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성검(10)
놀 거주지를 탈탈 털어버린 댈런과 루시아는, 우선 그날 하루를 푹 쉬기로 했다.
루시아의 컨디션 때문이었다.
장장 네 시간을 갑각늑대에 매달려 있었던 데다, 곧바로 놀 거주지를 휩쓸고 다니며 그녀의 체력은 말 그대로 방전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한 줌의 신성력마저, 거주지 안에 세워진 악신의 제단을 정화하며 완전히 고갈된 상황.
악마가 숨어든 동굴은 여기서 남쪽으로 일주일은 걸어가야 했다.
무리해서 출발했다가 중간에 다시 방전될 바에야, 차라리 지금 쉬어두는 게 더 나은 선택.
어차피 갑각늑대를 이용해 이동시간을 극도로 단축시켰기에, 하루쯤 쉰다고 해서 계획에 큰 차질은 없기도 했다.
화르르륵.
댈런은 놀들이 모아놓은 땔감으로 모닥불을 지폈다.
그 사이 루시아는 거주지 안에 흐르는 냇가에서 몸과 갑옷을 박박 씻고 왔다.
여벌로 챙겨온 가벼운 옷을 걸치고, 냇가에서 빤 갑옷과 옷을 모닥불 곁에 말려둔 그녀는 곧장 천막 안에 들어가 수마에 빠져들었다.
천막은 짐승 냄새가 좀 남아있긴 했지만, 지능 높은 종족답게 하룻밤 머물 거처로는 제격이었다.
푹신한 털가죽 침대.
바람을 막아줄 두터운 천막.
이 두 가지만 해도, 미궁 안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잠자리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저벅.
댈런은 고생한 성기사를 재워두고서 거주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그 역시 피와 내장을 냇가에서 씻어냈기에, 지금은 가벼운 천옷 한 겹 차림이었다.
저벅. 저벅.
거주지를 둘러보며 안전을 재확인한 그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놀 전사장의 천막 쪽으로 향한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놀 시체는 차가운 밤공기 아래 식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시체.
두 팔과 목이 잘려나간 놀 전사장의 시체 앞에서, 댈런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만 보이는 잿빛 시체 두 구가 빛무리로 화하며, 그의 손 안으로 스르르 빨려들어온다.
[미궁 초행자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완숙한 투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체력 +1, 기량 +1, 라판텔라의 분쇄검(C)]
별볼일 없는 허접한 캐릭터의 시체 하나와, 나름 공략을 연구하던 시절의 시체 하나.
다행히 근력은 오르지 않았다.
댈런은 굉장히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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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10
[근력 : 30] [기량 : 18] [체력 : 19]
[감각 : 17] [지능 : 19] [마력 : 14]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용혈의 재생 인자(C), 도약(E), 불꽃 화살(D), 급속 빙결(D), 라판텔라의 분쇄검(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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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두 자릿수가 된 레벨.
물론 큰 의미는 없었다. 레벨 10이 되었다 해서, 이 망할 게임이 뭔가 특별한 보상을 주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어쨌든 추가 능력치를 체력에 투자하자, 체력 수치 역시 드디어 20대에 접어들었다.
‘이건 충분히 의미가 있지.’
몇 번 몸을 풀어보는 것만으로도, 내상 없이 다룰 수 있는 힘의 크기가 확연히 늘어났음이 느껴진다.
댈런은 어깨를 휘휘 돌리며 달라진 몸에 익숙해져갔다.
‘다른 능력치들도 골고루 올리긴 해야 할 텐데.’
능력치 하나가 과도하게 높았을 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어쩌면 특정 능력치가 과도하게 낮거나 할 때 역시, 뭔가 부작용이 있을 지도 몰랐다.
‘일단 당장 급한 불부터 끄고, 그 다음에 밸런스를 신경 써야겠군.’
댈런은 몸을 푸는 걸 멈추고, 들고온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낮에보다 조금 더 어두워진 별빛이, 잘 닦이고 갈린 검끝에서 반짝거리며 부서진다.
통짜 금속으로 만든 검은 수백 마리의 놀을 썰어버리고도 멀쩡했다.
과연 르베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
모닥불 곁에서 말리고 있는 갑옷 역시, 사슬이 부분부분 끊어지긴 했어도 크게 찢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스읍―
댈런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지능 수치가 새로이 얻어낸 지식들을 조각조각 나누고 분석해낸다.
감각과 기량 수치는 그 분석해낸 산물을 근육과 내장에 적용해가며 몸의 움직임으로 체화시켰다.
손끝이 저릿해온다.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딱히 부상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온몸에 뜨거운 피를 넘치도록 펌핑해댔고.
전신의 근육은 당장에라도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공기를 찢어발기고자 안달이 나 있었다.
