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36화 (36/288)

악마의 성검(8)

두두두두―!

루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고개가 저절로 흔들리고, 골반은 당장에라도 튕겨날 듯 오르내렸다.

갑각늑대의 승차감은 빈말으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부상을 입고 눈이 돌아간 이 마물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자신의 집으로 내달리는 중이었으니까.

‘우욱···토할 것 같아.’

그리고 루시아는 훈련된 군마를 타고도 쉽게 멀미를 하는 몸.

신성문신의 힘을 빌렸음에도 불구하고, 갑각늑대의 안장 위에서 보낸 네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거의 다 왔소. 저길 보시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고 굵은 목소리. 루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댈런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멀지 않은 언덕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언덕 위에 세워진 울타리와, 그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놀 경계병들.

무려 이천 마리에 달하는 놀 무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미궁 1층에서 가장 거대한 놀 거주지였다.

아우우우!

집에 다 왔다는 사실 때문일까.

갑각늑대가 길게 울부짖고는 속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두두두두두!

놈은 피를 철철 흘려대서 기운 다 빠진 몸으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 성문을 향해 질주했다.

“으윽!”

루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목 뒤쪽, 감각을 강화하는 신성문신이 다시 한 번 빛을 뿜었다.

얼굴을 아리게 스치는 바람 사이, 문신으로 강화된 시력이 목책 위 놀 경계병들의 표정을 읽어냈다.

으릉···?

슬쩍 벌어진 입. 휘둥그레 뜬 노란 눈.

하나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들.

놀들의 입장에서는 당황하는 게 당연하긴 했다.

부상당한 사냥개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그 위에 난데없이 사냥감 둘이 올라타 있는 꼴이니까.

두두두두!

그리고 경계병들이 당황한 사이, 눈이 돌아간 갑각늑대는 이미 목책의 문을 들이받고 있었다.

우지직! 와지끈!

달리는 군마와 같은 속도에, 강철 갑주를 걸친 듯 단단한 머리뼈.

놀의 조악한 손재주로 세운 목책 성문은, 그 무식한 돌격에 받히자마자 산산조각나서 날아갔다.

깨갱! 깽!

박살난 성문 잔해들과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 한가운데. 갑각늑대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주르륵 미끄러진다.

“우욱, 씨발 개좆같은······.”

루시아는 비틀거리며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방패와 검을 손에 들었다.

신성문신의 힘으로 균형감각이 빠르게 회복된다.

루시아는 희뿌연 먼지구름 속에서 천천히 주변을 경계했다.

그녀는 훈련받은 대로 천천히 심호흡하며, 거칠어진 숨과 심박을 진정시켰다.

“후우······.”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여긴 적진의 한가운데다.

그것도 영민하기 그지없는 사냥꾼인, 놀 종족의 거주지.

놀 종족은 균열의 성기사단이 주로 싸우는 마물 중 하나다.

그런 만큼, 루시아는 놈들이 어떤 종족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개체 하나하나는 최하급 마물 중에서도 덜떨어지는 편으로, 잘 싸우는 은패 용병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무리로 모이는 순간 고도의 전략과 협동력을 발휘해, 숫자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놈들.

심지어 무리가 되는 순간 공포심마저 결여되다시피 해서, 부대의 반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개떼처럼 달려든다.

‘놀 종족을 퇴각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뿐이랬지.’

그녀는 교습과 훈련에서 배운 내용을 천천히 복기해봤다.

첫 번째는 무리 전체에 말 그대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는 것.

그게 불가능하다면, 놈들의 머리 역할을 맡은 전사장의 멱을 끊어버리는 게 두 번째 선택지였다.

저벅.

그때 루시아의 곁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댈런이었다.

“좀 괜찮으시오?”

“예. 하지만 이제부터가 걱정이군요. 놈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 합니다.”

아직 먼지구름이 채 가라앉지 않았고, 놀 경비대는 상황 파악이 완전히 안 된 듯했다.

