 바가 있는지···.”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떠도는 소문과 정보들을 교환하는 손님들.
철벅. 슥. 슥.
그들 사이에서, 버번은 말없이 바닥의 핏자국을 대걸레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
“연기는 만족하나?”
달칵.
시에나의 사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댈런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시에나는 구두굽을 경쾌하게 또각거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생각 이상이던데? 겉이 곰 같아서 그렇지, 속은 누구보다 늑대라니까.”
“욕처럼 들리는군.”
“그럼 늑대가 아니라 뱀이라고 해줄까?”
“그건 쌍욕이고.”
시에나가 깔깔 웃었다. 방음이 잘 된 정보상의 사무실은 그렇게 웃어도 밖으로 작은 소리조차 새어나가지 않았다.
찻잎 담은 통을 달그락거리는 그녀를 두고, 댈런은 길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가구를 몇 개 새로 들여왔군.”
“맞아. 누구 덕에 술집 장사가 아주 잘 됐거든. 경비대 지휘관들이 절반 넘게 모인 곳에서, 대놓고 음지의 정보상을 팔아넘기는 건 무슨 매너야?”
“덕분에 손님이 늘었잖소. 술집에나, 정보상에나.”
댈런이 낮게 웃었다. 시에나는 잔 두 개와 다과를 내오며 말했다.
“···덕분이긴 하지. 내가 빚지는 걸 참 싫어하는데, 당신한테는 벌써 두 번이나 졌네.”
청동 구역의 고객들이 사교도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해 준게 첫 번째.
그 과정에서 정보상의 입지를 크게 늘려준 게 두 번째.
시에나가 그렇게 덧붙이는 사이, 댈런은 진중한 태도로 잔을 들고는 향을 음미했다.
“음.”
커피 향기.
오랜만이었다.
지난 몇 주간 워낙 바빴던 나머지, 엘가이아 마탑의 원로 마법사가 보내준 원두를 이제서야 맛보게 된 것.
시에나는 그런 그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운을 띄웠다.
“어떻게 갚을까. 뭘 원해?”
댈런은 대답 없이 찻잔을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
뭉근하게 퍼지는 고소함과, 입 안쪽으로 퍼지는 씁쓸한 각성효과.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은은하게 남는, 살짝 시큼한 잔향까지.
이거 진짜 죽여주네.
한동안 그 향과 맛을 즐기며 침묵을 지키던 댈런은, 시에나가 잔을 반쯤 비웠을 무렵에서야 입을 열었다.
“난 고객이오. 그쪽은 정보상이자 의뢰 중개인이고.”
“그렇지.”
“그럼 그냥 맡은 일을 잘 해주면 되는 거요. 그러다보면 언젠가 내가 빚을 질 날이 오겠지.”
시에나는 말없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사무실에는 한동안 두 사람의 홀짝거림만 맴돌았다.
그 정적 속에서, 댈런은 문득 생각했다.
‘뱀이라.’
이 게임에 있어서 능숙함과 교활함으로 따지자면, 절대 틀린 비유는 아니겠지.
그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음의 빚이라는 독을 주입해왔으니까.
‘영입 대상인 영웅 후보들에게, 심적인 채무감만큼이나 치명적인 독도 없지.’
단순한 돈이나 물건으로 누군가의 호감을 사는 건 쉽지 않다.
그보다 효과적인 건 거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적당한 수준의 부담과 채무감.
그건 수백 회차가 넘도록 이 게임을 거듭하면서, 댈런이 NPC들을 영입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 게임이 살아 숨쉬는 세계가 되었다 해서, 그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르베론에게는 채무관계를 해결하고 좋은 입지의 대장간을 열어줌으로 빚을 지웠고.
볼크마에게는 목숨을 구해주고 상권을 장악하게 도와줌으로써 손에 족쇄를 채웠다.
펠버의 제자를 구해주고, 가웨인에게 복수할 기회를 열어준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그리고 시에나 에클라시아는, 최후반부까지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NPC중 하나지.’
가웨인이나 르베론 아하킴이 영입 1순위라면.
시에나는 단언컨대 영입 0순위다.
아직까지 본신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서도, 음지를 거머쥔 정보상이자 준수한 전투원인 그녀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 비밀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더욱더 큰 전력이 되어갈 테지.
물론 그 전제에는 그녀의 기질적인 성향이 기반되어 있기도 했다.
한 번 자기 사람이라 확정한 순간부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배신하지 않는 고지식한 성향.
‘호감도 올리기가 미친듯이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어느 지점만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니까.’
그리고 이 게임을 오래 플레이한 고인물의 감은, 이미 그녀의 호감도가 그 지점에 근접하게 도달했다고 말해주었다.
근래 들어서 끊임없이 터져나온 사건들과, 그 사이 보여준 댈런의 모습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
달칵.