완숙한 투사의 시체를 회수하며 얻게 된 스킬, 라판텔라의 분쇄검.
데하만의 갑주격투 이후 처음 얻어낸 이 무투 스킬은, 그의 초인적인 육신마저도 고양시키는 위력의 무술이었다.
같은 C등급인 용혈의 재생 인자를 생각해봤을 때, 분쇄검이 보여줄 활약은 당연히 기대되는 바.
거기다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해본 적 없는 용혈의 재생 인자와 달리, 라판텔라의 분쇄검은 댈런 역시 몇 번쯤 얻고 사용했던 검술이었다.
모니터 너머에서나마 그 위력을 실감한 적이 있는 만큼, 기대감이 배가 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공격에 치중된 양손검술이지. 방어마저도 공격의 일부로 생각하고, 그 모든 공방에서 파괴력 하나에만 초점을 맞춘 검술.’
후우―
천천히 호흡을 내뱉는다.
두 손으로 잡은 검을 천천히 어깨 너머로 들어올린다.
그의 앞에는 놀 전사장의 도끼창이 거꾸로 박혀 있었다.
바위를 쪼개고도 흠집 하나 나지 않던,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도끼창.
습―
뱉었던 호흡을 다시금 짧게 그러모은다.
뻗어나가는 감각을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 돌린다.
천천히 왼발이 바닥을 끌며 앞으로 나아가고.
양 팔의 어깨에서부터,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스으으―
어깨부터 팔뚝을 덮어가는, 기묘한 아지랑이 같은 기운.
그 기운이 검을 잡은 손끝에 도달한 순간.
휘익―!
특별할 것 없는 검격이, 어깨 위에서부터 사선으로 내리그어졌다.
“······.”
변화는 한 박자 늦게 나타났다.
캉!
바위도 박살낸 도끼창이 반으로 뚝 갈라지더니.
쩌저저저저정―!
그대로 자루 끝부터 도끼머리까지 산산조각나며, 수백 조각의 고철 파편으로 변해 전방으로 터져나간 것.
그건 어둑한 하늘의 별빛이, 수백의 반짝거림으로 지상에 피어났다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
다음날.
두 사람은 아침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댈런은 최대한 전투를 피하는 방향으로 경로를 계획했다.
루시아의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는, 자잘한 전투라도 삼가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일행은 그렇게 사흘을 별 탈 없이 남하했다.
미궁에 내려온 지는 나흘째가 되는 밤이었다.
타다닥.
댈런은 모닥불 앞에 앉아, 저녁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닥불 맞은편에서 루시아가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평소보다 더 많이 잡아오셨습니까?”
그녀는 불 위에서 꼬챙이를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가죽을 벗기고 손질한 땅굴토끼 열 마리가, 그 꼬챙이에 꿰인 채 익어갔다.
땅굴토끼는 지상의 토끼보다 훨씬 위험하고 사납긴 하지만, 미궁에서는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있는 짐승형 마물 중 하나였다.
고기의 맛이 토끼와 크게 다르지 않아, 사냥꾼 출신의 탐험가들이 애용하는 식량이기도 했다.
“댈런?”
지글지글.
기름 자글거리는 소리에 군침이 고인다. 고소하면서도 향긋한 냄새는 10분 전부터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댈런은 침을 꿀떡 삼키고서야 뒤늦게 대답했다.
“배고파서. 그리고 숲 근처라 그런지, 근처에 토끼굴이 꽤 많기도 했소.”
“그렇습니까. 댈런이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많이 드시는 건 알지만, 되도록 열 마리를 넘기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한 번에 요리하는 게 쉽지는 않아서요.”
“내가 도와주면 되지 않겠소.”
“이런 씹···아니,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말아주시죠.”
루시아는 미간을 잔뜩 오므리며 댈련을 노려봤다.
눈으로 욕한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주는 눈빛이었다.
댈런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내가 누구 식중독이라도 걸리게 했나?
“댈런이 한 요리는···애당초 그걸 요리라 부르는 것도 이상하군요. 그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난 그래도 먹을 만하던데.”
“차라리 날것으로 드십시오. 그게 더 영양가 있고 맛도 좋지 않겠습니까?”
댈런은 손가락으로 코를 긁었다. 사실 지구인이었을 적에도 요리만큼은 잼병이긴 했다.
이 세계에 와서도 요리라고는 용병 생활 초기에 스튜 몇 번 끓여본 게 다였고.
그마저도 선배 용병들이 곧 자기들이 하겠다며 뜯어말려서, 그냥 얻어먹는 처지가 되었었지만.
‘그래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처음 사냥해온 짐승을 요리할 때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의 딴에는 나름 속살은 적당히 쫄깃하고, 껍질은 바삭하게 잘 익었다고 느꼈으니까.