갑각늑대를 이용해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게 목표였으니, 그 목표는 이미 달성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하게 거주지 한복판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나, 지금부터 무사히 탈출하기만 하면 되는 일.

그렇기에 그녀는, 댈런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딜 빠져나간다는 말이오?”

댈런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루시아의 어깨를 툭툭 쳐주더니, 먼지구름을 먼저 빠져나가며 말했다.

“조심히 따라오시오, 성기사 양반.”

“자, 잠깐!”

당황한 손길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루시아는 황급히 그를 따라 먼지구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퍽! 서걱!

방패가 투구를 쓴 놀의 머리통을 깨뜨리고, 검이 번쩍이며 그 커다란 몸을 세로로 쪼개버리는 광경을.

“덤벼라! 개새끼들아!”

댈런은 거주지 한복판을 내달리며, 말 그대로 놀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

전후좌우에서 피가 흩뿌려진다. 댈런은 무심한 얼굴로 끊임없이 손을 놀렸다.

방패로 이빨을 들이미는 놈을 후려치고, 큰 칼을 휘둘러오는 놈을 칼과 함께 반토막으로 갈라버린다.

잘려나간 팔다리와 흘러내린 내장이 땅에 나뒹굴었다.

그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서, 놀 거주지의 한복판에 검붉은 융단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놀 역시 마냥 당해주고만 있지는 않았다.

댈런이 막 놀 하나의 허리를 갈라버린 직후, 곳곳에 자리잡은 놀 궁수들이 화살이 쏘아댔다.

피피핑―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비. 그리고 약간의 엇박자를 두고 덮쳐오는 놀 여섯 마리.

화살을 피하거나 막자니, 직후 덮쳐오는 놀들에게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렇다고 화살을 무시하고 놀들을 신경쓰면, 놀의 이빨에 찢기는 대신 화살비에 고슴도치가 되는 그림이었다.

이도저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 댈런의 대처는 간단했다.

스읍.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한 것이다.

콰자자작!

왼손의 방패가 화살을 죄다 튕겨낸다. 동시에 오른손의 칼이 번쩍이며, 커다란 빛의 원을 그려냈다.

엇박자로 달려든 놀 여섯 마리의 허리는, 그 원에 닿아 그대로 토막나며 내장을 흩뿌렸다.

으릉······!

순간 주춤하는 놀들. 그러나 잠깐이었을 뿐.

곳곳에서 다시금 화살이 날아들고, 무기를 꼬나쥔 놀들이 덮쳐오기 시작한다.

댈런은 개의치 않았다. 화살 몇 개 쳐내는 건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손이 조금 더 바빠지긴 했지만, 놀들이 죽어나가는 속도는 오히려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전쟁의 신이시여!”

흘끔 뒤쪽을 내다보니 루시아 역시 꽤 많이 따라온 상태였다.

그녀의 전신에서 빛을 뿜는 신성문신은, 그저 초인적인 근력과 민첩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줄지 않는 체력, 끝없는 재생력, 예민한 감각과 빠른 판단능력까지.

다룰 능력이 된다는 전제 하에, 신성문신은 끝없는 힘을 약속하는 도구였다.

그리고 악마 살해자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역대 성기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신성문신을 완벽하게 다루는 성기사.

아직 그 재능이 완전히 꽃피우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신성문신의 힘을 웬만한 정식 성기사 이상으로 다뤄내고 있었다.

스르르릉―!

새하얀 빛을 머금은 검이, 짧은 순간 열 번도 넘게 긴 호선을 그린다.

십수 번의 검격은, 간격 안에 다가오는 놀들을 죄다 베어버렸다.

물론 그 하나하나에 담긴 힘은, 댈런처럼 한 방에 몸을 반으로 갈라버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뱃가죽이 갈라지기만 해도, 놀의 숨통이 끊어지는 건 매한가지.

심지어 그녀의 검격은 싸움이 지속될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원래부터 타고난 재능에 오랜 시간 훈련과 수행으로 쌓여온 잠재력이, 제대로 된 실전을 경험하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내는 것.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댈런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싸움에 집중했다. 이미 그의 손에 죽어나간 놀의 숫자만 삼백 이상.