댈런은 깨끗하게 비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거진 다 넘어온 상태라면, 여기서 굳이 더한 부담을 줄 필요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슬쩍 느슨하게 풀어주는 게 더 나은 선택지.
조금 천천히 돌아가더라도, 확실하게 사로잡는 게 사람의 마음을 얻는 열쇠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시오.”
“···뭐?”
“역행의 사도들과 싸울 때, 놈들의 동향을 알아내는 데 크게 일조하지 않았소. 저런 날파리들을 일주일 씩이나 가게에 붙잡고 있던 것도, 저놈들이 나에게 직접 꼬이지 않도록 편의를 봐준 것일 테고.”
시에나가 댈런이 올 때까지 저런 진상 손님을 방치한 건, 그녀 자신의 이득보다는 댈런을 위해서가 컸다.
사실 그녀 정도 되는 사람이면, 제국 저 구석 영지의 남작가 아들 정도야 크게 꺼릴 상대가 아니다.
그 호위기사가 아니라 본인의 머리에 석궁을 박아버렸다 해도, 까마귀 둥지의 이름으로 심심한 유감 한 번 표하면 그만일 테니까.
그럼에도 댈런이 올 때까지 그런 진상 손님을 쫓아내지 않고 있었다는 건 뭘 의미하는가.
‘일종의 거름망이자 미끼를 자처한 거지.’
날파리들이 댈런에게 직접 꼬이지 않게, 귀찮음을 감수하고 중간에서 걸러주는 거름망.
어차피 그녀가 나서서 쫓아내봐야, 날파리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 목표가 댈런 본인으로 바뀔 뿐.
어쩌면 그가 묵고 있는 여관에서 저런 진상 짓거리를 한 번 더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관까지 찾아왔다면, 그의 손에 한 번 더 두들겨 맞을 뿐이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맙지.”
달칵.
그녀가 빈 잔을 내려놓았다.
“다만 나라고 손해 볼 행동이었던 건 아냐. 내가 얻어가는 것도 분명 있으니까.”
시에나는 그렇게 말하며 잔 두 개를 가지고 일어섰다.
항상 한 수를 숨겨두는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오늘따라 유독 솔직한 태도다.
이 역시 그녀의 신뢰도가 임계점에 가까워졌다는 증거.
새로 커피와 차를 내리는 그녀를 보며, 댈런은 말없이 낮게 웃었다.
‘얻어가는 게 있었다라.’
오히려 기꺼운 일이다.
아무 것도 얻어가지 못했으면, 그거야말로 오히려 무능한 정보상이라는 소리니까.
능력 없는 동료는 필요하지 않다.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댈런에게 필요한 사람은 가진 바 능력이 출중한 이들뿐.
설령 내 편으로 만드는 게 한없이 어려운 이들이라도, 중요한 건 그 난이도가 아니라 능력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종말 앞에서, 유능한 영웅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법이니까.
어쨌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댈런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지명의뢰는 뭐요?”
기다렸다는 듯이 책장 한쪽에 꽂혀있던 종이뭉치를 꺼내오는 시에나.
테이블 위에 올려진 건 두툼한 의뢰서 묶음이었다.
거의 반 뼘 두께쯤 되어보이는 종이더미. 시에나는 찻잎을 마저 달그락거리며 말했다.
“좀 길어질 수 있는데, 차 한 잔 더 하면서 이야기할까?”
“그래야겠군.”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서류작업에, 커피 한 잔으로는 부족한 법이다.
***
지난 일주일 남짓한 시간동안, 그에게 들어온 지명의뢰는 총 마흔여섯 건이었다.
의뢰자의 신원이 불명확하거나, 너무 얼토당토않은 의뢰들은 한 번 걸러냈음에도 그 정도.
시에나에게 간략한 브리핑을 듣던 댈런은, 어느새 눈꺼풀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프로그맨과 괴인 수백을 때려죽일 때도 느껴본 적 없는 정신적인 피로감.
‘이 정도면 마물보다 서류더미가 더 공포스러울 지경이군.’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그의 앞에서, 시에나는 서른세 번째 의뢰서를 요약하다 말고 슬쩍 내려놓았다.
그녀가 말했다.
“피곤하지?”
“쉽지 않군. 하나씩 요약해달라고 했던 말, 취소하겠소.”
역시 정보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댈런의 너스레에, 시에나가 작게 웃으며 늘어져 있는 의뢰서를 모아 한 묶음으로 만들었다.
“그냥 조건에 맞게 골라주는 게 서로 편할 것 같네. 보수로 원하는 금액대나 물건, 아니면 선호하는 의뢰 내용 같은 거 있어?”
댈런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체력을 증진시키는 비약. 혹은 그런 종류의 비전 주문이나 의식을 내어줄 수 있는 의뢰주라면 좋을 듯하군.”
이 세계에서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레벨업밖에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레벨업은 플레이어만이 가능한 특권.
다른 NPC들은 몇 년씩 지독한 수련을 거치거나, 아니면 특별한 방법으로 본신의 능력을 향상시켰다.