물론 루시아가 그걸 맛보며 온갖 쌍욕을 내뱉은 다음에는, 나름 자기 객관화가 되어가고 있긴 했다.
한 입 물었다가 이가 깨질 뻔하고, 신성 문신으로 골격을 강화시켜서야 질기디 질긴 속살을 겨우 씹어삼킨 걸 눈앞에서 목격했으니까.
“다 됐습니다.”
때 아닌 자기혐오에 빠져들려는 찰나, 루시아가 다 된 구이를 척 내밀었다.
기름과 꿀을 발라 반들반들하게 익힌 겉면에, 적당히 뿌려진 향신료의 향긋한 냄새.
한 입 베어물자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껍질이 입안에서 바삭하게 부서지고, 그 안쪽 살결은 부드럽게 갈라지면서 입안에 육즙을 흩뿌렸다.
이 정도면 거의 A등급 요리 스킬을 가지고 있다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악마 살해자가 요리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을 줄이야.’
순식간에 두 마리째를 반쯤 먹어치우며, 댈런은 생각했다.
“평소에도 요리를 좋아하시오?”
“훈련 때 야영을 하게 되면 제가 도맡아서 하곤 했습니다. 성기사단의 교범에는 먹는 것 역시 전투의 일부라 쓰여 있어, 각종 향신료도 보급이 잘 되는 편이고요.”
미궁에까지 향신료와 꿀을 챙겨올 정도면, 아마 대륙의 그 어느 군대보다 이쪽 보급이 잘 되는 걸 테였다.
댈런은 모니터 너머에서 언뜻 봤던 성기사단의 보급 목록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멸망해가는 와중에도, 소금과 후추를 포대 단위로 포함시켰었지.
‘멸망을 앞둔 마지막 만찬에서, 성기사단이 빠지면 왠지 모르게 섭섭하긴 했어.’
댈런은 문득 떠오르는 잡생각에 피식 웃었다. 이제야 토끼 다리 하나를 마무리한 루시아가 물었다.
“악마의 거처까지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습니까?”
“이 속도라면 대충 나흘 정도 더 가야 하오. 그보다 하루쯤 빨라질 수도 있고.”
여기서 속도를 더 높인다면 말이지. 댈런은 덧붙였다.
지난 사흘간 루시아의 체력은 충분히 회복되었다. 조금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테였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별 말은 없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모닥불 타닥거리는 소리와, 고기를 우물거리는 소리만이 멤돌았다.
댈런이 문득 입을 열었다.
“바렛은 어떤 사람이었소?”
루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댈런은 기름 묻은 손을 옷자락에 슥슥 닦으며 말했다.
“애송이니 뭐니 하는 소리 하려는 거 아니니 걱정 마시오. 그때는 그쪽 정신 차리라고 한 소리고. 사실 성검의 인정을 받을 정도면 꽤 괜찮았던 사람이란 거 아니오?”
“꽤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루시아는 먹던 고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는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성기사였습니다. 많은 동기와 후배들이 존경했고, 심지어 선배 기사들 중에 그에게 먼저 경례하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죠.”
그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슬픔과 불신, 추억과 회환이 뒤섞인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댈런은 그녀의 얼굴 위로 묻어나오는 복잡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짧게 응해주었다.
“안타깝군.”
“그래서 이해가 안 됩니다. 대체 왜 성검을 훔친 것이며, 대체 왜···왜 악마에 그렇게 쉽게 빼앗긴 것인지. 물론 악마를 얕보는 것은 아닙니다만, 성전사들과 토벌대의 탐험가들도 지원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쉽게 당했다는 건······.”
루시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댈런은 고기를 한 점 더 베어물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이상한 점이긴 했다.
성검의 인정을 받을 정도라면 보통 성기사는 아니라는 뜻.
거기다 악마를 토벌하기 위해서라면 못해도 탐험가 수십이 몰려갔을 테다.
‘수습 기사들과 성전사들도 따라갔다고 하니까, 미궁 1층까지 쫓겨난 최하급 악마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법도 한데.’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미궁에 들어오기 전 엿들었던 민머리 탐험가의 증언.
‘놈은 악마가 성검에 배를 찔렸다고 했지.’
성검의 신성력이면 최하급 악마의 재생력 정도는 손쉽게 압도할 수 있었다.
배에 구멍이 뚫려 내장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악마 특유의 재생력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소리.
그대로 공세를 이어나갔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을 테다.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군.’
댈런이 의심의 깊이를 점점 더 더해가는 동안, 루시아는 고개를 휘휘 털어냈다. 그녀가 말했다.