그렇게 백 마리쯤 더 죽였을 무렵이었다.

으르르릉!

그가 막 놀 두 마리의 목을 동시에 잘라버린 순간, 흉포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으르르······.

놀들이 물러난다. 댈런은 천천히 검을 내렸다.

방금까지 눈에 핏대를 세우고 달려들던 놈들이,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공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루시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천천히 댈런 곁으로 걸어왔다.

댈런은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그녀의 흰 갑옷은 놀의 피로 뒤덮여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갑옷 사이로 드러난 신성 문신이, 거의 빛을 다해 흐릿하게 깜빡거렸다.

“아무래도 놈들의 대장이, 자기 수하들이 죽어나가는 게 화가 난 모양이오.”

“놀의 대장이라면···전사장 아닙니까?”

“맞지. 나랑 한 판 붙고 싶은 모양이니, 그쪽은 그만 좀 쉬시오.”

댈런은 그녀의 등을 툭툭 쳐주고 앞으로 걸어갔다.

루시아는 무심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바닥까지 체력을 다 써버린 그녀의 손은 허공을 휘적거릴 뿐이었다.

열 걸음쯤 앞으로 걸어간 자리.

댈런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와라, 겁쟁아! 한 판 붙자는 거 아니었냐!”

그의 목소리가 놀 거주지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댈런은 언덕 위쪽의 커다란 천막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기다리자, 천막 입구를 들추고 거대한 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다른 놀들보다 머리 두 개쯤 더 큰 키.

양손으로 단단히 그러쥔 거대한 도끼창.

[미궁 초행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완숙한 투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댈런은 놈의 머리 위에 주르르 떠오르는 알림창을 보며, 눈앞의 놀이 그가 노리는 대상이 맞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놀 전사장. 악신의 수하 바르구프.’

몇 년 후.

성검을 든 악마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두어 달쯤 전 시점에, 미궁 1층의 놀 군단은 탐험가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자신의 세력권 안에 잠잠히 머물던 놀 부족들이, 갑자기 군단으로 연합해 인간을 공격하는 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

수많은 탐험가들을 잡아먹으며 토벌 대상이 된 그 군단의 지배자는, 악신에게 힘을 하사받은 놀 전사장이었다.

그르르르.

미래에 악신의 수하로 악명을 떨칠 놀 전사장이,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댈런과 루시아를 내려다봤다.

놈은 살기로 번뜩이는 눈으로 댈런을 노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했다.

“넌 누구냐.”

얼씨구. 이놈이 말도 할 줄 아네?

***

댈런은 눈썹을 기울였다.

먼 미래에 악신의 힘을 얻어 악마의 말과 사람의 말을 하게 되는 건 알았지만, 이 시점부터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댈런이 대답하지 않자, 뒤에서 숨을 가다듬던 루시아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대륙의 균열을 수호하는 성기사단의 수습기사, 루시아 카스타챌드다!”

거대한 놀은 노란 눈으로 루시아를 흘깃 쳐다봤다. 잠시뿐이었다.

놈은 곧 눈길을 돌려 댈런에게 고정시킨 채 다시 물었다.

“넌 누구냐고 물었다. 내 영토를 침범하고, 나의 동족들을 학살하는 전사야. 우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성기사도 아닌데, 어째서 여기까지 발을 들인 거지?”

“사람 잡아먹는 개새끼 잡으러 오는 데 이유라도 필요하냐.”

댈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놀 전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놈이 입을 열었다.

“늑대가 사냥감을 잡는 데 역시 이유가 필요한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침범한 인간들만 사냥했을 뿐이다. 우리의 정찰대가 정해진 길 이외의 장소를 다니는 것도 아니니, 그대들 역시 충분히 피할 방법은 있었을 터.”

“어쨌든 잡아 먹었다는 거잖아, 개새끼야.”