‘특별한 비약이나 영구적으로 적용되는 주문, 혹은 의식이 대표적이지. 악신과의 계약도 그 중 하나고.’
쉬는 동안 수 차례나 고민해봤지만, 레벨업으로 부족한 체력을 올리기는 요원한 일이다.
거기다 과거에 그가 키웠던 캐릭터들을 떠올려보면, 체력 능력치를 중점적으로 올렸던 경우도 그리 많지 않았다.
무너진 능력치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
물론 그 전후사정을 모르는 시에나는, 댈런이 내건 조건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체력? 당신이 체력이 부족할 일이 있어?”
“이렇게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어보니, 확실히 부족함이 느껴지더군.”
낮게 웃으며 둘러대는 말.
시에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 마물을 때려잡는 거랑, 엉덩이 지구력이 좋은 거랑은 다르니까.”
오히려 그의 장단에 맞춰주면서, 자세한 언급을 두루뭉술 피해간다.
누구에게나 가장 깊이 감춰둬야 할 비밀이 있다는 건,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바였으니까.
“체력 증진이 가능한 비약이나 주문, 혹은 의식이라······. 잠시만 기다려줘.”
“그러지.”
댈런은 커피를 한 잔 더 홀짝이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시에나는 그 사이 오십 건 가까이 되는 의뢰를 빠르게 분류하고, 한 번 걸러냈던 것들 중에서도 조건에 맞는 게 없는지 다시 찾아봤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댈런이 커피 한 잔을 다시금 깔끔하게 비워냈을 무렵 그녀가 말했다.
“여기. 대충 여덟 개 정도로 추려졌어.”
시에나는 추려낸 의뢰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해서 설명해주었다.
여덟 개 중 다섯은 약초를 주로 다루는 상단이나 서부 구역의 농장주, 그리고 뒷골목의 마약상들의 의뢰서였다.
댈런은 그것들을 테이블 한쪽에 슬쩍 밀어두었다.
“이건 일단 보류하도록 하지.”
사실 약초상들의 의뢰를 받아서 나쁠 건 없었다.
영약의 원재료를 다루는 이들이니만큼, 댈런의 목적과 가장 가깝다 봐도 무방했으니까.
그러나 댈런이 원하는 건 단순한 건강증진 목적의 약초가 아니다.
그의 초인적인 육신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전설의 약초나 영약이 필요할 터.
‘그런 급의 물건을 취급하는 사람들은, 이 드넓은 청동 구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지.’
그리고 그 정도 되는 NPC라면, 당연하게도 댈런의 머릿속에 이름부터 이명까지 다 담겨 있었고.
지금 그에게 지명의뢰를 넣은 이들 중에는, 아쉽게도 그런 거물 약초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머지 셋 중 둘은 신전이야. 하나는 빛의 신 파웰의 신전이고, 하나는 물의 수호신 시셀라의 신전.”
“둘 다 끌리지 않는군.”
시에나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당신 북부인도 아니면서, 하다쉬의 영원궁전이 진짜 있다고 믿는 거야?”
“인종과 신앙은 별개 아니오?”
댈런은 심드렁한 얼굴로 답했다.
물론 그가 정말로 북부의 전사신을 믿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제국이나 동부 기사왕국에서 모시는 저런 신들보다는 단순무식한 투신이 낫지 않나 싶기도 했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는, 신이라고 뒤통수 안 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럼 남은 건 하나뿐인데. 사실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 이건 내가 한 번 걸렀던 의뢰거든.”
시에나는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뢰 내용이 좀 이상하더라고. 성공 보수도···글쎄, 당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지 확실하게 장담을 못하겠어.”
“뭐길래 그러시오?”
댈런이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시에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러더니, 한 장짜리 의뢰서를 댈런에게 내밀었다.
“의뢰주는 성기사단의 한 수습기사야. 그리고 의뢰 내용은···미궁의 악마를 무찌르고, 놈에게 빼앗긴 성검을 되찾는 걸 도와달라는 거.”
턱을 긁적이던 손길이 순간 멈췄다. 댈런은 건네받은 의뢰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말했다.
“이걸로 하겠소.”
“···진짜?”
시에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댈런은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끄덕였다.
“그래, 덕분에 드디어 미궁이라는 곳에도 가보겠군.”
톡톡.
두텁고 긴 손가락이 테이블 위의 의뢰서를 두드린다.
성검을 강탈한 미궁 속 악마라.
댈런은 놈을 알고 있었다.
놈은 역행의 사도들만큼이나 댈런을 골치아프게 만들었던, 게임 중반부에 등장하는 보스몹들 중 하나.
벌써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일찍 상대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의뢰자에게 연락을 넣어주시오. 곧 만나러 가겠다고.”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춤의 도끼가 곧 맛볼 악마의 피를 기대하는 듯, 저 혼자 부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