“이미 전사한 동료입니다. 비록 실수와 책망받을 거리가 있을지언정, 악마와 싸우다 죽었으니 영광스러운 죽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줄 동료가 있다니, 성기사 바렛은 영광스러운 삶을 살다 간 게 맞는 듯 하군.”
“······.”
루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려놓았던 토끼 고기를 들어, 다시 한 입씩 베어물기 시작했다.
댈런도 꼬챙이에서 고기 한 덩이를 더 빼냈다. 벌써 다섯 마리째였다.
루시아는 먹던 걸 잠시 멈추고 그걸 신기한 듯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대체 저 많은 고기가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거지?
***
밤이 깊어갔다. 댈런이 먼저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루시아는 모포 속에 들어가자마자 1분도 안 되어 잠에 빠져들었다.
타다닥. 타닥.
댈런은 모닥불을 멍하게 바라봤다. 툭툭 튀는 불티가 바람에 날려 하늘로 올라간다.
그 모양새가 마치 별동별 같았다. 떨어지는 대신 솟구치는 별똥별.
그들은 저 밤하늘이 제 고향이라고 주장하듯, 어지러운 몸놀림으로 별들에 닿고자 하는 갈망을 표출해댔다.
종국에는 빛이 사그라들고 남는 어둠뿐이었다.
그 어둠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문득 며칠 전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자네는···대체 누군가?’
펠버의 목소리였다.
땅의 기억에서 댈런을 읽어낸 원로 마법사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던 이야기.
‘땅은 자네의 생애가 고작 2년하고도 한 달이라고 말하네. 이건···이건 정말 예상 밖이로군. 평범하지 않은 이라고 생각하긴 했네만.’
영역을 거둬들이고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노인은, 미세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었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해 두겠네. 자네 같은 영웅의 앞길에, 이런 늙은이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댈런은 낮게 웃었다.
비밀로 해 두겠다니.
처음에는 약간 경계했지만, 보면 볼수록 믿을 만한 노인이었다.
생각해보면 원작에서도 그랬다.
악마의 군세가 미궁도시를 침공할 때마다, 펠버 발렌티노는 엘가이아 마탑을 이끌고 끝까지 분전했었다.
영입 불가능한 엑스트라 NPC 중 하나라 동료로 삼은 적은 없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
타다닥. 탁!
댈런은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몇 번 들쑤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가 잠든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그는, 모닥불을 떠나 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믿을 만한 사람이 꽤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반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대의보다는 사리사욕에 이끌리는 게 원래 인간의 본성인 법이니까.
댈런 자신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기에,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 욕심을 추구하는 과정에 내 목에 칼을 들이대는 놈이 있다면.’
그럴 경우, 손속을 봐줄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도 그의 생각이었다.
피잉―!
어둠을 뚫고 날아드는 화살.
촉부터 깃털까지 죄다 검게 칠해진 화살은, 미궁처럼 어두운 환경에서 기습을 가하기에 최적화된 암기였다.
댈런은 손을 뻗어 화살을 잡아챘다.
살짝 저릿한 피부의 감촉을 보아하니, 이걸 쏘아낸 장치도 평범한 활이나 석궁은 절대 아닌 듯했다.
잠시 화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숲 경계의 풀숲 쪽으로 화살을 휙 날렸다.
쐐―!
발사되어 날아올 때보다 반 배는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는 화살.
그 검은 궤적이 수풀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진 직후, 수박이 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털썩!
수풀 밖으로 굴러나오는, 머리가 반쯤 사라진 시체.
놈이 떨어뜨린 복잡한 형태의 기계식 쇠뇌는, 다음 화살이 장전되는 중이었다.
그때 다른 풀숲들이 푸스스 떨렸다. 댈런은 검손잡이에 손을 턱 얹은 채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풀숲을 헤치고 중무장한 사람들이 한 명씩 걸어나오기 시작한다.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은 머리가 터져버린 남자를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씨, 씨발! 라쿠스!”
“죽여버리겠다! 이 야만인 새끼!”
너나할 것 없이 무기를 뽑아드는 탐험가들. 댈런은 그 가운데서 민머리 용병을 발견했다.
민머리 역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놈의 어깨가 흠칫했다. 댈런은 씩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냐?”
“···운 좋게도.”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하나 물어보자. 언제부터 우리 뒤를 밟았지?”
“······.”
민머리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닫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탐험가가 소리를 질렀다.
“덮쳐라! 죽여버려!”
탐험가들이 달려든다. 창과 검이 찔러오고, 석궁에서 화살이 쏘아져 날아들었다.
번쩍이는 십수 개의 날붙이 앞. 댈런은 두 손으로 검을 모아쥐곤 사나운 미소를 만들었다.
성기사의 최후를 목격했다는 증인에게, 솔직한 증언을 받아낼 시간이었다.