놀 전사장의 이빨 사이로 그릉거림이 새어나왔다. 루시아는 저게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댈런은 검을 땅에 콱 꽂고는, 허리띠를 추스르며 말했다.

“그리고 사람 말 하는 거 보니 이미 악신이랑 계약한 모양인데, 거기에 사람 심장 열 개쯤 바쳐야 하지 않던?”

“···어떻게 그걸, 아니, 나는 잘 모르겠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당황한 거 다 보인다, 새꺄.”

허리띠를 추스르던 손이, 자연스레 도끼를 뽑아든다. 댈런은 망설임 없이 놈을 향해 도끼를 내던졌다.

패래래랙―

해가 뜨지 않는 지하세계. 희뿌연 별빛에 번쩍이며 날아가는 도끼날.

신성문신으로 감각이 강화된 루시아마저 그저 희끗한 그림자로밖에 인식하지 못한 손도끼는.

쩌어어엉!

놀랍게도 놀 전사장이 휘두른 도끼창에 튕겨나가, 천막 곁의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무슨. 인간의 힘이 어떻게.”

전사장이 중얼거렸다. 놈의 노란 눈은 거의 달걀 수준으로 커져 있었다.

댈런은 혀를 쯧 차고 검을 뽑아들었다. 확실히 미궁의 마물들은 땅 위의 적들보다 수준이 더 높았다.

콰아아앙!

그의 발끝이 지면을 터뜨리듯 밀어차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내며 순간.

“에낙사―!”

악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놀 전사장의 눈에, 짙은 녹색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쩌저저정!

놀 전사장과 댈런의 팔이 동시에 흐릿해지며, 천막 앞에서 무수한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악마의 성검(9) - 무료 마지막 회차입니다.

도끼창이 단두대처럼 떨어진다. 댈런의 검이 도끼날의 옆면을 후려쳤다.

쨍!

타점을 잃은 도끼날이 허공을 가르고, 댈런은 방패의 모서리로 놀 전사장의 머리통을 찍어갔다.

으릉!

놀 전사장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에도 놈은 능숙하게 대처해갔다.

빗나간 도끼날을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금속 추가 달린 자루 끝부분을 내지르는 동작.

그 자루 끝부분과 댈런의 방패가 충돌해, 꽝 하고 소음이 터져나왔다.

으르르!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휘청거리는 3미터짜리 거체.

놀 전사장은 빠르게 중심을 회복하고, 다시 도끼창을 들어올렸다.

한편 댈런은 반 걸음쯤 물러났을 뿐이었다.

전사장이 도끼창을 다시 한 번 내려칠 무렵, 그는 가볍게 옆으로 몸을 틀어 이를 피해냈다.

애꿎은 흙더미가 퍽 하고 솟아오른다. 그 순간 댈런의 검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빛살이 번쩍이고, 놀 전사장의 가슴팍이 쩍 갈라지며 피를 뿜었다.

으워어어!

놀 전사장이 길게 울부짖었다. 놈은 녹색 빛이 완연한 눈을 치켜뜨고, 쉴새없이 댈런을 몰아붙였다.

댈런은 단순하게 대처했다. 검과 방패로 도끼창을 흘리거나, 걷어내거나, 아니면 그냥 두어 걸음 움직여 피해버렸다.

그 중간중간 찔러넣는 검격에, 놀 전사장의 몸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크고 작은 상처가 더해져갔다.

거의 스무 개가 넘는 상처에서 피를 흘릴 무렵, 놀 전사장이 갑자기 뒤로 크게 물러났다. 놈이 입을 쩍 벌렸다.

“에낙사―!”

길쭉한 입에서 터져나오는 악신의 이름.

그 외침에, 전사장의 눈에 깃들었던 녹색 기운이 몸뚱이에도 깃들기 시작했다.

그르릉!

전사장의 눈이 이제는 무슨 안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회색 털가죽은 짙은 암녹색 기운으로 덮여갔다.

무슨 녹색 연기로 된 얇은 껍질이, 가죽 위에 한 겹 더 덧씌워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드득.

놈의 팔 근육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이런.’

수상한 낌새를 느낀 댈런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전사장의 두 팔이 흐릿해지더니, 방금까지 댈런이 있던 자리에 도끼창이 내리찍혔다.

뻐어어엉―!

연못에 무거운 바위를 던진 듯, 와르르 튀어오르는 돌과 흙더미.

그 흙더미가 채 내려앉기도 전에, 녹색 안광을 줄기줄기 흘리는 놀 전사장이 모래흙과 자갈의 폭포를 가르고 도끼창을 찔러온다.

쨍!

검을 휘둘러 그 창끝을 걷어내며, 댈런은 표정을 살짝 굳혔다.

‘악신의 힘이 생각보다 더 강하게 깃들었군.’

사람의 말을 할때부터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다.

놀의 지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복잡한 언어체계를 능숙하게 구사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리고 악신의 이름을 외치며 그 힘을 온몸에 덧입은 지금의 모습은, 제국의 기사였던 텔리아 상회주마저 손쉽게 압도할 위상.

도끼창을 내지를 때마다 공기가 떨리고, 내리치는 위력은 땅이 폭발하듯 흙더미를 토해낼 정도다.

이 정도면 하급 마물 중에서도 극히 드문 전투력이다. 아니, 어쩌면 중급 마물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몇 년 뒤쯤 고위 마물에 가까운 힘을 얻게 되기는 하지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군.’

뭔가 변수가 생겼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의 가장 큰 변수는 댈런 자신. 하지만 이번 회차에서 그가 미궁에 발을 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놀 전사장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방도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 간접적인 영향이 놈에게 미친 거라면, 앞으로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되겠군.’

일단 그 고민은 나중에 해도 될 문제였다. 당장 급한 건 눈앞의 싸움.

후웅―!

허리를 젖혀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도끼날을 피해내고서, 댈런은 그대로 땅을 밀어찼다.

퍼벅!

발밑에서 터져나가는 흙더미.

뒤로 젖혀진 무게중심에, 도약 스킬의 반동을 더해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아낸다.

뻐억!

그 과정에서 댈런의 발끝은 놀 전사장의 턱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그워어!

덜컥하고 뼈마디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놀 전사장.

놈은 아래턱 왼쪽이 푹 들어간 채, 입에서 핏덩이와 날카로운 이빨을 쏟아냈다.

“그르르. 신께서는 제물의 가치에 따라 힘을 내려주시지.”

잠깐 만들어진 싸움의 공백 속.

놀 전사장이 거칠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 열을 바치자 내게 명정한 이지를 내려주셨고, 스물을 더 바치자 바위도 부술 힘을 내려주셨다. 서른을 바쳤을 때는, 부러진 뼈도 순식간에 재생할 수 있는 회복력을 하사하시더군.”

우드득.

그 말과 동시에 전사장의 어그러진 턱이 도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박살나서 피가 줄줄 흐르던 잇몸이 재생되고, 동시에 날카로운 새 이빨이 쑥쑥 자라나며 부러진 이빨들을 밀어내었다.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린 채 이를 지켜봤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방패를 툭 떨어뜨렸다.

전사장이 완전히 회복된 턱으로 히죽 웃었다.

“그르륵. 항복하는 건가?”

“지랄.”

댈런은 침을 퉤 뱉었다. 놀들을 학살하며 입 안에 피가 잔뜩 들어와 찝찝했다.

싸움이 끝나면 입을 수통의 물로 입을 한 번 헹구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놀 전사장이 이빨을 드러냈다.

“오만방자하구나. 전사.”

놈이 달려들었다. 내리치는 도끼창에 쐐애― 소리가 나며 공기가 갈라진다.

댈런은 이를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았다. 검을 대각선으로 눕혀셔, 힘을 적당히 빼고 흘려낸다.

퍼벅!

땅에 쟁기로 갈아낸 듯 깊은 고랑이 파인다. 놀 전사장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몸에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놈은 길게 울부짖으며 계속해서 도끼창을 휘둘러왔다.

그리고 댈런은 그걸 다 흘려내거나 방향을 틀어 걷어냈다. 정면으로 받아내지는 않았다.

놈의 힘은 이미 보통의 놀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것이었기 떄문이다.

물론 받아내려면 받아낼 수 있었다. 아니, 아예 힘 하나로 밀어붙여서 싸움을 끝낼 수도 있을 테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직까지 체력 수치는 근력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했고, 그 역시 몸을 상하지 않는 선 안에서 효율적으로 힘을 쓰는 법에 슬슬 익숙해지는 참이었다.

그리고 악마의 힘을 입은 놀 전사장의 근력은, 그 선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는 수준.

댈런이 그걸 압도하기 위해서는 내상을 감수해야 했다.

‘용혈의 재생 인자로 금방 회복하긴 하겠지만, 좋은 선택이 아니지.’

미궁은 위험한 곳이다.

댈런의 무력이 동급의 탐험가들에 비해 원체 뛰어난지라, 그 위험함이 별 것 아닌 듯 보였을 뿐.

함부러 용혈에 의지했다가 의식을 잃게 되기라도 하면, 그땐 진짜로 언제 위험에 빠질 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근력을 아낀다고 해서, 선택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

콰광!

놀 전사장의 도끼창이 바위를 쪼갰다. 무슨 재질로 만든 건지 도끼창은 바위를 부수면서도 날만 조금 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댈런은 볼 수 있었다.

싸움이 길어지며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전사장의 자세.

악신의 힘에 아직 다 적응하지 못해, 힘을 휘두르기보다 오히려 휘둘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후웅―

도끼창이 다시 한 번 내리그어진다. 댈런은 검을 들어 그 육중한 공격을 빗겨냈다.

콰앙!

그리고 도끼머리가 땅에 처박히는 찰나의 순간.

턱.

그의 곰발바닥 같은 손아귀가, 놀 전사장의 팔목을 붙잡았다.

“어딜 감히―!”

전사장이 고함을 지르며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댈런의 영창이 조금 더 빨랐다.

“피리엔트 라구스.”

영창을 읊는 것과 동시에, 머릿속에 그려낸 심상을 현실에 투영하며 마력의 바람을 옭아멘다.

투영할 심상의 형태는, 차가운 냉기 속에서 얼어붙는 공간 그 자체.

예전보다 강해진 마력 수치에 의해, 좀 더 많은 마력풍이 댈런의 의지에 이끌려오고.

쩌저적―

댈런에게 붙잡힌 놀 전사장의 팔뚝이 얼음덩이가 되는 건,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급속 빙결.’

대사도에게 배신당했던, 여섯 번째 은가면 사도의 시체를 회수하며 얻은 마법.

접촉한 대상에게만 쓸 수 있다는 제한 때문에, 마법사 캐릭터에게는 은근히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 주문이었지만.

근접전을 위주로 하는 댈런에게 있어서, 빈틈을 만들 수 있는 변수는 무엇이 됬건 간에 유용한 도구였다.

“그어어억! 인···간, 어떻게 주문을!”

혈관으로 침투하는 냉기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놀 전사장이 비명을 질렀다.

댈런은 말없이 손아귀에 힘을 꽉 쥐었다.

얼어붙은 털가죽에 쩌적 금이 가기 시작하고, 전사장이 다급한 손길로 댈런을 밀쳐내려는 순간.

콰장창!

산산이 부서져 뜯겨나간 팔뚝이, 검붉은 피를 흩뿌리며 땅에 떨어졌다.

그어어어어!

잘린 팔의 단면을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는 전사장.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놈을 향해, 댈런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콰직!

전사장은 남은 팔을 들어올려 내려찍는 검을 가로막았다.

두껍고 질긴 털가죽과 악마의 힘으로 강화된 근육에 막혀, 검날은 더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섰다.

“오.”

댈런은 짧게 감탄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그는 곧장 전사장의 남은 팔에 급속 빙결을 걸고 뜯어내버렸다.

“크억, 으어억! 자, 잠시만 기다려라. 거래를 하자.”

“뭔 놈의 거래?”

댈런은 뜯어낸 얼음덩이 팔뚝을 툭 던져놓았다. 전사장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 내 막사 안 금고에 제물로 바친 인간 사냥감들의 유품이 있다. 나를 살려준다면 그 금고를 열어주겠다!”

“흠.”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탐험가들의 유품이라.

어지간한 탐험가 정도면 비싼 장비를 하나씩은 가지고 다니기 마련이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목숨을 위한 투자니까.

“알려줘서 고맙군.”

“조, 좋아. 그르륵, 나를 살려주겠다는 거지? 잘 생각한 거다! 신께서도 너를 기뻐하실···.”

“아니.”

콰직!

댈런의 검이 놀 전사장의 목에 박혔다. 놈이 반쯤 잘린 기도로 바람소리 섞인 비명을 질렀다.

한 번에 잘라낼 생각이었는데, 힘 조절에 워낙 신경을 쓰다보니 반만 잘렸다.

댈런은 그냥 힘을 좀 더 줬다. 평범한 여성의 허리 둘레만큼 두꺼운 목이, 툭 썰려나가며 피분수를 뿜었다.

쿵.

목이 사라진 거체가 무릎을 꿇는다. 댈런은 풀썩 쓰러진 놀의 시체를 발로 툭툭 차봤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악신의 힘을 받았다더니, 대사도처럼 머리가 두쪽나도 재생하는 수준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전사장의 천막 앞. 댈런은 넓은 포위망을 구축한 놀 무리를 슥 둘러봤다.

으르르.

으릉······.

무리를 이룬 놀은 후퇴할 줄 모르는 용맹한 병사가 되지만, 지도자가 죽는 순간 그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지곤 한다.

무리 내에서 가장 강한 개체를 대장으로 추앙하는 놈들의 습성 탓이겠지.

지금도 놀들은 주춤거리며 천천히 물러나고 있었다.

댈런은 피식 웃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왁 소리를 질렀다.

깨갱! 깨개갱!

단박에 등을 돌린 채 우르르 달아나는 놀 무리. 댈런은 뻐근해진 어깨를 휘휘 풀고는 루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피곤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댈런,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런 몰골로 소리를 지르시면 당신이 마물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몰골?”

“온몸에 검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갑옷 틈새마다 내장조각을 덕지덕지 붙인 몰골 말입니다.”

댈런은 피웅덩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과연 험악한 몰골이기는 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루시아를 쳐다봤다. 사실 그녀라고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진이 빠지도록 싸우느라 감각이 둔해져버렸는지, 본인은 아직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댈런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씩 머금고는 말했다.

“피가 굳기 전에 씻긴 해야겠군. 그런데 혹시 그쪽 머리 위에 붙은 건 뭐요?”

“머리 말입니까?”

루시아는 머리를 더듬거렸다. 그녀는 뭔가 물컹한 감각을 느끼고는 어꺠를 흠칫 떨었다.

루시아는 천천히 댈런 곁으로 다가와, 피웅덩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핏물에 젖어 붉게 염색된 하얀 피부.

길게 기른 머리칼 사이에 엉켜버린 창자.

갑옷의 어깨부분 틈새에서 대롱거리는 눈알과 시신경.

“어, 어어······.”

파들거리는 손으로 어깨에 붙은 눈알을 떼어낸 그녀의 안색이,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

악마가 눈을 떴다. 흰자위 없이 검게 물든 눈이었다.

그는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공동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뻥 뚫린 천장의 구멍 너머로 미궁 하늘의 별자리가 보였다. 악마는 그 별들을 천천히 뜯어살피더니, 굵고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낙사구스의 장기말 하나가 또 목숨을 잃었군.”

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요 근래 들어 놈의 장기말이 둘이나 사라졌다.

하나는 미궁 밖 인간들의 거대도시에 숨어든 인간 수하였고, 다른 하나는 방금 명을 다한 놀 종족의 전사장이었다.

“그 애벌레 새끼는 생긴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어.”

히죽거리기를 멈추지 않은 채, 악마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낙사구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길 게 뻔했지만, 그 대단한 전시안으로도 지옥에서 한참 떨어진 미궁 1층의 중얼거림을 듣지는 못할 테였다.

“내 반드시 언젠가는 그 새끼를 신좌에서 끌어내려, 내 발밑에 무릎을 꿇리고 말 테다.”

히죽대는 입술로 뿌드득 이를 갈고는, 악마는 천천히 공동 중앙의 마법진을 걸어나갔다.

우지직.

발밑에서 인간 탐험가들의 시체가 밟혀 으깨졌다.

공동에 수두룩하게 널브러진 시체들은, 건방지게도 자신을 토벌하겠답시고 이 마굴까지 쳐들어온 토벌대들이었다.

몇 주 전부터 열댓 명씩 몰려와 극성으로 귀찮게 구는 놈들. 한 번은 오십 단위로 쳐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 때는 좀 위험했지.’

악마는 검고 긴 손가락으로 배에 큼직하게 남은 흉터를 쓰다듬었다.

미궁 1층을 싸돌아다니는 허접한 탐험가 무리에, 성기사가 버젓이 끼어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놈은 성검의 선택까지 받은 성기사였던지라, 정말로 죽을 뻔했던 싸움이었다.

‘다행히 같이 온 놈들이 제때 뒤통수를 쳐줬지.’

성검에 찔려 큰 부상을 입은 악마. 그리고 악마의 회심의 반격에 맞아 비틀거리며 주저앉은 성기사.

보통이라면 여기서 성기사를 도와 악마를 마무리하는 게 당연한 수순일 테다.

하지만 인간은 유혹에 약하고, 그중에도 특히 탐험가라는 족속의 탐욕은 끝이 없는 법.

간지럽지도 않은 화살 공격에 비틀거리며 다 죽어가는 척 연기를 해주니, 놈들은 알아서 성기사의 등에 검을 찔러버렸다.

악마의 수급과 성기사의 성검, 둘 모두를 취할 기회라고 여긴 것이겠지.

“크흐흐. 멍청한 놈들.”

덕분에 악마는 꿩 먹고 알 먹은 셈이었다.

쓰러진 성기사의 성검을 빼앗고, 실력 없는 속 빈 강정인 나머지 탐험가들을 절반 가까이 쳐죽였다.

지옥의 세력싸움에서 밀려나 미궁 저층부까지 쫓겨난 이레, 악마의 인생에서 가장 운이 좋은 순간이었다.

우르릉.

그때 동굴이 작게 진동했다. 악마는 공동에 연결된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경계마법이 발동된 걸 보아하니, 토벌대가 또 쳐들어온 모양이었다.

“흠···열, 열하나, 열둘. 열두 명이군. 이 정도면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어. 나의 충실한 타락기사야, 일어나라.”

그의 명령에 공동 구석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기사가 일어났다.

목에 감긴 얇은 쇠사슬이 불길한 보랏빛을 뿜어대고, 기사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악마를 올려다봤다.

“어서 가서 침입자들을 격퇴하거라.”

악마가 말했다. 기사는 맥없이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큼직한 양손검을 뽑아들고서 공동 밖으로 걸어나갔다.

악마는 기사의 뒷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그의 갑옷 등 부분에는 여러 날붙이에 찔린 듯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타락한 성기사가 침입자를 처리하러 나가자, 악마는 마법진 한가운데로 돌아가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성검을 향해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검을 온전히 타락시키고 얻게 될 힘을, 그리고 그 힘으로 행할 폭력과 갈취의 향연을 상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성검에 맺힌 신성한 빛은, 공동 안을 가득 채운 불길한 마력에 의해 천천히 좀먹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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